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파나사띠

[스크랩] 아나파나사띠 핵심 요약 - 굉장히 중요함

수선님 2018. 2. 11. 12:40



부처님 당시부터 비구, 비구니, 사미, 사마니, 재가신자 여러분들은 다함께 모여 수행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법을 얻고, 수행을 통해 목표한 바를 성취하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서 모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수행이란 계율의 청정(戒淸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8계를 받아서 계율의 청정을 이룬 다음에는, 마음의 청정(心淸淨)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청정을 위해서 여러분은 근접삼매(upacāra-samādhi)와 본 삼매(appanā-samādhi),

즉 색계 4선과 무색계 4선을 닦아야 합니다.

 

그럼 왜 여덟 가지 선정을 닦아야 하는가?

 

여덟 가지 선정을 닦아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인 진리인 빠라맛타(paramattha)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선정을 얻게 되면 가장 먼저 궁극적인 진리인 궁극적인 물질과 정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정을 닦은 후 빛을 얻어서, 그 빛과 삼매의 힘으로 여러분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물질(rūpa)과 정신(nāma)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궁극적인 물질과 정신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상응부』 진리상응(sacca-samyutta)에서 부처님은 4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집멸도 4성제를 모르면, 우리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매를 닦아 그 삼매의 힘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4성제를 정확하게 보고 알 수 있습니다.

4성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알 때, 우리는 열반에 도달하고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4성제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五蘊)가 바로 고(苦)입니다.

고의 원인이 되는 갈애가 바로 집(執)입니다.

고(苦)와 집(執)은 여러분이 향상 발전시켜야 할 위빠사나의 대상입니다.

 

고제와 집제를 그냥 보는 것인 아니라 무상 고 무아, 삼법인으로 보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닦아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단계별로 위빠사나를 계속 수행해나갈 때,

여러분의 수행은 향상되어서 마침내는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얻게 될 것입니다.

 

도와 과를 얻을 때 여러분은 궁극적인 평안함(열반)을 대상으로 가지면서 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정과 삼매의 도움 없이는 최종의 목표인 도와 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4성제를 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본다(如實知見)는 것입니다.

『상응부』 진리상응(sacca -samyutta)의 삼매경(samādhi-sutta, SN Ⅴ, 414)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비구여, 삼매를 개발하십시오. 삼매가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가? 그것은 곧 4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삼매를 개발하면 우리가 보아야 하는 대상인 4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삼매를 개발하기 위해서 『청정도론』에 나온 40여 가지의 사마타 수행주제 중에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설명할 것은 바로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 호흡관)입니다.

 

아나빠나사띠는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사마타 수행법으로서의 아나빠나사띠입니다.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할 때는 보통 좌선의 자세가 좋습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다리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처럼 다리를 겹치는 것보다, 나란히 놓는 평좌가 좋습니다.

 

곧으면서도 편안하게 앉은 자세는 몸에 긴장이나 피로를 주지 않아서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럼 지금 수행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수행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들숨 날숨이 긴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둘째, 들숨 날숨이 짧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셋째, 시작과 끝, 즉 호흡의 전체를 알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과정 !

넷째, 들숨 날숨이 고요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〇 수행자는 먼저 숨이 길고 짧은 것을 알아야 하는데,

숨이 길고 짧은 것은 숨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숨을 시간을 말합니다.

때에 따라 숨이 길고 짧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길게 하거나 짧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호흡을 길면 길다고, 짧으면 짧다고 다만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〇 그 다음으로 수행자는 들숨날숨이 길든 짧든, 호흡의 시작과 끝(호흡의 전체)을 다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설령 숨이 가빠서 호흡이 짧더라도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들숨 날숨을 지켜볼 때, 호흡의 시작과 끝을 어디에서 봐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코끝이나 윗입술 사이, 어느 곳이든지 숨이 두드러지게 부딪히고 접촉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곳의 한 점에 마음을 챙기고, 호흡이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호흡의 시작과 끝을 지켜봐야 합니다.

 

윗입술 부분이 좀 더 명확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수행자들 스스로가 바람이 부딪히면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곳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보십시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몸 안으로 바람을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람을 따라가게 되면 그것은 4대 수행이 됩니다.

바람이 코끝이나 윗입술 사이에 부딪히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곳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들숨 날숨을 보아야 합니다.

 

코끝이나 입술 위를 보지 않고 바람의 움직임을 따라가게 되면, 그것은 4대 중에서 풍대를 보는 수행이 됩니다.

그것을 보게 되면 코가 딱딱해져서 있는 그대로의 들숨날숨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4대 관찰을 따로 시작하게 되면 그 때는 몸 전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만,

지금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나빠나사띠이기 때문에, 코끝이나 윗입술 위 어느 한 부분을 봐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호흡이 두드러지게 접촉되는 한 점에 마음을 두고 들숨날숨을 지켜보십시오.

들숨날숨을 보는 이것은 빠라맛타(paramattha), 즉 궁극적인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빤냐띠(paññatti), 즉 개념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숨은 들숨으로 알아차리고, 날숨은 날숨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〇 그리고 다음은 들숨날숨을 보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단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호흡을 고요하게 지켜볼 수 없다면, 『청정도론』 주석서에서는 호흡의 숫자를 세도록 설명합니다.

 

그러나 만약 들숨날숨을 고요한 상태에서 분명하게 지켜볼 수 있다면, 굳이 숫자를 셀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호흡이라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자꾸 밖으로 향해 나갈 때, 여러분은 호흡과 함께 숫자를 세는 방법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들숨날숨을 쉬면서 그 끝에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나’

다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둘’

그 다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셋’ ... ...

그와 같이 해서 여덟까지 셉니다.

 

이렇게 들숨날숨을 여덟까지 세는 동안 여러분은 ‘내가 오로지 여기에만 마음을 집중하리라’ 라고

단단하게 마음을 먹으면서 시도해보십시오.

 

좌선시 마음이 들숨날숨에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30분 정도 고요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숫자를 세는 방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30분이나 한 시간도 고요하게 유지할 수 없을 때, 여러분은 숫자를 세는 방법으로 마음의 고요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것으로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

오늘 배운 방법으로 수행을 계속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말했듯이, 바람이 부딪히는 곳, 즉 코와 위 입술 사이의 한군데를 정해 놓고 숨을 알아차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만이 사마디(삼매)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장소 저 장소로 옮겨 다니면 사마디의 개발을 완성하는데, 즉 선정을 얻는데 굉장히 더디고 어렵습니다.

바람이 부딪히는 그 장소가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 장소를 정해놓지 않으면 호흡을 따라갈 확률이 많기 때문에, 한 장소를 정해 놓고 호흡을 보라는 것입니다.

적당한 곳, 즉 코끝에서부터 위 입술사이 어느 지점이든 상관없습니다.

 

어느 한 군데를 정해놓고 호흡을 따라가지 않으면서, 바람을 가장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는 곳을 지켜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들숨날숨을 따라가게 되면, 그것은 4대 수행이 됩니다.

지정한 한 장소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이 고요해지면, 장소가 불분명해지고 오히려 들고나는 공기가 더욱 더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들숨 날숨을 지켜보는데 생각이 들어오거나 마음이 방황한다면, 여러분은 숫자를 셀 수 있습니다.

 

8정도를 기억해서 하나에서 여덟까지가 바람직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에서 여덟까지를 세고,

다시 또 하나에서 여덟까지 세는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을 30분에서 한 시간정도까지 해보십시오.

 

그래서 좌선할 때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생각하면, 숫자 세는 방법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들숨날숨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 호흡의 길고 짧음, 호흡의 시작과 끝을 봐야 합니다.

 

호흡의 길고 짧음을 볼 때, 여러분은 ‘길고 짧음’, 아니면 ‘시작과 끝’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만약 꼭 그렇게 하고 싶다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단지 들숨은 들숨으로, 날숨은 날숨으로 알아차리면 충분합니다.

호흡이 길든 짧든 그 시작과 끝도 다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굳이 이것이 호흡의 시작이고, 이것이 끝이라고 마음속으로 읊조릴 필요는 없습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바람의 시작과 끝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수행하면서 바람의 들어오는 시작과 끝을 계속 보게 되면, 우리는 몸이나 코 등, 다른 것은 전혀 의식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바람만 의식할 수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바람(공기)만 의식할 때, 우리는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이상 좌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들숨날숨을 보고 있으면 호흡이 점점 미세해집니다.

호흡이 점점 미세해지는 것은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아나빠나사띠 수행법에서 이것이 네 번째 순서의 ‘숨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는 부분입니다.

 

 

그러면 왜 고요해진 호흡을 좋다고 하는가?

마음이 가라앉고 사마디가 깊어졌을 때, 호흡이 미세해지기 때문입니다.

 

거친 호흡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호흡이 아주 미세해졌을 때, 니밋따(nimitta 心象 혹은 表象)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흡이 거칠면 니밋따가 나타났을 때, 호흡과 니밋따가 하나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호흡과 니밋따가 둘이 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고요한 호흡이 훨씬 좋습니다.

호흡이 고요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미세해지면 거기서 더욱 더 마음을 기울여 집중해서 봐야 됩니다.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마음집중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결국 니밋따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빛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빛이 여기저기 나타나는데, 그때 수행자가 빛을 따라 여기저기를 보게 되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쌓아온 사마디가 흩어집니다.

 

사마디가 좋아져서 빛이 몸 전체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 빛은 대상이 아닙니다.

계속 들숨날숨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호흡이 미세해지면서 길든지 짧든지, 그 시작과 끝을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앉아서 볼 수 있다면,

이 사람에게 니밋따가 나타날 확률이 높습니다.

 

 

 

 

니밋따, 즉 심상(心象)은 여러 종류입니다.

어떤 사람에겐 회색일 수도 있고, 다른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수행자 각자의 인식(saññ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수행 중에는 여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속 수행을 해서 들숨날숨과 니밋따가 하나가 되었을 때, 그때는 니밋따를 집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밋따와 들숨날숨이 조금이라도 떨어져서 두 개가 되게 되면, 그때는 니밋따를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니밋따가 떴다고 해도 사실 처음에는 니밋따가 오래가지 않습니다.

만약 니밋따가 사라진다면, 다시 들숨날숨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니밋따의 힘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할 것입니다.

니밋따가 나타났다가 오래 머물지 않고 자꾸 사라진다면, 여러분은 좌선을 하기 전에 한번 서원을 세워보십시오.

 

‘내가 이번 좌선에서 니밋따를 40분 동안 유지하도록 노력하리라.’라고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점점 시간을 늘려 가십시오.

 

그래서 니밋따가 한 시간, 두 시간 동안 머물게 되면, 앞에서 말한 회색은 다시 하얀색으로 변할 것입니다.

 

회색인 상태를 빠리깜마 니밋따(parikamma-nimitta 예비심상)이라고 할 수 있고,

한 두 시간 지나면서 회색의 니밋따가 더욱 하얀 색으로 변하게 되면,

그 상태를 욱가하 니밋따(uggaha-nimitta 익힌 심상)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밋따의 모양과 색깔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 다양함은 수행자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니밋따의 모양과 색깔도 변합니다.

 

그래서 니밋따가 떴을 때는 되도록 마음의 변화가 적은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니밋따가 굉장히 둥글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긴 장작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절대 모양과 색을 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모양이나 색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면, 그것 때문에 니밋따의 모양도 역시 변하게 됩니다.

니밋따가 들숨날숨의 당처에 확고하게 머물기 전까지 모양과 색을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니밋따가 둥글든지 길든지, 그것 전체를 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둥글다고 둥근 것을 돌아가면서 볼 필요도 없고, 길다고 아래위로 다 훑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보게 되면 사마디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그래서 둥글든지 길든지 간에 그것을 다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로지 코끝에 들숨날숨만 주시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들숨날숨을 그 상태에서 계속 보게 되면, 그래서 하얀색의 니밋따를 한 시간 이상 유지하게 되면,

그 니밋따는 새벽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됩니다. 이것을 빠띠바가 니밋따(paṭibhāga-nimitta 대체 심상 혹은 닮은 심상)라고 합니다.

 

대체심상은 어쨌든 반짝 반짝 빛난다고 알면 됩니다.

그래서 빛이 나는 그 상태의 니밋따를 우리는 우빠짜라 사마디(upacāra-samādhi 근접삼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근접삼매에서 계속 사마디를 닦아 사마디의 힘이 좋아졌을 때, 그때 비로소 마음은 대상에 잠겨버립니다.

컵에 작은 돌을 넣었을 때, 그 돌이 물속에 가라앉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대상에 잠겨져버릴 때는 소리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빠나 사마디(appanā-samādhi 본 삼매), 혹은 선정(jhāna) 상태라고 합니다.

근접삼매 상태에서는 수행자들이 자주 바왕가의식(bhavaṅga-citta 존재지속심, 생명연속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바왕가의식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수행자가 대상도 모르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근접 삼매에서 계속 사마디의 힘이 강해졌을 때, 아빠나 사마디(appanā-samādhi), 즉 선정(jhāna) 상태가 됩니다.

이 사마디 상태에서는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동안 바왕가 상태에 떨어지지 않고 선정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접삼매 상태에서는 선정의 요소가 완전히 계발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아빠나 사마디 상태에서는 선정의 요소가 완전히 개발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파욱 사야도 법문



출처 : 무인아제
글쓴이 : 무인아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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