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

[스크랩] 95. 頻呼小玉元無事 - 자주 소옥이를 부르지만 본디 일은 없다

수선님 2018. 5. 20. 13:11


소옥이를 부르지만 본디 일은 없다 - 괴안국어(槐安國語)

 

 

이 선어는 원래 "자주 소옥이를 부르지만 본디 일은 없다. 다만 그이에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일 뿐(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에서 앞부분을 뽑아낸 것입니다.

 

아리따운 여주인이 하녀 이름을 자주 부르는 것은 그 하녀에게 어떤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두고 있는 정인(情人)에게 자기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연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미묘한 정감을 나타낸 이 구절에서도 깊은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연애 감정에 빠져 있는 이들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제3자가 보기에는 쓴웃음을 금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능청스럽게 하녀를 부르고 있는 아리따운 여주인은 누구일까요.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는 대상인 그이는 또 누구일까요.

 

그이를 우선 우리들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은 어쩌면 부처님이라는 ㅇ름을 가진 순수한 인간성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당신이 되게 하는 절대 생명이 바로 여기 있어요. 깊이 내려뜨린 장막에 숨어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나는 잘 보여요. 당신의 바로 옆에 있어요. 아직 모르시겟아요? 정말 딱하군요"하고 주의를 끌기 위해 용무도 없는데 하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목소리요, 모든 모습은 부처님의 모습이로다[一切聲是佛聲 一切色是佛色]"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보고 듣는 것이 다 진리의 목소리요, 진리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존재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은 인식 작용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조엄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처님이다"하고 말하면 '범신론(凡神論)'이나 자연숭배를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존재하는 것은 단지 무심히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깊게 수신작용(受信作用)을 하는 쪽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미세한 구별을 하지 못하면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이것을 나타낸 것으로 "파초 잎새에 시름겨운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때 듣는 이의 마음이 슬퍼하고 있을 뿐(파초엽상무수우 지시청시인단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파초 잎도 비도 모두가 무심한 상태에 있습니다. 다만 파초 잎 위에 비가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빗소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시름겨운 비도 되는 것입니다. 

 

松原泰道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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