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행록(行錄) 53. 54. 55. 56. 57. 58-1. 58-2. 58-3
53 삼산이 만 겹의 관문을 가두어 버렸다
到大慈(도대자)하니 慈在方丈內坐(자재방장내좌)어늘 師問(사문), 端居丈室時如何(단거장실시여하)오 慈云(자운), 寒松一色千年別(한송일색천년별)이요 野老拈花萬國春(야노념화만국춘)이로다 師云(사운), 今古永超圓智體(금고영초원지체)여 三山鎖斷萬重關(삼산소단만중관)이로다 慈便喝(자편할)한대 師亦喝(사역할)하니 慈云(자운), 作?(자마)오 師拂袖便去(사불수편거)하니라
대자스님이 계신 곳에 갔을 때, 대자스님이 방장실에 앉아 계셨는데 임제스님이 여쭈었다.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 계실 때는 어떻습니까?”
“추운 겨울에도 소나무는 한결같아서 그 푸른빛이 천 년을 빼어났고,
시골의 노인이 꽃을 꺾어 드니 온 세계가 봄이로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고금에 길이 뛰어난 크고 원만한 지혜의 본체여,
삼산(三山)이 만 겹의 관문을 가두어 버렸더라.”
대자스님이 대뜸 “할!”을 하시니, 임제스님도 “할!”을 하셨다.
대자스님이 “어떤가?” 하시니, 임제스님은 소매를 떨치며 가 버렸다.
(강의)
강설은 아무리 잘해봐야 어차피 군더더기다. 혹이다.
군더더기 소리를 부치자면 이렇다.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있는 그 사람을 대자스님과 임제스님이
서로 지극히 절제된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사람이다.
불생불멸의 참 생명이다.
사시(四時)의 변화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
천 년을 빼어났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온 세계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그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또 임제스님이 읊은 “고금에 길이 뛰어난 크고 원만한 지혜의 본체여,”란 말 역시
사람 사람들의 집안에 단정히 앉아 있는 참 부처를 뜻한다.
그는 옛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다. 본래로 완전무결하고 원만구족한 지혜의 본체다.
여기서 삼산(三山)이란 신선들이 살기 때문에 속인의 발길이 닫지 않는 전설의 산이다.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빌어서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사람 사람들의 본분의 산, 무위진인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 사람을 극한의 높이까지 끌어 올려 표현하였다.
그 표현은 둘 다 아름답고 유현하고 고고하지만 말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뒤늦게 그것을 알고는 “할”로써 날려버렸다.
대자스님이 “어떤가?”라는 말에 임제스님은 소매를 떨치며 가버렸다.
참 잘한 일이다.
54 훌륭한 선객은 정말 다르구나
到襄州華嚴(도양주화엄)하니 嚴倚?杖(엄의주장)하야 作睡勢(작수세)어늘 師云(사운), 老和尙?睡作?(노화상갑수자마)오 嚴云(엄운), 作家禪客(작가선객)이 宛爾不同(완이부동)이로다 師云(사운), 侍者(시자)야 點茶來(점다래)하야 與和尙喫(여화상긱)하라 嚴乃喚維那(엄내환유나)호되 第三位(제삼위)에 安排這上座(안배자상좌)하라
양주의 화엄스님에게 갔을 때, 화엄스님이 주장자에 기대어 조는 시늉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노스님께서 졸가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훌륭한 선객은 정말 다르구나.”
“시자야! 차를 다려 와서 큰스님께서 드시도록 하여라.”
화엄스님이 유나를 불러 “이 스님을 셋째 자리에 모시도록 하여라.” 하였다.
(강의)
노련한 화엄과 기민한 임제의 만남이라고 평한 이가 있다.
또 옛 사람은 용은 푸른 바다에서 노닐고
호랑이는 산에서 울부짖는다. 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깊이 음미해봐야 한다.
극도로 깊고 투명한 의식이 아니면 그 맛을 느끼기가 어렵다.
어린 녹차 한 잎을 찬물에 띠우고 조주 청다(淸茶)의 맛을 아는 경지라고나 할까.
삼위(三位)라는 것이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중국 총림에서 제1위는 전당(前堂·)수좌,
제2위는 서당(西堂)수좌, 제3위는 후당(後堂)수좌이다.
55 화살이 서천을 지나갔다
到翠峯(도취봉)하니 峯問(봉문), 甚處來(삼처래)오 師云(사운), 黃檗來(황벽래)니라 峯云(봉운), 黃檗有何言句(황벽유하언구)하야 指示於人(지시어인)고 師云(사운), 黃檗無言句(황벽무언구)니라 峯云(봉운), 爲什?無(위십마무)오 師云(사운), 設有(설유)라도 亦無擧處(역무거처)니라 峯云(봉운), 但擧看(단거간)하라 師云(사운), 一箭過西天(일전과서천)이로다
임제스님이 취봉스님 계신 곳에 이르자 취봉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황벽스님 회하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은 어떤 법문으로 학인을 지도하시는가?”
“황벽스님은 법문이 없으십니다.”
“어째서 없는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소개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쨌든 한 번 말해 보아라.”
“화살이 서천을 지나가 버렸습니다.”
(강의)
화살이 신라를 지나갔다.
화살이 서천[인도]을 지나갔다.
모두들 같은 의미다.
십만 팔 천리를 지나갔다. 라는 말도 있다.
낙처(落處)를 모른다는 뜻일 게다.
끈질기게 묻는 취봉스님을 멀리 따돌려 버렸다.
56 여기서 무슨 밥그릇을 찾는가
到象田(도상전)하야 師問(사문)호되 不凡不聖(불범불성)하니 請師速道(청사속도)하라 田云(전운), 老僧祇與?(노승지여마)니라 師便喝云(사편할운), 許多禿子(허다독자)야 在這裏覓什?椀(재자리멱십마완)고
임제스님이 상전스님 계신 곳에 이르러 물었다.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니 스님께서는 빨리 말씀 해주십시오.”
“노승은 그저 이럴 뿐이네.”
임제스님이 곧 “할!”을 하며 말하였다.
“허다한 머리 깎은 이들아, 여기에서 무슨 밥그릇을 찾고 있는가?”
(강의)
범부와 성인의 경지를 초월한 자리를 물었다.
상전스님 자신도 그런 경지를 잘 수용하고 있노라. 라는 뜻이다.
“할”이다.
그렇게 대답을 하면 공연히 머리만 깎고 밥그릇이나 챙기는 중이다.
본분 작가로서는 너무 부족하다.
죽도 밥도 먹지 말라.
57 짚신만 떨어뜨릴 뿐이다
到明化(도명화)하니 化問(화운), 來來去去作什?(내래거거작십마)오 師云(사운), 祇徒踏破草鞋(지도답화초혜)로다 化云(화운), 畢竟作?生(필경자마생)고 師云(사운), 老漢話頭也不識(노한화두야불식)이로다
명화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자 명화스님이 물었다.
“왔다 갔다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저 쓸데없이 짚신만 떨어뜨릴 뿐입니다.”
“결국 어쩌겠다는 말인가?”
“이 노인네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강의)
여기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이 또 한 분 있다.
아예 못 알아듣는다고 해버렸다.
임제스님의 이 말이 얼마나 좋은가. “그저 쓸데없이 짚신만 떨어뜨릴 뿐입니다.”
그렇다 누구나 집신만 떨어뜨리고 다닐 뿐이다.
다른 일이 있으면 안 된다.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이다.
일 없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을 뿐이다. 그것밖에 달리 무엇이 있던가.
언제나 그 자리 그 사람인 것을. 어쩌기는 뭘 어쩌는가?
참으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58-1 노파의 거량
往鳳林(왕봉림)타가 路逢一婆(노봉일파)하니 婆問(파문), 甚處去(삼처거)오 師云(사운), 鳳林去(봉림거)니라 婆云(파운), 恰値鳳林不在(흡치봉림부재)로다 師云(사운), 甚處去(삼처거)오 婆便行(파편행)이라 師乃喚婆(사내환파)하니 婆回頭(파회두)어늘 師便打(사편타)하다
스님이 봉림스님에게 가던 도중 어떤 노파를 만났는데 노파가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봉림스님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봉림스님은 마침 계시지 않습니다.”
“어딜 가셨습니까?” 하였는데 노파가 그냥 가니까 임제스님이 불렀다.
노파가 고개를 돌리자 임제스님이 곧 후려쳤다.
(강의)
노보살은 자신의 기봉(機鋒)을 숨기고 장난으로 거짓말을 했는데
임제스님이 추궁하니까 그냥 가버린다.
갈려면 곧바로 가버리지 임제스님이 부른다고 돌아보기는.
거짓말한 탄로가 나버렸다. 그것이 맞을 짓이다.
그러나 상당한 노파다. 아마 덕산스님을 시험하던 노파가 아닌가 모르겠다.
당시에는 선지식들을 시험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노 보살들이 많았으리라.
58-2 봉림과의 시문답(詩問答)
到鳳林(도봉림)하니 林問(임문), 有事相借問得?(유사상차문득마)아 師云(사운), 何得?肉作瘡(하득완육작창)고 林云(임운), 海月澄無影(해월징무영)이어늘 游魚獨自迷(유어독자미)로다 師云(사운), 海月旣無影(해월기무영)이어늘 游魚何得迷(유어하득미)오 鳳林云(봉림운), 觀風知浪起(관풍지랑기)하고 翫水野帆飄(완수야범표)로다 師云(사운), 孤輪獨照江山靜(고륜독조강산정)하니 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이로다
임제스님이 봉림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자 봉림스님이 물었다.
“물어 볼 것이 있는데 괜찮겠는가?”
“무엇 때문에 긁어 부스럼을 만드십니까?”
“바다에 비친 달이 너무나 밝아서 그림자가 하나도 없는데,
노니는 고기가 제 스스로 미혹할 뿐이다.”
“바다에 비친 달은 이미 그림자가 없는데,
노니는 고기가 미혹할 리 있겠습니까?”
“바람을 보아 물결이 이는 것을 알고, 물을 보고 작은 배에 돛을 올린다.”
“외로운 달이 홀로 비치어 강산은 고요한데,
혼자서 웃는 소리가 천지를 놀라게 하는군요.”
(강의)
노파의 말을 뒤로하고 결국 봉림스님을 만났다.
봉림스님은 시를 짓는 솜씨가 뛰어난 분이다.
물론 임제스님도 그에 걸 맞는 솜씨를 발휘한다.
눈이 밝은 사람들은 긁어서 부스럼 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또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만들어 올리는 것도 금기사항이다.
그런데 봉림스님이 긁어 부스럼 내는 짓을 하겠는가?
임제를 점검하기 위해서 그물을 던져보는 일이다.
“본분자리에는 밝고 밝은데 그대는 왜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가?”
“밝고 밝은데 길을 잃고 돌아다닐 일이 있겠습니까?
누가 길을 잃었단 말입니까?” 이렇게 수작하여 멋진 시가 오고 간다.
“내 그대의 하는 꼴을 보고 하는 말이다. 내가 잘 못 볼 리 있겠는가?”
“잘 못 보았습니다. 나는 경우가 틀립니다.” 하면서 그 유명한
“孤輪獨照江山靜(고륜독조강산정)
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 이라는 구절을 내 놓는다.
하늘을 찌르는 자긍심을 나타낸 말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다.
어느 누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랴 마는.
살활자재와 대기대용이 하늘을 찌르는 본분종사의 시절과 기백이다.
마치 단기필마로 조조의 수천 군중 속을 종횡무진하면서
취모검(吹毛劍)을 휘둘러 무를 배어 넘기듯 하는
상산 조자룡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林云(임운), 任將三寸輝天地(임장삼촌휘천지)나 一句臨機試道看(일구임기시도간)하라 師云(사운), 路逢劍客須呈劍(노봉겁객수정검)이요 不是詩人莫獻詩(불시시인막헌시)로다 鳳林便休(봉림편휴)하니 師乃有頌(사내유송)호대 大道絶同(대도절동)하야 任向西東(임향서동)이라 石火莫及(석화막급)이요 電光罔通(전광만통)이로다
“세 치 혀를 가지고 천지를 비추는 것은 알아서 할 일이나,
기틀에 맞는 한마디를 던져 보시게.”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쳐야 하지만,
시인이 아니면 시를 말하지 마십시오.”
봉림스님이 거기서 그만두자 임제스님이 게송을 하였다.
“큰 도는 철저히 동일해서 동쪽과 서쪽을 마음대로 향함이라.
부싯돌의 불도 따라잡지 못하고 번갯불도 통하지 못하도다.”
(강의)
봉림스님은 임제의 그 말에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는 “세치 혀를 가지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그것은 어쩔 수 없다마는
제대로 살아 있는 한마디를 해보면 어떨까?”
이 말을 듣고 임제스님은 그의 시감(詩感)이 절정에 달했는지
천고에 빛나는 이런 말을 던진다.
“명검을 알아보는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쳐라.
그리고 시인이 아니면 시를 논하지 말라 하였소
[路逢劍客須呈劍(로봉검객수정검) 不是詩人莫獻詩(부시시인막헌시)].”
여기서 봉림스님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임제스님은 내친김에 한껏 실력을 발휘한다.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큰 도는 철저히 동일해서 동쪽과 서쪽을 마음대로 향함이라.
부싯돌의 불도 따라잡지 못하고 번갯불도 통하지 못하도다.”
모든 시간에 다 있고, 모든 장소에 다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 도리다.
그러나 일천 부처님과 일만 조사들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광석화(電光石火)도 그 신속함에는 미칠 수 없다.
이 한 게송에 독자들은 눈을 뜰지라.
58-3 공적으로는 바늘도 용납하지 않는다
?山問仰山(위산문앙산)호되 石火莫及(석화막급)이요 電光罔通(전광만통)이어늘 從上諸聖(종상제성)이 將什?爲人(장십마위인)고 仰山(앙산문)云, 和尙意作?生(화상의자마생)고 ?山云(위산운), 但有言說(단유언설)이요 都無實義(도무실의)니라 仰山云(앙산운), 不然(불연)이니다 ?山云(위산운), 子又作?生(자우자마생)고 仰山云(앙산운), 官不容針(관불용침)이나 私通車馬(사통거마)니다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부싯돌의 불빛도 미칠 수 없고 번갯불도 통할 수 없는데
옛날부터 여러 성인들께서는 무엇으로 학인들을 지도하였는가?”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만 있을 뿐 전혀 실다운 뜻은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떤가?”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도 용납할 수 없지만
사적으로는 수레나 말까지도 통합니다.”
(강의)
위산스님이 누군가. 이 말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일천 부처님과 일만 조사들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광석화(電光石火)도 그 신속함에는 미칠 수 없다는데
옛날 여러 성인들은 무엇으로 학인들을 지도하였는가?”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짱 거짓말이지.”
“그것을 꼭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 말이 해당이 안 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눈을 뜨는데요
[官不容針(관부용침) 私通車馬(사통차마].”
위산스님이 사랑하는 제자 앙산스님에게 시험 삼아 물어 본 것인데
참으로 뜻밖에 좋은 말을 들었다.
그런 제자라면 마음을 놓을 수가 있다.
그래서 천하의 위앙종(?仰宗)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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