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

[스크랩] 제2장 敎外別傳 - 깨달은 마음으로 전하노니

수선님 2018. 2. 18. 12:57
 敎外別傳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선의 깨달음을 직접 전하는 것 - 그것이 바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뜻입니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일반적인 의미의 교육 말고(敎外), 달리 전하는(別傳) 게 있다는 뜻입니다.
 
선의 정수는 바로 교외별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교육 계획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전하기는 해도, 학교나 다른 종교들이 행하고 있는 이른바 교학체계(敎學體系)라는 도그마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의본질은 책이나 문자로 전할 수 없다는 게 선가의 일관된 생각입니다.
 
진리를 직접 파악하려면 머리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온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좌선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모든 개념적인 주장이나 교훈에 속받되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교외별전'에서 '교외(敎外)의 법(法)'이란 진리를 뜻하며, '별전(別傳)'이란 진리를 곧바로 사람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교나 일반 종교에서는 언너나 문자를 통해 '교내(敎內)의 법' 곧 교리나 경전을 가르치지요.
 
개념적인 지식을 버려야 비로소 부처님의 깨달음이 전달됩니다. 교외별전은 불교의 교리로는 담을 수 없는 부처님의 생샌한 깨달음의 본질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한다'는 말도 잘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준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특수한 정신적 수용상황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전하여 깨닫게 된다는 수동적인 의미보다는 '깨달음의 계기'라는 섬광(閃光)같은 동일성을 통해 그대로 진리 자체가 자기화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교외별전도 앞장의 '불립문자'와 마찬가지로 직선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교수(交授)와 전수(傳受)로 구분되는 주체와 객체의 수요과정이 아니라, 교수 자체가 곧 전수하는 생명과 생명의 만남을 일컫습니다. 참된 교육은 이래야 합니다.
 
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교사라는 말이 없다면 교육이 얼마나 잘 될까"라고 한탄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달마(達摩)대사는 "가르침이란 전함이요, 전함이란 곧 깨달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교(敎)=전(傳)=각(覺)인 것입니다. 약동하는 생명의 체온을 전(傳)한다는 의미가 빠진 가르침(敎)은 다만 지식을 전수한다는 의미일 뿐, '깨달음(覺)'이란 본질적인 가치를 잃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사이에는 단지 암기라는 평면화된 기능적 관계로 고착되지요. 마치 가마우지가 먹이를 통째로 삼키는 것처럼 지식을 통째로 삼키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가르치고 배우는 데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개념적인 도그마에 사로잡히면 풍부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선가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도, 참된 깨달음을 찾는 구도자나 수행자는 이른바 합리주의나 공리주의로 치장한 교육체제에서 벗어나 아침저녁으로 스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산 지식을 얻으려고 합니다.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온몸으로 스승과 접촉하여 알맹이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시간과 효율성에 묶인 기존의 교육체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산 공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선 수행자의 생활은 선과 하나이기에, 전해야 항 어떤 형싱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전하거나 받는 형태가 아니라 말하자면 '부전(不傳)의 전(傳)', 곧 전수한다는 의식 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선의진수를 전수받으려고 이처럼 밤낮으로 모시고 있습니다"하고 탐나는 듯이 말했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냐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자네에게 전하고 있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네. 그밖에 무슨 진수가 필요하겠나?"
 
인간만이 스승은 아닙니다. 사과는 익으면 누구 앞에서나 떨어집니다. 선생이 없어도 분명히 인력(引力)의 소재를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어째서 뉴턴만이 지구의 인력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사과라는 것에 가르치거나 전하려는 의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부전의 전'을 '전(傳)'으로서 받아들일 수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존엄한 것입니다. 진지하게 배우는 사람만이 이 힘을 빨리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외별전은 누구나 갖고 있는 삶의 근거-순수한 인간성 그 자체인 불성(佛性)-에 눈뜨게 하려는 깨달음에의 길, 바로 그것입니다.
 
松元泰道
출처 : 忍土에서 淨土로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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