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사상

[스크랩] 4. 오온(五蘊)을 관찰하는 장[觀五陰品] 9偈

수선님 2018. 3. 11. 12:36

4. 오온(五蘊)을 관찰하는 장[觀五陰品] 9

 

[] 경전에서는 5()이 있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 ()의 원인 없이 색을 얻을 수가 없네.

색 없이 색의 원인을 얻을 수가 없네. (1)

 

 

()의 원인이란 베[]의 원인인 실과 같은 것이다. 실을 없애면 베가 없고 베를 없애면 실이 없다. 베는 색과 같고 실은 색의 원인과 같다.

[]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면 이 색은 원인이 없는 것이네.

원인이 없이 법()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2)

 

 

예를 들어 실없이 베가 있다면 이 베는 원인이 없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법()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 불교의 법(), 외도의 법, 세간의 법에 모두 원인이 없는 법이 있다. 불교의 법에는 세 무위(無爲)가 있다. 무위는 상주하는 것이므로 원인이 없는 것이다. 외도의 법에는 허공시간장소()미진(微塵)열반 따위가 있다. 세간의 법에는 허공시간장소 따위가 있다. 이 세 법()16)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주하는 것이기에 원인이 없다. 그런데 그대는 무슨 까닭에 원인이 없는 법이 세간에 없다고 하는가?

[] 이 원인이 없는 법은 그저 언설(言說)이 있을 따름이다. 사유(思惟)해서 분별(分別)한 것은 모두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법이 인연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라면 원인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인연이 없다면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 두 종류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발생의 원인[作因]이고 다른 하나는 언설의 원인[言說因]이다. 이 원인이 없는 법은 발생의 원인이 없고 단지 언설의 원인이 있을 따름이다.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언설의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허공은 6()를 관찰하는 장에서 타파하는 바와 같다. 그 밖의 것들은 후에 논파할 것이다. 또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것도 모두 타파되는데 하물며 극미[微塵]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랴?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법은 세간에 없다.

 

[] 색 없이 색의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만일 색 없이 원인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리라.

만일 결과가 없는 원인을 말한다면 옳은 점이 없네. (3)

 

 

색이라는 결과가 없이 오직 색의 원인만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다.

[]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일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원인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또 만일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면 사물이 어떻게 원인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인과 연을 타파하는 장[破因緣品]17)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미 색이 있다면 색의 원인을 쓰지 않네.

만일 색이 있지 않다면 색의 원인을 쓰지 않네. (4)

 

 

또 두 경우에 색의 원인이 있을 터인데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미리 있는 원인 속에 색이 있다면 색의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만약 미리 있는 원인 속에 색이 있지 않다면 또한 색의 원인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 두 경우라면 모두 옳지 않다. 단지 원인이 없이 색이 있을 따름이다. 무슨 과실이 있는가?

 

[]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네. (5)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나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하는 이를 범부라 이름한다. 무명과 탐욕[愛染]으로써 색을 탐착(貪著)하고 그런 후에 그릇된 봄[邪見]으로써 분별과 희론을 일으켜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거나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고 하는 따위를 말한다. 이제 이 중에서 색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라면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6)

 

 

또 만일 결과와 원인이 서로 유사하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원인은 미세하고 결과는 거칠고 크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색은 힘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베가 실과 유사하다면 베라 이름할 수 없다. 실은 다()이고 베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삼[]의 실은 명주를 이루지 않듯이 거친 실은 미세한 베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두 주장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색도 없고 색의 원인도 없는 것이다.

 

수온[受蔭]상온[想蔭]행온[行蔭]식온[識蔭]

여타의 모든 법은 다 색온[色蔭]과 동일하네. (7)

 

(나머지) 네 온()과 모든 법도 이와 같이 사유해서 논파해야 한다.

또 이제 논을 짓는 이는 공성의 이치를 찬미하고자 게송을 읊는다.

 

만일 어떤 자에게 묻는 자가 있을 때 (어떤 자가) 공성(空性)이 없이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8)

 

만일 어떤 자가 논박하고자 할 때 공성(空性)이 없이 그 과실을 말한다면

이것은 논박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9)

 

 

사람들이 논쟁을 벌일 때는 제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다. 공성(空性)의 이치가 없이 묻고 답한다면, 물음은 물음이 되지 못하고 답은 답이 되지 못해서 모두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되고 만다. 가령 어떤 자가 물단지는 무상하다고 말했을 때 묻는 자가 무엇에 근거해서 무상하다고 하는가?” 했다고 하자. 이 물음에 무상한 원인에서 생겼기 때문이다고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라 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원인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어 그것이 상주하는 것인지 무상한 것이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된다. 만일 묻는 자가 그 과실을 말하고자 할 때 공성에 의지해서 모든 법은 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논박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대가 무상함에 의거해서 나의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나도 상주함에 의거해서 그대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이 논파한다. “상주함이 없다면 업보가 없을 것이다. [][] 등 법()들이 찰나찰나 소멸하기에 분별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이 있기 때문에 모두 논박이 되지 못하고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된다.

만일 공성(空性)에 의거해서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사람은 공성의 상()에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고 답하고자 한다면 공성[空法]에 의거해야 하는데 하물며 고()가 없는 적멸[寂滅相]을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있어서이겠는가?

 


출처 : 청산백운
글쓴이 : mang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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