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행증(信解行證)
"신해행증(信解行證)"은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하는 네 가지 중요한 단계를 나타냅니다.
이는 수행자가 진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1. 신(信): 믿음의 단계입니다.
불법(佛法),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자는 이 단계에서 불교의 진리에 대한 신앙심을 갖고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깊은 신뢰를 형성합니다.
2. 해(解): 이해의 단계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이고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가르침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고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3. 행(行): 실천의 단계입니다.
믿음과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자는 실제로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수행에 매진하게 됩니다.
이는 명상, 선(禪), 계율 준수 등의 구체적인 실천을 포함합니다.
4. 증(證): 증득(證得)의 단계로,
깨달음을 얻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수행자는 실천을 통해 진리를 직접 체험하고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신해행정은 불교 수행의 네 가지 주요 단계를 나타내며, 믿음에서 시작해 이해하고, 그 이해를 실천하며,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설명 합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에 대해 이야기로 풀어 설명해놓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ㅡㅡ옛날 어느 마을에, 진리를 찾고자 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수안이었습니다.
수안은 늘 인생의 목적과 진정한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을 어귀에서 한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스님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수안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내 가르침을 따라오라. 나는 너에게 부처님의 길을 보여주겠다.”
수안은 스님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확신한 수안은 그 말을 믿고 스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신(信)'의 단계였습니다.
그는 스님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안은 스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불경을 읽으며 점차 그 가르침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지, 왜 모든 것이 무상한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해(解)'의 단계였습니다.
그는 이제 단순히 믿는 것에서 벗어나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이해를 얻은 수안은 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명상하며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일상 속에서도 화를 참으며 욕심을 줄이려 노력했습니다. 수안은 이제 가르침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행(行)'의 단계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 실제로 수행을 하며 몸과 마음으로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의 수행 끝에, 어느 날 수안은 마치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마음이 맑아지고 모든 것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임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에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세상의 이치를 명확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 깊은 평안과 자유를 느꼈습니다.
이것이 '증(證)'의 단계였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체험하고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신해행증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을 통해 경험하며, 궁극적으로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뜻합니다.
수안의 여정은 불교 수행자의 마음의 길을 상징하며, 모든 수행자가 따르는 네 가지 단계의 중요한 과정을 설명해 줍니다.
이번 양력 10월3일은 초하루 입니다.
반야정사에서는 초하루 법회가 있습니다.
함께하는 소중한 인연이 되면 좋겠습니다.
반야정사 - 도안
[출처] 신해행증(信解行證)|작성자 도안
<신해행증(信解行證)>
<화엄경>에서는 불교 공부를 하는 방법을 불자의 종교적 믿음과 실천에 두어, 한 마디로 신(信)ㆍ해(解)ㆍ행(行)ㆍ증(證)이라는 네 가지 범주를 제시하고 있다.
신(信)은 믿음이니, 먼저 불ㆍ법ㆍ승 삼보를 철저히 믿고 귀의하는 것이다. 믿으면 무한한 힘이 나온다.
해(解)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많이 듣고 많이 배우는 것이 수행의 지름길이다.
행(行)은 배운 내용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배운 내용이 그대로 실생활에 적용되고, 그 행한 결과가 바르게 일어남을 확연히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증(證)이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수행하는 과정을 넷으로 나누어, 「신(信)―믿어라, 해(解)―이해하라, 행(行)―실천하라, 증(證)―깨달아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의 자세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그 수행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보자.
• 신(信)은 말 그대로 믿음이다. 부처님과 불법의 가르침과 승가를 올바로 믿는 것을 말한다.
즉,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와 계(戒)를 믿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기에 우리가 모르더라도 부처님의 깨달음을 먼저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화엄경>에 이르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信爲道源功德母)”라 했다.
따라서 불법의 바다에는 믿음으로써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믿음은, 수행을 하면 반드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교신행의 기초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신신심은 틀림이 없다고 결정짓는 마음이다. 불법이 거짓이 아닌 진리라는 마음의 결정이 곧 신심이다. 불교의 신행은 이러한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불교의 믿음은 유일신적(唯一神的) 종교의 믿음과는 다르다. 불교의 믿음은 신의 절대적인 권능이나 창조를 믿고, 신을 믿음으로써 그 은총을 입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라, 불법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결정하는 대결단이다. 이 같은 결단이 없으면 삼귀의(三歸依)를 하고 오계(五戒)를 받는다고 해도 진정한 불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 신행의 기초는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이 전제 돼야 한다.
<화엄경> 보살의 계위(位次)에 십신(十信)이 있듯이, 신(信)이란 여래의 묘법은 모두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언어로서 확실하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인은 오직 믿음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하며, 자기의 믿음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 성인이 가르치신 말씀을 믿어 망령되게 바꾸지 말아야 한다.
• 해(解)란 불법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일단 믿었으면 듣고 이해해야 한다.
즉, 연기법(緣起法)과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를 이해함을 말한다.
이해가 안 된다면 들으나마나한 것이다. 이해 없는 믿음은 미신이나 맹신이 되기 쉽다.
철저한 이해 없이는 바른 믿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교는 무조건 믿으라는 종교가 아니라 이해하고 스스로 깨닫는 종교이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이해를 중요시한다.
불교 신행에 있어서 믿음과 이해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아는 것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알게 되는 것이다. 모르면 믿음이 나올 수 없다.
그러니 모르는 것은 반드시 이해해야 하며,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을 묻고, 법을 구해야하며, 또 스스로 반조하고 선정을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한다.
그리하여 자기 스스로 알고 나서 변화시켜 설법하되, 모두 변화된 자기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며, 큰 밝음을 내놓아 일체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변화되지 않은 채 뱃속에 탐ㆍ진ㆍ치ㆍ만ㆍ의(貪嗔癡慢疑)가 가득하다면 아무리 이해한다 해도 그건 빈말이고, 그런 사람의 말은 결코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 행(行)이란 믿고 이해한 바를 몸소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과 이해함이 성숙되면, 이에 의한 실천이 따라야 한다. 행(行)에는 내행(內行)과 외행(外行)이 있고, 내외가 상응해야 한다.
내행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등의 집착을 끊는 것이고, 외행은 온갖 착한 행동을 행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자ㆍ비ㆍ희ㆍ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함을 말한다.
비록 분명히 이해했다 하더라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신행생활은 머리나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돼야 한다.
깨달은 진리와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은 생활 속에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비록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확신한다 하더라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계속적인 반복훈련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반복훈련을 수도(修道) 또는 수행(修行)이라고 한다. 수행이 점점 깊어지면 언제 어디서나 행하는바 법에 어긋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입으로는 외고 마음으로는 생각하되(口而誦 心而惟), 입과 마음이 상응하며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릇 말을 하되 가르침의 말씀에 의지해야 하며,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쓰는 것이 여기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바르게 말할 수 있고 바르게 행할 수 있다면 비로소 언행에 어그러짐이 없다 하겠다. 따라서 말을 바르게 하는 것은 환희로운 것이지만, 행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다면 말하지 않음만 못하다.
• 증(證)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증득함을 말한다. 참된 실체를 실제로 증득하는 것이다.
‘신’이 있고, ‘해’가 있어도 ‘행’이 없으면 ‘증’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해가 된다면 그대로 실천해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
중생의 모든 고통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거짓을 진실로 알고 있는 잘못된 믿음과 이에 의한 빗나간 생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바른 믿음과 철저한 깨달음에 의한 적극적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원만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이 같은 삶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삶에는 모든 아집과 편견에 의한 갈등이 없고, 무지와 욕망에 의한 모든 고뇌가 사라진 불ㆍ보살의 원만한 삶이 전개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이 세계가 불국정토를 이루게 될 것이다.
오늘날 불교계의 고민은 설법하는 사람은 많지만, 불법을 행하는 이가 많지 않다는 데에 있다.
우리 앞엔 훌륭한 경전이 많이 있다. <반야경>,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등 해서, 팔만사천의 훌륭한 법문이 잔뜩 있다. 그래서 웬만한 불자라면 그 중에서 몇 권 정도는 핵심을 요약할 줄 안다.
그러나 어떤 경을 주해하고 요약했다할지라도 실천은 오히려 속인보다도 못한 경우가 있다.
말로는 그럴싸하게 하지만 행위와 실천은 내행과 외행이 나누어지기 일쑤다.
내행은 정혜(定慧)가 원융해야 한다. 외행은 사위의(四威儀) 중에 계법(戒法)을 엄수해서, 털끝만큼도 범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납득할 수 있고, 그 위에 몸소 실천 해낼 때, 비로소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불법을 믿는다는 것은 이 같은 경전의 말씀에 근거해서 신ㆍ해ㆍ행ㆍ증의 체계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신해행증’이란 믿음[信]과 이해[解]가 한 짝을 이루고, 실천[行]과 깨달음[證]이 한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곧 신해수증(信解修證)과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이 <화엄경>의 가르침은 신해행증(信解行證), 곧 바로 믿고 바로 이해하고 바르게 실천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공부이고, 내 것으로 만드는 수행이다. 그래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을 통해서 십회향(十廻向)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는 신ㆍ지ㆍ행ㆍ득(信知行得)이라고 했다. 믿고 알고 행하면 얻는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얻는다는 확신과 믿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원하는 바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념을 철저하게 각인시켜줬다. 이것이 화엄에 와서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발전했다. 아는 데 그치는 게 아니고 믿고 이해해서 보살행을 하면 증득된다는 것이다.
십신(十信)에서는 올바른 믿음을 성취시켜주고, 십주(十住)에서는 올바른 이해를 가르쳤고, 십행(十行)에서는 올바른 실천, 즉 보살행을 하도록 했다면, 십회향(十廻向)에서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했다. 결국 ‘신해행증’은 불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말한 것이다.
불교의 목표는 일체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 상락아정(常樂我淨), 완전한 행복이다. 행(行)이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행방편을 말하는데, 선종에서는 그 중에서 화두참선이 최고의 수행방편이라고 말한다.
실천수행(實踐修行), 신해행증(信解行證), 언행일치(言行一致) 등의 행도 마찬가지 뜻이다.
용수(龍樹) 보살도 그의 <지도론>에서「지목행족(智目行足)이라야 청량지(淸凉地)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청량지란 맑고 깨끗한 피안인 열반의 세계에 비유한 것이다. 이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려면 지혜의 눈과 수행의 발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실행이 따르지 않는 이론은 마치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와 같으며, 반면에 올바르지 않은 실천은 오히려 행하지 아니함만 못하다. 따라서 신(信)과 행(行)을 겸비해야 한다.
또 불교 신행체계에서 신(信)ㆍ해(解)ㆍ행(行)ㆍ증(證)은 법보 가운데 사법(四法)이라 칭해지는 교(敎)ㆍ리(理)ㆍ행(行)ㆍ과(果)와 상응한다.
믿음[信]은 부처님의 가르침[敎]에 대한 믿음이고, 이해[解]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리성[理]에 대한 이해이다. 이와 같은 신해와 교리가 이루어진 연후에는 실천[行]으로 나아가는 것을 수행이라 하며, 이 실천수행을 통해 인과[果, 연기]를 증득[證]함으로써 온전한 신행을 확립하게 된다. 기실 깨달음은 온전한 신행의 여과(餘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것은 온전한 신행을 한다는 것과 동의어가 돼야 한다.
※교리행과(敎理行果)---수행과정에 관해 법보 가운데 교법, 이법, 행법, 과법. 이를 사법(四法)이라 하는데, 수행에 의해 구경의 목적인 깨달음을 얻은 차례, 즉, 종교적 수행의 과정을 4단계로 분류한 순서를 말한다.
교(敎)는 언어ㆍ문자로써 말하는 교설(敎說),
이(理)는 교리 내용인 도리(道理),
행(行)은 그 도리에 따라 실천하는 수행,
과(果)는 수행의 결과로 체득하는 결과, 곧 깨달음과 열반의 성취를 말한다.
이는, 말에 의한 가르침과 그 가르침 속에 설해진 도리와 그 도리에 의한 수행과 그 수행의 인(因)에 의해 얻는 증과(證果 : 깨달음)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법(四法)은 불ㆍ법ㆍ승 삼보 가운데서 법보(法寶)를 분류해서 교법ㆍ이법ㆍ행법ㆍ과법으로 나눈 것이다. 또한 그 중 교(敎)ㆍ리(理)ㆍ행行)은 문(聞)ㆍ사(思)ㆍ수(修)에 배대된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가르침이나 이론들이 결국엔 신해행증(信解行證)에 포섭된다. 그래서 신해행증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를 좀 더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은 처음에는 믿는[信] 것이고, 믿기만 하면 맹신에 빠지기 때문에 알아야[解] 되고, 알면 믿음이 더 깊어져서 분명해지고 바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그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앎, 실천, 체득이 겸해야 한다. 그래서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믿음, 이해, 실천, 체득이 한 단어가 되다시피 서로 붙어 있어야 한다.
또 신해(信解), 즉 믿음과 이해라든지 해행(解行), 즉 앎과 실천도 한 용어가 돼있다. 믿음과 앎, 앎과 실천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믿되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믿음은 대단히 중요하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을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했듯이, <법화경>에서는 분별심으로는 불법에 들어갈 수 없고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믿음이란 실천을 통한 자기 검증이 없으면 이치를 깨달아도 흔들리게 된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머뭇거리는 사람들은 다 이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옳다고 믿으면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든다. 한 점의 불안도 없이 확신에 차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도 있다. 믿음이란 그렇게 엄청난 힘이 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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