한국고승비문

11.양주태고사원증국사탑비문(楊州太古寺圓證國師塔碑文)

수선님 2023. 10. 8. 14:46

11.양주태고사원증국사탑비문

楊州太古寺圓證國師塔碑文

있는 곳: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태고사

세운 때:고려 우왕 11년 (1385)

所 在:京畿道 高陽市 德陽區 北漢洞 太古寺

年 代:高麗1) 禑王 11年 (1385)

1) 여(麗)와 십자(十字) 사이에 [全文]에는 禑王이라 하였고, [總覽]에는 廢王禑라

고 되어 있다

원증국사탑명(圓證國師塔銘) [전액]

圓證國師塔銘 [篆額]

고려국(高麗國) 국사(國師) 대조계사조2) 전불심인(傳佛心印) 행해묘엄

(行解妙嚴) 비지원융(悲智圓融) 찬리왕화(贊理王化) 부종수교(扶宗樹敎)

대원보제(大願普濟) 일국대종사(一國大宗師) 마가3) 실다라4) 이웅존자(利雄

尊者) 시(諡) 원증탑명(圓證塔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高麗國, 國師, 大曹溪嗣祖, 傳佛心印, 行解妙嚴, 悲智圓融,

贊理王化, 扶宗樹敎, 大願普濟, 一國大宗師, 摩訶悉多羅, 利

雄尊者, 諡圓證塔銘, 幷序.

2) 사조(嗣祖):사승(嗣承) 또는 사법(嗣法)과 같은 말이니,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교법(敎法) 또는 선법(禪法)을 전해받는 것.

3) 마가(摩訶): Mahā. 대(大)라 번역하며, 크다는 뜻이다.

4) 실다라(悉多羅): Siddhārtha. 실달다(悉達多)라고도 음사(音寫)함. 일체의성(一

切義成)이라 번역하니, 모든 지혜 또는 뜻(一切智)을 이룬자의 뜻이다.

추충보절(推忠保節)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인 신(臣) 이색

(李穡)이 교지(敎旨)를 받들어 비문을 짓고,

전봉익대부5) 판전교시사6) 진현관7) 제학(提學)인 신(臣) 권주8)는 왕명에

의하여 비문과 아울러 붉은 전액을 쓰다.9)

推忠保節, 同德贊化功臣, 三重大匡, 韓山府院君, 領藝文春秋

館事, 臣, 李穡, 奉敎, 撰,

前奉翊大夫, 判典校寺事, 進賢館, 提學, 臣, 權鑄, 奉敎, 書,

丹幷篆額.

5) 봉익대부(奉翊大夫):고려 때 문관(文官)의 종2품의 품계. 「지공나옹사리석종비

문指空懶翁舍利石鐘碑文」 주4)봉익대부奉翊大夫 [고려편4] p.417 참조.

6) 전교시(典校寺):고려 때 경적(經籍)과 축소(祝疏)를 관장하던 관청. 내서성(內

書省)·비서성(秘書省)·비서감(秘書監)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전

교시의 우두머리인 판사(判事)는 정3품 벼슬.

7) 진현관(進賢館):고려 때의 관청. 재능이 있는 문신들을 뽑아 임금을 시종케 하

던 관전(館殿) 중의 하나로서 충렬왕(1274~1308) 때 설치되었다. 진현관의 제학

(提學)은 종2품인 대제학(大提學) 바로 밑의 벼슬이었다.

8) 권주(權鑄):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지(子止), 호는 춘수당(春睡堂)・모명재

(慕明齋)이다. 원복군(元福君) 권렴(權廉)의 아들이다. 1361년(공민왕10) 홍건적

이 침입하여 공민왕이 남쪽으로 몽진할 때, 전법총랑(典法摠郎)으로서 왕을 호

종하였다. 이 공을 인정받아 1363년(공민왕12)에 신축호종2등공신(辛丑扈從二等

功臣)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1374년 조카 진(瑨)이 홍륜(洪倫)·최만생(崔萬生)

과 더불어 공민왕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나 1386년(우왕12) 전공판서(典工判書), 1389년(창왕 1)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서예에 능하여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

藏閣記碑」,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등의 비문이 전한다. 「지

공나옹사리석종비문」 주6)권주權鑄 [고려편4] pp.417~418 참조.

9) 단병전액(丹幷篆額):단사(丹砂)를 먹물에 섞어서 전액을 썼다는 뜻이다. 「선각

왕사비문禪覺王師碑文」 주21)서단병전액書丹幷篆額 [고려편4] p.356 참조.

상(上)이 즉위(卽位)하신지 11년이 되는 해10) 1월 10일, 좌대언11)인 신

(臣) 중용12)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이르기를,13) 태고국사(太古國師)의 사

리탑비문(舍利塔碑文)을 경이 지으라고 명(命)하였다. 그리하여 신이 삼

가 고찰하여 보니, 국사의 휘는 보우(普愚)요 호는 태고(太古)이며 속성은

홍씨(洪氏)이니 충남 홍주14)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연15)이니, 개부의동

삼사16) 상주국(上柱國)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이병부사(判吏兵部事) 홍양

공(洪陽公)에 추증(追贈)되었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니 삼한국대부인

(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上之十一年, 正月, 十日, 左代言, 臣, 仲容, 傳旨, 若曰, “國師

太17)古浮圖,18) 汝其銘之.” 臣, 謹案, 國師諱普愚, 號太19)古, 俗

姓洪氏, 洪州人也. 考諱延, 贈開府儀同三司, 上柱國, 門下侍

中, 判吏兵部事, 洪陽公, 妣鄭氏, 贈三韓國大夫人.

10) 상지십일년(上之十一年):상은 고려 제32대 우왕(禑王). 우왕 11년은 을축(乙丑)

이니 1385년이다.

11) 좌대언(左代言):고려 때의 밀직사(密直司)에 소속되어 있던 정3품의 벼슬. 1310

년에 좌승선(左承宣)의 후신인 좌승지(左承旨)를 고친 이름으로 1356년에 다시

좌승선으로 고쳤다가 1362년에 좌대언(左代言)으로 개칭하였다.

12) 중용(仲容):박중용(朴仲容)을 말하는 듯함. 『고려사』권126「임견미전林堅味傳」

에 우왕(禑王) 14년(1388) 1월 임견미(林堅味) 세력이 제거될 때 밀직제학(密直

提學)인 박중용 등 50여인(餘人)이 참수당하고 박중용의 아버지인 박형(朴形)도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3) 약왈(若曰):약은 위(謂)의 뜻. 또는 구말(句末)의 어조사(語助辭). 곧 교지(敎旨)

를 전하여 일러 가로되라 새긴다.

14) 홍주(洪州):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지명.

15) 홍연(洪延):태고국사의 아버지의 이름. 호는 홍양공(洪陽公)이나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16)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고려 문산계. 중국에서는 위(魏)·진(晉) 시대부터

시작된 관계(官階)인데, 우리나라에서는 995년에 전의대광(典儀大匡)을 개부의

동삼사라고 불렀다. 1298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개칭. 1356년에 다시 개부의

동삼사라 하다가 1362년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고쳤다.

17) [全文]과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이하 [全書]라고 한다)에는 太이고, [總

覽] [苑]에는 大이니, 뜻으로는 같으나 太가 옳음.

18) [苑] [總覽] [全書] [拓本]에는 圖이고, [全文]에는 屠이나, 이는 梵語의

Buddha(Stūpa)의 音寫이므로 모두 통용됨.

19) [全文] [全書]에는 太이고, [總覽] [苑]에는 大이니, 뜻으로는 같으나 太가 옳음.

부인(夫人)이 어느 날 밤 태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여 대덕 5년20) 신축(辛丑) 9월 21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성동21)

의 나이에도 영오22)함이 남달리 뛰어났다. 13살 때 회암사 광지선사23)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19살 적부터 만법귀일이언만 일귀하처화24)

들어 참선(參禪)하였다.

夫人夢, 日輪入懷, 旣而有娠, 以大德五年辛丑, 九月, 二十一

日, 生師, 師成童, 穎悟絶倫. 十三, 投檜巖廣智禪師出家,

十九, 叅萬法歸一話.

20) 대덕오년(大德五年):대덕은 원나라 성종대(成宗代)의 연호. 5년은 고려 충렬왕

27년(1301).

21) 성동(成童):①8살 이상의 소년 ②15살 이상의 소년.

22) 영오(穎悟):뛰어나게 총명함. 『북사北史』「예술藝術」‘유수재전庾秀才傳’에 “秀

才幼穎悟 八歲誦尙書”라 하다.

23) 광지선사(廣智禪師):전기가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24) 만법귀일화(萬法歸一話):만법일여(萬法一如)와 같은 뜻이니, 갖가지 차별적인 현

상(現象)이 곧 평등(平等)한 이체(理體)임을 보인 것. 승조(僧肇)의 『보장론寶藏

論』(대정장47, p.793b24)에 있는 구절(句節)로서, 차별적(差別的)인 만법이 평등일

미(平等一味)의 이체(理體)로 귀입(歸入)함을 말함.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萬法歸一 一歸何處’라고 하니, 조주가 대답하기를 ‘내가 청주(靑州)에 있

을 때 한 벌의 삼베 장삼(長衫)을 만들었더니 그 무게가 7근(斤)이었다.’라고 하였

다. 僧問趙州 萬法歸一 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 作一領長衫 重七斤”

원통 계유년25)에 성서(城西)의 감로사26)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만법귀

일에 대한 의단27)이 박락(剝落)하고 팔구(八句)의 송(頌)을 지었으니,28)

“불조(佛祖)가 산하(山河)와 더불어 입이 없지만 모두 삼켜 버렸다” 함이

그 결구(結句)이다. 그 후 후지원 정축년29)에 스님의 나이 37세 되던 해 겨

울에 전단원30)에서 안거(安居)하는 동안에는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

話頭)를 참구하였다. 이듬해 1월 7일 5경31)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 팔

구(八句)의 송(頌)을 지었으니 “굳은 조사관을 타파(打破)하고 나니, 청풍

(淸風)이 태고(太古)에서 불어오더라”는 것이 그 결구(結句)이다. 3월에 양

32) 초당(草堂)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시양(侍養)하였다.

元統癸酉, 寓城西甘露寺, 一日, 疑團剝落, 作頌八句, “佛祖

與山河, 無口悉呑却.” 其結句也. 後至元丁丑, 師年三十七冬,

寓栴檀園, 參無字話. 明年正月, 初七日, 五更, 豁然大悟, 作

頌八句, “打破牢關後, 淸風吹太33)古.” 其結句也. 三月, 還楊

根草堂, 侍親也.

25) 원통계유(元統癸酉):원통은 원나라 영종(寧宗) 연호. 원통 계유년은 고려 충숙

왕 2년(1333).

26) 감로사(甘露寺):감로사가 전국에 걸쳐 여러 곳에 있으므로 어느 곳의 감로사인

지 알 수 없으나, 개성(開城)에 있었던 감로사로 짐작되는데, 감로사는 조선초에

도 200결의 토지를 소유하며 사세(寺勢)를 유지하였다.

27) 의단(疑團):공안(公案)인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 곧 의심하는 것이므로 참선하

는 것을 의단(疑團)이라고 한다.

28) 작송팔구(作頌八句):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팔구의 송(頌)을 지었다는 말이

니, 곧 1333년 가을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 승당(僧堂)에서 지낼 때, 아직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면서 분연히 만법귀일화(萬法

歸一話)로 7일간 용맹정진하여 끝나는 날 밤에 두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났

는데, 하나는 백비탕(白沸湯)이 담긴 병(甁)을 들었고, 다른 한 동자는 잔을 들어

백비탕을 받아 권하므로, 스님은 이를 받아 마시고 홀연히 성오(省悟)함을 얻

고는 다음과 같은 팔구(八句)의 송(頌)을 지었다. “一亦不得處 踏破家中石 回看

沒破跡 看者亦己寂 了了圓陁陁 玄玄光爍爍 佛祖與山河 無口悉呑郤”(한불전6,

p.696a20).

29) 후지원정축(後至元丁丑):지원(至元)이란 연호는 원나라 세조대(1264~1294)와

순제대(1335~1340) 두 번 사용되었기 때문에 순제대에 사용된 지원 연호를 일

반적으로 후지원(後至元)이라 한다. 후지원 정축년(丁丑年)은 고려 충숙왕 복위

(復位) 6년(1337)이다. 이 해 가을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보현보살장普

賢菩薩章」을 보다가 “一切盡滅 …… 名爲不動”이란 대목에 이르러 이미 얻었던

모든 지견(知見)이 박락(剝落)하고는 “靜也千般現 動也一物無 無無是什麽 霜後

菊花稠”(한불전6, p.696a24)라는 송을 읊었다. 이로부터 스님은 무자화두(無字話

頭)를 거각(擧覺)하였다.

30) 전단원운운(栴檀園云云):1337년 10월 채중암(蔡中庵:자는 無悶, 휘는 洪哲, 호는

中庵:1262~1340)이 그의 집 북쪽 전단원(栴檀園) 중에 선실(禪室)을 만들고 스

님을 청하여 그곳에서 동안거(冬安居)를 하게 했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1338년

(戊寅) 1월 7일 오경(五更)에 이르러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 다음과 같은 팔구

(八句)의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趙州古佛老 坐斷千聖路 吹毛覿面提 通身

無孔覈 狐兎絶潛蹤 翻身師子露 打破牢關后 淸風吹太古”(한불전6, p.696b07).

31) 오경(五更):새벽 03시부터 05시 사이를 가리킴.

32) 양근(楊根):양근현(楊根縣)의 줄임말이니,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의 옛 이름.

33) [全文] [全書]의 太와 [總覽] [苑]의 大는 뜻으로는 같으나 太가 옳음.

스님은 일찍이 공안(公案) 일천칠백칙(一千七百則)을 보다가 암두스님34)

의 밀계처(密啓處)에 이르러 꽉 막혀서 통과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 홀연

히 깨닫고는 암두(巖頭)를 비웃으면서 “암두(巖頭)가 비록 활을 잘 쏘기는

하나, 이슬에 옷이 젖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라고 평(評)하였다.

師嘗看千七百則, 至巖35)頭密啓處, 過不得. 良久, 忽然捉敗,

冷笑一聲云, “巖36)頭, 雖善射, 不覺露濕衣.”

34) 암두(巖頭):828~887. 청원계(靑原系). 휘는 전할(全割), 호는 암두. 천주(泉州;

福建省) 남안현(南安縣) 출신. 속성은 가씨(柯氏). 영천사(靈泉寺) 의공(義公)

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고, 교리(敎理)를 연구하다가 덕산선감(德山宣鑑:

780~865)의 법을 이어받아 제자가 되었다. 동정호반(洞庭湖畔) 와룡사(臥龍寺)에

서 종풍(宗風)을 진작하였다. 광계(光啓) 3년 4월 8일(『조당집祖堂集』7에는 中和 5

년(885) 4월 4일) 밤에 침입한 도적이 칼을 들고 가해(加害)하려 하므로 태연자약

하게 수도하는 토굴(土窟)에 무슨 물건(物件)이 있겠는가? 하면서 대규일성(大叫

一聲)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시호는 청엄대사(淸儼大師)이다.『송고승전宋高

僧傳』23;『조당집』7;『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6 (대정장51, p.326a10)등 참조.

35) [全文] [全書]의 巖과 [總覽] [苑]의 巗은 같은 字이다.

36) [全文] [全書]의 巖과 [總覽] [苑]의 巗은 같은 字이다

신사년37) 봄에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중흥사38)에 주석하게 되었는

데, 동봉(東峯)에 자그마한 암자를 짓고는 편액(扁額)을 태고암39)이라 하

고, 그곳에서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證道歌)를 본받아40) 태고암가(太古

庵歌) 한 편을 지었다.

辛巳春, 住漢陽三角山重興寺, 卓庵於東峯, 扁曰太41)古, 倣永

嘉體, 作歌一篇.

37) 신사(辛巳):고려 충혜왕 복위 2년(1341).

38) 중흥사(重興寺):서울 삼각산 노적봉 남쪽 군창지 맞은 편에 있었던 절. 1915년

에 폐사(廢寺)가 되었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쌓고 북한산성 도총섭(都摠

攝)의 지휘 아래 많은 스님들이 산성을 지킬 무렵 도총섭이 있던 큰 절로서 중

흥사라고도 한다.

39) 태고(太古):태고사(太古寺)이니 중흥사 서쪽에 있었던 절이다.

40) 영가체(永嘉體):영가현각(永嘉玄覺:647~713)스님이 지은 증도가(證道歌;7言

및 6言으로 된 266句)의 체제를 본받아 태고암가(太古庵歌) 일편(7言 및 6言으로

된 84句)을 지은 것을 지칭함.

41) [全文] [全書]의 太와 [總覽] [苑]의 大는 뜻으로는 같으나 太가 옳음.

지정 병술년42)에 스님의 나이 46세 때 원(元)나라 연도43)로 입원유학(入

元遊學)하였다. 축원(竺源) 영성선사44)의 고명함을 듣고 남소45)로 찾아갔

으나, 그는 이미 입적(入寂)한 후였다.46) 그리하여 다시 방향을 바꾸어 호

47)에 있는 하무산48)으로 가서 석옥 청공선사49)를 친견하고, 자신이 얻은

바를 낱낱이 아뢰고 아울러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바쳤더니, 석옥(石屋)

이 이를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큰 법기(法器)로 여겼다. 이어 일용사50)

묻는 데 대하여 스님은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또 여쭙기를 “지금 스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것 이외에 더 일러주실 말씀이 있나이까?” 하니, 석옥이 이

르기를 “노승(老僧)도 이와 같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또한 이와 같을 뿐

이니라” 하면서, 드디어 신표(信表)로서 가사(袈裟)를 전해주고는 이르기

를 “노승이 이젠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석옥은 임제(臨濟)의 18대 법손이다.51)

至正丙戌, 師年四十六, 遊燕都. 聞竺源盛禪師, 在南巢, 往見

之, 則已逝矣. 至湖州霞霧山, 見石屋珙禪師, 具陳所得, 且獻

太52)古庵歌, 石屋深器之. 問日用事, 師答訖, 徐又啓曰, “未

審, 此外, 還更有事否.” 石屋云, “老僧亦如是, 三世佛祖, 亦

如是.” 遂以袈裟表信曰, “老僧, 今日展睡 矣.” 屋臨濟十八

代孫也.

42) 지정병술운운(至正丙戌云云):지정은 원나라 순제대의 연호. 병술은 지정 6년이

며 고려 제29대 충목왕 2년(1346). 이 해 봄에 연도(燕都)에 들어가 대관사(大觀

寺)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43) 연도(燕都):연경(燕京)이니 당시 원나라의 왕도이며 지금의 북경(北京)이다.

44) 축원성선사(竺源盛禪師):1276~1347. 천녕무능교(天寧無能敎:道翁圓의 弟子)의

제자이니, 호는 축원, 휘는 영성(永盛) 또는 수성(水盛). 속성은 범(范)씨. 시호는

묘과(妙果). 卍속장138, p.927b.

45) 남소(南巢):지명(地名)이니, ①안휘성(安徽省) 소현(巢縣)의 동북 지방. 거소(居

巢)의 고성(故城). 주(周)의 소백국(巢伯國)이었다. ②안휘성 동성현(桐城縣)의

남쪽 지방임.

46) 이서의(已逝矣):태고국사가 축원영성(竺源永盛)스님을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1347년에 서거(逝去)하였더라는 말이니, 연대상(年代上)에 문제가 없지 않다.

곧 태고가 1346년에 입원(入元)하였고, 축원은 1347년에 입적하였으며, 1348년

에 귀국한 것에 미루어 본다면 귀국 1년 전에 입적한 셈이다.

47) 호주(湖州):지명(地名). 절강성(浙江省) 오흥현(吳興縣) 지방.

48) 하무산(霞霧山):중국 절강성 오흥현에 있는 산 이름. 1347년 7월 하무산 천호암

(天湖庵)에 도착하여 석옥화상(石屋和尙)을 친견하였다.

49) 석옥공선사(石屋珙禪師):1272~1352. 임제종(臨濟宗) 호구파(虎丘派). 호는 석

옥, 휘는 청공(淸珙). 시호는 불자혜조선사(佛慈慧照禪師). 속성은 온씨(溫氏). 어

머니는 유씨(劉氏). 소주(蘇州:江蘇省) 상숙(常熟) 출신. 은사(恩師)는 영유(永

惟). 급암종신(及庵宗信)의 법을 이어받아 제자가 되었다. 1352년 7월 23일 세

수 81세, 법랍 54하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석씨계고략속집釋氏稽古略續集』권1

(대정장49, p916b); 『보속고승전補續高僧傳』권13 (卍속장134. p231b).

50) 일용사(日用事):날마다 되풀이 하는 일과(日課). 곧 직업 또는 본분사(本分事)

를 말하는 것이니, 선사(禪師)에게는 공안참구(公案參究)의 참선을 일컫는 말이

다.『벽암록碧岩錄』권42(대정장48, p179b26)에 방거사(龐居士)가 석두희천(石頭

希遷)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頭頭非取捨 處處沒張乖 朱

紫誰爲號 靑山絶點埃 神通並妙用 運水及搬柴”라는 오도송을 지었다.

51) 옥임제십팔대손(屋臨濟十八代孫):석옥이 임제의현(臨濟義玄)의 제18대 법손

(法孫)이라는 말이니, 그 조보(祖譜)는 다음과 같다. 28조 달마(達磨) → 29조 혜

가(慧可) → 30조 승찬(僧璨) → 31조 도신(道信) → 32조 홍인(弘忍) → 33조 대

감혜능(大鑑慧能) → 34조 남악회양(南嶽懷讓) → 35조 마조도일(馬祖道一) →

36조 백장회해(百丈懷海) → 37조 황벽희운(黃檗希運) → 38조 임제의현(臨濟義

玄) → 39조 흥화존장(興化存獎) → 40조 남원혜우(南院慧隅) → 41조 풍혈연소

(風穴延沼) → 42조 수산성념(首山省念) → 43조 분양선소(汾陽善昭) → 44조 석

상초원(石霜楚圓) → 45조 양기방회(楊岐方會) → 46조 백운수단(白雲守端) →

47조 오조법연(五祖法演) → 48조 원오극근(圓悟克勤) → 49조 호구소륭(虎丘紹

隆) → 50조 응암담화(應庵曇華) → 51조 밀암함걸(密庵咸傑) → 52조 파암조선

(破岩祖先) → 53조 무준사범(無準師範) → 54조 설암조흠(雪岩祖欽) → 55조 급

암종신(及庵宗信) → 56조 석옥청공(石屋淸珙) → 57조 평산처림(平山處林) →

58조 태고보우(太古普愚).

52) [全文] [全書]의 太와 [總覽] [苑]의 大는 뜻으로는 같으나 太가 옳음.

스님이 그곳에서 보름 쯤 있다가 떠나올 때 주장자(柱杖子)를 주면서

“길 조심하여 잘 가라”고 당부하므로53) 스님은 주장자를 받고 하직 인사를

하고 다시 연도(燕都)로 돌아오니, 스님의 도덕에 대한 명성이 널리 전파

되어 있었다. 천자가 이 소문을 듣고는54) 영녕사55)에서 수법(受法)한 개당

법회(開堂法會)를 열기를 청하였다. 이 때 순제(順帝)임금은 금란가사(金

襴袈裟)와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불자(拂子)를 하사하였고, 황후(皇后)

와 황태자(皇太子)는 향(香)과 폐물을 바쳤으며, 왕공(王公)과 사녀(士女)

들도 앞을 다투어 찾아와 예배(禮拜)를 올렸다.

留師半月, 臨別, 贈以拄杖曰, “善路善56)路.”57) 師拜受, 迴至燕

都, 道譽騰播. 天子聞之, 請開堂于永寧寺. 賜金襴袈裟, 沉香

拂子, 皇后, 皇太子, 降香幣, 王公, 士女, 奔走禮拜.

53) 선로선로(善路善路):청공(淸珙)이 태고(太古)로부터 귀국인사(歸國人事)를 받

고 부디 길 조심하여 잘 가라고 부탁하는 말이다.

54) 천자문지(天子聞之):원의 순제 임금을 지칭함.

55) 영녕사(永寧寺):1347년 7월 하무산 천호암(天湖庵)에서 석옥을 친견하여 수법

(受法)하고 8월 3일 그곳을 출발, 같은 달 17일 연도(燕都) 영녕사에 이르러 순제

의 명에 의하여 이 절에서 석옥으로부터 수법(受法)한 개당법회(開堂法會)를 가

졌다.

56) [全文] [全書] [總覽]에는 善. [苑]의 二는 善의 오자임.

57) [全文] [全書] [總覽]에는 路. [苑]의 二는 路의 오자임.

무자년(戊子年) 봄58) 귀국하여 미원현(迷源縣)의 소설산(小雪山)에 들어

가 직접 경작하면서 4년간 부모를 시양(侍養)하였다.

戊子春, 東歸, 入迷源小雪山, 躬耕以養者四年.

58) 무자춘(戊子春):태고(太古)스님이 1348년 봄 원나라로부터 귀국하여 중흥사(重

興寺)에서 여름 안거(安居)를 마치고 미원(迷原)으로 가서 토굴을 짓고 소설암

(小雪庵)이라 이름하여 그곳에서 주석하였다

임진년59) 여름 현릉60)께서 스님을 왕도(王都)로 맞이하여 모시려 하였

으나, 응하지 않자, 재차 사신을 보내오므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나아가

서 잠시 있다가 그 해 가을 고사(固辭)하고 산으로 돌아갔는데, 그 후 조

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다.61)

歲壬辰夏, 玄陵邀師, 不應, 再遣使, 請益勤, 師乃至秋, 力辭

還山, 未幾, 日新亂作.

59) 임진(壬辰):고려 공민왕 1년(1352).

60) 현릉(玄陵):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지칭함.

61) 일신난(日新亂):고려 공민왕 1년(1352)에 조일신(趙日新:?~1352. 고려시대의 逆

臣, 본관은 平壤, 初名은 興門. 仁規의 손자, 瑋의 子)이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조

일신은 공민왕이 세자이던 때 원나라에서 숙위한 공으로 공민왕 즉위 후 1등공

신에 책봉되었다. 그 후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는 야심에서 공민왕

1년 9월에 난을 일으켜 왕을 핍박하여 우정승(右政丞)에 올랐으며, 반란의 책임

을 자신의 무리들에게 돌려 살해하거나 투옥시키고는 그 공으로 좌정승(左政

丞)이 되었다. 이후 방자하게 행동하다가 마침내 왕명에 의해 주살(誅殺)되어

조일신의 난은 6일 만에 평정되었다.

병신년62) 3월 나라에서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63)에서 법회(法會)를 열었

는 바, 전국의 선사(禪師)와 강사(講師)가 함께 수없이 모였다. 현릉(玄陵)

도 친히 법회에 임석하여 만수가사(滿綉袈裟)와 수정염주(水精念珠)와 기

타 복용물(服用物) 등을 헌납하였고,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앉아 종지(宗

旨)를 천양하였다. 이에 천자(天子)께서 잡색(雜色) 비단으로 가사 3백 벌

을 만들어 이 날 법회에 참석한 선교(禪敎) 대덕(大德)들에게 나누어 주었

다. 이 때에 가진 법회의 성대함은 미증유(未曾有)의 법연(法筵)이었다.

丙申三月, 請師說法于奉恩寺, 禪敎俱集. 玄陵親臨, 獻滿綉袈

裟, 水精念珠, 及餘服用, 師陛座, 闡揚宗旨. 天子, 賜雜色段

疋袈裟, 三百領, 是日, 分賜禪敎碩64)德. 法筵之盛, 古所未有.

62) 병신(丙申):고려 공민왕 5년(1356).

63) 봉은사(奉恩寺):고려 광종 2년(950)에 개성의 성남(城南)에 창건한 절로써 태조

왕건의 원당(願堂)이 있어서 고려시대에 왕의 행차가 가장 빈번하였던 절이며

연등회도 주로 이 절에서 열렸고, 국사와 왕사의 책봉의식도 주로 이곳에서 행

해졌다.

64) [苑] [總覽] [全書]에는 碩. [全文]의 須는 碩의 오자임.

스님께서 산중(山中)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현릉(玄陵)이 이르시기를,

“스님께서 나의 불교 중흥의 뜻을 유보(留保)치 않도록 힘이 되어 달라”

고 청했다.65) 4월 24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광명사66)에 원융부67)

설치하여 정3품직(正三品職) 장관(長官)을 두어 선문구산(禪門九山)을 일

종(一宗)으로 통합하려 하였으니, 스님을 존숭(尊崇)함이 지극함을 보인

것이다. 광명사에 있다가 이듬해에 왕사직(王師職)을 사양하였으나, 왕

이 윤허(允許)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스님은 밤을 이용하여 왕성(王城)을

빠져나와 산중으로 은둔하였다. 현릉이 스님의 확고한 뜻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법복(法服)·인장(印章) 등을 모두 스님의 처소로 되돌려 보

냈다.

師請還山, 玄陵曰, “師不留我倍道矣.” 四月, 二十四日, 封爲

王師, 立府曰圓融, 置僚屬長官正三品, 尊崇之至也. 留居廣明

寺, 明年, 辭位不允. 師夜遁, 玄陵, 知師志不可奪, 悉送法服

印章于師所.

65) 사불류아배도의(師不留我倍道矣):현릉(玄陵)이 스님께서는 나의 불도중흥(佛

道中興)의 배가(倍加)코자 하는 이 신심(信心)을 보류(保留)케 하지 마옵소서라

고 간청하였다는 것.

66) 광명사(廣明寺):경기도 개성시 만월동에 있었던 절로 고려 태조 왕건이 옛 집

을 희사하여 절로 만든 것으로 선종(禪宗)의 승과(僧科)가 이곳에서 실시되기도

하였고, 충숙왕(忠肅王)의 진전(眞殿)이 있던 절이었다.

67) 원융부(圓融府):구산선문(九山禪門) 오교각종(五敎各宗)을 통할하기 위한 기구

이니, 광명사에 두었다.

임인년68) 가을 양산사69)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며, 계묘년70) 봄에는 가

지사71) 주지를 맡도록 청하므로, 스님은 모두 왕명에 따랐다. 병오년72)

10월에 또 왕사직의 사임서를 인장과 함께 보내면서 깊은 산중에서 임성

양진(任性養眞)하도록 허락을 간청하였다. 현릉이 윤허하였으니 이는 신

돈(辛旽)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기 때문이었다.

壬寅秋, 請住陽山寺, 癸卯春, 請住迦智寺, 師皆應命. 丙午十

月, 辭位, 封還印章, 仍乞任性養眞. 玄陵從之, 辛旽用事故也.

68) 임인(壬寅):고려 공민왕 11년(1362).

69) 양산사(陽山寺):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院北里)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봉암사(鳳巖寺)의 다른 이름이니, 산 이름을 취해서 절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70) 계묘(癸卯):고려 공민왕 12년(1363).

71) 가지사(迦智寺):선문(禪門) 구산(九山) 중의 하나인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

지산(迦智山)에 있는 보림사(寶林寺)이다.

72) 병오(丙午):고려 공민왕 15년(1366).

이보다 앞서 스님이 왕에게 신돈을 논박(論駁)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말하기를 “국가가 잘 다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펴야 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려면 사승(邪僧)이 그 기회를 편승하게 되오니, 원하옵

건대 폐하(陛下)께서는 이를 살펴 신돈을 멀리하신다면 종사(宗社)가 심

히 다행(多幸)한 줄로 아뢰옵니다”라고 하였다.

先是師上書論旽曰, “國之治, 眞僧得其志, 國之危, 邪僧逢其

時, 願, 上, 察之, 遠之, 宗社幸甚.”

무신년73) 봄 운수행각(雲水行脚)하다가 전주(全州) 보광사74)에 잠시 우

거(寓居)하였다. 신돈은 보우가 마치 눈엣가시와 같아 그를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고 백계(百計)를 꾸몄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스님

이 강절75)지방인 해외(海外)로 가서 유학코자 하니, 신돈이 현릉에게 고하

기를 “태고(太古)는 폐하의 총은(寵恩)을 입음이 지극하옵니다. 앞으로 편

안하고 조용하게 노기(老期)를 보내는 것이 그가 해야할 도리입니다. 이

제 멀리 해외로 유학(遊學)하려 함은 반드시 다른 의도(意圖)가 있어서이

니 청하옵건대 폐하께서는 통찰하여 주십시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위

급하게 느껴져서 현릉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신돈은 그 일을

형조에 내려 추문(推問)하여 신문토록 하여 스님의 좌우에 있는 이들을

무복(誣服)케 하고는 스님을 속리사(俗離寺)에 금고시켰다.76)

戊申春, 寓全州普光寺, 旽必欲置師死地, 百計莫能中. 後以

師將遊江浙, 白玄陵曰, “太古蒙恩至矣, 安居送老, 是渠職也,

今欲遠遊, 必有異圖, 請上加察.” 其言甚急, 玄陵不得已從之.

旽下其事, 雜訊之, 誣服師之左右, 錮于俗離寺.

73) 무신(戊申):고려 공민왕 17년(1368).

74) 보광사(普光寺):전라북도 전주군 고덕산에 있었던 절로 백제 때 창건. 고려 때

고용봉(高龍鳳)이 중수하였고, 조선조 때 모악산(毋岳山)으로 옮겨 지었다.

75) 강절(江浙):중국 절강성(浙江省) 지방. 원의 연도(燕都) 지방.

76) 고우속리사(錮于俗離寺):보우(普愚)와 그의 좌우(左右)들을 속리사에 금고(禁

錮)시켰다는 말이니, 1368년(戊申) 신돈(辛旽)이 가일층 보우를 모함하여 사지

(死地)로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현릉(玄陵)은 신돈의 상소(上疏)를 받아

들여 보우를 속리사(俗離寺)에 금고시켰다. 스님은 속리산에 금고되어 있으면

서 채근(菜根)과 목과(木果)로 연명(延命)하면서도 전혀 신돈을 원망하는 기색

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돈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

다”라고 말하였다. 다음 해인 1369년(己酉) 3월 현릉이 보우를 금고시킨 것을 후

회하고 승록사원(僧錄司員) 혜기(惠琪)를 보내어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오도

록 명(命)하였다. 그리하여 1371년(辛亥) 7월 마침내 신돈은 사형당했다.

기유년77) 3월에 이르러 현릉이 스님을 금고(禁錮)한 것을 후회하고 소

설암(小雪庵)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다.

己酉三月, 玄陵悔之, 請還小雪.

77) 기유(己酉):고려 공민왕 18년(1369).

신해년78) 7월 신돈을 주살(誅殺)하고, 현릉은 사신을 보내어 예(禮)를

갖추어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영원사79)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

였으나, 스님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으로 멀리서 7

년간 일을 맡아보던 중 무오년80) 겨울 지금의 폐하이신 우왕(禑王)의 명을

받아 비로소 취임하여 1년 쯤 영원사에 주석(住錫)하다가 돌아갔다.

辛亥七月, 旽誅, 玄陵, 遣使備禮, 進封國師, 請住瑩源寺, 師

以疾辭. 有旨遙領寺事凡七年, 戊午冬, 被今上命, 始至寺, 居

一年而還.

78) 신해(辛亥):고려 공민왕 20년(1371). 이 해 7월 신돈의 일당인 기현(奇顯)·최사

원(崔思遠) 등을 죽이고, 신돈은 수원(水原)에 유배 후 처형했다.

79) 영원사(瑩源寺):경상남도 밀양군 자씨산(慈氏山)에 위치. 이제현(李齊賢)이 지

은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의 비(碑)가 있다. 운문사(雲門寺)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6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고적古跡’ 참조.

源은 原字가 옳음.

80) 무오(戊午):고려 우왕 4년(1378).

신유년81) 겨울 양산사(陽山寺)로 옮겨 입원(入院)하는 날에 우왕이 다시

국사(國師)로 책봉하였으니, 선군(先君)의 뜻을 따른 것이다.82) 임술년83)

여름 소설암으로 돌아와 그 해 12월 17일 미질(微疾)을 느끼게 되었다. 23

일에 이르러 문인(門人)을 불러 앉히고 이르기를, “내일 유시84)에 나는 떠

날 것이니 지군85)에게 청하여 국사의 인장(印章)과 구점86)으로 남긴 사세

장(辭世狀) 수통87) 등을 봉하여 임금께 전달하라”고 당부하였다. 때가 다

가옴에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단정히 앉아 임종게 사구88)를 설하

고,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입적하였다. 부음을 우왕 임금에게 아뢰

니, 임금이 심히 진도(震悼)하였다.

辛酉冬, 移陽山寺, 入院之日, 上, 再封國師, 先君之思也. 壬戌

夏, 還小雪, 冬十二月, 十七日, 感微疾. 二十三日, 召門人曰,89)

“明日酉時, 吾當去矣, 可請知郡, 封印口占辭世狀數通.” 時至,

沐浴更衣, 端坐說四句偈, 聲盡而逝. 訃聞于上, 上, 甚悼.

81) 신유(辛酉):고려 우왕 7년(1381).

82) 선군지사야(先君之思也):선군이란 우왕(禑王)의 아버지인 공민왕을 지칭함.

83) 임술(壬戌):고려 우왕 8년(1382).

84) 유시(酉時):17시부터 19시까지의 시간.

85) 지군(知郡):군수(郡守)와 같은 뜻. 양근군수(楊根郡守)를 불렀다는 말이니, 당

시 양근군수는 이양생(李陽生)이었다.

86) 구점(口占):자필로 쓴 것이 아니고 입으로 말하는 것을 받아서 적은 것.

87) 수통(數通):당시 스님은 구점사세장(口占辭世狀) 6통(通)을 남겼다.

88) 사구게(四句偈):국사의 임종게(臨終偈)이니 다음과 같다. “人生命若水泡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帒 一輪紅日下西峰”이라 하다. 세수는 82세요, 법

랍은 69하였다

89) [總攬]은 결락이나 [苑] [全文] [全書]에는 曰임.

계해년90) 1월 12일 향목(香木)을 하사하여 화장하였다. 그 날 밤 광명이

하늘에 뻗쳤고 사리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중 100과를 내전(內

殿)의 임금에게 올리니,91) 이로 말미암아 임금은 더욱 경중(敬重)하시고,

유사92)에 명하여 시호를 원증(圓證)이라 하고 탑을 중흥사(重興寺)의 동쪽

봉우리에 세우니, 보월승공탑(寶月昇空塔)이라 이름하였다. 석종(石鍾)을

만들어 사리를 진장(鎭藏)한 것이 무려 세 곳이니,93) 가은(加恩)의 양산사94)

와 양근(楊根)의 사나사95)와 이 절 부도(浮圖) 옆에 서있는 것이 바로 그

것이다. 석탑(石塔)으로 만들어 조장(厝藏)한 곳은 미원현(迷源縣)의 소

설암96)이다.

癸亥正月, 十二日, 降香茶毗. 其夜, 光明屬天, 舍利無筭. 進百

枚于內, 上 益敬重焉, 命攸司, 諡曰 圓證, 樹塔于重興寺之東

峯, 曰 寶月昇97)空. 作石鍾, 藏舍利者, 凡三所加恩陽山楊根舍

那, 是寺浮圖之傍. 所立是, 已作石塔, 以藏之者, 迷源小雪也.

90) 계해(癸亥):고려 우왕 9년(1383).

91) 진백매우내(進百枚于內):무수(無數)한 사리 중 100과를 임금께 올렸다는 말.

92) 유사(攸司):받은 바 책임자라는 뜻이니, 해당 관청(僧錄)의 관원(官員)이라는 말.

93) 장사리자범삼소(藏舍利者凡三所):석종탑(石鐘塔)을 만들어 사리(舍利)를 조장

(厝藏)한 곳이 세 군데란 말이다. 그러나 그후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비(塔碑)는

5개소에 건립되었다. ①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②양근현(楊根縣) 사나

사(舍那寺) ③명주군(溟州郡) 청송사(靑松寺) ④미원현(迷原縣) 소설암(小雪庵)

⑤삼각산(三角山) 태고사(太古寺) 등이다.

94) 가은양산(加恩陽山):경상북도 가은면(加恩面) 원북리(院北里) 희양산 봉암사

(鳳巖寺)를 지칭함.

95) 양근사나(楊根舍那):경기도 양평군(楊平郡:楊根) 용문면(龍門面) 연수리(延壽

里) 사나사(舍那寺)를 가리킴.

96) 미원소설(迷源小雪):미원(迷原)이니,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雪岳面) 창의리(蒼

宜里:一本에는 蒼宣里)에 위치하고 있는데, 양근읍 북쪽 약 60리(24㎞) 지점이다.

97) [總攬]은 결락이나 [苑] [全文] [全書]에는 昇임.

신(臣) 색(穡)이 엎드려 조용히 생각하여 본 즉 선왕98)께서 석교99)를 돈

독히 신봉하여 가히 지극하였으나, 그 간에 참소가 횡행하였고, 생전에 태

고(太古)가 부종(扶宗) 수교(樹敎)함도 가히 지극하다 하겠으나, 환난(患

難)과 모함 등이 그의 몸에 미친 까닭은 인연(因緣)의 과보(果報)인 것이

니,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정업(定業)은 능히 면할 수 없는 것인저. 심지

어 칭송하는 명성100)이 화하101)에까지 가득하며 사리(舍利)의 광명이 고금

에 빛났으니 그것이 어찌 자주 볼 수 있는 일이겠는가?102) 신 색이 재배(再

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명(銘)을 지어 이르니,

臣, 穡, 竊伏惟念, 先王, 崇信釋敎, 可謂極矣, 而讒說行乎其

間, 太103)古, 扶持宗敎, 亦可謂至矣, 而患難及于其躬, 此所

以因緣果報, 雖聖人, 有所不能免也歟. 至於聲名, 洋溢華夏,

舍104)利, 照耀古今代, 豈多見哉. 臣, 穡, 再拜稽首, 而銘曰,

98) 선왕(先王):공민왕을 지칭함.

99) 석교(釋敎):석가(釋迦)의 교(敎)이니, 불교를 지칭함.

100) 성명(聲名):명성(名聲). 좋은 평판. 멀리 퍼진 칭송(稱頌).

101) 화하(華夏):화는 화려함. 하는 하나라 곧 대국(大國)이라는 뜻으로 중국 본토

(本土)의 과칭(誇稱).

102) 기다견재(豈多見哉):스님과 같이 위대(偉大)한 업적과 신비(神秘)함을 자주 볼

수 있겠는가라고 감탄하는 말이다.

103) [全文] [全書]의 太와 [總覽] [苑]의 大는 뜻으로는 같으나 太가 옳음.

104) [總攬]은 결락이나 [苑] [全文] [全書]에는 舍임

홍대(弘大)하고 거룩하신 스님의 마음은,

바다같이 깊고 넓어105) 하늘을 능가!106)

동분서주 쉴새 없는 스님의 자취는,

바다 건너107) 석장(錫杖) 짚고108) 구법(求法)하셨네!

惟師之心,

海濶天臨.

惟師之跡,

浮杯飛錫.

105) 해활(海濶):스님의 도덕과 이기(理氣)가 바다와 같이 깊고 넓고 맑다는 말.

106) 천림(天臨):①하늘이 지상(地上)을 조림(照臨)하는 것 ②마치 하늘이 만물(萬

物)을 두루 보살피듯 스님께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차별없이 제도함에 비유

하는 뜻. 안연지(顔延之)의 「응조연곡수작시應詔讌曲水作詩」에 “太上正位 天臨

海鏡”이라 하다.

107) 부배(浮杯):①유상곡수(流觴曲水) 또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의 줄임말이니, 음

력 3월 3일 곡수에 잔을 띄우고 그 잔이 자기의 앞에 왔을 때 시(詩)를 지었던

고사(故事). ②배를 타고 강(江)을 건너거나 바다를 넘어 해외(海外)에 유학(遊

學)한다는 뜻. 「지광국사현묘탑비문智光國師玄妙塔碑文」 주112)부배浮杯 본

서 p.369 참조. ③승명(僧名)이니 배도화상(杯度和尙)은 기주(冀州)에서 다년간

(多年間) 주석하였다. 하나의 목배(木杯)를 타고 다니다가 강물을 만나면 그 목

배를 물에 띄워 타고 물을 건넜으므로 배도화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대정장50,

p.390b). “杯度者 不知姓名云云”; 「지증대사적조탑비문」 주104)촉건하전觸騫河

筌 [신라편] p.305 등 참조. 여기서는 ②와 ③의 뜻이 모두 통한다.

108) 비석(飛錫):신통으로 석장(錫杖:六環杖)을 날려 수도처(修道處)를 점복(占卜)

한 것과 호랑이의 싸움을 말린 데에서 온 고사(故事)이다. ①서주(舒州)의 잠산

(潛山)은 중국에서 가장 절경(絶景)이며 또한 명산(名山)이다. 도사(道士)인 백

학도인(白鶴道人)과 보지공(寶誌公:중국 梁 武帝 때) 스님이 서로 거주권(居住

權)을 다투다가 이를 양 무제에게 공주(共奏)하였는데, 무제는 두 사람에게 물

건으로써 던져 먼저 닿는 자가 갖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도인(道人)은 먼

저 백학을 날렸고, 지공(誌公)은 다음으로 석장(錫杖)을 날렸는데, 지공의 석장

이 먼저 날아가 탁립(卓立)하매, 그 꽂힌 자리에서 감천(甘泉)이 솟아 올랐으

므로 마침내 지공이 암자(庵子)를 짓고 안거(安居)하였다. ②제(齊)나라 때 혜

조(慧稠)스님이 회주(懷州) 왕악산(王岳山)에서 수도하다가 암전(岩前)에서 싸

우는 호랑이를 보고 석장을 그들의 머리 위에 날려 빙빙 돌게 하여 싸움을 말

리고 나서 다음의 게송(偈頌)을 지었다. “本自不求名 剛被名求我 岩前解兩虎

障却第三果”라 하다. 『속고승전續高僧傳』권16「석승조전釋僧稠傳」(대정장50,

p.553c~p.554a) 참조. ③담순화상(曇詢和尙)은 승조(僧稠)의 제자이다. 속성은 양

씨(楊氏). 홍농(弘農) 화음(華陰) 출신. 어느 날 산길을 가다가 양호(兩虎)가 여

러 시간 동안 싸움이 그치지 아니함을 보고 담순(曇詢)이 석장으로써 갈라놓고

몸으로써 막으면서 이르기를 “同居林藪 計無大乖 幸各分路 虎低頭受命 便飮氣

而散”이라 하여 호랑이의 싸움을 석장으로 말렸다. 그 후 곰과 호랑이의 싸움을

만나서도 말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속고승전』권16「석담알전釋曇謁傳」

(대정장50, p.559a~b) 참조.

귀국(歸國)해선 공민왕의 귀의(歸依)를 받아,109)

임금의 정신적(精神的)인 지주(支柱)가 되다.110)

소설암(小雪庵)에 들어가서 밭을 갈으니,111)

은(隱)과 현(現)을 때에 따라 자적(自適)하시다.112)

歸而遇知,

王者之師.

躬耕小雪,

隱現維時

109) 우지(遇知):①지음자(知音者)를 만나다 ②지기자(知己者)를 만나다 등의 뜻이

니, 곧 왕신(王臣)들의 호법자(護法者)를 만났다는 말이다.

110) 왕자지사(王者之師):1356년에 공민왕이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

고 보우(普愚)를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는 말.

111) 궁경소설(躬耕小雪):보우가 1348년 봄 원나라로부터 돌아와 그 해 여름 안거

(安居)를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마치고 미원현(迷原縣) 미지산(彌

智山)으로 들어가 소설암(小雪庵)을 짓고 선농일치(禪農一致)로 수년간 밭을 갈

면서 정진하였다는 뜻.

112) 은현유시(隱現維時):숨어서 정진하거나 사회에 나타나 활동하는 것이 때에 따

라 적의(適宜)하게 하였다는 말이니, 예컨대 왕실과 국가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원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하고 귀국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대법회(大法會)를

가진 것 등은 현시(現時)에 속하고 전주(全州) 보광사(普光寺)와 미원(迷原) 소

설암(小雪庵) 등에서 연좌정진(宴坐精進)하는 것 등은 은시(隱時)에 속하는 것

이다.

나라 위한 호국심(護國心)은 한결 같으나,113)

신돈승(辛旽僧)이 시기하여 참소(讒訴)했지만,114)

구름 속에 덮인 태양 컴컴하다고,

광명(光明)이야 조금인들 손상(損傷)있으랴!

時維鷲城,

竊弄刑名,

如雲蔽日,

何損於明.115)

113) 시유취성(時維鷲城):항상 깊은 산중(山中:鷲城)에서 수도하거나 아니면 호국

(護國)을 위해 정진한 것 뿐이라는 말.

114) 절롱형명(竊弄刑名):보우는 오로지 불교(佛敎)와 국가를 위하여 수행(修行)하

고 직언(直言)할 뿐, 아무런 사심(私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돈(辛旽)이 자

신의 횡행(橫行)에 적대자(敵對者)가 오직 보우밖에 없으므로 보우를 음해(陰

害)하여 근거없는 갖가지 형명(刑名)을 절롱(竊弄)하여 마침내 일시나마 속리산

에 금고(禁錮)시킨 것을 말함.

115) [總攬]은 결락이나 [苑] [全文] [全書]에는 明임.

서산(西山)으로 넘어가는 새벽달이여!116)

달 진다고 달빛까지 사라질건가!

수정(水晶)같이 맑게 비친 사리(舍利) 광명(光明)이,

임금 계신 옥문(玉門)117)까지 비추었도다!

月墜崐崘,

餘光之存.

舍利晶瑩,

照耀玉118)門.

116) 곤륜(崐崘):산 이름. 중국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117) 옥문(玉門):원문(原文)에는 왕문(王門)이라 되어 있는데 王은 玉의 오자임. 옥

문은 궁궐(宮闕)을 지칭함이고, 왕문이란 왕궁(王宮)의 문을 가리킴이다.

118) [苑] [全文]의 王과 [總覽] [全書]의 玉은 뜻으로는 무방하나 玉이 옳음. 옥문은

궁궐이고 왕문은 왕궁의 문이다

삼각산중(三角山中) 중흥사(重興寺)의 동쪽 능선의,

나무 끝에 구름들이 덮이어 있네!

그 봉(峰) 밑에 사리탑(舍利塔)이 세워졌으니,

영원(永遠)토록 나라 운명 공고(鞏固)하소서!

惟三角山,

翠倚雲端.

樹塔其下,

與國恒安.

고매하신 스님 가풍(家風) 차별이 없어,

고려(高麗) 나라 동국(東國) 땅에 두루 불도다!

재배(再拜)하고 둔필(鈍筆)로서 명(銘)을 지으니,

바라건대 영원(永遠)토록 전(傳)하지이다!119)

惟師之風,

播于大東.

臣拜作銘,

庶傳無窮.

119) 서전무궁(庶傳無窮):지금 세운 이 탑비(塔碑)가 영원무궁(永遠無窮)토록 전시

(傳示)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홍무(洪武) 18년120) 을축(乙丑) 9월 11일.

문인(門人) 전송광사(前松廣寺) 주지(住持) 대선사(大禪師) 석굉(釋

宏)121)이 비석을 세우다.

洪武十八年, 乙丑九月十一日.

門人, 前松廣寺住持, 大禪師, 釋宏, 立石.

120) 홍무십팔년(洪武十八年):홍무(洪武)는 명(明)나라 태조(太祖)의 연호. 18년은

고려 우왕 11년(1385).

121) 석굉(釋宏):나옹스님의 문인(門人)으로 순천 송광사 주지를 역임하였고, 나옹

의 행장(行狀)을 기록하였으나, 자세한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비음碑122)123)

122) [苑]에는 碑. [總覽]의 裏와 [全文]의 陰은 뜻으로는 모두 무방하나 [苑]의 碑가

옳음.

123) [苑]에는 陰. [總覽]의 面과 [全文]의 記는 뜻으로는 모두 무방하나 [苑]의 陰이

옳음

문도

국사 지웅존자124) 혼수,125)

왕사 원응존자126) 찬영,127)

내원당128) 묘엄존자 조이,129)

내원당 국일도대선사 원규,130)

도대선사 광화군 현엄.131)

門徒

國師 智雄尊者 混脩,

王師 圓應尊者 粲英,

內願堂 妙嚴尊者 祖異,

內願堂 國一都大禪師 元珪,

都大禪師 廣化君 玄厸嚴.132)

125) 혼수(混脩):1320~1392. 호는 환암(幻庵). 자는 무작(無作). 속성은 조씨(趙氏)이

다. 나옹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보우의 제자이기도 하다. 우왕 때 국사(國師)로

책봉되었다.

126) 원응존자(圓應尊者):찬영(粲英 1328~1390)의 왕사호(王師號)이니, 갖춘 이름은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원명불일 명변대지 우세이생 보제무애 도대선사 묘변

지원응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圓明佛日明辯大智祐世利生普濟無礙都大禪師妙

辯智圓應尊者)이다.

127) 찬영(粲英):1328~1390. 고려 스님. 호는 목암(木庵). 자는 고저(古樗). 시호는 대

지국사(大智國師). 탑호는 지감원명(智鑑圓明). 속성은 한씨(韓氏). 원증국사(圓

證國師) 보우(普愚)의 법을 이어받았다.

128) 내원당(內願堂):고려 말 조선조 초기시대에 궁궐 안에서 왕과 왕비 등 궁내의

식구들이 개인적으로 불교(佛敎)를 신행(信行)하던 불당(佛堂)이니, 내불당(內

佛堂)이라고도 한다. 이 법당의 책임을 맡은 스님을 내원당(內願堂) 또는 분수승

(焚修僧)이라 한다.

129) 신이(神異):호는 묘엄존자(妙嚴尊者).

130) 원규(元珪):호는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이나,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

이지 않는다.

131) 현엄(玄嚴):전기가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132) [總覽]은 결락, [苑]은 厸, [全文]은 厸嚴, [全書]는 嚴. 嚴이 옳다. [苑][全文]의 厸

은 隣의 古字이나, 여기서는 嚴(吅)의 略字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우제1열右第一列】

대선사

수서, 조굉, 자소, 선진,

일녕, 정유, 상총, 혜렴,

혜심, 경돈 등 구십인.

大禪師

守西, 祖133)宏, 慈紹, 旋軫,

一寧, 定柔, 尙聰, 惠廉,

慧深, 慶敦 等 九十人.

133) [苑]의 袓(縣의 이름 조字)와 [全文]의 袒(옷벗어맬 단字)는 [總覽] [全書]의 祖의

오자임.

선사

신규, 참교, 덕제, 의경,

수윤, 내유, 내규, 성잠,

천긍, 유창 등 백칠인.

禪師

信規, 旵134)皎, 德齊, 義瓊,

壽允, 乃由, 乃圭, 省岑,

天亘, 惟昌 等 百七人.

134) [苑] [總覽] [全文] [全書] 모두 旵(비칠 감字)이나, 晶으로 된 곳도 있다

운수135)

법공, 정유, 환여, 달생,

성명, 중철, 복남, 정일,135)

조행, 성인, 법자, 법순,

달심, 성여, 희엄, 명회,

각훤, 선견, 희오, 가신,

가생, 지천, 설잉, 선정,

가운, 가인, 설상, 설강,

설사, 설서, 요환, 설진,

가송, 가순, 내령, 약무 등 천삼인.

雲水

法空, 定乳, 幻如, 達生,

省明, 中哲, 卜南, 定一,

祖行, 省因, 法慈, 法淳,

達心, 省如, 希儼, 明會,

覺昍,136) 善見, 希悟, 可信,

可生, 止川, 雪137)仍, 宣正,

可雲, 可印, 雪祥, 雪岡,

雪思, 雪栖, 了幻, 雪珍,

可松, 可淳, 乃寧, 若无138) 等 千139)三人.

135) 운수(雲水):운수납자(雲水衲子)의 줄임말. 운납(雲衲)이라고도 한다. 특히 선객

(禪客) 중에 동·하안거(冬·夏安居)를 마치고, 해제 철에는 나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소요자재(逍遙自在)히 행각(行脚)하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하는 일반

적인 스님을 일컫는 말.

136) [苑] [總覽]의 昍과 [全文] [全書]의 明은 뜻으로는 같으나 어느 字가 옳은지 알

수 없다.

137) [苑] [總覽] [全文]에는 雪. [全書]의 雲은 雪의 오자임.

138) [苑] [總覽] [全文]에는 无(無의 古字), [全書]에는 無. 无는 無의 古字이므로 같은

글자임

139) [總覽] [全文] [全書]에는 千. [苑]의 十은 千의 오자임.

칠원부140)원군 윤환,141)

영삼사142)사 이인임,143)

판문하 최영,144)

문하시중 임견미,145)

수문하시중 이성림,146)

판삼사사 이성계,

철성147)부원군 이림,

삼사좌사 염흥방,148)

찬성사 우인열,149)

연흥150)군 박형,151)

개성군 왕복명,152)

상당153)군 한천,154)

문하평리155) 반익순,156)

정당문학 이인민,157)

김해군 김사행,158)

밀산159)군 박성량,160)

지신사161) 염정수,162)

전공판서 최경만,163)

김해부사 이희계,164)

삼한국대부인 이씨,

비구니 묘안,

전공판서 김인귀.

漆原府院君 尹桓,

領三司事 李仁任,

判門下 崔瑩,

門下侍中 林堅味,

守門下侍中 李成林,

判三司事 李成桂,

鐵城府院君 李琳,

三司左使 廉興邦,

贊成事 禹仁烈,

延興君 朴形,

開城郡 王福命,

上黨君 韓蕆,165)

門下評理 潘益淳,

政堂文學 李仁敏,

金海君 金師幸,

密山君 朴成亮,

知申事 廉廷秀,

典工判書 崔敬萬,

金海府使 李希桂,

三韓國大夫人 李氏,

比丘尼 妙安,

典工判書 金仁貴.

140) 칠원(漆原):칠원현(漆原縣)이니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을 가리킴.

141) 윤환(尹桓):?~1386. 고려 재상(宰相). 본관은 칠원(漆原). 수(秀)의 손자. 시호는

충효(忠孝). 충숙왕(忠肅王) 때 호군(護軍)이 되었고 충혜왕(忠惠王) 때 대언(代

言)이었으며, 이후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공민왕 때에 판삼사사(判三司

事), 좌정승(左政丞),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 등의 벼슬을 하였다.

다섯 임금을 섬기고 세 번 영상을 지냈다.

142) 삼사(三司):고려 때의 행정관청. 국가의 전곡(錢穀)의 출납(出納) 및 회계(會計)

를 맡아보았다. 「지공나옹사리석종비문」 주133)삼사三司 [고려편4] p.430 참조.

143) 이인임(李仁任):?~1388. 고려의 권신(權臣). 본관은 성주(星州). 1369년 수문하

시중(守門下侍中)이 되고, 다시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東寧府)를 토벌한 공로로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이 되었다. 공민왕 사

후 우왕(禑王)을 추대하고 정권을 잡았다. 친원정책을 취하여 친명파를 추방하

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 횡포에 격노한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해

1388년 성주에 안치(安置)되었다가 곧 사망하였다. 「지공나옹사리석종비문」 주

121)이인임李仁任 [고려편4] pp.429~430 참조.

144) 최영(崔瑩):1316~1388. 고려의 명장(名將). 제주목호(濟州牧胡)의 난이 일어나

자 양광・전라・경상도의 도통사(都統使)로 난을 평정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

가 되었다.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출정을 자원하여 홍산(鴻山) 싸움

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

명(明)이 북변(北邊)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우왕(禑王)은 최영

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

(李成桂)를 우군도통사(友軍都統使)로 하여 요동을 정벌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

에 군사를 동원하여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였으나, 이성계 등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좌절되었다. 이성계군대가 개경

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高峰)・합포(合

浦)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공료죄(攻遼罪)로 개경에서 참형당했다. 「보제선사사

리석종비문普濟禪師舍利石鐘碑文」 주98)최영崔瑩 [고려편4] p.392 참조.

145) 임견미(林堅味):?~1388. 문신(文臣). 본관은 평택(平澤). 언수(彦修)의 아들. 중

랑장(中郞將)이 되어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했고 원나라 동녕부 토벌, 제주

목호의 난, 왜구 침입 때 출전했다. 1380년 경복흥(慶復興)과 그 일당을 숙청하

고 1384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전횡을 일삼다가 1388년 최영(崔瑩) ·

이성계(李成桂)에게 살해되었다. 「지공나옹사리석종비문」 주131)임견미林堅味

[고려편4] p.430 참조.

146) 이성림(李成林):?~1391. 또는 이림(李琳). 본관은 고성(固城). 교(嶠)의 아들. 판

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지위에 있을 때, 딸을 우왕의 비(妃)로 보내 철성부원

군(鐵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이성림은 문하시중의 지위에서 김저(金佇)의 옥

사(獄事)에 연루되었지만 창왕의 외조부(外祖父)였으므로 극형은 모면하고 철

원(鐵原)에 유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초(彝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이성계 등이 모함하여 다시 충주(忠州)로 유배되었고, 결국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었다. 「지공나옹사리석종비문」 주135)이성림李成林 [고려편4] p.431 참조.

147) 철성(鐵城):경상남도 고성군의 옛 이름. 이림(李琳)의 본관이 고성이다.

148) 염흥방(廉興邦):?~1388. 고려 말기의 권신. 자는 중창(仲昌). 호는 동정(東亭).

본관은 서원(瑞原). 공민왕 때 지신사로 홍건적을 대파하여 제학에 올랐고 도병

마사로서 탐라(耽羅)・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였다. 매관매직을 자행하고 토

지와 노비를 강탈하는 등의 행패로 이성계 등에 의해 처형되었다. 「지공나옹사

리석종비문」 주139)염흥방廉興邦 [고려편4] p.431 참조.

149) 우인열(禹仁烈):1337~1403. 고려 말·조선 초의 권신. 사불랑(沙弗郞) 등에 침

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9년 전대호군 김저(前大護軍 金佇)・예의판서 곽충

보(禮儀判書 郭忠輔)・이색(李穡)・왕안덕(王安德) 등 고려조 권신들과 함께 이

성계를 살해하고 폐왕(廢王) 우(禑)를 복위시키려 하다가 김저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양 갔다. 「지공나옹사리석종비문」 주138)우인열禹仁烈 [고려

편4] p.431 참조.

150) 연흥(延興):연창(延昌)이니 충청북도 죽산현(竹山縣;竹州)의 옛 이름.

151) 박형(朴形):?~1398. 고려·조선조의 문신(文臣). 본관은 죽주(竹州). 덕룡(德龍)

의 아들. 시호는 정강(靖康). 우왕 원년(1375)에 이인임(李仁任)을 해치려고 모의

했다 하여 귀양을 갔으며, 같은 왕 14년(1388) 최영(崔瑩) 등이 이인임을 제거할

때 전 찬성사(前 贊成事)였던 박형(朴形)도 각산술(角山戌)로 귀양갔다.

152) 왕복명(王福命):고려 무신(武臣). 홍건적(紅巾賊) 격파에 공을 세워 1363년 판

사(判事)로써 2등공신이 되고 1365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우왕(禑王)

즉위 후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지고 1378년 평리(評理)로써 양광(楊廣) 전라(全

羅)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가 되어 장단(長湍)에서 왜구(倭寇)를 격파했다. 시

호는 충정(忠靖).

153) 상당(上黨):충청북도 청주시의 옛 이름.

154) 한천(韓蕆):고려말 조선초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악(渥)의

손자요 대순(大淳)의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

巡問使), 1391년(공양왕 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거쳐 이듬해 예문관대제학

(藝文館大提學)으로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에 의

해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고 1400년(정종 2)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155) 문하평리(門下評理):고려 문하부(門下府)의 종2품(從二品)의 관직. 목종 때에는

첨지정사(僉知政事), 1061년(문종 15)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개칭하였으며,

공민왕 11년(1362)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라 개칭하였다.

156) 반익순(潘益淳):우왕(禑王)의 총애를 받아 왕씨성(王氏姓)을 하사받고 왕의 아

들이 된 반복해(潘福海)의 아버지. 아들이 공신호(功臣號)를 받으면서 아버지인

익순(益淳)도 문하평리(門下評理)에서 우시중(右侍中)으로 승진하였다. 『고려사

高麗史』권124「반복해전潘福海傳」.

157) 이인민(李仁敏):고려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포(褒)의 아들, 인임(仁任)의 아

우. 1383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시(科試)를 관

장. 1390년에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이색(李穡)·권근(權近)·이

숭인(李崇仁) 등과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이듬해 국대비(國大妃) 왕씨(王

氏)의 생일날에 특사(特赦)되었다.

158) 김사행(金師幸):고려말·조선초의 환관(宦官). 초명(初名)은 광대(廣大). 공민

왕의 총애를 받아 판내부사(判內府事)가 되었고, 정릉(正陵)의 공역(工役)을 사

치스럽게 한 죄로 공민왕 사후(死後) 익주관노(益州官奴)가 되었다가 우왕 때에

사면되었다. 공양왕 때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되어 왕을 경연(經筵)에 나가

지 못하게 하고 불교(佛敎)를 믿게 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 때

주살(誅殺), 효수(梟首)되었다. 『고려사高麗史』권122「김사행전金師幸傳」 참조.

159) 밀산(密山):경상남도 밀양의 옛 이름.

160) 박성량(朴成亮):1352년 3월 전왕(忠定王)이 강화(江華)에서 짐독(鴆毒)을 받고

죽었는데, 전왕이 강화로 쫓겨갈 때 박성량이 박사신(朴思愼)과 함께 가다가 모

두 순군(巡軍)에 추격되고, 박사신만 따라가도록 허락하였다. 우왕 3년(1377) 2

월에 북원(北元)의 봉책사(封冊使)가 올 때에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박성량이

우왕에게 편복(便服) 차림으로 행성(行省)에 나아가 지(旨)를 듣도록 상소한 바

있다. 「보제선사사리석종비문普濟禪師舍利石鐘碑文」 주108)박성량朴成亮 [고

려편4] p.393, 「지공나옹사리석종비문」 주144)박성량朴成亮 [고려편4] p.432 등

참조.

161) 지신사(知申事):고려 때 밀직사(密直司)의 정3품 벼슬. 충렬왕 때 첨원사(僉院

使;정3품)를 지신사(知申事)로 개칭한 바 있고, 공민왕 11년(1362)에 지주사(知

奏事)를 지신사(知申事)로 고쳐 불렀다.

162) 염정수(廉廷秀):1377년(우왕 3)에 지신사가 되었다. 「지공나옹사리석종비문」

주148)염정수廉廷秀 [고려편4] p.432 참조.

163) 최경만(崔敬萬):전기가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164) 이희계(李希桂):전기가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165) [苑]에는 탈락, [全書]에는 蕆. [總覽]의 藏과 [全文]의 은 [全書]의 蕆의 오자임.

[비신(碑身)의 높이(高)는 7척5촌(七尺五寸), 폭(幅)은 3척5촌5분(三尺五寸五分), 글자의

간격은 9분(九分)이며, 해서(楷書)이다. 전제(篆題)의 글자 간격은 3촌2분(三寸二分)이다.]

[揭載]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上 pp.570~582.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上 pp.525~529.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中世下 pp.1229~1234.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第6冊 pp.7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