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수경

[스크랩] 염수경(念受經) - XVII.~ XX.

수선님 2018. 2. 18. 12:36

XVII. 비구 다중(1)

 

2.

어느 때 여러 비구들이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3.

존자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들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4.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5.

비구들이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6.

비구들이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7.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고요함이 있나니,

초선을 이룬 자에게서는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XVIII. 비구 다중(2)

 

2.

어느 때 여러 비구들이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은 비구들에게 세존께서 물으셨다.

느낌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냐?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이냐?

위험함이란 무엇이냐?

벗어남이란 무엇이냐?

 

4.

존자시여,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봇도랑 내는 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존자시여, 부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친히)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게 되면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5∼8.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난다.

 

(앞의 경과 같이 상세히 설하시다.)

 

XIX. 목수 빤짜깡가【원주17】

 

2.

어느 때 목수 빤짜깡가가 우다이 장로를 뵈러 갔다. 가서 공손히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여쭈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의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들이 세존께서 가르치신 세 가지 느낌입니다."

 

4.

이 말을 듣고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寂靜)하고도 오묘한 유(類)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5.

다시 우다이 장로가 목수 빤짜깡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두 번째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하고도 오묘한 유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6.

세 번째로 우다이 장로가 목수 빤짜깡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 번째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하고도 오묘한 유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다이 장로는 목수 빤짜깡가를 설복시킬 수 없었고,

목수 빤짜깡가도 우다이 장로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7.

아난다 장로가 우다이 장로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 얘기를 듣게 되었다.

 

8.

그러자 아난다 장로는 세존께 나아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아난다 장로는

우다이 장로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아뢰었다.

 

9.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목수 빤짜깡가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우다이 비구의 주장은 옳았다.

마찬가지로 우다이 비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목수 빤짜깡가의 주장 또한 옳았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원주18】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느니라.

 

10.

참으로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렇듯 제각기(의 근기에 맞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다툼을 벌여 신랄한 독설로 서로 상처를 주면서 논쟁과 논박으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명되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이좋게 화합하여 언쟁하지 않고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 할 것이다.

 

11.

아난다여, 여기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觸]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아난다여, 이것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아난다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겨나는[緣已生]

즐거움(sukkha)과 기쁨(somanassa)을 관능적 쾌락 주29) 이라 부른다.

 

12.

그런데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말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아주 멀리하고,

도덕적으로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不善法]을 멀리한 채,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불선법을) 멀리 떨쳐낸 데서 오는[遠離生]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관능적)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즐거움이니라.

 

원주 17. 이 경은 중부 제59경 `많은 종류의 느낌'과 내용이 동일함.

원주 18. 제22경 참조.

주해 29) 관능적 쾌락: Kaamasukha. 한역은 欲樂. 영역은 sensual pleasure.

 

 

XIX. 목수 빤짜깡가 2

 

13.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생각 일으킴[尋]과 추론적 사유[伺]가 가라앉으면서 제이선에 들어 머무는 바,

그 선에는 내면적 확신이 있고, 그리고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단일성이 있으며,

삼매에서 생기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의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4.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온전히 알아차리는 채 평온에 머문다.

안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자들이 일컫는바 `평온한 채로 마음 챙겨 즐거움에 머문다'고 하는 제삼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5.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비구가 있어 즐거움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으며, 이미 그 이전에 기쁨과 슬픔은 사라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 평온에 기인한 마음 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사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6.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색에 대한 인식[色想]을 완전히 초월했으며,

장애 주30) 에 대한 인식도 사라졌고,

그 밖의 다양한 인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무한하구나, 허공은'하며 공무변처(空無邊處 aakaasana~nc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7.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하구나, 식(識)은'하며 식무변처(識無邊處, vi~n~naa.na~nc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8.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없구나, 아무것도'하며 무소유처(無所有處, aaki~nca~n~n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9.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nevasa~n~naanaasa~n~n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20.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원주19】

 

21.

그런데 아난다여, 때로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여보게 친구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한다네." 주31)

 

원주 19. 주석서: 제사선부터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상태다.

그러나 이 무덤덤한 느낌도 `즐거움'으로 불린다. 평화롭고 고상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감각적 욕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과 여덟 가지 정(定)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느껴지는 즐거움'이라 부르고, 상수멸(想受滅)의 상태는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라 한다.

 

따라서 느껴지는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든

둘 다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란 뜻에서 확실히 즐거움인 것이다.

 

증지부 아홉의 장 제34경에서 사리불 존자는 단호히 말한다.

"열반은 행복이다. 벗이여, 열반은 행복이다. 진실로!"

그러자 우다이 비구가 물었다.

"느낌이 없는 터에 어떻게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리불 존자가 대답했다.

"거기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그것이 바로 행복이네, 벗이여."

그 경의 뒷 이야기를 본 경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열반이 행복이란 데 대해선 증지부 여섯의 장 제100경 역시 참조할 것.

 

주해 30) 장애(pa.tigha): 한역은 유대(有對). 걸리는 것 또는 저항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일체 감관에 대한

대경을 의미함. 또 윤리적 면에서 성냄[瞋心]을 의미하기도 함.

 

주해 31) 중부 , 59경과 내용이 같음.

 

XX. 비구들(2, 3, 5, 6, 18, 36, 108가지 느낌들)|

 

3.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세 가지로도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4.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다툼을 벌여 신랄한 독설로 서로 상처를 주면서 논쟁과 논박으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나는 방편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은 사이좋게 화합하여 언쟁하지 않고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 할 것이다.

 

5.

비구들이여, 여기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 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즐거움과 기쁨을 관능적 쾌락이라 부른다.

 

6.

그런데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말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여, 여기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아주 멀리하고, 도덕적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을 멀리한 채,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멀리 떨쳐낸 데서 오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관능적)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즐거움이니라.

 

7.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면서 제이선에 들어 머무는 바,

그 선에는 내면적 확신이 있고 그리고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단일성이 있으며,

삼매에서 생기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8.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마음 챙기고 온전히 알아차리는 채 평온에 머문다.

안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자들이 일컫는바

`평온한 채로 마음 챙겨 즐거움에 머문다'

고 하는 제삼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9.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비구가 있어 즐거움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으며, 이미 그 이전에 기쁨과 슬픔은 사라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 평온에 기인한 마음 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사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0.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색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했으며, 장애에 대한 인식도 사라졌고,

그 밖의 다양한 인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무한하구나, 허공은'하며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한결 즐겁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1.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하구나, 식은'하며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2.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없구나, 아무것도'하며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3.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4.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인식과 느낌의 그침)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15.

그런데 비구들이여, 때로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여보게 친구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한다네"라고.

 

출처 : nirvana
글쓴이 : 무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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