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을 통찰하는데 도움 되는 여러 성구들 (초기경에서 발췌)
느낌들이란 참으로 거품과 같나니 -- 상응부 , 온상응(蘊相應), 제95경.
일체사는 느낌에 귀결된다. -- 증지부 , 여덟에 관한 모음, 제83경.
모든 느낌들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간에,
안에서든 밖에서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우월하든 간에,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나니.
-- 상응부 , 온상응, 제59경 무아상경(無我相經) 주34).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있는 동안에는 즐겁지만 변할 때는 괴롭고,
괴로운 느낌은 그것이 있는 동안은 괴롭지만, 변하면 즐겁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것을 알면 즐겁고 모르면 괴롭다.
중부 , 제44경, 유명소경(有明小經).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 느낌을 자아라고 간주하지도 않으며,
자아를 느낌의 소유주로 간주하거나, 느낌이 자아 안에 포함되어 있다거나,
자아가 느낌 안에 포함된다고도 간주하지 않는다.
이렇게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느낌이라는 올가미에 걸리지 않았으며 안팎의 올가미들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해야 될 것이다.
그는 언덕을 보았으며, 저편 언덕(피안)을 보았으며, 괴로움에서 완전히 해탈했다고 나는 말한다.
--상응부 , 온상응, 제117경.
느낌을 통찰하는데 도움 되는 여러 성구들 2 (증지부에서)
비구들이여,
느낌들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연기를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다양함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이 익어 맺는 결실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그침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그침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이미 설했다.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설했는가?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인가?
이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어떤 것이 느낌들을 일어나도록 조건 지우는가?
촉이 느낌들을 일어나도록 조건 지운다.
어떤 것이 느낌들의 다양함인가?
세간적 즐거운 느낌이 있고, 출세간적 즐거운 느낌이 있다.
세간적 괴로운 느낌이 있고, 출세간적 괴로운 느낌이 있다.
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고,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나니 이를 일러 느낌들의 다양함이라 한다.
어떤 것이 느낌들이 익어 맺는 결실인가?
이 느낌 또는 저 느낌에서 생긴 개아적 존재가 그 결실이다.
이때 그 존재가 띠는 복덕성 또는 비복덕성은 느끼는 당자가 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느낌들의 그침인가?
촉의 그침이 느낌의 그침이다.
그리고 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正道]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선정이다.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이
느낌을 알고,
느낌들을 일어나도록 조건 짓는 것을 알고,
느낌의 다양함을 알고,
느낌이 익어서 맺는 결실을 알고,
느낌의 그침을 알고,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을 알 때에 그는 통찰력이 있는 성스런 삶을 아는,
다시 말해 느낌의 그침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 증지부 , 여섯의 모음, 제63경.
느낌을 통찰하는데 도움 되는 여러 성구들 3 (증지부에서)
이들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나는 설시(說示)하였나니
(이들은 저) 명석한 사문이나 바라문들조차 논박 못하고,
흠내지 못하며 비난하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떤 연유로 나는 이 성스러운 진리를 설할 수 있었는가?
여섯 가지 기본요소[六界] 주35) 를 반연하여 모태에 듦이 있고[入胎, gabbhassa-avakkanti],
모태에 들게 되면 명색(名色, naama-ruupa)이 있게 되고,
명색을 반연하여 육입(六入, salaayatana)이,
육입을 반연하여 촉(觸, phasso)이,
촉을 반연하여 느낌(受, vedanaa)이 있게 된다.
이제 그 느끼는 자【원주20】를 위해(vediyamaanassa)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요,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요,
이것이 괴로움의 그침이며,
이것이 괴로움의 그침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증지부 , 셋의 모음, 제61경.
주해 35) 여섯 가지 기본요소: 지 수 화 풍 공(空) 식(識).
원주 20) 주석에는 이를, 느낌을 이해하는 당자로 규정하고 염처경 중 수념처의 시작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다르게는 `느끼는 자'란 일체의 고를 느끼고 그로부터 해탈을 구하는 중생들을 언급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느낌을 통찰하는데 도움 되는 여러 성구들 4 (중부 146경에서)
"비구니들이여, 여기 기름 등불이 타고 있다고 칩시다.
그 기름도 심지도 불꽃도 불빛도 모두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기름과 심지와 불꽃은 무상해서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 불빛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는 법이 없다'
고 말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그 기름과 심지와 불꽃이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그 불빛 또한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니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반연하여 느끼는
즐거움, 괴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제각기 나름대로 조건을 반연하여 그에 상응하는 느낌들이 생겨나고,
조건들이 멸하면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느낌들도 멸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비구니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참으로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를 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중부 , 제146경, 난다까의 법문.
느낌을 통찰하는데 도움 되는 여러 성구들 5 (중부 74경)
악기웨사나여,
즐거운 느낌은 무상하고 조건 지워진 것이며,
연이생(緣已生)이며, 무너지기 마련이고, 희미해지기 마련이며, 바래기 마련이고 그치기 마련이다.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그러하다.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이것을 알게 되면
즐거운 느낌에 대해 싫증나게 되며,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도 싫증나게 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도 싫증나게 되느니라.
싫증내기에 욕망이 사라지게[離欲] 되고 욕망이 사라짐으로써 해탈하게 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고 아는 지혜가 생겨난다.
이제 그는 명확히 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악기웨사나여,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비구는 그 누구에게도 편들지 않고,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대로 언어를 취해서 쓰되 (세상 사람들처럼) 착각하지 않고 쓴다.
-- 중부 , 제 74경, 장과경(長爪經).
주석서에 나타나는 성구들 (장부 제1, 범망경의 복주서에서)
주석서에 나타나는 성구들
느낌(등 오온)의 일어남(과 그침과 그침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알면 집착 없이 해탈로 나아가게 된다. 도에 맞기 때문이다.
느낌의 일어남 등을 완전히 통찰하지 못하면 마침내 윤회의 감옥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러한 (무명이) 업 형성[行]의 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미혹이 들어 느낌들의 참 성질을 가려버리고 느낌들을 즐기고 있게끔 만든다.
그러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느낌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고 또 느낌에 대해 초연하게 된다.
느낌에서 위험을 읽을 줄 모르면 느낌에 대한 갈애가 증장하나니,
느낌에서 `달콤함'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느껴진 것에 대해서 욕심이 있을 경우에는 `나', `내 것'이라는 관념에 붙들려(집착하여) 몸부림치고,
그리고 영원불변[常見] 따위의 관념에 붙들려 몸부림치게 된다.
이렇게 이어지게 되는 것은 무간연(無間緣) 주36) 에 의해서인 바,
(유신견에 대한) 집착[取]은 갈애[愛]에 의해 조건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아가 항상 하다는 이론[常見] 따위를 내세우거나,
그것들에 상응하는 정서를 느끼는 자들에게는 촉(觸)이 그 인연(hetu paccaya) 주37) 이 되고 있다.
이 인연이 적용되는 까닭은 그런 견해나 정서를 갖는 일이,
감각 기관[根, indriya]과
대상[境, visaya]과
식[識, vi~n~naa.n]의 만남[三者和合]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 장부 , 제1경, `범망경'(梵網經)의 복주에서 ―
주해 36) 무간연(anantarapaccaya): 식의 흐름에 있어서 어떤 상태의 식이 그 바로 뒤를 잇는 단계에 대해 조건이 될 때 그 양자 간에 간격이 없으므로 무간연이라 함.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이십사 연 가운데 네 번째 연).
예를 들어 색을 보는 과정에서 안식(眼識)이 그 뒤를 잇는 의계(意界)
―대상을 떠올리는 기능을 함―에 대해 등무간연(saman antarapaccaya)이 되고,
이 의계는 또 그 뒤를 잇는 의식계(意識界)
―대상을 조사하는 기능을 함―에 대해서도 등무간연이 됨. 무간연과 등무간연은 실제로는 동일함.
주해 37) 인연(hetu paccaya): 뿌리의 조건인바 나무가 뿌리에 근거하며,
뿌리가 살아있어야 나무도 살 수 있듯이 모든 건전하거나 불건전한 마음상태는 제각기
그 뿌리(탐 진 치 무탐 무진 무치의 여섯 가지)의 동시존재를 필수 조건으로 함.
이를 인연이라 분류함(이십사 연 가운데 첫 번째).
아비담마 주38) 에서 본 느낌[受]의 위치
우선 불교심리학에서는 느낌[受, vedanaa]을 즐겁게, 괴롭게, 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 감수되는
순수감각 현상으로 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따라서 느낌은 감정과 구분되어야 한다.
느낌은 맨 감각이고 이러한 기본적 느낌에서 정서의 흐름인 감정이 일어난다.
그 감정은 또 느낌에다가 좋다 싫다 그 밖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덧붙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이란 수온(受蘊)을 가리키는데,
이는 이른바 사람이라는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五蘊) 주39) 가운데 하나이다.
정서의 흐름(감정)속에 작용하고 있는 그 특정 요소들은 행온(行蘊)에 속하며
따라서 이것들은 수온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느낌은 네 가지 정신적 더미 중 하나인데 식(識)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이 수온, 상온, 행온이 불가분으로 함께 일어난다.
느낌은
감각기관[根, indriya]과
대상[境, visaya]과
식(識, vi~n~aa.na),
이들 세 가지 요소가 만날 때에는 언제나 생겨난다.
불교심리학에서 말하는 촉(觸, phassa)이 바로 이 셋의 만남을 이르는 말인데,
그 중에서 식의 존재여부가 촉의 결정요인이 되므로
이는 어디까지나 정신적 과정이지 육체적 과정은 아니다.
이 과정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신체기관과 여섯째인 의(意)에 의해서 조건 지워지므로
모두 여섯 종류가 있는 셈이다.
이 여섯 가지 촉에 의해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 느낌이 조건 지워지는 것이다.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pa.ticca-samuppaada)에서 이것은
"촉이 느낌을 조건 짓는다[觸緣受, phassa-paccayaa-vedanaa]"
는 연결고리에 해당된다.
만일 감정이 따라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 다음, 즉
"느낌은 갈애를 조건 짓는다[受緣愛, vedanaa-paccayaa-ta~nhaa]"
라는 연결고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六境] 가운데
형상(色, ruupa)과
소리(聲, sadda)와
냄새(香, gandha)와
맛(味, rasa)에 닿아서 생겨난 맨 느낌은 항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점이다.
이들 네 가지 감각적 인식[想]에 관한 한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느낌이 따를 때는 그것은 최초의 반응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뒤이은
인식과정상의 추가 단계가 되는 것이다.
한편 닿거나 압박하는 등의 육체적 감촉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중 어느 하나를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意)를 통한 정신적 촉은 기쁨, 슬픔 또는 정신적으로 담담한 느낌(upekkhaa)을 야기할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 느낌은 또한, 모든 형태의 식(識)에 공통되는 정신적 요소[心所, cetasika] 중의 하나가 된다. 주40) 달리 말하면 식의 경험은 모두가 어느 정도는 색조를 띠게 마련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나 담담한 느낌이라 해서 아무런 색조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 나름대로 독특한 성질의 색조를 띤다는 것이다.
느낌 그 자체는 따로 떼어내 본다면 앞에서 말한 대로 그것은
즐겁다, 괴롭다, 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라고 알게 되는 순수한 감각 현상이다.
이 기본적 느낌에 달라붙는 감정적, 실용적, 도덕적, 정신적 가치 등은
그 느낌과 관련되어 바로 뒤따라 일어나는 다른 정신적 요소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이들은 행온(行蘊)에 속하는 것이다.
이들 느낌과 같이 일어나는 이 정신 요소들의 작용과 특성에 따라
느낌이 좋거나 나쁘게, 고결하거나 저열하게, 업을 짓거나 짓지 않게,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이게 되는 것이다.
느낌은 식(識)의 작용이 강하지 않을 때에는 대개 맨 감각 단계에서 그치고 그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마음을 챙겨 느낌을 제어할 때에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런 경우 그 느낌에 대해선 이미 어떤 의미부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정적으로든 지적으로든 간에.
불기 2547(1883)년 정월 스리랑카, 캔디에서 냐나뽀니까 합장
주해 38) 아비담마(Abhidhamma): 불교의 경전을 경 율 논으로 나눈 가운데 논부(論部)의 총칭.
곧 부처님의 설법을 경, 경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을 논이라 한다.
논을 아비달마라 하며, 대법(對法)이라 번역. 그런데 여기서 아비담마는 남방불교 전통을 가리킨다.
불교의 각 부파는 주로 경에 대한 해석상의 상이 때문에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각 부파는 각기 제 나름의 논부를 가지고 있으며, 빠알리경의 논장은 칠론(七論)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뿐 아니라 경장의 제오부 소부경에도 무애해도 와 의석 등이 들어 있어 아비담마적 특색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후대에 조성된 붓다고샤의 청정도론은 남방불교의 경전해석에 있어 부동의 준거 틀로 군림하고 있고, 더 후대의 아비담마타 상가하 (勝法義攝)는 인식론의 결정판이다.
냐나뽀니까 스님의 본 논고는 바로 이와 같은 남방불교 전통에 입각해서 느낌을 해석한 글이다.
원문에서는 서두에 `들어가는 말' 다음에 실려 있으나 우리 한국 독자들이 모처럼 부처님 원음을 만나면서 굳이 남방의 눈에 의지할 필요는 없겠기에 뒤편으로 돌려 남방전통을 이해하는데 참고로 삼도록 했다.
주해 39) 오온(pa~ncakkhandha):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무더기.
주해 40) 아비담맏타 상가하 (勝法義攝)에 의하면
느낌(vedanaa),
인식(sa~n~naa),
의도(cetanaa),
촉(phassa),
작의(作意, manasikaara),
정신적 활력(jiivita),
집중(samaadhi)의 일곱 요소는
어떤 형태의 식에서도 반드시 동시에 같이 일어나는 정신적 요소들[心所, cetasik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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