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수경

[스크랩] `염수경(念受經) - 머리말

수선님 2018. 2. 18. 12:34

이제부터는 초기불전연구원의 원장이신 대림스님이 번역하고 1996년에 고요한소리에서

'염수경(念受經) -- 상응부 느낌편'이란 제목으로 출판한 상응부 느낌상응의 경들을 하나씩 올릴까합니다.

 

초기경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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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책은 빠알리경 경장의 상응부 제4권 가운데 느낌편[受相應品]을 번역한 글이다.

빠알리어에서 영어로 옮긴 역자는 스리랑카에서 불자출판협회(B.P.S.)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이 협회를 이끌었던 독일 태생 냐나뽀니까 스님이다.

 

다른 경들의 경우가 그렇듯이

이 경 역시 여러 나라에서 나름대로 제각각 번역이 되어 현재 다양한 번역본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영국 빠알리성전협회(P.T.S.)의 역본(F. L. Woodward, The Book of The Kindred Sayings, Book Ⅳ, Part Ⅱ, Kindred Sayings about Feeling, London, 1927, pp.136∼161.)과

일본어역 남전대장경 (立花俊道 譯, 南傳大藏經 第十五卷 相應部經典 卷四, 六處篇 第二 受相應, 1940, pp.318∼368.)이 있다.

 

여기 소개하는 냐나뽀니까 스님 역본은 상응부 중에서 수상응(受相應, 느낌편) 부분만 뽑아서 번역하고

서문을 붙인 글로서 1983년에 스리랑카 불자출판협회(B.P.S.)에서 법륜(Wheel) 총서로 펴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비교적 최신의 번역으로, 그 간의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최근의 경전 연구 경향과 그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책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현재 그들의 연구수준이나 번역이 꼭 완벽해서라기보다는,

고요한 소리가 앞으로 본격적인 역경에 착수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현재까지 나와 있는

모든 연구 성과들을 일단 섭렵·수렴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가능한 한 원역자의 입장을 존중하고

그 견해를 반영하여 독자들과 더불어 검토·음미해보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경전을 더욱 올바르게 이해하고 또 경전 용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적합한 한글 역어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번에 사용한 냐나뽀니까 스님의 영역본에는 종래의 번역본들과 다른 입장을 취한 참신한 이해와 표현들이 많이 나와 우리들의 경전이해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가능한 대로 영역의 원의를 그대로 살려내려 애써 보았다.

다만 그 중에서 우리에게 너무 생소한 감을 주는 말들은 가급적 피하고 친숙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가령 phassa를 sense impression으로 표현하는 경우 촉(觸)으로 옮기고,

원 번역자의 용어를 주(註)에서 소개하는 방식을 취했다.

 

제목

`염수경' ― 상응부 느낌편 ― 은 영어제목 `Contemplation of Feeling' (The Discourse-Grouping on the Feelings)을 유념하면서 이미 간행한 바 있는 염신경 (금구의 말씀 하나, 고요한 소리, 1991.)과 맥락을 같이 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다.

 

우리의 바람은 이 글이 사념처(四念處) 가운데 수념처(受念處)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며

아울러 신념처에 이어 사념처를 차례로 설명해나가는 목적 또한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원역자의 `들어가는 말'과 `아비담마에서 본 느낌의 위치' 주1) 는

아비담마 불교에서 수(受)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요약 소개한 글로서,

아비담마의 관점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줄 믿는다.

 

또한 이를 통해 남방불교의 독특한 입장도 살펴볼 수가 있겠다.

원역자의 번역이 이루어진 배경이 이러하므로 이 책이 어느 면에서는 아비담마 내지

남방불교 전통에 입각한 번역의 일단이라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아비담마적 해석과 근본 불교적 이해가 일치할 경우 그것은 가장 안심스러운 번역토대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문제는 앞으로 고요한 소리 역경에 있어 최대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중대한 과업이기 때문에 관계 제현의 적극적인 동참을 구하는 바이다.

 

끝으로 노파심에서 한 말 더 붙이자면,

여기 실은 `들어가는 말'이나 `아비담마에서 본 느낌의 위치'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난삽한 느낌만 주게 될 위험도 있으니만큼 그 읽기를 뒤로 미루고

본문 경부터 먼저 읽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백 가지 해설 도움말보다도 부처님의 말씀은 더욱 도움이 되고 해설이 되니까.

 

 

 

일러두기

 

이 책은 수상응(Vedanaa Samyutta) 경의 수가 29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P.T.S.본에 따른 분류이다.

미얀마 6차 결집본은 31편으로 되어 있고 이에 따라 이 번역의 저본인 B.P.S.영역도 31경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동일하며,

다만 같은 경이 둘로 나뉘어 편수가 늘어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P.T.S.본의 합리적 편성을 따르기로 했다.

 

각 문단 첫머리의 항목 번호도 저본에는 없는 것인데 P.T.S.원본의 것을 취해서 넣었다.

게송 뒤에 붙은 번호 역시 마찬가지다.

 

저본인 B.P.S.영역본에는 영어권 독자들의 취향에 맞춰 반복 문구는 거의 모두 생략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생략을 피하고 아무리 지루한 감이 있어도 꼼꼼히 다 챙겨 담기로 했다.

 

P.T.S.본도 약자 처리로 생략한 곳이 많은데,

그런 경우는 여기선 다 살리기로 하고 다만 제18경 5절은 빠알리 원문의 표기대로,

27경은 주에서 밝힌 이유로 생략했다.

 

 

들어가는 말

 

 `느낌이 세상 전부인 것을!'

 

어느 독일 시인의 감개 어린 말이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인간의 삶에 있어 느낌이 얼마나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요소인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을 더 늘리고 괴로운 느낌은 줄이려는

밑도 끝도 없는 노력에 평생을 다 바치고 있다.

 

평범한 생활의 단순한 기쁨에서부터 야심가들의 권력욕이나 위대한 예술가들의 창조적 희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인간적 야망과 투쟁도 따지고 보면 이 한가지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소망스런 즐거움이야말로 다다익선일 것이다.

즐거운 느낌에 수반하는 정서적 만족을 그들은 행복으로 여기니까.

만일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에는 천박한 것에서 세련된 것에 이르기까지 가지수도 천차만별이 되고,

강도(强度)도 경우에 따라 제각기 달라서 때로는 대단히 강렬한 행복도 있게 될 것이다.

 

또 정서라는 것 역시 여러 가지로 의지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의지작용은 다시 행동을 낳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쾌락의 극대화'가 추구될 수밖에 없다.

 

인류는 그동안 이 원칙에 충실하다보니 더러는 꽤 영웅적인 행각도 벌였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비겁하고 파렴치한 일을 훨씬 더 많이 저질러온 것이 사실일 것이다.

 

즐거운 느낌을 누릴 방법을 공급해줄 양으로 생산업과 서비스업이 수없이 생겨났고

그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과 응용과학 역시,

날로 커져가고 있는 감각적 향락과 안일에 대한 수요를 채우는 일에 온통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정서적, 감각적 행복의 조달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 공포와 근심 등 괴로운 느낌마저도 자기네가 해결해 내겠다면서 온갖 수상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처방전을 궁리하느라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간단히 살펴본 것만으로도 이제

"일체사가 느낌에 귀결된다"

는 부처님의 간명한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느낌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올바로 인식하고 나면 어째서 느낌(vedanaa)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이 스무 가지 유신견 주2) 에 들게 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느낌의 쌓임을 자아로 간주할 때 유신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아직 첫 단계의 외톨이일 때에는 전혀 색깔이 없는 상태여서

대상이 주는 충격을 즐겁다, 괴롭다, 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식으로 떠올리는 데서 그친다.

그러다가 감정적 요소나 의도적 요소들이 첨가되면

비로소 욕망, 사랑, 싫음, 미움, 걱정, 두려움 또는 왜곡된 견해 따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과정으로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혼합물들이 결코 느낌들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하루 종일 받는 수많은 인상 중에서 미약한 것들은

대부분 매우 희미하고 짧은 동안의 느낌을 떠올리는 데서 멈추어 버릴 뿐,

더이상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이로 보아 우리가 느낌을 `맨 주3) 느낌(bare feeling)'의 단계에서 멈추게 만들 수 있다는

심리학적 가능성이 입증되는 것이며,

따라서 마음챙김과 자기제어의 힘만 빌릴 수 있으면 아무리 자극적인 느낌일지라도

그것이 감정으로 발전하지 않고 맨느낌에서 그치도록 의도적 작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는 실제 경험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만큼 끝없는 연기의 유전도

느낌[受]의 대목에서 멈출 수가 있고,

느낌의 뒤를 갈애가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내재적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느낌이야말로 해탈의 길에서 주요한 관건이 되는 요소임을 깨닫게 되며,

이 때문에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느낌에 대한 수관(隨觀)'이 효과적인 수행방편으로

높이 평가되어 온 것일 것이다.

 

들어가는 말 (2)

 

느낌에 대한 수관은 사념처(四念處: 身念處, 受念處, 心念處, 法念處) 가운데 하나이며,

통찰력의 증진을 목표로 하는 관법 수행(위빠싸나)을 통하여 실천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느낌에 대한 수관을 일상생활에 잊지 말고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느낌이 선하지 못한 감정으로 바뀌려 할 때에는 반드시 놓치지 말고 챙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수행할 욕심에서 일부러 느낌을 만들어 내고자 애쓸 필요는 없고

다만 느낌이 일어날 때에만 그것을 마음챙겨 관찰하면 충분할 것이다.

마음이 깨어있고 고요해서 우리가 느낌을 그 시작단계에서 분명하게 주시할 수만 있다면,

그런 기회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을 터이니까.

 

느낌 수관에서 가장 요긴한 것은, 느낌이 생겨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느낌을 마음챙겨 알아차리고

`이것은 즐거운 느낌, 이것은 괴로운 느낌, 이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라고 각각 또렷이 구별해내는 일이다.

`뒤섞인 느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이 짧게 지속되더라도 그 느낌에 대해서는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동안 내내 유의하여 마음챙김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느낌이 꺼지는 종결점을 꾸준히 주시하다보면

차츰차츰 그 순간이 더 분명하게 포착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감정, 생각, 의지 따위들을 훨씬 용이하게 옭아맬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멈추게도 할 수 있게 된다.

 

보통 때는 이들 감정들이 느낌에 따라붙어 습관적으로 어느결에 엉겨버리곤 한다.

즐거운 느낌은 으레 습관적으로 쾌락과 욕구에 연결되며 괴로운 느낌은 혐오에,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립적 느낌은 지루함과 혼미에 연결되며

또한 그릇된 견해의 배후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느낌의 생멸(生滅)을 관하는 데에 순수한 `맨주의'(bare attention)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들 오염물들이 섞이지 못하도록 붙들어 둘 수 있으며 혹시 오염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 본색을 드러나게 만들어,

그냥 두었으면 강력해질 뻔했던 것들도 꼼짝없이 주저앉게끔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느낌을 부풀었다 터지는 거품으로 관찰하게 되면 갈애 또는 혐오와 느낌과의 연결관계는 점점 약해져서, 끝내는 그 고리마저도 끊어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수행해 가면, 좋고 싫은 것에 대한 집착도 줄어들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비와 연민이라든가 지족(知足), 인욕, 관용 같은 한결 고상한 감정과 덕성들을 키울 수 있는

내면 공간은 점점 더 넓어지게 될 것이다.

 

이 관법 공부에서는 느낌에 티끌만큼이라도

`나' 또는 `내것' 따위의 관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느낀다(고로 나는 존재한다)" 따위로 `나'라는 개념을 붙여선 안된다.

아울러 "기분이 참 좋다. 난 정말 행복해!"라는 식으로 느낌의 소유주가 된 듯한 생각이 있어서도 안된다.

즐거운 느낌을 더 누리고자 할 때엔 갈애가 생겨난다.

"나는 괴로워. 난 정말 불행해!" 하면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때에는 혐오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나'니 `내것'이니 하는, 사실과 다른 그릇된 견해를 탈피해서,

우리는 느낌들이 한낱 조건지워진,

덧없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올바로 알고 있어야[正知, sampaja~n~na]만 한다.

 

성성한 마음챙김이 빈틈없이 유지되고 있어야 하며,

존재하는 것은 단지 이러이러한 느낌의 정신적 작용일 뿐이라는

그 엄연한 맨사실 자체에 마음챙김을 집중해야 한다.

 

염처경에서도 말하듯이 올바른 앎[正知]은 통찰과 마음챙김[正念],

이 두 가지의 계발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에도 쓰여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느낌에 대해, 어떤 주체가 있어 그 느낌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심지어 명상 중에도 그런 짓을 하는 한, 관법 수행에 진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느낌을 `나'니 `내것'이니 하는 식으로 자신과 연결시키지 않고 올바로 알아차리는 일은

느낌을 일어나게 하는 신체적인 자극과 느낌 자체를 명확히 분간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그 자극에 뒤따라 일어나는 정신적 반응과 느낌과도 구분하게 해준다.

 

그렇게 되면 수행자는 주의력을 오로지 느낌에만 집중시킬 뿐 엉뚱한 데로 빠져버리는 일이 없게 된다.

`느낌에서 느낌을 주시한다'라고 말한 의취가 바로 이것이다.

수행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수행자는

`정신.물질을 분명히 식별하는(naama­ruupa­pariccheda) 통찰지' 주4) 를 성취하는 쪽으로 성큼 다가선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진전하려면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반드시 그 느낌이 매순간 생멸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마음챙겨 관찰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렇게 공부해 나가면 무상(無常)을 점점 더 깊이 체험하기에 이르는데,

이와 같은 체험이야말로 구경해탈에 들어서는 관문 중에 하나인 것이다.

 

관법 수행을 하는 중에, 느낌이 사라지는 순간을 더욱 예리하게 주목하게 되면 될수록

명상자는 그 마음에 느낌의 무상성을 깊이 각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느낌 이외에도 다른 정신적 육체적 변화 과정에서도 얻을 수 있는데,

이 경험이 점점 익어가면 멸괴지 주5) 가 나타난다.

그 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자신이 더 깊은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길에 올바로 들어섰음을 알게 될 것이다.

 

[주해]

4) 정신과 물질을 분명히 식별하는 통찰지 : 관법 수행(vipassanaa)을 통해서 증득하게 되는 경지의 하나. 빠알리 주석서에는 관법 수행의 향상단계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1. 물질(ruupa)에 대한 분명한 식별,

2. 정신(naama)에 대한 분명한 식별,

3. 정신과 물질 둘 다에 대한 분명한 식별,

4. 정신과 물질이 조건지워졌음을(pa.ticcasamuppaada) 앎,

5. 정신과 물질이 조건지워졌기에 무상이요, 고(苦)요, 무아임을 앎.

 

5) 멸괴지(滅壞智, bhaaaga-~naa.na): 모든 형태의 존재의 붕괴를 보는 지혜. 무상 고 무아를 거듭 관하면 마음챙김과 올바른 알아차림[正念正知]이 예리해져 신체적 정신적 형성이 섬광처럼 분명해지며 이 단계에서 이들 형성물의 붕괴 해체상도 두드러지게 된다.

 

느낌 수관은 고의 쇠사슬 중 가장 약한 부분을 끊어내는 데에 유효한 도구임은 분명한데

위빠싸나 수행법을 닦을 때에 그 힘이 최대로 발휘된다.

또 그렇게까지 본격적이지는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에 대해 고요히 숙고해 보거나, 아니면 나중에 되돌아보기만 하여도, 느낌 수관은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하다보면 머지 않아 느낌과 감정이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목전의 감정을 바라보며 숙고하거나 지내놓고 돌이켜 숙고해보기만 해도,

다음 번에 같은 느낌이나 감정이 생겨났을 때 그것들을 좀더 확연히 알아차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아서 날뛰거나 의기소침해지는 등

지나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바라보거나 되돌아보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마음의 견고함과 평정상태가 차차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 수관은 그것만을 지속적으로 해서는 안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느낌이 일어날 때 어떻게 감정이 뒤따라 일어나는지 그 구조를 잘 알게 될 때까지,

적절한 상황에서 적당한 기간 동안만 닦으면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조복할 수 있는 힘이 저절로 커지게 된다.

혹 이처럼 느낌과 감정에 의식을 집중하다가는 너무 냉담해지거나 정서적으로

메말라 버리지 않을까하고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기우이다.

 

오히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앞에서 말한 더욱 고상한 정서를 향해 환하게 열리게 될 것이다.

느낌 수관이 따뜻한 인간관계를 가로막지는 않으며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름지기 집착의 열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뿐이며 이러한 체험은 이 고(苦)의 세계에서

그것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꽤나 큰 충족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매일매일 이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서원 더욱 크게 익어가리니

느낌에 대한 수관을 통해

저 드높은 뜻 성취되기를

이 마음 고에서 완전히 해탈하기를!

 

불기 2537(1983)년 정월 스리랑카 캔디에서 냐나뽀니까 합장

 

 

출처 : nirvana
글쓴이 : 무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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