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선시(禪詩)

수선님 2024. 2. 25. 13:12

선시(禪詩)

 

 

1) 봄에는 꽃이 피고

 

춘유백화추유월 春有百花秋有月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네

하유량풍동유설 夏有凉風冬有雪 여름엔 시원한 바람 겨울엔 흰 눈

약무한사괘심두 若無閑事掛心頭 부질없는 일로 가슴 졸이지 않으면

변시인간호시절 便是人間好時節 인간의 좋은 시절 바로 그것이라네

 

무문선사(無門禪師)의 이 시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는 시이다. 다분히 인생을 낙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유 있는 멋이 이 시속에 있다. 사계절의 운치를 바라보며 자연과 동화된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는 유흥에 도취되어 읊는 턱없는 풍월이 아니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문제들이 사라진 고요하고 밝은 심경이 될 때 세상은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아름답게만 보이는 법이다. 욕망에 허덕이고 불안 초조에 시달리는 범부의 번뇌심 속에서는 때로는 꽃이나 달이 순수한 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꽃을 보니 오히려 슬퍼지고 달을 보니 오히려 원망스러워 지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항상 주관과 객관의 대립에서 생기는 마찰 그것 때문에 울고 사는 인생이 아닌가. 하지만 도를 깨친 도인의 경지는 다르다. 관조(觀照) 속에 음미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는 실상 그대로의 참모습일 뿐이다. 망념에 의해 오인되는 객관경계에 이런 저런 탓을 하다보면 기실은 나 자신이 무능하고 허무할 뿐이다.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 인생을 바로 보는 안목이 열리면 소아적인 자기 집착을 벗으나 큰 자기에로 돌아가게 된다. 큰 자기 곧 대아(大我)가 되었을 때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무문 선사는 중국 송나라 때의 스님으로 본 법명은 혜개(慧開)이다.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을 지었는데 보통 줄여서 <무문관>이라 한다. 선문(禪門)의 어록(語錄) 가운데서 공안(公案) 48칙(則)을 가려 뽑아 송(頌)을 붙였다.

 

 

2) 낚시줄 길게

 

천척사륜직하수 千尺絲綸直下垂 낚싯줄 길게 바다 속에 드리우니

일파재동만파수 一波載動萬波隨 파도는 일파 만파 일렁이는데

야정수한어불식 夜靜水寒魚不食 고요가 겨운 밤 물만 차가울 뿐 고기는 물지 않아

만선공재월명귀 滿船空載月明歸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고 말았네

 

인생이란 어떤 면에서 빈배와 같은 것이다. 욕구충족을 위해 아무리 배에 짐을 싣듯 실어 보아도 부질없는 것임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되는 것이다. 야보도천(冶父道川)선사의 이 게송은 읽는 이의 마음을 비우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가을 달밤에 어떤 이가 배를 타고 낚시를 하러 갔다. 간 곳이 바다라 해도 좋고 큰 호수라 해도 상관없는 곳이다. 물 속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고기가 물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차가운 수면에 파도가 일고 달빛은 교교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웬일인지 고기가 물지 않는다. 밤은 이슥한데 고기는 낚아질 기척이 없어 할 수 없이 낚싯대를 거두고 빈배로 돌아온다. 만선의 꿈은 사라지고 뱃전에 달빛만 부서질 뿐이었다.

 

흔히 도(道)는 비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노자 도덕경에도 나오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 실체가 없는 것으로 우리들의 의식에 의해 분별되어지는 환영일 뿐이다. 그런데 이 환영이 사람을 그렇게도 애타게 만들며 못 잊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의 파도 속에서 산다. 생각 그것은 사실 번뇌인데 한 생각이 일어나면 천 가지 만가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연쇄반응으로 서로 서로 관계하면서 희비의 쌍곡선을 이루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는 존재들! 그 본 바탕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공(空)한 것이다. 카알 붓세는 "산너머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하기에 찾아갔다가 눈물만 흘리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하지 않았던가? 물론 메틸 링크의 파랑새 이야기도 있다. 어떻거나 우리는 자신이 비워질 때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자아관념의 상(相)을 떠나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면 모든 것은 이미 해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이미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야보 도천선사는 당나라 때 스님이나 생몰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금강경오가해에 수록된 야보(冶父 아버지 '부'자가 사람이름으로 쓰일 때 보로 읽는다.)의 송(頌)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야말로 읽는 이로 하여금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게 하는 시원함이 있다. 이송도 오가해에 나오는 하나다.

 

3) 구름걷힌 가을 하늘 달이

 

운권추공월인담 雲捲秋空月印潭 구름 걷힌 가을 하늘 달이 못에 도장을 찍었네

한광무제여수담 寒光無際與誰談 그지없는 물에 비친 달빛 누구에게 말해줄까

활개투지통천안 豁開透地通天眼 하늘과 땅을 뚫어 막힘 없는 눈을 뜨면

대도분명불용참 大道分明不用參 큰 도는 분명하여 참구할 필요 없네

 

사람이 도(道)를 멀리하지 도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 곁에 항상 진리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다만 눈먼 장님이 해를 못 보듯 미혹한 중생이 제 곁에 있는 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핑게가 있다면 어두운 밤에 빛이 없으면 물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두워서 도가 안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일이 무엇이었나 하면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횃불을 하나 만들어 놓고 이제 밝아졌으니 눈 있는 사람 와서 보시오! 보고 싶은 사람 와서 보시오 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나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기가 범부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누가 달 밝은 밤에 호수에 나갔다. 물 속에 동그란 달 그림자가 도장을 찍어 놓은 듯 떠 있고 교교한 달빛 사이로 차가운 냉기 마저 감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가슴속의 회포 이건 정말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상을 비추고 있는 달빛의 무궁한 뜻을 누구에게 무어라고 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정수리에 눈을 가진 사람은 여기에서 그윽한 종지(宗旨)를 바로 보아내는 것이다. 천지를 관통해 보는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에겐 언제 어디서나 대도가 분명히 나타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예장 종경(豫章 宗鏡)선사의 금강경 제송강요(提頌綱要) 속에 들어 있는 이 게송은 닦을 것도 없는 도(道)의 본체가 만상 속에 드러나 있음을 묘사해 놓은 명시(名詩)이다. 그는 사람이 삼라만상 차별의 본 뜻을 알려면 푸른 못에 떠 있는 달을 두 번 세 번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하였다. 이른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는 소식이 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부처를 찾을 것조차 없다는 것이다. 결국 부처를 찾는다는 것은 제 곁에 있는 것을 있는 줄 모르기 때문에 찾는다는 역설이 나오며 나아가 이미 내가 부처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부처이므로 특별히 찾을 것이 없다는 말이 된다.

4)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야야포불면 夜夜抱佛眠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조조환공기 朝朝還共起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기좌진상수 起坐鎭相隨 앉으나 서나 늘 따라다니고

어묵동거지 語默同居止 말할 때나 안 할 때나 함께 있으며

 

삼호불상리  毫不相離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여신영상사 如身影相似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는구나

욕식불거처 欲識佛去處 부처님 간데 알고자 하는가?

지자어성시 只這語聲是 단지 이 말소리 나는 곳 부처이로세

 

인간을 불성(佛性)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근본 입장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자리가 바로 부처가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마음 없는 사람이 없다. 때문에 마음이 있는 자는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 최후의 설법으로 알려진 <열반경>의 대의 중 하나가 일체중생 모두가 불성이 있다고 밝힌 것이다. 사실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바로 알면 나와 부처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화엄경>에도 분명히 마음, 부처, 중생 이 세 가지는 똑 같은 것이라 하였다.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또 선가(禪家)에서는 뭐라 했는가?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부처라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하였다.부대사(傅大士)의 게송으로 알려진 이 송(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주도하는 주인공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설해 놓은 법문이다. 잠잘 때 잠드는 주인공이 바로 부처요 일어날 때 일어나는 주인공이 바로 부처다. 앉거나 서거나 일체의 행동거지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바로 부처라는 말.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항상 함께 하는 부처는 바로 내가 내 마음을 떠나지 못한다는 뜻에서 해 놓은 말이다.

부대사는 양나라 무제(武帝) 때의 사람이다. 생몰연대가 서기 497년에서 569년으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살면서 불법에 뜻을 두어 크게 도인풍을 드날린 사람이다. 같은 시대의 보지공 (寶誌公) 화상이 양 무제에게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이 게송을 미륵 게송이라고 말해 오기도 하였다. 성(姓)을 따라 부대사라 하기도 하고 동양사람이라 하여 동양대사(東陽大士)라고도 불렀다. 또 송산의 쌍림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므로 쌍림대사(雙林大士)라 부르기도 하였다. 부대사록 4권과 심왕명 1권이 전해지고 있다.

5) 온 몸이 입이 되어 허공에 걸려

 

통신시구괘허공 通身是口掛虛空 온 몸이 입이 되어 허공에 걸려

불관동소남북풍 不管東西南北風 동서남북 바람을 가리지 않고

일등여거담반야 一等與渠談般若 언제나 바람 따라 반야를 노래하네

적정동료적정동 滴丁東了滴丁東 뎅그렁 뗑 뗑그렁 뗑

 

 

절에 가면 처마 밑에 풍경이 달려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작은 종 모양의 요령 안에 방울이 달렸고 그 밑에 보통 불고기 모양의 쇠붙이가 달려 있다. 이 풍경을 소재로 멋진 시를 지은 사람은 천동여정(天童如淨)선사(禪師)이다. 그는 조동종에 속해 있던 승려로 남송(南宋) 때 사람이다. 생몰 연대가1163에서 1228년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바람에 울리는 풍경소리를 반야를 노래한다고 한 것은 깊은 직관력을 터득한 경지라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를 반야송(般若頌)이라고 불러왔듯이 선시사(禪詩史)에서 반야의 세계를 노래한 백미(白眉)로 알려져 있다. 여정(如淨)의 문하에서 수학한 일본 조동종의 개조인 도원(道元)은 이 시가 단연 선시로서 최고의 격을 갖춘 시라 하였다.

 

예로부터 바람소리 물소리가 모두 반야를 노래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실 반야를 증득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 반야의 화음으로 들릴 것이다. 때로는 사람이 사람의 말이 아닌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디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가 실상의 이치를 관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면 마음에 와 닿는 모든 것이 부처의 세계에서 들려 오는 반야의 소리가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두두(頭頭)가 비로(毘盧)요 물물(物物)이 화장(華藏)이다" 고 한 말이 있듯이 실상을 통달한 지혜의 눈으로 보면 삼라만상이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온 세상이 비로자나의 법신 정토(淨土)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긍정하고 살아야 할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욕구불만에 의하여 이 세상을 부정하고픈 때가 있기도 하나 대자연의 이치 속에는 아무런 결함과 하자가 없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원만 그 자체라는 것이다.

6)날이 다하도록 봄을 찾아도

 

진일심춘불견춘 盡日尋春不見春 날이 다하도록 봄을 찾아도 봄을 보지 못하고

망혜변답농두운 芒鞋遍踏籠頭雲 짚신이 닳도록 이랑머리 구름만 밟고 다녔네

귀래소연매화취 歸來笑撚梅花臭 허탕치고 돌아와 매화꽃이 피었기에 향기를 맡았더니

춘재지두이십분 春在枝頭已十分 봄은 흠뻑 가지 위에 있었네

 

어떤 사람이 봄을 찾아 나섰다. 들이랑 산골짜기를 온통 쏘다니며 해가 저물도록 봄을 찾았으나 봄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 왔더니 마당가에 있는 매화 가지에 꽃이 피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 향기를 코로 맡다가 온종일 찾아 헤맸던 봄이 바로 꽃향기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내면의 자기 마음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상징해 놓은 이야기다. 가령 인간이 원하는 행복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이 행복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의 조건에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나아가서 ‘도(道)다. 진리다’고 하는 것도 우리들 마음을 떠나서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 곁에 도가 있고 사람 곁에 진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는 진리를 찾기가 쉽지 않는 것이 중생이다. 내 곁에 행복이 있어도 그 행복을 모르고 먼 곳을 다니면서 찾는다는 뜻으로 한, “마음밖에 부처를 찾지 말라”는 선가의 말은 수행자들에게 엄격한 주의를 주는 말로 알려져 있다. 마음 빼면 인생이 없고 마음 빼면 우주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마음에 의해 있는 것이고 마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다만 이 유심(唯心)의 도리를 사람들이 쉽게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을 알기까지는 숱한 헤맴과 시행착오를 겪는다는 사실이다. 메틸링크의 파랑새 이야기나 카알 붓세의 산너머 행복 이야기도 이 이야기와 같은 내용이지만 여기서는 부정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매화향기에 서 봄을 찾았다고 긍정으로 마무리했다.

 

이 시의 원작자가 누군지 어느 때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은 채 전해져 작자미상으로 간주되는데, 다만 어떤 비구니 스님이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애틋한 서정이 배여 있어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7)서로 서로 만날때 향기를 얻고

 

물물봉시각득향 物物逢時各得香 서로서로 만날 때 향기를 얻고

화풍도처진춘양 和風到處盡春陽 온화한 바람 속에 봄볕도 따사롭네

인생고락종심기 人生苦樂從心起 인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활안조래만사강 活眼照來萬事康 활달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만사가 모 두 편안하리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음의 느낌에 따라서 아름답고 좋게 보이기도 하고 나쁘고 추하게 보이기도 하는 법이다. 때문에 좋은 느낌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 인생은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너와 나의 만남에 있어서 꽃의 향기처럼 서로서로 마음의 향기를 풍기자. 온화한 봄바람이 양지의 언덕을 스치듯 기분 좋게 세상을 살아갈 때 원망하고 증오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마음의 눈이 열려 지혜로운 처신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내게 갖추어졌느냐가 문제다. 인생은 생각에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생각에 끼어 드는 감정이 잘못될 때 절망과 비탄에 빠져 스스로 포기하게 되며 따라서 자신의 인생이 실패로 끝난다는 뜻이다.

 

도심(道心)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생실패는 없다.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여 삶의 본질을 탐구하여 자기 정체를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경계에 부딪쳐 자신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지금 빠져 있는 감정에서 쉬이 벗어날 수도 있다. 비탄이나 고통에 짓눌리는 일도 마음을 바꾸면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해 질 수 있다. 모든 분별은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을 A는 부정적으로 보고 B는 긍정적으로 보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마음 대로지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역시 마음이 문제일 뿐이다.

 

이 시는 근세의 대선사였던 경봉(鏡峰)스님의 시다. 스님의 법명은 정석(靖錫), 속성은 김씨였다. 1892년에 밀양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유학을 마치고 15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16세에 출가, 양산 통도사에서 성해스님을 의지해 스님이 되었다. 두루 경전을 섭렵하고 참선수행으로 정진하다가 36세에 한밤중 촛불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도를 깨달았다. 그후 제방의 수좌를 제접하면서 여러 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었다. 1982년 법랍 76 세수 91세로 입적하였다.

 

8)내게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문여하사서벽산 問余何事栖碧山 내게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소이부답심자한 笑而不答心自閑 빙그레 웃을 뿐 대답 못해도 마음 더욱 넉넉하네

도화류수묘연거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 물에 흘러 아득히 가니

별유천지비인간 別有天地非人間 인간세상 벗어난 또 다른 세계라네

 

너무나 잘 알려진 이태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다. 산거(山居)생활의 탈속한 맛이 진하게 느껴지고 있다. 왜 산에 사느냐는 말에 빙그레 웃을 뿐, 모든 것에서 초월된 마음이 저절로 한가롭기만 하다는 두 번째 구는 정말 뉘앙스가 미묘하여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사실 세상사라는 것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죽느니 사느니 하는 범부들의 문제가 속세를 초월해 버릴 때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무릉도원의 선경(仙境)을 읊은 시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상세계를 동경하는 인간의 순수한 정서를 소담하게 나타내었다고도 하겠다. 세상의 근심걱정을 이고 살 때는 선(禪)을 맛볼 수 없다. 잠시라도 근심을 풀고 자기의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본래 마음이란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이다.

 

예로부터 산은 시끄러운 세상을 피하는 인간의 휴양처로 인식되기도 했다. 또한 사색과 명상을 할 수 있는 수행의 곳이었다 특히 불교에서는 입산출가니 입산수도니 하는 말을 써 오면서 도를 닦으러 산에 들어간다 하였다. 산중에 산다는 것은 세상의 시끄러움을 벗어났다는 뜻과 함께 수도에 종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연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도 산이다. 숲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봉우리가 있고 기슭이 있다. 산은 인간과 자연이 동화되는 곳이어서 명상이나 선(禪)수행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9)돌아와 발을 씻고 침상에 올라 자다

 

귀래세족상상수 歸來洗足上床睡 돌아와 발을 씻고 침상에 올라 자다

곤중부지산월이 困重不知山月移 산 위로 달이 가는 줄 미처 몰랐네

격림유조홀환성 隔林幽鳥忽喚醒 숲 속의 새소리에 문득 눈을 떠보니

일단홍일괘송지 一團紅日掛松枝 소나무 가지에 붉은 해가 걸렸구나

 

일에 쫓기는 일이 없는 한가로운 여유가 넘쳐나는 이 시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남구만의 시조의 연상케 하고 있다. 어느덧 사람 사는 마을이 도시화되고부터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움을 즐기는 시대는 이미 지나 가버렸지만 그러나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 볼 때 대답을 못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바쁜 일과에 쫓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산다는 것이, 생활한다는 것이 어쩌면 부담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적 관계에서나 사회 제도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 속에 존재하는 자체가 피곤해질 때가 많이 생긴다. 부담스러운 일이 없을 때 선의 세계로 들어가 실컷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분명 부담 없는 경기인데 우리는 경기에 임하기 전부터 너무나 많은 부담을 안고 링에 오르는 권투선수처럼 이 세상을 전쟁터로 보고 생존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번뇌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석옥 청공(石屋 淸珙) 선사의 시다. 중국 송(宋)나라 때 스님으로 우리 나라 고려 태고 보우(太古 普雨)선사가 석옥으로부터 법을 이어 받았다. 조계종 법맥의 연원이 이 두스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산월(山月)이라고 제목이 붙은 이 시는 그윽한 자연 속에 매여진 일상에 쫓기지 않고 사는 한가로운 여유가 넘친다.

 

 

10)시냇물소리가 부처님 설법이니

 

계성변시광장설 溪聲便是廣場舌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 설법이니

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淸淨身 산색이 어찌 부처님 법신이 아니랴

야래팔만사천게 夜來八萬四千偈 밤새 내린 비로 불은 물소리 법문을

타일여하거사인 他日如何擧似人 남에게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소동파(蘇東坡)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시는 불도를 닦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이다. 당대의 시인이요 학자였던 동파거사가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동쪽 언덕에 초암을 지어 놓고 기거하였다 하여 동파란 호가 붙었다. 처음에는 불교를 우습게 알았던 그가 옥천사 승호(承浩)선사의 할(喝)에 눌려 선(禪)을 시작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 후 그는 많은 고승들을 방문하면서 법문을 듣고 선지(禪旨)를 익혔다. 한번은 상총(常聰)선사를 찾아가 법문을 청했더니, 사람이 설해 주는 말만이 법문이 아니라 우주 만상이 모두 법을 설하고 있으니 그 법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으라는 말이다. 마침 절을 나와 돌아오는데 골짜기 계곡 밑을 지나자 폭포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전날 밤에 비가 와서 물이 불어 폭포의 물이 더욱 세차게 흘렀던 것이다. 순간 소동파의 머리에 섬광이 번쩍이는 것이었다. 그때 바로 이 송을 지었다고 한다. 산과 물이 부처의 몸이요 부처의 설법이라는 이 말은 우주의 근원을 사무쳐 알고 난 오도의 경계에서 나오는 말이다.

 

현상에 미혹해 속고 있을 때는 어림없는 이야기다. 두두(頭頭)가 비로(毘盧)요 물물(物物)이 화장(華藏)이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요 존재의 세계는 모두 부처의 세계라는 이 말의 뜻을 알 때 부처와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11)별들이 늘려있는 깊은 밤

 

중성나열야명심 衆星羅列夜明深 별들이 널려 있는 깊은 밤

암점고등월미침 岩點孤燈月未沈 바위에 외로운 등불 하나 달은 기우는데

원만광화불마형 圓滿光華不磨瑩 뚜렷이 찬 광명은 이지러지지 않고 빛나니

괘재청천시아심 掛在靑天是我心 내 마음 푸른 하늘에 걸려 있다네

 

한산시에 나오는 이 시는 밤하늘의 별을 보다가 마음의 빛을 찾은 오도송(悟道頌)과 같다.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희미한 잔월, 바위에 점 찍힌 듯이 켜져 있는 등불 하나, 이러한 배경 속에 갑자기 온 우주에 꽉 차고 저물지 않고 이지러짐이 없는 광명을 찾아낸다. 바로 자기광명인 마음의 빛이다. 이것이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구절에서 푸른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이 내 마음이라 하였다.

 

한산시(寒山詩)는 대부분 산 속에 은둔한 자취를 나타내면서 자연에 돌아가는 탈속한 정취와 때로는 인생의 무상을 노래하였다. 주로 외면적인 묘사를 통해서 내면세계를 넌지시 엿보게 하는 매력들을 가지고 있다. 한산은 산 속에 은둔하여 도풍(道風)을 드날렸던 전설적인 인물로, 중국 당나라 때 천태 시풍현(始豊縣)의서쪽 한암(寒巖)의 굴속에서 살았다. 미친 사람 같은 차림과 행동으로 국청사에 드나들며 습득과 함께 밥을 얻어 댓통에 넣어 한산으로 돌아가 놀면서 절벽이나 바위에 수많은 시를 남겼는데, 태주 자사를 지냈던 여구윤(呂丘胤)이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2)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굽이치나니

 

심수만경전 心隨萬境轉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굽이치나니

전처실능유 轉處實能幽 굽이치는 그 자리가 실로 그윽하다네

수류인득성 隨流認得性 이 흐름을 따라 본성을 알아버리면

무희역무우 無喜亦無憂 기쁠 것도 없고 또한 슬플 것도 없다네

 

마음은 언제나 경계에 부딪혀서 가지가지 감정을 일으킨다. 소위 희로애락이란 사람의 감정이 마음의 경계에 부딪혀서 일어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식이 흐르는 마음의 작용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일 찰라에 900번의 생멸이 있다고 하였다. 1초가 75 찰라이니까 1초동안에 67,500번(75x900)이나 마음의 진동이 있다는 말이다. 마음에 진동이 일어나는 것이 경계를 따라 굽이치는 물줄기와 같은 의식의 흐름이 된다. 이 이치가 참으로 미묘하여 알 수 없는 불가사의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 시작되는 근원인 본성, 굽이치는 성질을 갖고 있는 본성 자체를 알아버리면 기뻐도 기쁠 것이 없고 슬퍼도 슬플 것이 없는 무심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원래 이 게송은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22대 조사인 마나라(摩拏羅)존자가 그의 제자 학늑나(鶴勒那)존자에게 설해 주었다는 게송이다. 혹 어떤 이는 『경덕전등록』에 양기방회(楊岐方會)가 이 게송을 읊은 것이 있다하여 양기스님의 작품으로 보는 이도 있다. 사람은 감정에 북받쳐 울고 웃는다. 그러나 슬픔도 기쁨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파동일 뿐 정체가 없다. 그런데도 감정을 주체못하여 본성을 잃고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13)고요한 밤 산 속의 집에

 

산당정야좌무언 山堂靜夜坐無言 고요한 밤 산 속의 집에 말없이 앉았으니

적적요요본자연 寂寂寥寥本自然 적막하기 짝이 없어 본래 그대로인데

하사서풍동임야 何事西風動林野 무슨 일로 저 바람은 잠든 숲을 흔드나

일성한안려장천 一聲寒雁戾長天 기러기 소리내며 장천을 날아가네

 

 

산 속의 적막한 가을 밤 풍경을 읊으면서 인간의 내면을 관조한 시다. 이 시는 너무나 많이 회자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애송시다. 인간의 본래 한 생각의 번뇌망상을 일으키기 전에는 고요한 적멸 뿐이었다. 아무 일이 없는 고요 그 자체로 존재의 의식마저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는 것도 없었고 너라는 것도 없었다. 주객이 나누어져 서기 이전의 경계, 곧 본성의 세계에는 무명의 바람이 부는 일이 없다. 법화경의 사구게(四句偈)에서도 “제법은 항상 고요할 뿐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이라고 하였다.

내가 살아가는 이 한 생에 있어서 언제부터 이토록 많은 근심과 걱정이 쌓이기 시작했는가? 인연이 닿아 관계가 맺어지기 전에는 무심할 뿐이었는데, 인연 이후에 이리도 그립고 초조하기만 하다. 서풍이 불어 숲을 흔든다는 것은 생멸심의 번뇌가 바람이 되어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을 말하고 기러기가 울며 하늘을 날아간다는 것은 우리들 존재의 고민이 현실에 부딪혀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음을 뜻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왜 이러는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희·노·애·락을 싣고 사는 인생. 이것이 바로 숲을 흔드는 바람이요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소리이다

 

 

14)멀리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곳

 

수리무인도(數里無人到) 멀리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곳

산황시각추(山黃始覺秋) 산이 단풍들어 가을인 줄 알았네

암간일각수(巖間一覺睡) 바위틈에 한 숨 자다 깨어 보니

망각백년우(忘却百年憂) 사는 걱정 모두 다 날라 가버렸네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지극히 평범한 시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탈속한 산거인의 맑은 서정이 스며 있다. 부용도개(芙蓉道楷)스님이 지은 시인데 스님은 중국 송나라 때 조동종의 스님이다. 생몰 연대는 1043∼1118년.

인구가 과밀하여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되는 것 같은 현대의 생리에서 볼 때 은자의 안일무사가 오히려 부럽기도 할 것이다. 인가를 멀리 벗어난 깊은 산중. 은거하고 사는 사람 이 있어 날 가는 줄 모르고 사는데, 어느 날 산에 단풍이 들어 산색이 울긋불긋 변하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계절이야 으레 오고 가는 것, 할 일 없어 바위틈에 누워 낮잠 한숨 잤더니 무심한 산이요 무심한 하늘이라, 사는 걱정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공연히 철학하는 사람들이 인간에게 불만을 가지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불만 하는 인간이 되라”고 했지만 만족은 뭐고 불만은 뭐냐. 그대로 산 속에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버린 것을.

은자송(隱者頌)이라 할 이 시는 생존경쟁을 초월한 달인의 노래다. 비록 우리는 현실의 노예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누구 없이 한 생각 돌이키면 나 역시 은자요 도인이다

 

 

15)노파의 적삼을 빌려

 

차파삼자배파문 借婆杉子拜婆門 노파의 적삼을 빌려 노파 문전에 절하니

예수주선이시분 禮數周旋已十分 인사 차릴 건 충분히 다 차렸네

죽영소계진부동 竹影掃階塵不動 대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월천담저수무흔 月穿潭底水無痕 달이 못 밑을 뚫어도 수면에 흔적이 없네

 

선(禪)은 마음에 일체의 분별의식이 떠나간 상태를 유지한다. 마음에 미련이나 후회가 남으면 선이 아니다. 시비곡직을 애초에 외면해 버렸기 때문에 선에 들어온 것이며, 선에 든 마음은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동시에 주객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의 할 일은 다 해 마쳐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도리를 예의라 한다면 선심 속에서는 그 예의가 실은 차릴 것 없이 다 차려진다. 마음 자체는 능소(能所: 주체와 객체관계)가 없으므로 아무리 마음을 움직여도 움직임이 없다. 마치 대그림자가 계단 밑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으며, 달이 물 속을 비추어도 물에 흔적이 없는 것처럼, 모든 상대를 초월하여 여여부동(如如不動)하기만 한 그 자체가 선인 것이다. 선의 정수를 바로 읊었다고 평가받는 이 시는 야보도천(冶父道川)스님의 작품이다. 『금강경오가해』 중 야보송에도 나오고 있는데, 특히 3구와 4구는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인간사 모두가 공중에 일어나는 한 줄기 바람 같은 것인데, 구태여 우리는 자기생애의 흔적을 남기려고 애를 쓰니, 어찌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어느 선사가 “나는 평생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더불어 살아왔다”고 독백한 적이 있다. 알고보면 모든 사람이 다같이 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16)산은 무심히 푸르고

 

산자무심벽(山自無心碧) 산은 무심히 푸르고

운자무심백(雲自無心白) 구름은 무심히 희구나

기중일상인(其中一上人) 그 가운데 스님 한사람

역시무심객(亦是無心客) 또한 무심한 나그네로세

 

무심시라 할 수 있는 이 시는 이조 선시를 대표하는 서산스님의 시이다. 청허집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의 원 제목은 제일선암벽(題一禪庵壁)이라 되어 있다. ‘일선암’이라는 암자의 석벽에 썼다는 시이다.

요즈음처럼 무심이 그리운 때도 없을 것 같다. 무심이 그립다는 말은 도(道)가 그립다는 말이다. 명색이 도 닦는 사람이 도가 그립다는 말이 모순인 것 같지만 도 닦는 사람이기 때문에 도가 그리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더 그리운 법이 아니겠는가? 세상이 온통 힘으로 대결하여 승부를 결정짓자는 살벌함이 느껴지는 시대다. 싸움을 걸 상대를 찾고 있는 위협감이 은연중 와 닿기도 하는 것 같다. 또 무슨 사건이 터져 충격을 줄 것인가 불안하기도 하고 테러 공포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는다 하더니, 전쟁의 위기가 중동의 하늘을 덮고 있다는 외신의 보도가 나오고 있다. 무심이란 공기처럼 아무 색깔이 없는 마음이다. 감정이 북받친 희노애락의 동요로 누구와도 마찰이 없는 무심이 바로 도라고 선에서는 말한다. 산은 절로 푸르고 구름은 절로 희다. 그 속에 사는 사람 그도 역시 무심한 나그네라 했다. 사실 인생은 누구나 덧없는 나그네이다. 무심히 구름처럼 왔다 가는 나그네이다.

 

 

17) 홀로 산창에 기대니

 

독의산창야색한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 기운이 차갑다

매초월상정단단 梅梢月上正團團 매화가지 끝에 달은 떠 둥글구나

불수갱환미풍지 不須更喚微風至 봄바람 불러올 일 무어 있겠나?

자유청향만원간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집 안에 가득하네.

 

이 시는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에서 달밤에 매화를 보고 읊은 시다. 원제목이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라 되어 있다. 차가운 산골의 밤, 달빛마저 차가운데 청빈하고 지조 있게 사는 도학자는 가슴에 천지의 기를 느끼며 달빛 젖은 사색에 몰두한다. 뜰에 심은 매화는 어쩌면 자신의 성품을 상징하는 꽃일 것이다. 그 매화가지 끝에 마침 보름달이 걸려 있다. 인동의 초목이 봄을 기다리며 산자락에 섰는데 매화 일지향이 뜰에 가득하다.

 

퇴계는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매화시첩>이란 시집 안에 매화를 읊은 시가 무려 104수나 된다. 정한강(鄭寒岡)은 집 둘레에 백여 그루의 매화를 심어 놓고 자기 집을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옛날의 선비나 학자들이 매화를 특히 좋아했다는 사실은 매화의 기상이 청아한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군자에 비유한 것도 그렇고 아무튼 매향이야말로 최고의 향취를 사람에게 선사한다. 사람의 인격에서 풍기는 향기가 있다면 그 역시 매화 향기와 같을 것이다. 맑고 은은한 매화의 이미지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기실은 살아나야 할 것이다.

 

 

18)풀끝마다 조사의 뜻 분명하고

 

조의명명백초두 祖意明明百草頭 풀 끝마다 조사의 뜻 분명하고

춘림화발조성유 春林花發鳥聲幽 봄 숲에 꽃피자 새소리 그윽하다.

조래우과산여세 朝來雨過山如洗 아침빗발 스쳐간 산은 세수를 하였나?

홍백지지로미수 紅白枝枝露未收 붉고 흰 가지마다 이슬이 맺혔다.

 

정법의 눈이 열린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에서 참된 의미를 발견하는 투철한 직관력이 있다. 풀잎 하나, 꽃 한 송이에서 우주의 신비를 보고 무궁한 진리의 세계에 대한 감동을 느낀다. 조의(祖意)란 조사의 뜻이란 말인데, 이 말은 불법의 단적인 핵심을 가리킨다. 풀 끝마다 무궁한 진리가 분명하게 드러나 하나도 숨김이 없는 이 경지가 도를 통달한 도인의 눈에는 예사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고 숲에는 새가 운다. 이 자연의 섭리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작용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시는 봄의 풍광을 읊은 것이나 자연을 관조하는 내밀한 여운이 흠씬 풍긴다. 비가 스친 봄 산이 세수를 한 듯 이슬 맺힌 가지가 오히려 해맑다. 맑은 서정이 정말 이슬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다.

 

이 시의 작자 감산덕청(감山德淸)은 중국 명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스님이다. 1546년 남경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보은사로 출가하였다. 그 후 제방을 다니면서 도업을 닦아 선취를 터득하고 여러 곳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여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여산(廬山)에 오래 머물다 조계로 돌아와 1623년 78세로 입적했다. 어록을 비롯한 몽유전집(夢遊全集)등 많은 저서가 남아 전한다.

 

 

19)산비탈 한 마지기 노는 밭이여

 

산전일편한전지 山前一片閑田地 산비탈 한 마지기 노는 밭이여

차수정녕문조옹 叉手정녕問祖翁 손 모아 어르신께 여쭈나이다.

기도매래환자매 幾度賣來還自買 몇 번이나 팔았다가 다시 샀지요?

위린송죽인청풍 爲隣松竹引淸風 솔바람 댓잎소리 못내 그리웠습니다.

 

산비탈에 묵혀진 밭 한 마지기가 있다. 대대로 이를 가꾸며 살아왔던 그리운 시절이 생각나서 먼 조상 할아버지에게 넌지시 여쭈고 싶다. 이 밭의 임자가 누구누구였는지. 밭 근처에는 소나무 대밭이 있어 언제나 맑은 바람을 불러오고 있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자연 그대로 살던 시절이라 고향의 소식이 묻혀 있어 언제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 시는 중국 송나라 때 오조법연(五祖法演)선사가 지었다. 백운수단(白雲守端)의 법을 이었고 원오(圓悟克勤)의 스승이다. 만년에 오조산에서 선풍을 드날려 일세를 풍미케 하였다. 오조법연의 오도송으로 알려질 만큼 유명한 시이다. 산비탈 노는 밭이란 우리의 본성 곧 마음자리를 상징한 것이다. 아무런 가식이 없고 소박한, 부도 없고 명예도 없던 내 자성의 참모습을 우리는 잃어버렸다. 공연히 환영에 도취되어 미로를 헤매다가 고향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조옹(할아버지)은 자기 진심을 의인화 시킨 말로 볼 수 있다. 고향 가는 길을 찾은 후 헤매던 시절을 회상하며 본성을 등졌던 것을 고향 밭을 팔았다고 비유하였다.

 

 

20)산아래 흐르는 물은 그저 흐르고

 

유수하산비유의 流水下山非有意 산아래 흐르는 물은 그저 흐르고

편운귀동본무심 片雲歸洞本無心 골짜기에 모이는 구름 무심할 뿐이다.

인생약득여운수 人生若得如雲水 인생이 만약 물과 구름 같아진다면

철수화개편계춘 鐵樹花開遍界春 무쇠나무에 꽃 피어 온 누리가 봄이리

 

자연의 섭리는 언제나 도에 순응하여 일어난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이치, 바로 여기에 깨달음의 소식이 있다는 것이다. 차암수정(此庵修淨) 선사의 이 시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깨달음이 열리는 담담한 심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 세상을 달관하고 보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담담하게 느껴질 뿐이다. 울분도 욕망도 벗어나 자신을 잊고 사는 것이다. 무아의 경지에 들어갈 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관에 일어나는 망상이 들어서 사물의 참모습을 왜곡해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깨닫지 못한 범부 중생은 항상 진리에 대한 오해로 일관하면서 일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잘못 보는 오해의 눈을 고쳐야 한다는 점이다. 오해는 모르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차암수정스님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별로 없다. 생몰연대도 미상이다. 고존숙어록에 이 시가 전해 질 뿐이다. 순리에 의해 세상을 무심히 받아드리면 거기서 초월된 절대의 세계가 나타나 모든 격을 뛰어넘는 격외의 소식을 체험,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름답고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시이다. 무쇠나무에 꽃이 피어 온 누리가 봄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극적으로 살려 놓았다.

 

 

21)인적없는 옛 절에 봄은 깊어졌는데

 

춘심고원적무사 春深古院寂無事 인적 없는 옛 절에 봄은 깊어졌는데

풍정한화낙만정 風定閑花落滿庭 바람 자자 꽃잎만 뜰에 가득 쌓였구나

감애모천운청담 堪愛暮天雲晴淡 해질 무렵 구름 색깔 너무 좋아서

난산시유자규제 亂山時有子規啼 산에는 여기 저기 두견새 우네

 

이 시는 산 속의 춘경을 읊어 자연과 동화된 서정을 통해 아름다운 시상을 전개해 놓았다. 도시의 고민이 전혀 없는 자연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시다. 선시는 대부분 인간 실존의 고민 따위가 기술되지 않는다. 번뇌의 갈등이 극복된 경지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면서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그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다.

보조스님의 제자 혜심(惠諶)스님이 이 시를 지었다. 지리산 연곡사에서 어느 해 늦은 봄에 지어 당두(當頭)스님에게 주었다고 제목에서 밝히고 있다. 무의자(無衣子) 시집에 수록된 시로 원제목이 ‘춘만유연곡사증당두로(春晩遊燕谷寺贈當頭老)’로 되어 있다. 늦은 봄 연곡사에 놀다가 당두스님에게 주다는 제목이다. 무의자는 혜심스님의 자호다. 입적하고 나서 고종이 시호를 내려 진각국사가 되었다. 유명한 선문염송 30권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가 바로 보조스님이 죽고 난 뒤 보조스님이 창설한 수선사의 2대 법주가 되어 당시의 불교계를 이끈 공로를 남긴 분이다.

 

 

22)하늬바람 불자 비는 벌써 그쳤네

 

서풍취동우초헐 西風吹動雨初歇 하늬바람 불자 비는 벌써 그쳤네

만리장곤무편운 萬里長空無片雲 넓은 하늘에 구름조각 하나 없구나.

허실호거관중묘 虛室戶居觀衆妙 빈방에 앉아 온갖 묘한 이치를 관하니

천향계자낙분분 天香桂子落紛紛 하늘의 계수나무 향기(달빛) 어지러이 떨어진다.

 

이 시를 감상하면 지루한 장마가 그치고 더위를 몰아내는 하늬바람이 불어왔나 보다고 느껴진다. 하늘에서부터 가을 기운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여름의 그 많던 뭉게 구름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빈방에 홀로 앉아 좌선에 여념이 없다가 밤이 되어 달 뜬 줄도 몰랐다.

 

선정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달 속의 계수나무 향기가 여기 저기 떨어진다. 계수나무 향기는 곧 달빛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서산스님의 제자 사명스님이 쓴 시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앉아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오는 절기를 느끼면서 지었는지 제목이 <靑鶴洞秋坐>라 되어 있다. 지금의 청학동이 아닌 속세와 멀리 떨어진 불로장생술을 닦는 도인들이 모이는 골짜기라는 전설적인 이상향을 상징하는 이름이 청학동이다.

하늘에 뜬 달빛이 땅에 비쳐오는 모습을 달 속에 있다는 계수나무 열매가 꽃잎처럼 떨어진다고 묘사하였다. 참으로 멋진 시구이다. 결국 달빛이 계수나무 열매의 향기라는 말이다. 때로는 먼 하늘을 바라보면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향기로 닦아옴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순수한 감정이다. 무심은 순수를 의미하는 것이지 아무 감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23)꿈에 난새를 타고 푸른 허공에 올랐다가

 

몽과비란상벽허 夢跨飛鸞上碧虛 꿈에 난새를 타고 푸른 허공에 올랐다가

시지신세일거려 始知身世一遽廬 비로소 몸도 세상도 한 움막임을 알았네

귀래착인한탄도 歸來錯認邯鄲道 한바탕 꿈길에서 깨어나 돌아오니

산조일성춘우여 山鳥一聲春雨餘 산새의 울음소리 봄비 끝에 들리네

 

중국 송나라 때 대혜종고(大慧宗 ) 선사가 있었다. 간화선의 거장으로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서찰로 참선공부를 지도하였다. 그가 쓴 『서장(書狀)』이라는 책에는 42명의 사대부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 등장하는데, 위 시의 작자 진국태부인이다. 30세에 미망인이 되어 40여년을 불교수행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들이 출세하여 차남은 승상(정승)이 되고 큰아들도 요즈음 법무부 고위 관직인 제형(提刑)이 되었다. 본래 성씨는 허(許)씨였는데 고귀한 신분이라, 나라에서 준 진국태부인이라는 호칭을 썼다. 대혜스님이 이 부인의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부인이 정말 위 시와 같은 경지에 올라 정말 공부가 된 사람인가 의심을 하였다. 도겸이라는 스님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의심이 풀려 대혜스님 자신이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참정, 유보학과 함께 대혜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42명 중의 3인이 된다.

 

꿈에 난새라는 새를 타고 허공에 올랐다는 말은 묘한 상징성이 있는 말이다. 높은데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은 작게 보이고 내가 커진 것 같으면서 집착하던 일에서 쉬이 초월되어 떠나짐을 느낀다. 그야말로 세상은 한 움막 같은 것이다 견고하지 못하고 잠시 임시로 머무는 거적대기 얽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서산스님도 만국도성이 개미집 같다 하였다. 멀리 보면 세상은 집착할 데가 없어진다. 프랑스의 르낭은 “별의세계에서 지상의 사물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꿈을 깨고 나면 몽경은 없는 것이고 또 없었던 것이다.

 

한단몽이라는 설화는 여생이라는 사람에 여옹이라는 도사를 만나 자기의 빈곤을 탄식하니, 여옹이 주머니에서 베개를 꺼내주며 이것을 베고 자면 부귀영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여생이 베개를 베고 자다 꿈에 30여년의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깨어보니 부엌에서 짓던 밥이 아직 익지도 않았더라는 설화로, 한바탕 꿈과 같은 허망한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마지막 구절의 “깨고 보니 봄비 끝에 산새의 울음소리 들린다”는 말이 너무나 생생한 여운을 남긴다.

 

24)새 한 마리 울지 않는 곳

 

일조불명처 一鳥不鳴處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곳

이인상대한 二人相對閑 두 사람이 한가롭게 마주 앉았네

진관여법복 塵冠與法服 속세의 유자와 산중의 스님

막작양반관 莫作兩般看 승속을 구분하여 둘로 보지 마시게

 

이조를 대표하는 고승 서산스님은 평안도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서산스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구국의 선봉장에 서기도 했던 스님이 묘향산 성불암에 기거하고 있을 때 기이한 손님을 한 사람 맞이했다.

조선 중기 풍류객으로 이름 높았던 백호(白湖) 임제(林梯)가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다. 차를 나누며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때의 상봉을 임제가 한 수의 시를 지어 남겨 놓았다. 그날 따라 산 속이 너무 적적하였는지 새 소리 마저 들리지 않았다고 묘사하였다.

유자의 차림을 한 백호와 승복을 입은 스님이 마주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신분이야 승속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마음은 대화 속에 어울러져 하나가 되었는지 둘로 보지 말라는 마지막 구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시를 지은 임제는 풍운아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당파싸움에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이 비위에 거슬려 벼슬에 환멸을 느끼고 유랑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때 성운(成運)을 사사하여 글공부를 하여 생원, 진사 알성시에 급제하여 홍양현감, 서도병마사, 북도병마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내기도 하였다. 학업에 매진할 때 중용을 8백번 읽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불우하게도 유랑으로 끝난 그의 생애가 39세의 일기로 마감을 하였다. 황진이 무덤가에서 지었다는 유명한 시조도 남겼다.

"방초우거진 곳에 자느냐 누웠느냐?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뇨?

잔 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슬퍼하노라.

 

인생무상을 노래한 이 시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는 명시로 남았지만, 이 시조가 그의 관운을 빼앗아버리기도 하였다.

그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가던 도중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이 시조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가 임지에 채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막중한 국사를 수임한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일개 기생의 무덤을 참배 제사를 지낸 것이 사대부의 체신을 크게 그르치게 했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임종에 임해서 자식들에게 자신이 죽어도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죽음을 슬퍼할 것이 없다고 한 말은 생사를 초탈한 도승(道僧)들의 경지를 닮아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25)바루 하나로 천가의 밥을 빌면서

 

일발천가반 一鉢千家飯 바루 하나로 천가의 밥을 빌면서

고신만리유 孤身萬里遊 외로운 몸 만리를 떠도네

청목도인소 靑目睹人少 눈 푸른 이 알아주는 사람 없으니

문로백운두 問路白雲頭 흰 구름에게 갈 길을 물어 볼까나.

 

운수송(雲水頌)으로 알려진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시다. 이 시 한 편이 그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일생을 떠돌이 삶을 살았다는 포대화상의 애환이 엿보이는 내용이다. 구름처럼 물처럼 정처 없이 떠돌며 유랑으로 일생을 보낸 그도, 어쩌면 자신을 알아주는 지기가 없어 무척이나 외로웠는지 모른다. 구름에게 길을 묻는다는 마지막 구가 세상을 초월한 자의 자유보다 그리움의 향수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포대화상은 생몰연대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는 기이한 언행으로 세상을 살아 숱한 일화를 남긴 전설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있다. 중국 오대(五代) 때 양(梁)나라 봉화(奉化)출신으로 몸이 뚱뚱하고 배가 늘어져 이상한 모습을 하고 지팡이에 자루를 걸어 메고 다니면서, 무엇이든지 보면 달라고 하여 그 속에 넣어 담아 사방을 떠돌아 다녔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날씨나 길흉화복에 대한 것을 말해 정확히 맞춰주기도 했다고 한다.

 

긴 자루를 메고 다닌다 해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포대화상이라 불렀으며, 또 장정자(長汀子)라 부르기도 했다. 미륵보살의 화현(化現)이라고 그를 존경하여 그의 모습을 그려 받드는 풍습도 생겨 후대에까지 전해졌다. 실제 그가 단정히 앉아서 입적할 때에(일설916년), "미륵진미륵(彌勒眞彌勒) / 분신백천억(分身百千億) / 시시시시인(時時示時人) / 시인자불식(時人自不識)"이란 게송을 읊고 입적하였다 고한다.

 

미륵, 참된 미륵이여!

백천억으로 몸을 나누어

때때로 그때 사람들에게 보여줬건만

그때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구나.

 

 

26)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거년빈미시빈 去年貧未是貧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금년빈시시빈 今年貧始是貧 금년의 가난이 진짜로 가난일세.

거년무탁추지지 去年無卓錐之地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추야무 今年錐也無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어져 버렸네.

 

가난 타령을 한 이시는 오도의 경지를 가난에 비유 읊은 시이다. 도를 닦는 공부는 비우고 비워 가는 공부라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학문은 날로 더해 가는 것이요, 도는 날로 덜어 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爲學日益 爲道日損). 학문이란 욕망을 더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허위와 번뇌가 일어나는 반면, 도란 지식을 덜고 욕망을 없애며 마음을 비움으로써, 하는 것이 없는 경지, 곧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라 하였다.

깨달음의 상태를 무의 상태 혹은 공의 상태로 표현해 온 것은 선가(禪家)의 일반적인 묘사였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 있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깨닫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에도, "꿈속에선 육취가 분명하더니 깨닫고 나니 공하고 공해져서 아무것도 없네(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라고 하였다.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말도 이러한 연유로 생긴 것이다.

 

작년에 깨닫고 비로소 주객이 모두 없어진 것을 체험하였다. 다시 말해 무를 체험하고 공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깨달았다는 희열감 내지 충만감이 꽉 차 있었는데, 금년에는 그것마저 사라져 버리더라는 말이다. 어떤가? 깨닫고 나서 깨달았다는 기쁨이 남아 있는 상태가 좋은 것인가? 그것마저 없어진 것이 좋은 것인가? 공부가 깊어지면 깨달았다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 시의 작자는 향엄지한(香嚴智閑?~898)스님이다. 전등록에 나오는 이 시는 그의 오도송 격이다. 향엄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처음 백장(百丈)문하로 출가했으나 후에 위산 영우(靈祐)스님에게 가서 공부를 하다가, 공부가 되지 않아 울면서 떠났다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산중에서 풀을 베다가 자갈을 집어 던졌는데 그 돌이 날아가 대밭의 대나무에 맞아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한다. 그때의 오도송이 별도로 전해진다. 돌이 대에 부딪치는 소리에 깨달은 순간을 "한번 부딪치는 소리 듣고 모든 것 다 잊었네(一擊忘所知)"라고 읊조렸던 것이다. 그는 위산의 법을 전해 받은 제자가 되었다.

 

 

27)소나무 밑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송하문동자 松下問童子 소나무 밑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언사채약거 言師採藥去 스승은 약초를 캐러 갔다고

지재차산중 只在此山中 다만 이 산속에 있을 테지만

운심부지처 雲深不知處 구름이 깊어서 알 수가 없구나.

 

 

산속에 은둔하고 사는 현자(賢者)가 있었다. 이 사람을 만나고자 찾아갔더니 동자가 말하기를 스승은 약초를 캐러 나갔다 한다. 산 속 어디쯤 있을 테지만 구름이 깊어 행방을 알 수 없다.

 

이 시는 신선도의 그림이 연상될 정도로 도가풍이 물씬 나는 시다. 당시(唐詩)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되어 있는 명시(名詩)이기도 하다. 작자 가도(賈島779~843)는 한 때 스님이었던 사람으로 법명을 무본(無本)이라 하였다. 환속한 후 유랑시인으로 생애를 마친 그는 이 한편의 시를 남김으로서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를 좋아한 그가 어느 날 시구의 글자를 맞추는데 골몰하며 길을 걷다가 한퇴지의 행차에 무례를 범해 낭패를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는 “시상에 사로잡혀 글자에 골몰하다 그랬다”고 변명하자 한퇴지가 쾌히 용서하고 글자를 정해주었다는 고사가 있다.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밀친다 (僧推月下門)”는 글귀를 짓는데, 두 번째 구의 밀칠 ‘퇴(推)’자를 두드릴 ‘고(鼓)’자와 비교하여, 어느 자가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한퇴지의 행차를 미처 몰랐던 것이다. 한퇴지가 ‘퇴’자를 정해주면서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 이로 인해 환속하여 미관말직을 얻었으나, 천성이 유랑을 좋아하여 자호를 낭선(浪仙)이라 했듯이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를 지을 때 글자 하나를 선택하는데 무척 고심을 하여 고음(苦吟)시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두 시구를 삼년 만에 얻어 한번 읊으매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二句三年得 一吟雙淚流)”고 하였다 . 당시의 은둔자들의 탈속적 생활이 일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그도 은둔자들을 찾아 심방하기 좋아했는지 이 시의 원제목도 “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尋隱者不遇)”로 되어 있다

 

 

28)흰구름 사고 청풍을 팔았더니.

 

백운매료매청풍 白雲買了賣淸風 흰 구름 사고 청풍을 팔았더니

산진가사철골궁 散盡家私徹骨窮 살림살이 바닥나 뼛속까지 가난하네

유득수간초모옥 留得數間草暮屋 남은 건 두어 간 띠 집뿐이니

임별부여병정동 臨別付與丙丁童 떠날 제 불 속에 던져버려야지

 

물외한인(物外閒人)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번잡스러움을 피하여 아무데도 걸림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도인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속의 욕락(慾樂)을 벗어나 마음 비우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 가풍이 그대로 세상 물정 밖에서 한가로이 여유자적 하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구름과 바람을 사고판다는 첫 구는 탐욕이 사라진 무소유의 정신을 읊은 구절이다. 바람과 구름은 누구의 소유가 아니다. 소유가 아니므로 기실 사고 팔 수도 없다. 그런데 왜 사고 판다고 했는가? 하늘에 흰 구름 떠 있으면 그것을 벗하고 맑은 바람 불어오면 상쾌한 기분 느낀다. 무심히 살다 보니 근심걱정 사라져 번뇌 없어 좋지만 가진 것 하나 없으니, 살림살이 바닥이 나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두어간 띠집 뿐이라는 것은 아직 명이 붙어 있는 육신을 두고 한 말이다. 이마저 떠날 적에 불에 태워 화장하고 말 것이다. 불을 병정동이라 한다.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진 마음이 차라리 눈물이 날 정도로 맑아 보인다.

 

이 시는 중국 송나라 때 석옥청공(石屋淸珙1272∼1352)선사의 시다. 고려의 태고 보우(太古普雨1301∼1382)선사가 석옥의 법을 받아와 고려불교를 중흥시켰다. 백운경한(白雲景閑1299~1375)도 석옥에게 법을 물어 지도를 받다가 공민왕 때 고려로 돌아왔다.

 

 

 

29)복사꽃 연분홍 간밤 비에 젖어 있고

 

桃紅復含宿雨 도홍부함숙우 복사꽃 연분홍 간밤 비에 젖어 있고

柳綠更帶春煙 유록갱대춘연 푸른 버들가지에 봄 안개 어리네.

花落家童未掃 화락가동미소 꽃잎은 시나브로 떨어지고 있는데

鶯啼山客猶眠 앵제산객유면 꾀꼬리 울음 속에 나그네는 졸고 있네.

 

춘경을 담고 있는 한 폭의 동양화다. 비온 뒷날 날이 개자 복사꽃 붉은 꽃잎 아직 물기를 머금고 버들가지 사이로 봄 안개가 어린다. 마당에는 떨어진 꽃잎이 쓸지 않은채로 남아 있고, 꾀꼬리 나무 가지에서 노래하는데 누군가 봄에 취해 졸고 있는 것일까?

 

이 시의 작자 왕유(王維 699~759)는 당나라 전성기의 대시인이요 화가였던 사람이다. 이백 두보와 더불어 당시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로 불교에 심취하여 많은 시를 썼기 때문에 시불(詩佛)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그의 많은 시에는 선미(禪味)가 베여있다. 또한 자연시의 제1인자로 꼽히었으며 그의 시를 좋아했던 대종(代宗)으로부터 "천하의 문종(文宗)"이라는 격찬을 받기도 했다.

 

그림에도 뛰어나 장안의 절 자은사에 그린 벽화 백묘화(白描畵)와 금벽청록(金碧靑綠)의 산수화가 절찬을 받기도 하였다. 벼슬이 상서우승(尙書右丞) 때 죽었으므로 왕우승이라고도 불리며 <왕우승문집> 10권이 있다. 당시의 고승들과 교유가 넓었으며 특히 하택신회(荷澤神會)선사를 의지해 참선을 하기도 했다. 불교 경전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초서에도 능했다.

 

 

30)한 그루 그림자없는 나무를

 

일주무영목 一株無影木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를

이취화중재 移就火中栽 불 속에 옮겨 심으니

불가삼춘우 不假三春雨 봄비가 오지 않아도

홍화난만개 紅花爛漫開 붉은 꽃 어지럽게 피어나리라

 

무엇이 그림자 없는 나무일까? 굳이 말하자면 식물의 나무가 아닌 마음의 나무다. 곧 일체 중생의 본래각성을 나무에 비유했다. 보리수는 깨달음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나무는 본래 피팔라(pippala)라는 나무인데, 석가모니가 그 나무 밑에서 정각을 이루고부터 깨달음을 이룬 나무라는 뜻으로 보리수로 부르게 되었다. 이 보리수가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져 있다. 음양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그림자가 없고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젖지도 않는다. 때문에 물이 없어도 이 나무는 자란다. 물론 계절에 따라 피는 꽃도 아니다. 봄비도 필요 없고 훈풍도 필요 없다. 불 속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중생들이 번뇌와 욕망의 불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번뇌와 욕망 속에서도 깨달음의 꽃은 핀다.

 

『소요당집』에서 하나 뽑은 이 시는 소요태능(逍遙太能1562∼649)스님의 작품이다. 그는 편양언기(鞭羊彦機)와 함께 서산문하를 대표하는 선승이며 탁월한 선지를 터득한 인물로 널리 추앙받았다.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였는데, 그의 문하를 소요파라고 부르고 있다. 한때 부휴선수(浮休善修) 밑에서 대장경을 배우다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나중에 서산문하에 들어가 법을 전해 받고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서 교화를 펴다 만년에 지리산 연곡사에서 머물다 입적했다.

 

 

31)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사대원무주 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본래공 五蘊本來空 오온도 본래 공한 것일 뿐

장두임백인 將頭臨白刃 칼날이 내 머리 내리치겠지만

흡사참춘풍 恰似斬春風 흡사 봄바람을 베는 것 같으리라.

 

이 시는 승조(僧肇)법사의 임종게(臨終偈)이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맞이한 임종게로서는 일품인 시이다. 승조는 동진(東晋)때 스님으로 당시의 유명한 역경가 구마라습의 수제자였다. 『조론』은 그가 저술한 대표작으로 반야부 경전에서 설한 공의 이치를 논한 책이다. 만유제법이 자성이 없어서 모두가 공한 것이나, 그것은 상대적 공이 아니라 절대적인 묘공(妙空)이라고 주장하여 공을 천명한 내용이다. 이렇게 공에 대하여 철저한 이론을 내세운 그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수보리처럼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그는 무척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당시 후진의 왕이었던 요흥(姚興)이 그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를 거절해 왕의 노여움을 사 사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흥은 승조의 스승 구마라습을 맞이하여 장안에 머물게 하면서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불교를 크게 외호하기도 했는데, 승조법사와는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승조가 31살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조의 사상은 공에 있다. 그는 철저히 공을 체득하여 남다른 경지를 체험한 인물이다. 위의 임종게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사대오온은 육체와 정신이다. 내 몸뚱이가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는 말이다. 마음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도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란 말이다. ‘칼날이 내 목을 내리쳐도 봄바람을 베는 것에 불과하리라’고 한 이 말에서 과연 승조는 공의 달인이라 할 것이다.

 

 

 

32)자비심으로 하는 방편의 일이여

 

자비방편사 慈悲方便事 자비심으로 하는 방편의 일이여

촉처유공부 觸處有工夫 부딪치는 곳마다 공부가 있구나

응변수성색 應變隨聲色 소리와 형상 따라 응용하고 변통하니

단단반주주 團團盤走珠 둥근 쟁반 위에 구슬이 구르네

 

사람 사는 일이 힘들고 고단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세상일이 수월해질 수도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하는 일은 괴롭지만,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는 일은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일상의 평범한 일과가 실상은 생활의 방편이다. 말하자면 살아가는 방식을 저마다 현실 속에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이 삶의 파동이요 존재의 활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모든 일에 자비를 띠고 이타 원력으로 한다면 하는 일 하나 하나가 본분공부다. 깨달음을 체득하여 도를 얻는 본분공부이다.

 

또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불공드리는 일이라고 했다. 때문에 공들이는 일 그 자체가 바로 공부다.

천동굉지(天童宏智1091~1157)선사는 중국 송나라 때 묵조선의 거장이었다. 묵조선이란 화두참구를 하지 않는 선법이다. 5가 7종의 중국 선의 종파 중 조동종 등은 임제종 선풍과 달리 선수행에 공안을 채택하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 천동굉지는 간화선(看話禪)의 거장 대혜종고(大慧宗杲)와 같은 시대 인물로, 간화선법을 주장하던 대혜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 역시 당대의 거봉이었다. 그가 먼저 입적하자 묵조타파를 부르짖으며 오직 간화만이 참된 선법이라 주장했던 대혜가 천동의 49재 때 영가법문을 하면서 "법의 바다가 말라버렸고 법의 깃대가 꺾이었다"고 애도를 하기도 했다. 달인분상에서는 밥 먹고 잠자는 것도 공부라고 한다. 자유자재하게 온갖 경계, 곧 소리와 형상을 대하면서 어디에도 걸림 없는 것이 ꡐ쟁반에 구르는 구슬과 같다ꡑ한 마지막 구가 시원하고 여유가 넘친다.

 

 

32)구름처럼 떠돌며

 

부운유수시생애 浮雲流水是生涯 구름처럼 떠돌며 물처럼 흘러가는 이 내 생애여

헐박수연괘석지 歇泊隨緣掛錫枝 인연 따라 쉬고 머물며 지팡이 걸어 두네

납자유래무정적 衲子由來無定跡 납자는 원래 정한 곳이 없으니

종교거주부심기 從敎去住負心期 가고 머무는 것 마음에 내맡겼네

 

 

사람마다 모두 자기가 사는 주소를 가지고 있다. 이는 사는 장소 곧 생활의 근거지가 정해져 있다는 말이지만 사실 인생에는 정처가 없다. 비록 어디 어느 곳에 산다는 내 주소가 있을지라도 그것 역시 임시로 머무는 한시적인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생사를 유전(流轉)하는 윤회의 경계에서 보면 누구나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에 생애를 건 납자의 신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구름처럼 떠돌며 물처럼 흘러가는 방랑자일 뿐이다. 아무도 내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 교단에서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한 곳에 3일 이상을 머물지 말라고 가르친 적도 있다. 현실의 어디에도 집착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시는 일본의 선승 일사문수(一絲文守 1608~1646)의 작품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선문에 몸을 담아 수행정진 끝에 견처(見處)를 얻고 우당동식(愚堂東寔)의 법을 이었다. 그러나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입적하여 쓸쓸히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운수행각(雲水行脚)하는 납자의 생애가 담담하게 묘사되고, 가고 오는 것에 구애되지 않는 초연한 심정을 읊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시는 기실 생사거래의 자유를 노래한 시다. 올 때는 오고 갈 때는 가는 것, 머무르고 싶으면 머물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는 것이다. 다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영원한 화두로 남을 뿐이다.

 

 

 

33)산하와 대지가 눈앞의 꽃이요

 

산하대지안전화 山河大地眼前花 산하와 대지가 눈앞의 꽃이요

만상삼라역부연 萬象森羅亦復然 만상 삼라도 또한 그럴 뿐이네

자성방지원청정 自性方知元淸淨 자성이 청정한 줄 바야흐로 알았으니

진진찰찰법왕신 塵塵刹刹法王身 진진찰찰이 법왕의 몸이구나.

 

산하대지가 눈앞의 꽃이라는 것은 눈이 피로할 때 나타나는 헛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한자로 공화(空花)라 쓰기도 하는데 곧 허공 꽃이라는 말로 허망한 인연에 의해 나타나는 실체가 없는 것이란 뜻이다. 삼라만상도 그럴 뿐이라는 말도 산하대지가 허공인 바에야 그 속에 있는 만상이니 이 역시 허공 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허공 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의 본 성품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꽃이 아닌 허공자체와 같은 것, 이것이 바로 모든 공간을 이루고 있는 부처님의 몸이다. 시방을 다 포함하고 모든 시간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때로는 깨달음 자체인 각체(覺體)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의 본체라 하여 심체(心體)라 하기도 한다. 그대의 마음이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을 다 포함하고 있다면 이것을 믿겠는가? 이것을 믿지 못하면 부처가 될 수 없는 영원한 범부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이 시는 여말(麗末)의 고승 나옹선사가 지었다. ꡒ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ꡓ하는 의문을 품고 있다가 20세 때 출가를 한 스님은 이미 화두를 들고 절에 들어와 스님이 된 셈이다. 양주 회암사에서 정진하다 도를 깨치고 원나라 북경에 가서 지공화상을 만나 법담을 나눴다. 그 뒤 평산처림(平山處林)을 만나 그에게서 법의와 불자를 받고 다시 지공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법의와 불자를 받았다. 39세에 귀국하여 여러 곳에서 법을 설했으며 나중에 공민왕의 청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법을 설하기도 했다. 그런 후 52세 때 왕사가 도고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57세 때 우왕의 명을 받고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시호는 선각(善覺)이었으며 목은 이색이 비문을 지었는데 그 비와 부도가 회암사에 있다.

 

34)기러기 높이 날고

 

안자고비수자류 雁自高飛水自流 기러기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흐르는데

백운홍수잡산두 白雲紅樹雜山頭 산머리에 흰 구름 단풍이 섞여있다.

계변낙엽미귀로 溪邊落葉迷歸路 개울가엔 낙엽 쌓여 갈 길이 안보이고

임리소종산객수 林裡疎鍾散客愁 숲속에 먼 종소리 나그네 시름을 흩는구나.

 

이 시는 가을 산을 노닐다가 읊은 시로 원제목이 추일유산(秋日遊山)으로 되어있다. 붉게 물든 단풍이 흰 구름과 뒤섞여 가을 산의 운치를 더하는데 아련한 그리움이 수심이 되어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따라가고 있다. 낙엽이 길을 덮어 돌아갈 길을 잃고 서성거릴 즈음 멀리 절간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온다. 수심에 잠겨 있던 나그네는 종소리를 듣고 선정에서 나오듯 수심에서 빠져 나온다.

인생살이가 결국 나그네 수심 같은 것이다. 고단한 일상을 따라가면서 시름시름 앓고 사는 것이 인생살이 아니겠는가? 무심히 살아가는 도인들의 세계에도 자연을 느끼는 감상은 부풀대로 부풀어 감정의 포화가 꽉 찰 때도 있다. 내면의 정서는 한껏 자기 외로움을 달래는 독백으로 가득 차기도 하는 것이다. 무심하다는 것이 무감각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가슴은 결코 화석이 될 수는 없다.

이 시의 작자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는 이조 중기의 스님으로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을 이어 받았다. 20살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사명유정(四溟惟政)과 함께 당시에 널리 명성을 떨쳤던 스님이다. 독서를 많이 하여 박학다식했고 글씨도 잘 썼다. 한때 지리산에 머물 때 어떤 미친 중의 무고로 제자 벽암각성(碧巖覺性)과 함께 옥에 갇히는 수난을 당했으나 나중에 무조가 밝혀져 오히려 왕궁에 불려가 도를 설해주고 임금으로부터 후한 선물을 받아 나왔다. 뛰어난 인품과 덕화에 그를 따르는 무리가 항상 7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광해군 7년 제자 각성에게 법을 부촉하고 세수 73, 법랍 54로 입적하였다.

 

 

35)가을 바다 거친 파도

 

추해광도야우한 秋海狂濤夜雨寒 가을 바다 거친 파도 밤비는 차가운데

장인별리생숙뇌 長因別離生熟惱 이별로 또다시 가슴 아파 괴롭구나.

축융봉전야학환 祝融峯前野鶴還 축융봉의 학은 산으로 돌아왔을 텐데

송운독재주중노 松雲獨在舟中老 송운은 홀로 배에 남아 늙어야 하나.

 

참으로 애절한 슬픔이 짙게 배여 있는 시이다. 지은 이의 가슴에 깊은 한이 서려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사신으로 일본에 들어갈 때 지은 시다. 당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직후 지은 것으로 부산까지 따라와 배웅을 해준 태연(太然)장로와 헤어지고 그 이별의 회포를 읊은 시다. 선조 37년(1604) 음력 8월에 사명대사가 왕명에 의해 사신으로 임명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해 봄에 오대산에 있던 사명대사가 스승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열반에 들었다는 부음을 듣고 거기로 가던 도중 선조의 급한 부름을 받고 발길을 돌려 조정에 들어가 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일본에 갈 것을 부탁 받는다. 스승의 영결식도 치루지 못한 채 국사를 위임받아 남의 나라에 가게 되는 처지가 결코 영화로운 것이 아닌 불우한 신세였던 것이다. 더구나 임진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기 까지 10여년의 전란으로 나라는 어지럽고 민심도 불안하기만 하던 때였다.

 

축융봉은 중국의 태전(太顚)선사가 머물던 산봉우리 이름이다. 자신을 산에 사는 학에 비유하여 학이 산에 있어야 하는데 왜 바다에 배를 타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일종의 자조적인 서술이 읽는 이의 마음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송운은 사명당과 같이 쓰인 스님의 또 하나의 호이다. 이 시를 쓰고 일본에 건너갔던 사명스님은 8개월을 머물면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고 전란 때 잡혀갔던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이듬해 4월에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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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에 옷 두 번 기워입고/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일년의중보 一年衣重補 한 해에 옷 두 번 기워 입고

일일발양세 一日鉢兩洗 하루에 바리 두 번을 씻고 사네.

불효산중취 不曉山中趣 산에 사는 흥취를 모른다면

산중역진세 山中亦塵世 산중도 속세와 다를 바 없네.

 

산중에 사는 검소하고 단순한 생활의 흥취를 읊은 소박한 시이다. 입산수도의 일생은 아무래도 속진의 생활과는 다르다. 물자가 궁색해도 오히려 그것이 안빈낙도의 자기 분수를 충족시켜 주는 만족이 된다. 하루에 두 끼 공양 챙기고 일 년에 두어 번 옷이 떨어졌을 때 바느질 해 꿰매면 된다. 산에 사는 흥취는 산에 사는 사람만이 알뿐이지 도시의 숨 가쁜 생활과는 아마 세월 그 자체가 다를지 모른다. 언젠가 이런 말을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산을 오르내려도 산을 알려면 산속에서 잠을 자다가 한 밤중에 일어나 산의 숨소리를 들어보아야 산을 알게 된다"는 말을 했더니 몇 사람이 수긍이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산에 있어도 마음이 산심에 젖지 않으면 속세와 마찬가지라는 마지막 구절에는 어떤 경책의 침이 숨어 있는 말이다.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시문집에 수록된 '산거(山居)'라는 시이다. 평생을 학문과 수행에만 정진한 학승으로 소박한 일생을 살아 후대의 귀감이 된 스님이다. 특히 스님의 업적은 쇠미해진 이조 말엽의 불교 교학을 크게 일으킨 점이다. 많은 경전을 연구, 사기(私記) 등을 저술하였고 또 후학을 제접하는 많은 강의를 하여 교맥을 계승하게 했다. 스님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서 편찬한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이라는 문집이 전해지는데 그의 문인 영월계신(靈月誡身)에 의해 편찬되었다.

 

◐ 바람불자 산나무/부휴선수(浮休善修1545~1615)선사

 

풍동과빈락 風動果頻落 바람 불자 산 나무 열매 자꾸 떨어지고

산고월이침 山高月易沈 산이 높으니 달이 벌써 지려하네.

시중인불견 時中人不見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창외백운심 窓外白雲深 창 밖에 흰 구름만 자욱하구나.

 

이조 중기 부휴선수(浮休善修1545~1615)선사가 남긴 이 시는 산중의 정취가 조용히 풍겨 나온다. 사람이 자기 시간을 갖고 살기가 어렵다. 매일 누구를 만나서 사교를 하고 어떤 일에 매달려 그 치다꺼리에 부심하다 보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겨를이 없어져 버린다. 또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결국 끝없이 객관 경계를 쫓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영혼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추어보지 못한다. 어쩌면 이 시대는 사람이 자기 반조(返照)를 하지 않는 시대인지 모른다.

 

어찌 보면 세상은 반성하기를 싫어하면서 일방적 고집으로 사는 것 같다. 욕망의 공간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정신적 여백을 사양하는 것 같다. 도인들의 삶의 자취를 한 번 보라. 그들은 자기 고독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고독해 몸부림치지 않는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롭기 때문에 그 시간을 사랑하며 잘 견딘다. 혼자만의 세계에는 언제나 자화상을 바로 보는 거울이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자기 자화상을 바로 보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아무도 없는 홀로의 시간에 자연을 벗하여 세상을 관조하면 초연한 자기의 본래 모습이 만상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다.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을 이은 부휴는 임진란 당시 덕유산에 은거하면서 무주 구천동에서 한때 간경(看經)에 여념없이 지낸 적도 있다. 송광사에도 머물다가 나중에 칠불암에 가서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 눈이 보는 것이 없으니/부설(浮雪)거사

 

목무소견무분별 目無所見無分別 눈이 보는 것이 없으니 분별이 없고

이청무성절시비 耳聽無聲絶是非 귀는 들어도 소리가 없으니 시비가 끊어졌네

분별시비도방하 分別是非都放下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고

단간심불자귀의 但看心佛自歸依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귀의할 뿐이네

 

중생은 듣고 보는 성색(聲色)에서 분별과 시비로 세상을 산다. 객관의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망상적 분별을 일으키면서 정작 자기 존재의 정체는 잃어버린다. "내가 나를 모른다"고 하는 선가의 말처럼 자아에 대한 탐구는 하지 않고 바깥의 경계를 따라가면서 시비분별에 종사한다는 말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바깥의 경계를 따라가는 것을 멈추라고 한다. 다시 말해 분별과 시비의 굴속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먼 하늘을 바라보듯이 무심히 이런 저런 탓을 하지 말고 망념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 그대로 있으라는 것이다.

 

부설(浮雪)거사가 남긴 시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불국사의 승려로 있었던 부설스님이 도반 영조(靈照), 영희(靈熙) 등과 행각을 하다가 두릉동에서 구무원(仇無寃)의 딸 묘화(妙花)라는 여인을 만난 것이 숙세의 업연이 되어 그만 환속을 한다. 묘화가 부설스님에 반하여 그만 상사병에 걸려 다 죽게 되자 이를 낳게 하려고 세속의 정을 받아드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조·영희 등의 비난을 무릅쓰고 세속에 남아 공부를 하였으나, 두 도반보다 도를 먼저 이루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이다. 원래 스님의 법호였던 부설이란 이름이 환속한 후에 그대로 불리어 부설거사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 춘삼월 햇빛 모아둘 곳 없어서/ 대혜종고(大慧宗杲1088~1163) 선사

 

三月韶光沒處收 삼월소광몰처수 춘삼월 햇빛 모아둘 곳 없어서

一時散在柳梢頭 일시산재유초두 버들가지 위에 눈부시게 흩어져 있네.

可憐不見春風面 가련불견춘풍면 아깝게도 봄바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却看殘紅逐水流 각간잔홍축수류 물 따라 흘러가는 붉은 꽃잎만 보이는구나.

 

이 한편의 시를 읽으면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봄을 가슴에 가득 담는 느낌이 든다.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속에 또 찾아온 봄날의 하루가 시심에 젖어 있다. 선사들의 시는 대개 시심(詩心)이 선심(禪心)이다. 비워져 있는 무심한 마음에서 객관을 정관(靜觀)하고 있다.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면 모두가 무한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봄볕이 저장할 곳이 없어 버들가지 위에 눈부시다든가, 봄바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물 위에 흘러가는 꽃잎만 보인다는 말이 선적(禪的인 서정을 흠뻑 머금고 있다.

이 시는 간화선의 거장 대혜종고(大慧宗杲1088~1163) 선사의 『선종잡도해(禪宗雜毒海)』속에 들어 있는 시로 제자들에게 보였다는 뜻인 「시도(示徒)」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 시다. 봄을 느끼는 선심이 시심이 되어 봄날의 춘경을 이 정도는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 하늘을 이불하고/ 진묵(1562~1633)대사

 

천금지석산위침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을 이불하고 땅을 자리하며 산을 베개로 삼고

월촉운병해작준 月燭雲屛海作樽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하고 바닷물을 술로 잔에 부어

대취거연잉기무 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해 거리낌 없이 일어나 춤을 추니

각혐장수괘곤륜 却嫌長袖掛崑崙 외려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리는 게 싫구나.

 

참으로 호탕한 기백이 넘치는 시이다. 우주를 마음대로 휘젓는 대장부의 기개가 살아있다고나 할까? 천지의 공간이 오히려 작게 느껴져 소매 자락이 멧부리에 걸리는 것이 싫다니 도대체 얼마나 큰 무대가 있어야 하는가? 도통을 하여 통이 큰 사람에게는 사바의 무대가 사실 좁게 느껴질지 모른다. 무한한 도에 합한 마음이 유한한 세계를 상대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을 테니까.

 

진묵(1562~1633)대사는 이조 중기의 도승으로 알려진 스님이다. 김제 만경 불거촌 출신으로 7살에 전주 봉서사에서 출가하였다. 머리가 영특하여 책을 한번 읽으면 모두를 기억했다고 한다. 변산의 월명암, 전주의 원등사, 대원사 등지에 머물렀으며 많은 신이한 이적을 보인 스님으로 알려졌다. 주장자로 나한의 머리를 때려 신도의 꿈에 머리에 혹이 난 나한의 모습이 보였다거나, 경전을 보다가 삼매에 들어 날이 지나는 줄을 몰랐다는 등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진묵대사 유적고』라는 책에 대사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전해진다.

 

 

◐ 푸른 숲 짙은 그늘/영우(771~853)선사

 

녹수음롱하일장 綠水陰濃夏日長 푸른 숲 짙은 그늘 여름날은 길고 긴데

누대도영입지당 樓臺倒影入池塘 누대의 그림자는 연못 속에 거꾸로 잠겼구나.

수정렴동미풍기 水晶簾動微風起 미풍이 일어나 수정발이 흔들리고

만가장미일원향 滿架薔薇一院香 줄기 뻗어 가득 핀 장미로 온 절이 향기롭네.

 

중국 선종사에 위앙종을 연 위산 영우(771~853)선사가 있었다. 백장회해(720~8140)의 법을 이어 선풍을 크게 드날렸던 스님이다. 이 스님이 '수고우(水牯牛)'란 화두를 남겼다. 하루는 위산 스님이 "내가 삼년 후에 죽어 산 밑의 신도 집에 태어나면 왼쪽 옆구리에 위산의 스님 아무개라고 쓰였을 것이다. 그때 만약 위산의 스님이라 하려면 곧 수고우이고 만약 수고우라 부르려면 곧 위산의 스님 아무개일 것이니, 자!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수고우란 물소라는 말이다.

이 화두에 대해 고봉원묘(高峯原妙 : 1238~1295)선사가 위의 시를 지었다. 절 안의 여름 정경을 묘사한 뛰어난 시라 할 수 있는 이 시에 오묘한 선지(禪旨)가 드러나 있다고 평가 받는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의 평화로운 절 안, 거기에 수정발을 흔드는 미풍이 있고 만개한 장미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수정 고봉 선사는 『선요(禪要)』라는 저서를 남겨 선수행의 지침을 제시해 주기도 하고 그 밖에 어록을 남겨 선의 요지를 설해 주었다.

 

 

◐ 비개인 남산에/ 일선정관(一禪靜觀1533~1608)

 

우수남악권청람 雨收南岳捲靑嵐 비개인 남산에 아지랑이도 걷히고

산색의연대고암 山色依然對古庵 산 빛 의연히 옛 암자를 마주하네.

독좌겅관심사정 獨坐靜觀心思淨 고요히 홀로 앉아 바라보니 마음마저 맑아져

반생견괘칠근삼 半生肩掛七斤杉 이렇게 반평생 어깨에 장삼 걸치고 살았네.

 

「산당우후(山堂雨後)」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시도 서산대사의 제자인 일선정관(一禪靜觀1533~1608)이 지었다. 비온 뒤 절간에서 산색을 바라보다 심사가 일어나 반평생의 생애를 돌아보며 조용히 심경을 읊어 놓았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사는가 하는 것은 어느 개인의 인생살이의 객관적인 정황으로 화폭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 평생을 산속에 살면서 수도에 종사한 사연 속에도 숱한 애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깨에 장삼 걸치고 살았다고 자기 생의 독백을 내 놓는다.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으면서 승려로서 남다른 고민을 했다는 정관은 전쟁을 하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중생의 업보를 몹시 개탄했다고 알려졌다. 업보란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엄청난 악업을 지으면서 도를 어기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생을 헛되게 살고 마는 것이다.

 

 

 

 

 

◐ 연꽃잎 달빛 향해 / 심문담비(心聞曇賁)의 송(頌)

 

부용월향회중조 芙蓉月向懷中照 연꽃잎 달빛 향해 가슴을 열고

양류풍래면상취 楊柳風來面上吹 버들잎 바람 불어 얼굴이 간지럽네.

야반정전자지무 夜半庭前柘枝舞 밤새도록 뜰 앞에서 춤을 추다가

천명라수습연지 天明羅袖濕臙脂 날이 밝아 비단소매 분 냄새가 축축하네.

 

못에 핀 연꽃에 달빛이 쏟아진다. 가슴에 빛을 품은 아름다운 연꽃잎이 청정무구의 극치를 드러낸다. 버들가지 흔들며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또 얼굴이 간지럽다. 번뇌는 이미 떠났다. 공연히 인생을 시비로 몰지 말라. 안으로 흐르는 은은한 환희는 내 흥에 도취되어 춤을 추고 말 일이다. 자지무(柘枝舞)란 원래 혼자 추는 춤이다. 밤새도록 춤을 추었더니 날이 밝자 옷자락에 연지가 배여 축축한 냄새가 난다.

 

이 시는 『선문염송』에 나오는 심문담비(心聞曇賁)의 송(頌)으로 매우 심오한 선의 지취(旨趣)를 담고 있다.

어느 날 위산(僞山)이 앉아 있는데 제자 앙산(仰山)이 들어왔다. 위산이 두 주먹을 마주 쥐어 보였다. 앙산이 얼른 알아보면서 여자들이 하는 무릎만 약간 굽히는 절을 했다. 이를 본 위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ꡒ옳지, 옳지ꡓ 했다는 것이다.

 

이를 화제로 심문이 이와 같은 시를 지었다.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은 심문은 송대의 선승(禪僧)이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선은 식심분별이 갈아 앉은 경계에서 일어나는 직관의 순발력으로 때로는 상식을 뛰어넘는 예지를 발휘한다. 이것이 선수행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일차 방정식의 공식이 이차 방정식에 적용될 수 없듯이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번뇌를 여읜 사람의 의중을 알 수 가 없다.

 

 

◐ 구름없는 가을 하늘/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 선사

 

운진추공일경원 雲盡秋空一鏡圓 구름 없는 가을 하늘 둥근 거울이여

한아척거우성흔 寒鴉隻去偶成痕 외기러기 날아가며 흔적을 남기구나.

남양노자통소식 南陽老子通消息 남양의 저 노인네 이 소식을 알았으니

천리동풍불부언 千里東風不負言 꽃바람 천리 사이 말없이 통해지네.

 

선사들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이다. 중국의 유명한 선의 거장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 선사가 있었다. 어느 날 동그라미 일원상(一圓相)을 그려 경산도흠(徑山道欽713~792) 선사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본 도흠은 일원상 가운데 점을 하나 찍어 다시 마조에게 되돌려 보냈다. 이 일이 소문나 남양혜충(南陽慧忠?~775) 국사가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음, 도흠이 마조의 속임수에 그만 넘어갔구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 날아가는 것을 보다가 문득 마조, 도흠, 혜충, 당대의 고승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화를 생각하고 자신의 심회를 읊은 시이다. 둥근 거울 같은 하늘이 일원상이고 외기러기가 도흠이 찍은 점이라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기러기가 날아가는가. 남양이 점찍은 일을 속았다고 했는데 기러기가 하늘에 속아서 날아간다는 말인가? 한 생각 일으키면 허물인데 한 생각 이전의 소식이 청매 자신과 남양 사이에 천리의 간격을 두고도 통해졌다는 뜻이다.

 

◐ 홀로 산림의 초당에서 /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독애임로만권서 獨愛林盧萬卷書 홀로 산림의 초당에서 책이나 즐기며

일반심사십년여 一般心事十年餘 한 가지 마음으로 십년세월 넘겼다.

이래사흥원두회 邇來似興源頭會 요새 와서 근원에 마주친 것 같아

도파오심간태허 道把吾心看太虛 도틀어 내 마음 휘잡아 툭 트인 태허를 본다.

 

도를 틀어잡고 툭 트인 태허를 모았다는 이 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19살 때 지었다고 알려진 시이다. 물론 성리학을 탐구하여 이기(理氣)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시이지만 불교의 선과 상통하는 일종의 선시라고 할 수 있는 시이다. 퇴계의 생애가 고고한 학문의 일로 정진의 길이었음을 보여주며 임종시에 선승처럼 앉아서 숨을 거두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 한촉 차가운 등불에/ 혜즙(惠楫1791~1858)

 

일수한등독불경 一穗寒燈讀佛經 한 촉 차가운 등불에 불경을 읽다가

부지야설만공정 不知夜雪滿空庭 밤눈이 빈 뜰에 가득 내린 줄도 몰랐네

심산중목도무뢰 深山衆木都無籟 깊은 산 나무들은 아무런 기척 없고

시유첨빙타석상 時有檐氷墮石牀 처마 끝 고드름만 섬돌에 떨어지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계절의 서정을 깊이 느낀다. 물론 감상이 남달리 풍부한 탓도 있겠지만 내면 관조를 통한 사물의 관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깊은 밤 절간 방에서 불경을 읽고 있던 어떤 스님이 있었다. 간경삼매에 빠져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밤중이 훨씬 넘은 시간이 되었는데 밖의 기척이 여느 때와 사뭇 다른 것 같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던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끔 처마 밑에서 울던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왜 이리 조용할까? 잠시 밖에 귀를 기울였더니 섬돌 위에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 살며시 문을 열어보았다. 처마 밑에 달려 있던 고드름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떨어져 부셔지는 소리였다. 산중의 한겨울 눈 오는 밤의 풍경이 정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시이다.이 시의 작자 혜즙(惠楫1791~1858)은 이조 말엽의 스님으로 교학에도 밝았고 선지도 출중했다. 호를 철선(鐵船)이라 했으며, 14살에 대흥사에 출가하여 제방을 다니면서 경전을 수학하고 20년을 강의를 하며 수많은 학인들을 가르치다가 다시 20년 동안 좌선을 익혔다. 학식이 뛰어났고 글씨도 잘 써 다방면의 재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생애를 살아 이름을 내는 것을 싫어하였다. 철종 9년에 입적하였는데 문집 1권이 남아 전한다.

 

 

◐ 사흘은 강을 가고/괄허(括虛1720~1789)선사

 

三日江行七日山 삼일강행칠일산 사흘은 강을 가고 이레는 산을 간다.

一旬蹤迹是江山 일순종적시상산 열흘의 발자취가 강과 산뿐이구나

江山盡是胸中物 강산진시흉중물 강과 산이 모두다 가슴 속에 들었으니

咏出淸江咏出山 영출청강영출산 맑은 강을 노래하고 청산을 노래한다.

 

 

평생을 산을 따라 물을 따라 떠돌던 운수객(雲水客)이 있었다. 구름처럼 떠돌다 보니 발길 닫는 곳이 강이 아니면 산이다. 오늘은 이 강을 지나고 내일은 다시 저 산을 돈다. 천하강산을 돌며 보낸 생애가 이제 자신이 강산과 하나가 되어 강과 산이 모두 자기의 가슴 속이다. 보이는 사물이 모두가 자기 가슴 속에 들어와 앉아버리는 것이다. 내가 천지를 의지해 사는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이 오히려 나를 집으로 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숱한 세월을 행각한 끝에 얻은 대자유의 해탈낙이 곳곳에서 노래로 흘러나온다. 남이 보기에는 비록 쓸쓸하고 외로운 나그네지만 이 외로움은 우주가 하나로 된 큰 외로움이다. 모두가 어울려 하나가 되니 상대적 홀로감이 없어져버린 채 고독 그 자체가 되기도 하고 환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 시의 작자 괄허(括虛1720~1789)선사는 이조 중기의 스님이다. 경북 문경 출신으로 사불산 대승사에 입산출가 하여 나중에 당대의 선지식이 되었다. 환암(幻庵), 환응(喚應) 두 스님의 지도로 선지를 터득하고 환응의 법을 이어 받았다. 정조 13년에 세수 70으로 홀연히 좌탈입적(坐脫入寂) 하였다. “70년 지난 일이 꿈속의 사람이었네. 마음은 물속의 달과 같은데 몸은 어째서 오고 가고 하는가?”(七十年間事 依俙夢裏人 淡然同水月 何有去來身)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괄허집이란 문집이 남아 있다.

 

 

◐ 가지에 얼어붙은 눈 편편이 떨어지고/설암추붕(雪岩秋鵬1651~1706)

 

한지착설낙편편 寒枝着雪落翩翩 가지에 얼어붙은 눈 편편이 떨어지고

송운풍청후만천 松韻風淸吼晩天 저무는 하늘에 솔바람 파도소리

석상정공회수망 石上停筇回首望 돌 위에 지팡이 짚고 고개 돌리니

옥봉고엄조설변 玉峰高掩鳥雪邊 눈 덮인 봉우리 높이 새가 구름 곁을 난다.

 

유난히도 눈이 많은 해가 있을 때가 있다. 지난 해 서해안 지방에 내린 눈이 그런 경우다. 보름 동안 폭설이 내려 막대한 피해가 났다고 하였다. 눈이 올 때 사람들은 설경을 좋아하며 즐기려 하지만 너무 많이 내리면 그만 재해가 되어버리니 무심한 자연이지만 인간은 무심을 모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이 시는 설암추붕(雪岩秋鵬1651~1706)이 지은 것이다. 이조 중기 스님으로 삼장을 통달했고 언변이 좋아 설법에 능했던 스님이었다. 계행이 청정하였고, 월저도안(月渚道安)의 법을 이었다.

 

온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인 어느 날 외출에서 절로 돌아오다 설경을 바라보고 지은 시이다. 원 제목이 설후귀산(雪後歸山)으로 되어 있다. 옥봉이란 눈 덮인 산봉우리를 가리킨 말이다. 백옥처럼 하얀 산봉우리 너머 새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눈 온 뒤 석양이 질 무렵 아스라한 하늘가에 구름이 깔렸고 그 곁으로 새가 날아가는데 저무는 설국의 정적을 새가 깨뜨리는 파적의 묘미가 있는 시 같다.

 

 

 

◐ 반달이 밝게 떠서/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

 

반륜명월조서상 半輪明月照西床 반달이 밝게 떠서 서쪽 상을 비추는데

소관전다열주향 小鑵煎茶熱炷香 작은 다관에 차를 달이며 향을 피워 놓고

공시조심동일치 共是操心同一致 함께 마음 다잡아 운치를 같이 하니

막장현백착상량 莫將玄白錯商量 검고 흰 것을 가지고 잘못 헤아리지 말라

 

이조 초기의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한때 스님이 되어 절간에 살기도 하였다. 그의 법명은 설잠(雪岑)으로 기록되어 전하며 의상 스님의 『법상게』에 관한 주석서인 『법계도주』 등 약간의 저술도 남아 있다. 단종을 옹위하려다 세상에 대한 울분을 품고 광인처럼 행세하던 그가 불교에 귀의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달랬는지 이 시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경지에 들어 있는 달관자의 한가로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반달이 떠서 서쪽 창으로 방안을 비추는데 다관에 차를 달이며 향로에 향을 하나 꽂았다. 이른바 다반향초(茶半香初)의 운치다. 이 속에서는 세상의 시비를 따질 것 없다. 흑백논리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망상 속을 벗어나면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아무 일 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적정을 즐기는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에 들면 세상은 모두 하나가 된다.

 

 

◐ 개울물 소리없이/ 왕안석(王安石1021~1086)

 

간수무성요죽류 澗水無聲遶竹流 개울물 소리 없이 대밭을 감아 흐르고

죽서화초농춘유 竹西花草弄春柔 대밭 가 꽃과 풀은 봄기운에 취했구나.

모첨상대좌종일 茅簷相對坐終日 풀집 처마를 보며 진종일 앉자 있으니

일조불명산갱유 一鳥不鳴山更幽 새 한 마리 울지 않아 산이 더욱 깊네.

 

 

왕안석(王安石1021~1086)은 송나라 때 개혁정치를 주장한 인물로 흔히 조선시대 조광조(1482~1519)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부국강병과 인재양성을 목표로 내세웠던 신법(新法)을 실현코자 많은 파란을 겪었던 그는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종산(鐘山)에서 여생을 보냈다. 학자요 문인이기도 했던 그는 구양수(歐陽修)를 스승으로 하여 명석하고 박력 있는 문체를 만들어 냈다. 문장의 대가가 되어 당· 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치기도 한다. 자연을 읊은 시가 특히 우수하며, 유교와 불교의 경학에도 밝았다. 불교에 심취해 많은 경전을 열람하고 당대의 고승들과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 시는 종산에 묻혀 살 때 지은 자연시로 고요한 자연 속에 선(禪)의 경지가 은근히 피어나는 선시의 대표작이랄 만한 시다.

 

 

◐ 강호에 봄이 다해/부휴당(浮休堂) 선수(善修1543~1615)

 

강호춘진낙화풍 江湖春盡洛花風 강호에 봄이 다해 꽃잎은 바람에 날리는데

일모한운과벽공 日暮閑雲過碧空 해 저문 하늘에 구름은 어딜 가나

빙거요득인간환 憑渠料得人間幻 너로 인해 인간사 허깨빈 줄 알았으니

만사도망일소중 萬事都忘一笑中 한 번 웃고 만사를 모두 잊어버리자

 

늦은 봄 떨어진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어느 날 석양 무렵 운수납자 한 사람이 길을 가다 서산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자기의 한 생애도 속절없는 구름과 같은 신세임을 새삼 느꼈다. 아니 세상만사가 모두 뜬구름이다. 일장춘몽이라 해온 말 그대로 한바탕 꿈과 같은 세상사는 그대로 하늘에 떠가는 뜬구름이다. 『화엄경』에는 “삶이란 한 조각 구름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 사라지는 것(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이라 하였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무상을 느끼는 어떤 계기가 빨리 올수록 발심이 잘 된다고 한다. 출세간의 도를 닦는 일에 있어서 세간의 무상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도심배양에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 시는 부휴당(浮休堂) 선수(善修1543~1615)의 문집에 나오는 시이다. 스님은 17세에 출가 제방을 다니며 정진하다 부용(芙蓉)의 법을 이었다. 임진왜란 때 승장(僧將)이 되기도 했던 그는 한때 유가의 글을 오래 공부해 시문에 능했다. 그의 문집 부휴당대사집이 남아 있는데 5권 가운데 4권이 시로 되어 있다.

 

 

◐ 허공을 쳐부수니/나옹스님(1320~1378)

 

격쇄허공무내외 擊碎虛空無內外 허공을 쳐부수니 안팎이 없고

일진불입로당당 一塵不立露堂堂 티끌 하나 없는 자리 당당히 드러났네.

번신직투위음후 飜身直透威音後 몸을 뒤쳐 위음의 뒤를 뚫으니

만월한광조파상 滿月寒光照破床 보름달 찬 빛이 낡은 상을 비추네.

 

고려 때 나옹스님(1320~1378)이 지은 이 시는 오도송(悟道頌)이라 할 수 있는 매우 격조 높은 시이다. 허공을 쳐부수니 안팎이 없다는 1구에서부터 대단한 한 소식을 한 느낌이다. 허공이 부셔지는 대상은 아니지만 이는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경계를 모두 부수었다는 말이다. 시공을 초월해 있는 마음의 성품자리를 파악해, 주객이 끊어진 절대의 본성이 당당히 드러나 현상의 모든 세계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위음이란 말은 최초의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위음의 뒤란 천지만물이 시작된 이후라는 뜻이다. 초시간적 자리에서 시간적 상황 속으로 들어온 이후를 말한다. 보름달은 자기 심월이요 낡은 상이란 오름 육신을 상징하고 있다.

나옹스님은 고려 말기의 스님으로 일찍이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20살 때 출가해서, 요연(了然)에게 의탁해 득도(得度)하였다. 그 뒤 5년 후 양주 회암사에서 밤낮없이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에는 중국 원나라로 들어가 연도(燕都)의 법원사(法源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출신인 지공(指空)스님을 만나 법을 들은 뒤 다시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평산처림(平山處林)의 법을 전해 받고 불자(拂子)를 받는다. 1358년에 다시 지공을 만난 뒤 고려로 귀국한다. 1361년에는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내전에서 왕을 위하여 설법하고 왕과 왕비로부터 가사와 불자를 하사 받고 왕사가 된다. 여주 신륵사에서 우왕 2년(1376)에 세수 57세 법랍 37세로 입적하였다.

 

 

 

◐ 있네없네 깔아뭉개/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

 

유무좌단로진상 有無坐斷露眞常 있네 없네 깔아뭉개 진상을 드러내니

일점고명약태양 一點孤明若太陽 한 점 밝은 그것 태양 같구나.

직하승당유끽방 直下承當猶喫棒 바로 곧 알아채도 방망이 맞을 건데

나감냉좌암사량 那堪冷坐暗思量 어찌 쓸쓸히 앉아 이리저리 생각하랴.

 

선의 세계에 들어가면 우선 논리를 세우는 것부터가 금물이다. 관념화된 의식이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 자체가 철저히 비워져야 한다. 있네, 없네 하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으면 변견(邊見)에 떨어져 중도실상을 통달하지 못한다. 제 일구의 뜻을 바로 이 점을 밝혀 놓았다. 유와 무를 다 끊어 없애고 나니 참되고 한결같은 그 자리가 드러나더란 말이다. 밝기가 한 점 태양과 같아 어둠을 몽땅 삼켜버렸다. 이 자리에서는 알았다는 지견이 생기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물며 생각을 굴리는 것이야말로 절대 금물이다.

 

이 시는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이 지은 시이다. 고려 말 보조국사의 수제자가 되어 보조의 법을 이은 혜심은 진사에 급제했으나 보조스님을 찾아가 출가를 한다. 자호를 무의자(無衣子)라 했으며 『선문염송』30권을 지었는데 중국의 『전등록』에 버금가는 명저로 알려져 있다.

 

 

◐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시불(詩佛) 왕유(王維 701~761)

 

공산불견인 空山不見人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단문인어성 但聞人語響 말소리만 어슴푸레 들리어 오고

반경입심림 返景入深林 지는 햇살 한 가닥 숲속으로 들어와

부조청태상 復照靑苔上 푸른 이끼 위를 비추고 있네.

 

시불(詩佛)로 알려진 왕유(王維 701~761)의 시다. 이 시를 읽으면 저절로 귀가 이울어지는 느낌이 일어난다. 인적이 끊어진 깊은 산중에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도란거리는 말소리에 비로소 닫아 두었던 육근(六根)이 열리면서 주위가 의식되어진다. 숲속 깊이 한 가닥 햇살이 들어와 푸른 이끼 위에 떨어지는 정경이 해가 서산에 가까워진 시간을 읽게도 해 준다.

원제목이 ‘녹채(鹿柴)’로 되어 있는데 녹채란 사슴을 먹여 기르는 나무울짱을 말한다. 왕유가 한 때 망천(輞川)이라는 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은거생활을 할 때 그림을 그리듯이 지어 놓은 시들이 많다. 녹채를 선시의 일품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의 생애가 돈독한 불심으로 선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살은 때문이기도 하다. 32살 때 부인을 사별하고 평생을 혼자 살면서 시심을 불심으로 승화시켰던 사람이었다. 유마거사를 좋아하였고 유마힐(維摩詰) 세 글자가 묘하게도 유는 이름이 되었고, 마힐(摩詰)은 자호로 쓰기도 하였다.

 

◐ 맑은 새벽 나뭇가지/오암(鰲巖 1710~1792)대사

 

청신고수앵류명 淸晨高樹鶯留鳴 맑은 새벽 나뭇가지 높이 꾀꼬리 울음

문이하심아이경 問爾何心我耳驚 묻노니, 네 무슨 마음으로 내 귀를 놀라게 하냐?

원득원통무애력 願得圓通無碍力 원컨대, 막힘없는 원통의 힘을 얻어

보문진성불문성 普聞眞性不聞聲 널리 진여의 본성을 듣고 소리는 듣지 말자.

 

오암(鰲巖 1710~1792)대사는 이조 중엽의 스님이다. 시를 잘 썼던 스님으로 유명하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문단에 데뷔한 승려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문집 『오암집』은 시집이라 할 수 있는 문집이다. 시가 270여 수 수록되어 있고 문은 14편에 불과하다.

오암 대사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가 21살 때 모친의 상을 당해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하여 청하 보경사(寶鏡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때의 법명은 의민(毅旻)이었다. 청하의 오두촌(鰲頭村)에서 태어나 이 인연으로 자호를 오암이라 하였다.

새벽 꾀꼬리(曉鶯)라고 제목을 붙인 이 시는 꾀꼬리 울음을 듣고 듣는 성품인 문성(聞聲)을 듣는다는 오도(悟道)의 경지가 피력되어 있다. 이는 『능엄경』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 나오는 말로 성진(聲塵)인 소리를 들을 때 소리를 듣지 말고 듣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라는 말이다. 이를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 한다. “꽃을 보고 색이 공함을 깨닫고 새소리 듣고 듣는 성품을 밝힌다”는 시구(看花悟色空 聽鳥明聞性)처럼 보고 듣는 경계에서 진여본성을 찾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공부다.

 

 

◐ 서산에 달지고/ 연파(蓮坡·1772~1811)대사

 

월락서봉효경명 月落西峰曉磬鳴 서산에 달 지고 새벽 풍경 울리니

죽풍소슬주신청 竹風蕭瑟做新晴 댓바람 소슬한 게 기분 맑게 하구나

연단예흘빙경궤 蓮壇禮訖凭經几 불단에 예불하고 경상에 기대니

재시선창일반명 纔是禪窓一半明 이제사 선창이 반쯤 밝아오네

 

연파(蓮坡·1772~1811)대사는 『아암유집(兒庵遺集)』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어려서 대둔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는데 법명은 혜장(惠藏)이었고 법호가 연파였다. 자호를 아암이라 하여 문집의 이름을 『아암유집』이라 한 것이다. 27세때 당시의 고승 정암(晶巖)대사의 인가를 받아 그의 법을 이었으나 연담유일(蓮潭有一)을 깊이 존경하였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를 왔을 때 벽련사에 다산이 촌로차림으로 들어와 연파대사를 만나 담론을 나눈 것이 인연이 되어 대사가 입적한 후 다산이 대사의 비명을 지었다.

 

위의 시는 청신한 산사의 새벽 분위기에 어우러져 있는 맑은 정신이 배어있는 시이다. 제목이 <산거잡흥>으로 되어 있는 시의 첫수인데 새벽달 질 무렵 한줄기 바람에 풍경이 울릴 때 법당에 가 예불을 하고 돌아와 경상 앞에 앉아 잠시 명상을 하는데 창호지 밖으로 날이 새는지 어둠이 걷히며 먼동이 트는 밝음이 느껴지는 전경을 묘사했다. 절에서 잠을 자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산사의 새벽 분위기는 참으로 청신하다.

 

 

◐ 아미타부처님은/ 나옹스님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재하방 아미타부처님 어디에 계신가?

着得心頭切莫忘 착득심두절막망 가슴에 얹어 두고 잊지 말아라.

念到念窮無念處 염도염궁무념처 생각이 다해 더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이르면

六門常放紫金光 육문상방자금광 눈 귀 코 입 온몸에서 붉은 금색광명 쏟아지리라.

 

이 시는 고려 때 나옹스님이 지은 것이다. 이 시가 지어진 이면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20살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아 출가한 스님에게 누이동생이 있었다. 이 누이동생이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 자꾸 절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옹스님은 만나주지 않고 다른 스님에게 다른 곳으로 가고 없다 하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그래도 누이동생은 이 절 저 절을 나옹 스님을 수소문하여 찾아 다녔다. 이리하여 나옹스님은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써 두고 누이동생이 찾아오면 전하게 하였다.

“나는 이미 세속을 떠나 출가한 몸이라 속가의 가족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유가에서는 가족을 가까이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우리 불가에서는 가족을 가까이하는 것을 수도의 장애라고 여긴다.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말고 아미타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 내 생각이 날 때는 이 부처님 생각을 가슴에 얹어 두고 생각이 막힐 때까지 하고 있어라.”편지의 마지막에 써둔 시였는데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자기에 대한 생각을 끊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 홑이불에 한기 들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

 

지피생한불등암 紙被生寒佛燈暗 홑이불에 한기 들고 불등은 희미한데

사미일야불명종 沙彌一夜不鳴鍾 사미승은 밤이 새도 종을 치지 않는구 나.

응진숙객개문조 應瞋宿客開門早 나그네로 와서 자고 문 일찍 연다 투덜 대겠지만

요간암전설압송 要看庵前雪壓松 암자 앞 눈에 눌린 소나무를 봐야겠네.

 

이 시는 고려 말 문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시다. 원 제목이 ‘산중설야(山中雪夜)’로 되어 있는데 누군가 산중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날은 춥고 밤새 눈이 온 모양이다. 지피는 종이 이불이란 말이지만 홑이불을 가리킨다. 사람이 잘 수 있는 인법당 한 구석에서 한기를 느끼면서 잤는데 법당에 켠 장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새벽이 되어 날이 새는데도 절간의 종이 울리지 않는다. 종을 치던 사미승이 눈 때문에 종각에 올라가지 못한 모양이다. 날이 점점 밝아지자 나그네는 소나무가 이고 있는 눈을 보고 싶다. 암자 앞 설경이 나그네를 불러내는 것이다. 절 식구는 아직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아 객이 먼저 나가 절문을 열자니 괜히 미안스럽다. 사미를 불러내 문을 열어 달라면 일찍도 설친다고 필시 투덜댈 것이다.익재는 고려 조정의 문하시중을 네 번이나 역임한 정치가로 큰 활약을 한 인물이지만 학자 문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원나라에 오래 머물면서 중국의 학자들과 교류도 많았다. 과거 시험에 당락을 결정하는 지공거(知貢擧)를 여러 차례 역임하면서 당대의 학자 이색(李穡)을 등과시킨 이가 익재이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도 그의 문하생이었다.

 

 

◐ 달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헤초(慧超 704~787)

 

월야첨향로 月夜瞻鄕路 달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

부운표표귀 浮雲颯颯歸 뜬구름만 흩날리며 돌아가고 있네.

함서참거편 緘書參去便 구름 가는 길에 편지라도 부치고 싶은데

풍급불천회 風急不聽廻 바람이 급하여 내 말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아국천안북 我國天岸北 내 나라 하늘 끝 북쪽에 두고

타방지각서 他邦地角西 남의 나라 서쪽 모퉁이에 와 있는 몸

일남무유안 日南無有雁 더운 남쪽 천축은 기러기도 오지 않으니

수위향림비 誰爲向林飛 누가 고향 숲을 향해서 날아가려나.

 

이 시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헤초(慧超 704~787)의 시이다. 오천축을 순례하다가 어느 날 달밤에 향수에 젖어 지은 시이다. 혜초 스님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으로 제자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에 건너와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었던 스님이다. 혜초는 19살 때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떠나 만 4년 동안 인도 여행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카슈미르(Kashmir),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 등지를 두루 답사하고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30살 때쯤이었다.

 

이 시에 나타난 것처럼 간절한 향수에 젖어 있던 그는 끝내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787년에 입적했다고 기록해 전한다. 『왕오천축국전』에 실려 있는 이 시는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돈황석굴 천불동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날마다 산을 보아도/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 1226~1292)

 

일일간산간부족 日日看山看不足 날마다 산을 보아도 보는 것이 모자라고

시시청수청무염 時時聽水聽無厭 때마다 물소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아

자연이목개청쾌 自然耳目皆淸快 귀와 눈이 저절로 맑고 시원해

성색중간호양염 聲色中間好養恬 소리와 색깔 그 속에 고요함을 기르네.

 

수도자들은 예로부터 산과 물을 벗한다. 사는 곳이 산속이니 의당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심한 자연 속에 무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눈을 뜨면 산이니 아무리 보아도 싫지가 않고 시시로 들려오는 물소리 그 소리에 짜증을 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산을 보니 눈이 맑아지고 물소리 들으니 귀가 시원해진다. 여기에서 도심이 깊어지고 사는 일이 조용하다.

 

이 시는 고려 때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 1226~1292)의 시이다. 한가함 속에서 스스로 기뻐서 지었다면서 제목을 한중자경(閑中自慶)이라 붙인 시이다.

출가 전 19살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서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던 스님은 문장이 뛰어나 이름을 날리기도 했는데 29살에 원오(圓悟)국사를 의지해 수계 스님이 되었었다. 몽고 침입 때 환수 되었던 사찰의 토지를 돌려 달라는 글을 올려 원나라 세조를 감동케 해서 땅을 돌려받고 세조의 청으로 연경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고려 충렬왕 때 원감국사어록을 간행했으나 산실되고 말았는데 육당 최남선이 일본에서 구해와 다시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 하늘에는 초승달/ 대각국사 의천(義天 : 1055〜1101)

 

반륜명월백운추 半輪明月白雲秋 하늘에는 초승달 산에는 흰 구름

풍송천성하처시 風送泉聲何處是 어디서 물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나

시방무량광불찰 十方無量光佛刹 시방의 한량없는 부처님 나라 다니며

진미래제작불사 盡未來際作佛事 미래제가 다하도록 부처님 일 하리라.

 

이 시는 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 : 1055〜1101)의 임종게로 알려져 있는 시이다. 문종의 4째 왕자였던 스님은 11살에 출가하여 그 당시 왕사였던 난원(爛圓)을 의지하여 득도한 후 개성 영통사에 머물다 15세에 승통(僧統)이 되기도 하였다. 31살 때 송나라에 들어가 천태교학을 배우고 돌아와 고려에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립해 많은 경전을 간행하는 등 고려불교 발전에 큰 공로를 세웠다. 5째 왕자였던 동생 증엄(證儼)을 출가시켜 제자로 삼았고 이어 국사가 되었으나 4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이 시에는 죽음을 앞둔 대각국사의 발원이 들어있다. 시방의 부처님 나라를 두루 다니며 끝없는 불사를 하겠다는 불법홍포의 큰 원력이 담겨져 있다. 가을 산에 흰 구름과 함께 반달이 떴는데 어디선가 바람결에 물소리가 들려온다. 이 고즈넉한 산수의 풍경 속에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면서도 내생의 원을 그리움 속에 펼쳐놓은 시이다.

 

 

◐ 그대가 고향에서 왔다니/왕유(王維 : 701~761)

 

군자고향래 君自故鄕來 그대가 고향에서 왔다니

응지고향사 應知故鄕事 응당 고향의 일을 알겠군요.

래일기창전 來日綺窓前 오던 날 우리 집 비단 창가에

한매착화미 寒梅着花未 매화 꽃 핀 것 보았는지요?

 

왕유(王維 : 701~761)의 이 시를 읽으면 봄 햇살 같은 온화함 속에 고향의 따사로움이 느껴진다. 고향을 떠나 멀리 객지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고향에서 온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고향 소식이 궁금하여 이것저것 물어 볼 것도 많았으리라. 그러나 이 시에서는 자기가 살던 고향의 집 비단 커튼을 쳐 놓은 창가에 서 있던 매화나무 가지에 꽃이 피었던가 하고 묻기만 했다. 사실 이것이 고향에 대한 모든 것 전부를 물어 본 것이다.

 

수도자들은 고향의 의미를 깨달음의 세계로 전향시킨다.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선 것을 고향 길을 밟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에게는 3가지 고향이 있다. 보통 우리가 태어난 마을을 고향이라고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고향의 그리움은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던 곳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 고향이 부모가 있었기에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모를 고향이라 한다. 또 하나의 고향이 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자기 자신의 마음자리이다.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영혼의 고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세계가 우리에게 영혼의 고향인 셈이다.

 

 

◐ 길동무도 없이/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선사

 

춘산무반독심유 春山無伴獨尋幽 길동무도 없이 혼자 봄 산 깊숙이 들어가니

협로도화친장두 挾路桃花襯杖頭 길가의 복사꽃 지팡이에 스친다.

일숙상운소우야 一宿上雲疎雨夜 상운암의 밤은 성근 비에 젖는데

선심시사양유유 禪心詩思兩悠悠 선심과 시 생각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이 시는 불우한 생애를 마쳤던 조선조 명종 때의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선사의 시이다. “지금 내가 없으면 불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기꺼이 불교를 위해 순교의 길을 택했던 그도 문정왕후가 살아 계셨을 땐 두터운 신임을 받고, 온갖 탄압을 받고 쇠망하는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유생들의 끈질긴 협공을 받던 보우선사는 문정왕후가 죽자 끝내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타살을 당한다.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불과 6개월 동안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계(啓)가 75건, 불교의 폐단과 보우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423건이나 쏟아져 올라왔다고 한다.

 

이 시는 상운암이란 암자에서 숙박을 하면서 지은 시이다. 제목이 ‘숙상운암’으로 되어 있다.

 

 

◐ 노곤한 봄잠 자다/ 맹호연(孟浩然 689~740)

 

춘면불각효 春眠不覺曉 노곤한 봄잠자다 날 새는 줄 몰랐더니

처처문제조 處處聞啼鳥 곳곳에 우짖는 새소리 들린다.

야래풍우성 夜來風雨聲 밤새 거센 비바람 불었으니

낙화지다소 落花知多少 피어 있던 꽃들이 많이 떨어졌겠다.

 

봄 날 아침 정경이 해맑게 묘사된 명시이다. 제목이 춘효(春曉)라고 되어 있는 이 시는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시이다. 성당(盛唐)의 자연파 시인으로 시재가 뛰어났음에도 벼슬을 못해보고 불우한 생애를 마쳤던 그는 평생을 처사로 살면서 산수를 벗하여 시를 읊었다. 운이 없어 과거에 낙방하고 녹문산(鹿門山)에 은거, 시를 짓다가 40세에 장안으로 올라가 장구령 왕유 등과 교유하여 시재를 인정받았으나 그가 지은 부재명주기(不才明主棄)란 시구 하나가 현종의 비위를 거슬러 끝내 벼슬길이 막힌다. “재주가 없어 밝은 임금이 버리셨다”는 이 구절을 읽은 현종이 임금을 책망한 말이라 하여 노여워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벼슬을 원했다가 좌절되고 방랑과 은둔으로 생애를 보낸 그는 왕창령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한다. 청려(靑麗)하고 아정(雅正)한 시 263수를 남겼다.

 

 

◐ 시냇가 띠집에 한가롭게 홀로사니/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 띠집에 한가롭게 홀로사니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달은 밝고 바람 맑아 흥취가 남아돈다.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바깥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니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숲으로 평상 옮겨 드러누워 책을 본다.

 

때로는 사람들이 숨어 사는 은자(隱者)들을 동경하는 시절도 있었다. 안빈낙도를 즐기며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초연히 자기 삶을 부귀영화 밖에서 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의 사회풍조를 보면 이런 사람들은 고준한 삶의 정신이 더욱 빛나 보이는 모범이 있는, 삶의 견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의 시다. 어려서 고향인 선산의 도리사에서 글공부를 한 인연이 있는 야은은 학문을 좋아하였다. 려말(麗末)의 충신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려진 사람으로 조선조의 학자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을 세운 대학자로 높이 평가 받는다. 인품이 고매한데다 효심이 지극하였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공손한 예를 철저히 지킨 당대의 사표가 되는 큰 덕망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 한 잔의 차에/함허득통(涵虛得通1376~1433)선사

 

일완다출일편심 一椀茶出一片心 한 잔의 차에 한 조각 마음이 나오니

일편심재일완다 一片心在一椀茶 한 조각 마음이 차 한자에 담겼네.

당용일완다일상 當用一椀茶一嘗 자, 이 차 한 잔 마셔보시게

일상응생무량락 一嘗應生無量樂 한 번 맛보면 근심 걱정 모두 사라진다네.

 

차에 관한 시 한편을 소개하게 됐다. 예로부터 우리 불가(佛家)에서 차를 애용해 왔다. 특히 선가(禪家)에서는 일상생활에 차는 필수적으로 쓰이는 그야말로 다반사(茶飯事)의 하나였다. 지금도 선방에는 차 마시는 시간이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이 이래서 생겼다. 차를 마시는 것 자체가 선의 경지에 든 것이라는 의미다.

 

이 시는 함허득통(涵虛得通1376~1433)선사의 시이다. 조선조초의 스님으로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다 21살 때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 출가하였다고 한다. 제방을 다니며 수행정진 하다가 황해도 평산 자모산 연봉사에서 작은 방을 얻어 함허당이라 이름하고 3년간 정진한 이후 함허당으로 알려졌다. 세종대왕의 청에 의해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선비대비(先妣大妃)의 명복을 빌고 왕과 신하들을 위해 법을 설하기도 했다. <원각경소>, <금강경오가해설의>, <현정론>, <유석질의론>등 저서를 남겼으며 <함허당득통화상어록>이 전해진다.

 

 

◐ 내 생애 박복하다 비웃지 말라 /침굉(枕肱:1618~1686) 스님

 

막소생애박 莫笑生涯薄 내 생애 박복하다 비웃지 말라

요현일소도 腰懸一小刀 허리에 찬 작은 칼 하나로

등등천지내 騰騰天地內 하늘과 땅 사이에 늠름하나니

처처진오가 處處盡吾家 이 세상 모든 곳이 내 집이라네

 

이 시의 작자 침굉(枕肱:1618~1686) 스님은 조선조 숙종 때의 스님이다. 출가 수도자의 기백이 넘치는 이 시 한 편이 그의 생애를 돋보이게 한다. 법명이 현변(懸辯)이었던 그는 9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나 10년이 지난 19살 때 고산 윤선도가 양자로 삼아 환속시키려 하였으나 울면서 애원하여 승려로 남았던 사람이다. 그런 뒤 을사사화 때 윤선도가 광양에 유배되었을 때 찾아가 창랑가(滄浪歌)를 지어 위로한 일도 있었다. 소요태능(逍遙太能)의 법을 이어 선암사, 송광사 등 호남의 여러 사찰에 주석하면서 법을 폈다.

부귀영화 멀리하고 가진 것 없어도 허리에 패도하나 차고서 천지 안에 꿀리지 않게 살았다. 운수행각으로 천하를 떠도니 어디든지 내 있는 곳이 내 집이 된다. 작은 칼은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 곧 지혜의 칼을 상징하는 것이다.

 

 

◐ 한 번 서산문에 들어와/보응영허(普應暎虛 : 1541~1609)대사

 

일입서문고로망 一入西門古路忘 한 번 서산문에 들어와 옛길을 잊었으니

수류수처몰사량 隨流隨處沒思量 흐르거나 머물거나 아무 생각 없다네.

산중세월수능기 山中歲月誰能紀 산중의 세월 그 누가 기억하랴.

기견괴음청우황 只見槐陰靑又黃 괴목나무 잎들이 푸르다 노래진다.

 

조선조 중엽 보응영허(普應暎虛 : 1541~1609)대사는 사대부의 가문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글을 잘 하였다. 8살 때 대학을 공부하고 그 뜻을 이해하였으며, 어른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15살 때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을 하고는 충격을 받아 인생무상을 느끼고 19살 때 출가를 한다.

 

실상사에 계시던 인언(印彦)스님을 은사로 축발을 하고 5년간 시봉을 하면서 경론을 열람한다. 이후 제방으로 다니며 선교를 두루 섭렵하다 마침내 묘향산 서산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서래밀지(西來密旨 : 禪旨)를 터득하고 다시 천하를 주유하다가 65세 때 다시 실상사로 돌아와 대법회를 열어 경론을 강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 <영허집>에는 주옥같은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위의 시는 서래밀지를 터득한 후 읊은 시로 원제목은 번뇌를 일으키던 모든 것을 잊었다는 망기(忘機)로 되어 있다. 사람 사는 것, 그저 세상을 관조 하면서 물이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다.

 

 

◐ 십년을 단정히 앉아/ 서산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십년단좌옹심성 十年端坐擁心城 십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의 성을 지켰더니

관득심림조불경 慣得深林鳥不驚 숲속의 새들도 길들어져 놀라지를 않는구나.

작야송담풍우악 昨夜松潭風雨惡 어젯밤 소나무 못 밑에 비바람 몰아치더니

어생일각학삼성 魚生一角鶴三聲 고기는 못 한 구석에 모여 있고 학은 세 번 울며 날아가네.

 

이 시는 서산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으로 알려져 있는 시이다. 예로부터 마지막 사구째의 해석을 두고 이론이 분분했던 시이다. 오랜 세월 선정을 닦아 경계를 물리치고 번뇌를 쉬게 된 경지를 자기 본래마음, 진심을 성에 비유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듯이 지켰다 했다. 그리하여 주객이 대립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지고 보니 숲의 새들마저 무심해져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간밤에 비바람이 몰아쳤다는 것은 번뇌의 습기를 몰아내는 엄청난 회오리가 내면에서 일어났나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라 하겠다. 한 소식 체험한 경계를 읊은 것이다. 어생일각이라는 말을 두고 고기에 뿔이 났다는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깨침 이후의 평상도리를 나타낸 말로 본다. 비온 뒤 고기들이 못 한쪽 귀퉁이에 모여 있고 소나무의 학이 날아가면서 연거푸 울음소리를 냈다는 말이다.

 

 

◐ 온갖 물건 대하여도 / 방온(龐蘊․?~808)거사

 

단자무심어만물 但自無心於萬物 온갖 물건 대하여도 무심해지면

하방만물상위요 何妨萬物常圍遶 나를 방해할 게 무어 있으랴

목우불파사자후 木牛不怕獅子吼 나무 소가 사자 울음 겁내지 않듯

흡사목인견화조 恰似木人見花鳥 허수아비 꽃 본 것과 다를 바 없네.

 

중국 선종사에서 거사로써 크게 선풍(禪風)을 드날린 사람이 있었다. 인도의 유마거사에 비유되는 방온(龐蘊․?~808)거사이다. 성만 따서 방거사로 불리어졌는데 처음 석두희천(石頭希遷)선사를 참방해 선지를 터득하고, 다시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를 뵙고 크게 깨쳤다고 알려졌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던 명문가문의 부호였으나 불교에 귀의하고는 빈궁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산속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살면서 가족 모두다 생사를 자유자재하는 도인으로 살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주옥같은 많은 선시(禪詩)를 남겼다. 그의 딸 영조(靈照)가 선기(禪機)가 민첩해 아버지가 앉던 좌복에 앉아 먼저 좌탈(坐脫)을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의 많은 선사들과 교유하면서 선지를 폈으며, 특히 불상을 태워 소불공안(燒佛公案)을 남긴 단하천연(丹霞天然)선사와는 평생의 벗이 되어 지냈다. 마지막 임종시에 친한 친구였던 절도사 우적의 무릎을 베고 입적하면서 “모든 것이 공하기를 바랄지언정 결코 없는 것을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오. 세상을 잘 사시오 모두가 메아리와 같았소이다”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 매우 깊고 미묘한 가르침/ 원효스님의 게송

 

심심차미금강교 甚深且微金剛敎 매우 깊고 미묘한 ‘금강삼매’의 가르침을

금승앙신략기술 今承仰信略記述 이제 우러러 받들어 간략히 기술하였으니

원차선근변법계 願此善根遍法界 바라건대 이 선근이 법계에 두루 퍼져

보리일체무유결 普利一切無遺缺 널리 일체 중생을 빠짐없이 이롭게 하소서

 

이 시는 원효스님의 『금강삼매경론』의 말미에 붙어 있는 게송이다. 한국불교의 새벽을 연 원효스님의 탁월한 업적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지만 그가 남긴 게송은 몇 수 안된다. 미타증성게(彌陀證性偈)를 비롯하여 몇 개가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대비심에 입각한 원력이 깊이 서려 있다. 이 게송에서도 좋은 과보를 받게 될 선근이 법계에 가득하여 일체 중생 모두를 이롭게 해 달라는 원력이 피력되어 있다.

 

 

◐ 헛된 인연 잘못알고/ 범해각안(梵海覺岸)스님의 임종게

 

망인제연희칠년 妄認諸緣希七年 헛된 인연 잘못 알고 살아온 77년이여!

창봉사업총망연 窓蜂事業摠茫然 창가에 부딪치는 벌처럼 해온 일도 부질없어라

홀등피안등등운 忽登彼岸騰騰運 훨훨 털고 문득 저 언덕에 올라가면서

시각부구해상원 始覺浮 海上圓 비로소 바다 위에 거품인 줄 이제 알았네.

 

이 시는 범해각안(梵海覺岸)스님이 남긴 임종게(臨終偈)다. 범해 스님은 조선조 순조 20년에 태어나 고종 건양(建陽) 원년 1896년에 입적한 스님으로 선교를 섭렵해 학덕이 높았으며, 유서에도 밝은 학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염불에도 조예가 깊어 재공의식에 능했던 거장이었다.

 

초의(草衣)선사를 의지해 구족계를 받고 선교의 수학을 거쳐 두륜산(頭輪山)의 진불암(眞佛庵)에서 개당하여 <화엄경>과 <범망경>을 강설하고 선리(禪理)를 가르쳤다. 22년동안 학인들을 가르치며 제방을 순력하다가 다시 두륜산의 대둔사(大屯寺)로 돌아와 학인들을 가르쳤다. 77세에 입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임종을 앞두고 지난 생애를 회고하고 보니 창가에 부딪치는 벌처럼 해온 일이 부질없었다고 하면서 무상 속에 살아온 생애가 바다 위의 거품 같다고 하였다.

 

 

◐ 산은 깊고 물은 찬데/함허득통(涵虛得通 : 1376~1433)선사

 

山深水密生虛 산심수밀생허뢰 산은 깊고 물은 찬데 텅 빈 적막의 소리여

月皎風微夜氣凉 월교풍미야기량 달은 밝고 바람 자서 밤기운 서늘하다.

却恨時人昏入夢 각한시인혼입몽 사람들은 지금 한창 꿈속에 들었겠지

不知淸夜興何長 부지청야흥하장 맑은 밤 이 흥취를 누가 어찌 알려나.

 

산속 깊이 온 세상이 잠든 밤에 가끔 깨어 있는 사람이 있다. 잠이 오지 않아 깨어 있는 것이다. 불면의 번뇌에 시달리거나 밤새도록 해야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빛처럼 그날따라 정신이 초롱초롱 해져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저 무심히 선정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깊은 산속에서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운다면 이 시와 같은 흥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밤중에 산이 내쉬는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 세상은 밤이 있어서 더욱 신비스러워지는 것이다. 자연이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비밀 같은 것이 밤에 잘 느껴지는 법이다. 밤에 보면 산이 더 깊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의 밤보다도 또 바다의 밤보다도 산이 깊어 그런지 산의 밤이 더 깊게 느껴진다. 텅 빈 고요한 적막의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산의 교향악을 그대는 한밤중에 깨어 있으면서 들어 보아야 한다.

 

이 시는 조선조 초기의 함허득통(涵虛得通 : 1376~1433)선사의 시다. 21세에 출가하여 이듬해 무학 대사를 뵙고 법문을 들은 뒤 제방으로 다니며 수행정진하다 세종대왕의 청으로 대자어찰(大慈御刹)에 수년을 머물기도 하였으며 희양산 봉암사에서 입적하였다. 박학다식한 학문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를 두루 섭렵해, 당시의 불법 선양에 크게 공을 남겼던 스님이다.

 

 

◐ 한 해에 옷 두 번 기워입고/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일년의중보 一年衣重補 한 해에 옷 두 번 기워 입고

일일발양세 一日鉢兩洗 하루에 바리 두 번을 씻고 사네.

불효산중취 不曉山中趣 산에 사는 흥취를 모른다면

산중역진세 山中亦塵世 산중도 속세와 다를 바 없네.

 

산중에 사는 검소하고 단순한 생활의 흥취를 읊은 소박한 시이다. 입산수도의 일생은 아무래도 속진의 생활과는 다르다. 물자가 궁색해도 오히려 그것이 안빈낙도의 자기 분수를 충족시켜 주는 만족이 된다. 하루에 두 끼 공양 챙기고 일 년에 두어 번 옷이 떨어졌을 때 바느질 해 꿰매면 된다. 산에 사는 흥취는 산에 사는 사람만이 알뿐이지 도시의 숨 가쁜 생활과는 아마 세월 그 자체가 다를지 모른다. 언젠가 이런 말을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산을 오르내려도 산을 알려면 산속에서 잠을 자다가 한 밤중에 일어나 산의 숨소리를 들어보아야 산을 알게 된다"는 말을 했더니 몇 사람이 수긍이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산에 있어도 마음이 산심에 젖지 않으면 속세와 마찬가지라는 마지막 구절에는 어떤 경책의 침이 숨어 있는 말이다.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시문집에 수록된 '산거(山居)'라는 시이다. 평생을 학문과 수행에만 정진한 학승으로 소박한 일생을 살아 후대의 귀감이 된 스님이다. 특히 스님의 업적은 쇠미해진 이조 말엽의 불교 교학을 크게 일으킨 점이다. 많은 경전을 연구, 사기(私記) 등을 저술하였고 또 후학을 제접하는 많은 강의를 하여 교맥을 계승하게 했다. 스님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서 편찬한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이라는 문집이 전해지는데 그의 문인 영월계신(靈月誡身)에 의해 편찬되었다.

 

◐ 바람불자 산나무/부휴선수(浮休善修1545~1615)선사

 

풍동과빈락 風動果頻落 바람 불자 산 나무 열매 자꾸 떨어지고

산고월이침 山高月易沈 산이 높으니 달이 벌써 지려하네.

시중인불견 時中人不見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창외백운심 窓外白雲深 창 밖에 흰 구름만 자욱하구나.

 

이조 중기 부휴선수(浮休善修1545~1615)선사가 남긴 이 시는 산중의 정취가 조용히 풍겨 나온다. 사람이 자기 시간을 갖고 살기가 어렵다. 매일 누구를 만나서 사교를 하고 어떤 일에 매달려 그 치다꺼리에 부심하다 보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겨를이 없어져 버린다. 또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결국 끝없이 객관 경계를 쫓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영혼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추어보지 못한다. 어쩌면 이 시대는 사람이 자기 반조(返照)를 하지 않는 시대인지 모른다.

 

어찌 보면 세상은 반성하기를 싫어하면서 일방적 고집으로 사는 것 같다. 욕망의 공간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정신적 여백을 사양하는 것 같다. 도인들의 삶의 자취를 한 번 보라. 그들은 자기 고독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고독해 몸부림치지 않는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롭기 때문에 그 시간을 사랑하며 잘 견딘다. 혼자만의 세계에는 언제나 자화상을 바로 보는 거울이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자기 자화상을 바로 보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아무도 없는 홀로의 시간에 자연을 벗하여 세상을 관조하면 초연한 자기의 본래 모습이 만상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다.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을 이은 부휴는 임진란 당시 덕유산에 은거하면서 무주 구천동에서 한때 간경(看經)에 여념없이 지낸 적도 있다. 송광사에도 머물다가 나중에 칠불암에 가서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선시(禪詩)

요즈음 불교에 심취해 있습니다. 그래서 고승들의 선시(禪詩)를 찾아 읽으며 기뻐합니다전 어려서나 젊어서  불심이 강했습니다.부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여러 시들을 대하니퍽 기쁩니다 

caf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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