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행록(行錄) 49-1. 49-2. 50. 51. 52-1. 52-2
49-1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으리라
師一日(사일일)에 辭黃檗(사황벽)하니 檗問(벽문), 什?處去(십마처거)오 師云(사운), 不是河南(불시하남)이면 便歸河北(편귀하북)이니다 黃檗便打(황벽편타)한대 師約住與一掌(사약주여일장)이라 黃檗大笑(황벽대소)하고 乃喚侍者(내환시자)호되 將百丈先師禪版机案來(장백장선사선판궤안래)하라 師云(사운), 侍者將火來(시자장화래)하라 黃檗云(황벽운), 雖然如是(수연여시)나 汝但將去(여단장거)하라 已後(이후)에 坐却天下人舌頭去在(좌각천하인설두거재)리라
임제스님이 어느 날 황벽스님을 하직하니, 황벽스님께서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느냐?”
“하남이 아니면 하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황벽스님이 곧바로 후려치자, 임제스님이 그를 잡고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이에 황벽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시자를 불렀다.
“백장 큰스님이 물려준 선판과 경상을 가져오너라.” 하시니
임제스님이 “시자야! 그것을 불을 질러라.” 하였다.
황벽스님이 말하였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그냥 가져가거라.
나중에 앉은 자리에서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게 할 것이다.”
(강의)
스승과 하직할 때의 일이다.
하남을 가든지 하북을 가든지 확실하게 정해서 말하지 않고 ‘인연 닿는 곳으로 가게 되겠지.’하는 식이다.
또 한편으로는 본래 가고 옴이 어디 있는가. 늘 그 자리인 것을. 묻기는 새삼스럽게 왜 물어?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말투가 그게 뭔가. 황벽스님도 질 리가 없는 분이다.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의 촌보도 본래 옮기지 않는 모습을 좋이 서로 드날려 보였다.
그리고는 일상으로 돌아와서 이제 법을 주고받은 신표(信標)를 갖고 떠나라는데 그것마저 거절한다.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따위 같은 것은 불살라버리란다.
옷과 발우는 육조스님 대에서 이미 끝난 일인데 다시 무슨 짓거리인가?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걸망만 무거울 뿐이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스승 황벽스님도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제자다.
스승이 주는 신표를 스승 앞에서 불사르게 하는 일은 오직 임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태산준령이다.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그 높이를 알 수 없다.
아예 입이 떼 지지도 않는다. 혀를 내두를 수도 없다.
뒷날 법을 받았느니, 받지 않았느니 하는 시시비비에 대해서 입을 틀어막게 하라는 황벽스님의 염려도 아랑곳없다.
신표를 불사르게 한 이 사건이야말로 온 천하를 먼 미래에 까지 진동시키고도 남은 일이다.
무슨 신표가 굳이 필요하겠는가.
49-2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다
後?山(후위산)이 問仰山(문앙산) 臨濟莫辜負他黃檗也無(임제막고부타황벽야무)호되아 仰山云(앙산운), 不然(불연)이니다 ?山云(위산운), 子又作?生(자우자마생)고 仰山云(앙산운), 知恩方解報恩(지은방해보은)이니다 ?山云(위산운), 從上古人(종상고인)이 還有相似底也無(환유상사저야무)아 仰山云(앙산운), 有(유)나 祇是年代深遠(지시년대심원)하야 不欲擧似和尙(불욕거사화상)이니다 ?山云(위산운), 雖然如是(수연여시)나 吾亦要知(오역요지)하니 子但擧看(자단거간)하라 仰山云(앙산운), 祇如楞嚴會上(지여능엄회상)에 阿難讚佛云(아난찬불운), 將此深心奉塵刹(장차심심봉진찰)하니 是則名爲報佛恩(시즉명위보불은)이라하니 豈不是報恩之事(기불시보은지사)닛고 ?山云(위산운), 如是如是(여시여시)로다 見與師齊(견여사제)하면 減師半德(감사반덕)이요 見過於師(견과어사)라사 方堪傳授(방감전수)니라
뒷날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임제가 황벽스님을 저버린 게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은혜를 알아야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법입니다.”
“옛사람들도 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는가?”
“있습니다만 너무 오래 된 일이라 스님께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나 나도 알고 싶으니 말해 보아라.”
“다만 저 능엄회상에서 아난이 부처님을 찬탄하기를,
‘이 깊은 마음으로 먼지 같이 많은 국토를 받드는 것이 곧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은혜를 갚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이나 감하는 것이고,
견해가 스승보다 나아야만 비로소 법을 전해 줄 만하다.”
(강의)
황벽스님과 사형사제간인 위산스님이 이 중요한 사건을 놓칠 리가 없다.
어록을 편찬한 사람의 의도가 엿보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세상사 앞뒤를 모두 꿰뚫고 있는 제자 앙산에게 물었다.
“임제가 무엇을 잘못 한 게 아닌가?”
“아니지요. 참으로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은 일지요. 얼마나 멋집니까.”
“과거에도 그와 같은 사례가 있었는가?”
“그럼요. 능엄회상에서 있었지요.
아난이 ‘나의 이 깊고 깊은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모두 제도하는 일이
곧 부처님의 은혜를 갚은 일입니다.’라고 한 말이 곧 그와 같은 사례입니다.”라고 하였다.
글쎄요. 같은 사례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위산스님의 뒷말이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이나 감하는 것이고,
견해가 스승보다 나아야만 비로소 법을 전해 줄 만하다.”라고 했다.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관계가 그렇고 황벽스님과 임제스님의 관계가 그렇다.
곧 청출어람이 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이다.
잘되는 집안은 반드시 자식이 어버이보다 뛰어나다.
50 부처와 조사에게 다 예배하지 않는다
師到達磨塔頭(사도달마탑두)하니 塔主云(탑주운), 長老(장노)야 先禮佛(선예불)가 先禮祖(선예조)아 師云(사운), 佛祖俱不禮(불조구불예)니라 塔主云(탑주운), 佛祖與長老(불조여장노)로 是什??家(시십마원가)오 師便拂袖而出(사편불수이출)하니라
임제스님이 달마조사의 탑전에 이르렀는데 탑을 관리하는 스님이 말하였다.
“장로께서는 부처님께 먼저 절하십니까?
조사에게 먼저 절하십니까?”
“부처와 조사에게 다 절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조사가 장로에게 무슨 원수라도 됩니까?”
임제스님이 곧바로 소매를 떨치고 나가 버렸다.
(강의)
당시에 달마대사의 탑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그 견처(見處)가 보통이겠는가.
평범한 질문 같지만 함정이 깊은 곳이다.
임제는 불야타 조야타(佛也打 祖也打)하는 큰 방(棒)을 내렸다.
그리고는 기분 나쁜 놈을 만났을 때 “홱!”하고 나가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처가 있는 곳에 머물지 않고 부처가 없는 곳에 급히 지나가 버리는 도리다.
이쪽도 저쪽도 머물지 않는 법을 보여준 것이다.
양변에 집착하지 않는 쌍차(雙遮)의 도리는 안다마는
양변을 다 쓰는 쌍조(雙照)의 도리는 모르는가?
그리고 보면 조사들은 흔히 쌍조보다는 쌍차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탑주(塔主)의 말이 참 좋다.
“부처님과 조사가 장로에게 무슨 원수라도 됩니까?”
부처님과 조사에게 다 예배를 하고 부처가 있는 곳에도 머물고
중생이 있는 곳에는 더불어 같이 살아라.
있음도 받아드리고 없음도 받아드려라.
선도 받아드리고 악도 받아드려라.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양변을 떠나지만 말고 양변을 다 수용하고 활용하라.
양변을 떠나기만 하는 것은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은 모르는 이치다.
51 오늘은 낭패를 보았다
師行脚時(사행각시)에 到龍光(도룡광)하니 光上堂(광상당)이라 師出問(사출문), 不展鋒?(부전봉망)하고 如何得勝(여하득승)고 光據坐(광거좌)한대 師云(사운), 大善知識(대선지식)이 豈無方便(기무방편)고 光?目云(광징목운), ?(사)하니 師以手指云(사이수지운), 這老漢(자노한)이 今日敗闕也(금일패궐야)로다
임제스님이 행각할 때 용광스님이 계시는 곳에 이르렀는데,
용광스님이 마침 법당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으므로 임제스님이 물었다.
“칼을 뽑지 않고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까?”
용광스님이 묵묵히 않아 있자 임제스님이 말하였다.
“큰 선지식께서 어찌 방편이 없으십니까?”
용광스님이 눈을 크게 뜨고 쉰 목소리로 “사!” 하니,
임제스님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 늙은이가 오늘 낭패를 보았구나.”
(강의)
임제스님이 “큰 선지식께서 어찌 방편이 없으십니까?”라는
매우 부드러운 진흙 속에 가시를 숨겨둔 수법을 썼다.
그러자 용광스님은 칼을 빼들고 눈을 부라리며 “사!” 하고 임제를 배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임제의 한 마디는 도리어 용광스님을 배는 것으로 되돌려버렸다.
“이 늙은이가 오늘은 당했구나.” 하여 끝내버린 것이다.
여기서 이기고 지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용광스님을 점검해본 것이다.
52-1 앉아서 차나 들게
到三峯(도삼봉)하니 平和尙問(평화상문), 什?處來(십마처래)오 師云(사운), 黃檗來(황벽래)니라 平云(평운), 黃檗有何言句(황벽유하언구)오 師云(사운), 金牛昨夜(금우작야)에 遭塗炭(조도탄)하야 直至如今不見?(직지여금불견종)이로다 平云(평운), 金風吹玉管(금풍취옥관)하니 那箇是知音(나개시지음)고 師云(사운), 直透萬重關(직투만중관)하야 不住淸?內(부주청소내)로다 平云(평운), 子這一問(자자일문)이 太高生(태고생)이로다 師云(사운), 龍生金鳳子(용생금봉자)하야 衝破碧瑠璃(충파벽유리)로다 平云(평운), 且坐喫茶(차좌긱다)하라
삼봉에 갔을 때 평화상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황벽스님의 회하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은 어떤 법문을 하시는가?”
“금빛 소가 간밤에 진창에 빠져 아직까지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가을바람이 옥피리를 분다. 누가 이 소리를 아는가?”
“곧바로 만 겹 관문을 뚫으니 맑은 하늘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대의 한마디 물음이 매우 높구나.”
“용이 금빛 봉황의 새끼를 낳으니 유리 빛 푸른 창공을 뚫고 날아갑니다.”
“자, 앉아서 차나 들게.” 하셨다.
(강의)
자세한 전기가 남아 있지 않은 삼봉산의 평화상을 만나서
황벽스님의 불법을 첫마디부터 매우 시적으로 표현했다.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황벽의 불법은 화려하다. 그러나 어떤 의식사량계교나
언어문자의 자취에 메이지 않는다. 아예 그런 자취가 없다.”
평화상도 그에 맞게 시적으로 다시 묻는다.
“아, 그 표현 참 좋다.
그러나 그 높고 청아한 경지를 누가 이해하겠는가?”
“그렇습니다. 만 겹의 관문을 뚫고 맑은 하늘에도 머물지 않는 그 높은 경지입니다.”
“그대의 그 한 마디 말이 스승보다도 더욱 높구나.”
“천하에 누가 황벽스님의 불법을 능가하리요.
항차 나는 청출어남이 청어남입니다.”
“자네와는 안되겠다. 그만 차나 한잔 들게.”
52-2 요즘 어떠하시던가
又問(우문), 近離甚處(근리삼처)오 師云(사운), 龍光(용광)이니라 平云(평운), 龍光近日如何(용광근일여하)오 師便出去(사편출거)하니라
평화상이 다시 물었다.
“근래에는 어디에 왔는가?”
“용광스님이 계시는 곳에서 왔습니다.”
“용광스님은 요즈음 어떠하시던가?”
임제스님은 곧바로 나가 버렸다.
(강의)
평화상이 아무래도 임제에게 미련이 좀 남았던가보다.
황벽스님의 불법은 그만두고 여기에 오기 전에
어디 누구를 만나고 왔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바로 앞에 있었던 용광스님을 거론하게 되었다.
묻자마자 “용광스님의 요즘 근황은 이렇습니다.”하고 횡하니 나가버렸다.
씩씩하고 여여하다. 활발발하다.
그대로가 전체작용이다.
백 미터짜리 고래가 폭포 같은 물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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