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 - 무문관(無門關)
어느 날 한 수행승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물었습니다.
"내에게도 불성(不性)이 있습니까?"
불교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을 주장합니다. 즉 만물에 부처님의 생명[佛性]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지요. 이 수행승은 이 점에 착안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질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가르침을 맏고자 하는 소박한 의도로 하는 질문과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실력을 시험하거나 토론을 끄집어내려는 의도로 하는 빌문이지요. 이 수행승의 질문은 후자의 경우로 생각됩니다.
조주선사는 당나라 시대에 산동성에서 태어나 한평생 선을 닦으며 살아간 분입니다. 아니 예순에 이르서는 "세살 어린아이라도 나보다 나으면 그에게 배우고, 백살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그에게 가르쳐 주리라"는 생각에서 온 나라의 유명한 스님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면서 수행에 힘쓰다가 여든 살에 이르러서야 하북성 조주(趙州)에 위치한 관음원(觀音院)에 자리 잡고서 대중 쇼화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조주선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 40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선을 가르치다가 120세에 세상을 떠난 선불교 역사상 가장 큰 인물이었습니다.
조주의 선풍(禪風)은 "입에서 광채가 난다"고 사람들이 말할 정도였습니다. 설법을 벨풀 때 입술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빛나는 진리를 설파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가 수행자의 질문에 그 놀라운 혀끝으로 "없다[無]!"고 언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다른 수행승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은 선사는 이번에는 "있다[有]!"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주선사 같은 이가 아무렇게나 대답했을 리는 없을 테고 왜 같은 질문에 서로 상반되는 대답을 했을까요? 어떻게 대답하든 마찬가지여서 그렇게 대답했는지 모릅니다. 근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서로 어긋난다고 해서, 한 압으로 두말한 것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조주선사는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그 세계에 들거가기 위해서는 있음과 없음의 대립 개념에 기반한 상대적인 인식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상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주선사가 대답한 유무(有無)는 우리가 상식적인 범주로 이해하고 있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의 의미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란 무엇이며, '무'란 무엇인가 하고 따지게 되면 미로에 빠지게 됩니다. 있다고 생각하고 없다고 생각하는 이 대립적인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게다가 유와 무는 한자이기 때문에 더욱 문자에 미혹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사는 이것을 일상용어로 바꾸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상대적인 개념을 제거하고 마음을 평안히 갖도록 만듭니다.
이 선어는 오늘날 임제선(臨濟禪)의 수행 도량에서 수행자에게 처음 제시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이 화두를 통해 상대적인 지식을 모두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애써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평안히 하는 인격적인 체험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無)입니다. 공(空)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松原泰道
출처 : 忍土에서 淨土로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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