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

[스크랩] 제4장 見性成佛 - 자기를 알면 깨달음 얻으리니

수선님 2018. 4. 22. 12:59

見性成佛 - 보리달마(菩提達磨)

 

 

견성성불(見性成不) - 우리는 앞에서 이미 불립문자(不立文字)는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나타나고, 교외별전은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달마대사가 말한 이 네 가지 구절은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밑바닥부터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직지(直指)된 마음, 즉 '곧바로 가리킨 마음'이란 본래 우리들 가슴 속 깊이 묻혀 있는 순수한 인간성입니다. 옛말에 "모든 경(經)은 부처님의 가름침이며, 선(禪)을 행함은 곧 부처님이 되는 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므로 경전과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이나 사상에 사로잡히면 인식의 자유를 잃고 자기 안에 부처님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의 존귀함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에 쐐기를 박는 것이 '경성성불(見性成佛)' 네 글자입니다.

 

'견성(見性)'이란 자기의 본성을 보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곧 참된 자기가 되는 일이며, 참된 자기를 되찾는 일입니다. 이때 인간은 성불(成佛), 곧 부처님이 된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란 참된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불이란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순수한 인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순수한 인간성이 본애? 인간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견성(見性)의 '성(性)은 달마대사가 보여주는 마음입니다. 저명한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달마대사가 '마음'이라고 말한 것을 혜능(慧能)선사는 '견성'이라고 했다. 견성이란 '성(性)'을 보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견즉성(見卽性)을 뜻한다. 마음을 보고 있는 것이야말로 마음이 아닌가. 좌선할 때 자기 마음을 조정하기 위해 호흡의 수를 세는데, 이것을 세는 것은 누구인가. 이 주체를 임제(臨濟)선사는 '사람'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다만 감정적인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로 포함한 절대의 한 사람입니다. 스즈키는 "마음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어느 철학자가 정의한 "선이란 보는 것이다"에서의 '보는 사람'과도 상통합니다.

 

'본다'의 뜻을 가진 수많은 한자 중에서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견(見)'이라는 글자입니다. 이 글자에는 보다, 만나다, 알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눈, 곧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보는 마음이 있어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맛을 본다, 만나 본다고 할 경우에는 '알다[知]'와 같은 뜻의 말이며, 생각해 본다고 말할 때에는 '사유(思惟)한다'와 통합니다. 따라서 '견(見)'은 '관(觀)'으로 이어집니다. 

 

'마음으로 진리를 보고 생각한다[觀法]'나 '마음을 바로잡아 올바른 지혜를 얻는다[止觀]'는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관(觀)'에는 분명히 본다, 관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배(敬拜)한다는 어감도 들어있습니다. '관음(觀音)'은 본다는 빛을 경배한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불성(佛性)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선에서는 독경을 '간경(看經)'이라고 합니다. '간(看)'은 간호(看護)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다는 뜻입니다. 앞서에서도 보았듯이 '간각하(看脚下)', 즉 자기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좀더 말하자면 자기 안에, 그때까지는 깨다지 못한 채 숨어 있던 부처님의 생명이 점화되어 참된 자기가 환히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밝혀지면 다른 사람의 발밑을 밝혀, 더러워진 마음의 밑바닥에 꺼져 있는 촛불을 켜야 '참된 비춤[照顯]'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깨우치고 남도 깨우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傳)'은 '각(覺)'과 통합니다, '각'에는 기억한다는 뜻만 아니라 깨닫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깨닫게 하는 것은 예절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잊어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깨달아야 잊어바리지 않는 예절이 몸에 배게 됩니다. 예절에 의해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이 넘칠수록 정신이 황폐해지는 만물에게서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각종 공해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공해란, 자아를 멋대로 작동시켜 두려움을 모르는 공허한 마음이 쌓인 결과입니다.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대처 방법과 함께 각자 자기를 올바로 들여다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松原泰道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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