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 한적한 곳
2.
어느 때 한 비구가 세존을 뵈러 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존자시여,
제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있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세존께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그것이다. 이 셋을 세존께서는 설하셨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또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고 설하셨다.
' 존자시여, 여기서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4.
잘 말했다, 비구여. 잘 말했다!
나는 세 가지 느낌을 가르쳤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 셋을 나는 가르쳤다.
또 한편으로 비구여, 나는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 뒤의 말은 모든 조건 지워진 현상[諸行, sa.nkhaaraa] 주21) 의 무상함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제행(諸行)이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그라지기 마련이며,
열정이 식기 마련이며, 그치기 마련이며,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니라.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니라.
5.
비구여, 나는 더 나아가서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 주22) 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初禪)에 들면 말(vaacaa)이 그치며,
이선(二禪)에 들면 생각 일으킴(vitakka)과 추론적 사유(vicaara) 주23) 가 그치며,
삼선(三禪)에 들면 희열(piiti)이 그치며,
사선(四禪)에 들면 입출식(入出息)이 그치며,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色想, ruupasa~n~naa]이 그치며,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想受滅)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貪]이 그치고 성냄[瞋]이 그치고, 미망[癡]이 그친다.
6.
비구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 주24) 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고 성냄이 가라앉고, 미망이 가라앉는다.
7.
비구여, 무릇 여섯 가지 고요함 주25) 이 있나니 ,
초선을 이룬 자에게서는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원주16】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원주 16. `고요해짐'(pa.tippassaddha)의 절에선 네 가지 무색정(無色定)이 언급되지 않는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 네 가지 정은 `상수멸'에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수멸을 성취하는데 이 네 가지 정(定)은 조건이 되니까).
주해 21) 원역자는 all conditioned phenomena란 표현을 쓰고 있다.
`모든 조건 지워진 현상'으로 옮겼는데 아래에서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제행'으로 쓰겠다.
주해 22) 그침: nirodha의 역. 보통 멸(滅)로 옮기는데,
영어에서는 cease로 옮김. 원뜻은 억지(抑止)라는 뜻에 가깝다.
주해 23) 생각 일으킴은 vitakka의, 추론적 사유는 vicaara의 새김.
영역자가 쓰고 있는 말은 thought-conception과 discursive thinking임.
고요한 소리 보리수 잎에서는 생각(thought)과 숙고(contemplation) 등으로 옮겼음.
주해 24) 가라앉음: vuupasamaa의 역. 보통 적정(寂靜) 정지(靜止) 등으로 옮김.
가라앉는다는 뜻인 바, 앞에 말한 nirodha가 억지(抑止)의 단계라면,
이제 억눌려 정지된 것이 그 타성을 잃고 가라앉아 진정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원역자는 이를 stilling으로 옮긴 것 같다.
주해 25) 고요함: passaddhi의 역. 칠각지의 다섯 번째 요소로 보통 경안(輕安) 또는 제(除)로 번역됨.
진정된 다음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뿐하고 평안함을 말한다.
영역자는 quietening으로 옮기고 있는데 빠알리어 사전들은 대개 calmness, tranquillity 등을 쓰고 있다.
일단 고요함이라 새기기로 한다.
XII. 허공 (1)
3.
비구들이여, 허공중에는 갖가지 바람이 불고 있다.
동에서, 서에서, 북에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먼지 섞인 바람, 먼지 없는 바람, 더운 바람, 찬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센 바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이 몸속에서도 갖가지 느낌들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저 위의 허공중에는 온갖 바람들이 불고 있어,
동에서 오는가 하면 서에서도 오고, 북에서 오는가 하면 또 남에서도 불어닥치고, 1
먼지 섞인 바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찬바람인가 하면 더운 것도 있으며,
거센 바람인가 하면 부드러운 바람도 불고 ― 가지가지로 바람이 불고 있다. 2
그와 같이 여기 이 몸속에서도 가지가지로 느낌이 일어나나니,
즐거운 느낌들, 괴로운 느낌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라. 3
그러나 비구가 열심이어서 분명히 살피어 다시 태어남의 기반을 허물기에 열심이라면
마침내 모든 느낌을 두루 통찰하는 현자(賢者)가 되리니. 4
그는 느낌을 두루 통찰함으로써 바로 이 생에서 번뇌가 다하여,
몸이 무너질 때엔 법에 확고히 주하며 헤아림으로는 미치지 못할 지혜의 달인일지니. 5
13. 허공 (2) 주26)
비구들이여, 허공중에는 가지각색의 바람이 불고 있다.
동에서, 서에서, 북에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먼지 섞인 바람, 먼지 없는 바람, 더운 바람, 찬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센 바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이 몸속에서도 가지각색의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주해 26) 앞의 경과 동일한데, 뒤의 게송만 없다.
XIV. 객사(客舍)
비구들이여, 객사에는 동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고, 서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며, 북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며, 남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한다. 무사계급 사람들이 와서 묵기도 하고, 바라문들이 와서 묵기도 하며, 평민들이 와서 묵기도 하며, 노예들이 와서 묵기도 한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몸에도 여러 종류의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XV. 아난다 (1) 주27)
2.
어느 때 아난다 장로가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존자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
들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4.
아난다여, 이 셋이 느낌이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것을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 챙김[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5.
아난다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6.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7.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고요함에 대하여 가르쳤다.
초선을 이룬 자에게선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고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주해 27) P.T.S. 빠알리어본의 원제명은 Santakam, 영역본은 Property라 옮겼고,
일역본은 이것이 내용과 무관하다해서 止息이라 제하였다.
본경과 다음경 6절에 vuupasamo는 止息이라 옮기고 어근 s#am에서 온 것으로 봐 이를 제목으로 취했다는 설명이다. 본문에서는 원역자 냐나뽀니까 스님의 용례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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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I. 아난다 (2)
2.
어느 때 아난다 장로가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은 아난다 장로에게 세존께서 물으셨다.
느낌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냐?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이냐?
위험함이란 무엇이냐?
벗어남이란 무엇이냐?
4.
존자시여,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봇도랑 내는 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존자시여, 부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친히) 밝혀주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게 되면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그러면 아난다여, 듣고 잘 유념하도록 해라, 내가 말 할테니.
네, 존자시여. 아난다 장로가 대답했다.
5.
세존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6.
아난다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7.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8.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고요함에 대하여 가르쳤다.
초선을 이룬 자에게선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선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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