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한 물건도 없다 - 육조단경(六祖壇經)
앞에서 인용한 신수(神秀)의 게송을 들은 홍인(弘忍)선사의 제자들은 저마다 그를 찬양했습니다. 사실 홍인선사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게송을 전해들은 혜능(慧能)은 "잘 짓긴 햇지만 아직 진리를 드러내기엔 충분하지 못하다"고 평했습니다.
그러자 같이 있던 사람들은 방아나 찧는 무식쟁이가 뭘 알고 하는 얘기나면서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글을 쓸 줄 모르는 혜능은, 다른 사람에게 간청하여 신수가 지은 시의 운에 맞추어 자기의 심경을 게송으로 읊어 땅바닥에 쓰게 했습니다.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아니로다
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나니
何處惹塵埃 어디에 티끌이 일겠는가
존더 자세히 풀이하면, 신수는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라 했지만, 혜능이 보기엔 "보리수라는 나무도 없고 밝은 거울 같은 것도 없고,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티끌이나 먼자 묻을 데가 없는데 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게송을 본 홍인선사의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선의 절대성을 오묘하게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인선사는 이 시를 보고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면서 신발로 게송을 지워버렸습니다. 경악해 마지않던 대중들은 선사의 행동을 보자 소동을 그쳤습니다. 홍인선사는 대중들이 질투심을 일으켜 혜능을 위해할까봐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날 밤 홍인선사는 혜능을 몰래 불러 정법을 전수, 선불교의 제6조로 인가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중들의 박해를 염려하여 그 밤에 혜능을 남쪽으로 도피시켰습니다. 박해를 피해 다니던 혜능은 그 뒤 남쪽에서 선풍(禪風)을 드날렸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에 성하게 된 혜능의 선을 '남종선(南宗禪)', 북방에서 성하게 된 신수의 선을 '(北宗禪)'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두 게송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수의 북종선은 수행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점오(漸悟)'라고 부르고, 혜능의 남종선을 곧바로 깨달아 성불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으므로 '돈오(頓悟)'라고 부릅니다. 수행을 쌓고 나서 다시 하나의 비약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수와 혜능은 홍인선사의 제자입니다. 선(禪) 자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선 수행이 갖는 돈점(頓漸)의 두 얼굴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몸과 마음을 대응시키고 미망과 깨달음을 마주보게 하며 먼지와 깨끗한 상태를 구별하는 상대적인 인식을, 보다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본래 아무것도 없다(本來無一物)"고 부정한 혜능의 게송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간성을 원점에서 인식한 깨달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실감은 더욱 깊어 말이나 글로는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려면 실제로는 차곡차곡 수행하는 신수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한 정점에서 다시 비약하여 혜능의 선심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선 수행자의 수행정진이 바로 이것입니다.
松原泰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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