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수경

[스크랩] 염수경(念受經) - I~V.

수선님 2018. 2. 18. 12:35

I. 삼매

 

3.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들이,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니라.

 

4

삼매에 들어 분명히 알며 마음 챙기는 부처님의 제자는 느낌【원주1】을 알고 느낌(이 어떻게 비롯되는지) 그 기원【원주2】을 알며 1 어디서 느낌이 그치는지,【원주3】

그리고 느낌의 멸진(滅盡)에로 이끄는 길【원주4】 을 아느니라.

느낌의 멸진에 다달았을 때 비구는 갈증이 풀려 열반을 성취【원주5】한다. 주해1) 2

 

주해1) 열반: 흔히 쓰이는 대로 죽음에 든다는 뜻이 아니고, 살아있는 채 불교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성취한다는 뜻.

 

[원주]

1. 주석서에서 주석하기를: 그는 고성제의 방식에 의해 느낌들을 이해한다.

2. 주석서에서 주석하기를: 그는 집성제의 방식에 의해 느낌을 이해한다.

3. 주석서에서 주석하기를: 그는 멸성제의 방식에 의해 느낌을 이해한다.

4. 주석서에서 주석하기를: 그는 (멸에 이르는) 도성제의 방식으로 느낌들을 이해한다.

5. 반열반(parinibbuto): 완전하게 꺼진.

논서에서 주석하기를: 번뇌를 완전히 꺼버림으로 써(kilesa-parinibbaanaaya)

 

II. 행복

 

3.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들이, 비구들이여, 곧 세 가지 느낌이니라.

 

4.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마저도,

(또) 내가 겪든 남이 겪든 주8) 그 어떤 느낌에 접하든 간에,【원주6】 1

 

그 모두를 괴로움으로 아나니,

거짓되고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

그것들이 부딪치고 또 부딪쳐왔다가

사라져 가는 양을 지켜봄으로써【원주7】

그는 느낌으로부터 초연함, 즉 열정에서

벗어남[離欲]을 얻는다. 2

 

주해8) 원문은 `ajjhatta~nca bahiddhaa ca.' P.T.S.영역본과 일역본에서는 `안으로나 밖으로'로 새김.

원주6). 모든 종류의 느낌에 관하여. 제22경 참조.

원주7). phassa phassa vaayam disvaa 논서는 달리 해석한다. 이 문구를 ~naa.nena phusitvaa phusitvaa로 바꾸어 "생멸에 대한 지식의 방식으로 (그들을) 되풀이해 경험하며"로 해석함. 이 구절은 숫따니빠따 739게에도 나오는데 거기엔 한 줄이 더 첨언되어 있다.

 

III. 버림

 

3.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들이, 비구들이여, 곧 세 가지 느낌이니라.

 

4.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원주8】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저항(염오)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지(無知)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5.

비구가 즐거운 느낌을 대하여 탐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렸고,

괴로운 느낌을 대하여 저항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렸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대하여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렸다면,

그 때 그는 고질적 잠재성향에서 벗어나 올바로 보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다음 생에 다시 몸을 받게끔 묶는) 족쇄를 풀어버렸으며,

아만【원주9】을 철저히 꿰뚫어보아 고(苦)를 끝낸 것이다.

 

6.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은 알지 못한다면 그는 탐욕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1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은 알지 못한다면 그는 미움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2

 

그리고 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주9), 대지혜자 그것을 평화롭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 또한 맛들여 매달린다면, 그는 결코 고(苦)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라. 3

 

그러나 비구가 열심이어서 분명히 알아차리는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

그는 모든 느낌의 본성을 꿰뚫게 될 것이다. 4

 

또 그렇게 됨으로써 그는 바로 이생에서 번뇌가 다할 것이며,

지혜가 성숙하고, 법의 길에 확고하며

(언젠가) 수명이 다하여 몸이 무너질 때엔 어떤 헤아림으로도 개념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은 없으리라. 5

 

 

주해9) 영역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여기서부터는 거의 대부분 neutral feeling이라 옮기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원문에 충실하여 계속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이라 옮기기로 한다. 그것은 neutral이 단순히 평면적인 의미에서 "중간의, 중립의" 뜻으로 이해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71쪽의 목수 빤짜깡가의 얘기를 참작할 필요가 있다.)

 

원주8). 고질적 잠재성향: anusaya를 영역에서는 the underlying tendency로, 한역에서는 使隨眠으로 옮긴다. 여기서는 niranusaya의 뜻으로 고질적 잠재성향으로 옮겼다.

 

원주9). `자만'(conceit)은 특히 아만(asmimaano) 즉 지 정 양면의 인격체의 대한 믿음[有身見].

 

IV. 바닥없는 구렁텅이

 

3.

비구들이여,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가

'큰 바다속에 바닥없는 구렁텅이【원주10】가 있다'

고 말한다면 그는 실제로 있지도 않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원주11】

 비구들이여,

그 바닥없는 구렁텅이는 차라리 괴로움으로 찬 육체적 느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4.

배우지 못한 범부가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 사람을 일러 바닥없는 구렁텅이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그 속에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는,

배우지 못한 범부라 해야 할 것이다.

 

5.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원주12】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도 않는다.

그를 일러 그 바닥없는 구렁텅이를 감내하며 그 속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내는,

참으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라 부른다.

 

6

고통스런 육체적 느낌이 목숨을 앗아갈 듯 일어나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

그는 괴로움을 당하면 부들부들 떤다.

그는 울부짖고 큰소리로 통곡한다.

허약하고 무력한 사람, 그는 그 구렁텅이에 맞서지 못하며, 발판도 마련하지 못한다. 주10) 1

 

그러나 바로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데도 떨지 않고,

괴로운 신체적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견뎌내는 사람,

그는 진실로 그 구렁텅이를 버티어 낼 뿐만 아니라 그 깊은 속에서도 능히 안전한 발판을 확보한다. 2

 

주해10) 우드워드(F.L.Woodward)는 "구렁텅이를 벗어나오지도 굳은 땅에 도달하지도 못한다."로 옮기고 있다.

 

원주10). paataala. 심연, 험애(險崖).

 

원주11). 주석서는 말을 바꾸어 풀기를,

"일반의 믿는 바에 따르면,

바다속에는 물살로 패여진 매우 깊은 심연이 있어서

용신(龍神)과 같은 수중 동물의 서식처가 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이 심연은 안락한 주처로 생존의 기반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이 심연을 바닥없는 구렁텅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 되고,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의 뜻이 적절하지도 명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육체적 존재와 불가분인 육체적 고통을 두고

`바닥없는 고통의 구렁텅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적 고통이란 측량할 길없는 윤회의 한 부분이 되니까."

 

원주12). 주석서에서 설명하되: 이 경에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란 말은

첫째로는 예류과에 이른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또한 예리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지성으로써 어떤 느낌이 일어나든 거기에 끄달리지 않을 수 있는 선정수행자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느낌을 꿰뚫고 있다고 보아야 할 테니까). 주석서의 소(복주).

 

V.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3.

비구들이여, 다음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즐거운 느낌들을 괴로움으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들을 가시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을 무상한 것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4.

비구가 즐거운 느낌들을 괴로움으로 볼 줄 알며

괴로운 느낌들을 가시로 볼 줄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을 무상한 것으로 볼 줄 안다면 그는 바로 보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몸을 받게 하는) 족쇄를 풀었으며, 아만을 철저히 꿰뚫어보아 고를 끝낸 것이다.

 

 

행복에서 고통을 읽어내며 고통스런 느낌을 가시처럼 여기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저 평화로운 느낌에서 무상을 인식하는 사람

이들 느낌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그러한 비구야말로, 진실로 올바른 안목을 지닌 것이다.

또 느낌들을 꿰뚫어 보았기에 그는 바로 이생에서 번뇌가 다하며,

지혜가 무르익고 법의 길에 확고하여 언젠가 수명이 다해서 몸이 무너질 때엔

어떤 헤아림으로도 개념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은 없을 것이다.

 

출처 : nirvana
글쓴이 : 무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