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 마하시 사야도 법문

[스크랩] 12연기...17.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수선님 2018. 7. 8. 13:05

17. SASSATA AND UCCHEDA

 

 

To the ordinary people who are wedded to the ego-belief death means the extinction of individual entity or its displacement to another abode or existence.

 

17.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유신견에 휘둘리는 범부들에게 죽음이란, 한 개별적 실체의 소멸이나 또 다른 보금자리나 존재로 뒤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This is a misconception called ucchedadiṭṭhi if it is the belief in annihilation or sassatadiṭṭhi if it is the belief in the transfer of the soul to another body or abode.

 

이것이 바로 단멸론에 대한 믿음인 단견(斷見)과 영혼이 다른 몸이나 보금자리로 옮겨간다는 믿음인 상견(常見)의 전도된 견해입니다.

 

 

 

Some believe that consciousness develops spontaneously with the growth and maturation of the body (ahetukadiṭṭhi).

 

또 어떤 사람들은 몸이 자라고 성장함에 따라 마음도 저절로 성장한다는 무인론(無因論 ahetuka-diṭṭhi)을 믿고 있습니다.

 

 

 

Some have misconceptions about samsāra or nama-rūpa process. They regard the body as the temporary abode of the life principle that passes or from one abode to another.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물질의 흐름인 윤회에 대해서 전도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몸을 진아(眞我)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일시적 거주처로 여깁니다.

 

 

 

The disintegration of the physical body is undeniable but some people pin their faith to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in due course of time and so they treat the dead body with respect.

 

육체가 분해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머지않아 육체가 부활한다고 굳게 믿고 시신(屍身)을 소중히 다루기도 합니다.

 

 

 

These views confirm! the Ledi Sayādaw’s statement that the causal links between saṅkhāra and vinnāṇa lends itself to misinterpretation.

 

이러한 견해들은 상카라와 재생연결식사이의 인과관계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레디사야도의 말씀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Ordinary Buddhists are not wholly free from these misconceptions but because of their belief in the Buddhist doctrine of anatta, they do not harbour the illusions so blindly as to harm their vipassana practice.

 

평범한 불교신자들도 이러한 전도된 견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불교의 교리인 무아를 믿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닦지 못할 정도로 이런 환상들을 맹목적으로 지니지는 않습니다.

 

 

 

So even without a thorough knowledge about the nature of death, rebirth and

nāma-rūpa, they can enlighten themselves through contemplation.

 

그러므로 죽음, 재생, 정신과 물질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 없어도 관찰을 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For example, shortly after the parinibbāna of the Buddha the thera Channa practised vipassanā but made little progress because of his ego-belief.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parinibbāna)에 드신 직후에 찬나(Channa)장로는 그의 유신견 때문에 위빠사나를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에 진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Then as he followed Ānandā’s discourse on Paticcasamuppāda, he contemplated, overcame his illusion and attained Arahatship.

 

그리고 나서 아난다(Ānandā)존자의 12연기에 대한 법문을 따라서 관찰을 했으며 전도된 생각을 극복하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Again in the time of the Buddha bhikkhu Yamaka believed that the Arahat was annihilated after his parinibbana. Sāriputtrā summoned and preached to him. While following the sermon, Yamaka contemplated, and achieved liberation.

 

또 다른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의 야마까(Yamaka)비구는 아라한은 완전한 열반에 들고나면 단멸한다고 믿었습니다. 사라뿟따(Sāriputta)가 그를 불러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야마까 장로는 관찰을 하여 해탈을 성취하였습니다.

 

 

 

So those who have faith in the Buddha need not be disheartened. If they practise vipassanā zealously and whole-heartedly, they will become enlightened.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에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과 성을 다해 위빠사나를 수행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Because of their ignorance and doubts about the nature of death and conception or leaning to uccheda belief, some people ask whether there is a future life after death.

 

죽음과 수태의 본성에 대한 무지와 의심, 그리고 단견에 휘둘리는 경향 때문에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사후에 내생이란 게 과연 있느냐고 묻습니다.

 

 

 

The question by itself presupposes atta or soul or life-force in a living being. Materialism rejects the idea of soul but the ego-illusion is implicit in its differentiation of the living from the dead.

 

이 질문자체가 한 생명 안에 있는 자아(atta)니 영혼이니 진아(眞我)니 하는 것들을 전제로 합니다. 유물론은 영혼의 개념을 부정합니다만 죽은 자와 산자를 구별 짓는데 있어서 자아에 대한 전도된 생각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The question of those who accept the ego explicitly or by implication are hard to answer from the Buddhist point of view. If we say that there is future life, they will conclude that we support the ego-belief.

 

노골적으로나 은연중에 자아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불교적 관점으로 답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만약 우리가 내생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But Buddhism does not categorically deny the future life. Hence the Buddha’s refusal to answer this question. Moreover, it is hard to produce evidence for ordinary people.

 

하지만 불교는 무조건 내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게다가 보통사람들에게 증거를 제시하기가 어렵습니다.

 

 

 

Psychic persons may be able to point out the hell or the deva-worlds but skeptics will dismiss such exhibition as black magic or chicanery.

 

신통력이 있는 사람은 지옥이나 천상계를 보여줄 수 있겠지만 회의적인 사람들은 이를 마술(魔術)이나 속임수라고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So the Buddha did not answer the question directly but said that there is continuum of nāma-rūpa process in the wake of death without the extinction of defilements.

 

그래서 부처님께선 이런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번뇌가 소멸하지 않은 경우에는 죽음 뒤에 정신과 물질과정이 계속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The problem of future life does not admit of intellectual approach. It is to be settled only through certain Buddhist practices.

 

내생의 문제는 지성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특별한 불교수행을 통해서만 해결 됩니다.

 

 

 

These practices enable the yogi to acquire psychic powers by virtue of which he can see the dead, the good men who have attained the deva-worlds as well as the evil persons who are suffering in the nether worlds.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수행자는 신통력을 얻어서 선한 사람은 천상계를 얻고 못된 사람은 악처에서 고통 받고 있음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What he sees is as clear as what an observer who occupies a position directly opposite two houses sees-persons passing from one house to the other.

 

그가 보는 것은 두 집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선명합니다.

 

 

 

Among the many devas, animals, etc of the higher and lower realms, he (the yogi) can easily find the person whom he wants to see.

 

높고 낮은 세계의 수많은 천신, 동물들 중에서 수행자는 자신이 보고자 원하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It is possible for the yogis to attain jhāna and psychic powers. There is no teaching which rules out this possibility. Some practising yogis have in fact had paranormal contact with the other world (paraloka).

 

수행자는 선(jhāna)과 신통력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제로 저 세상(para-loka)과 신통력으로 접촉을 갖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But paranormal gifts are hard to come by. Their emergence depends on intense concentration and so the easier way is to practise vipassanā.

 

하지만 이러한 신통력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러한 신통력은 강력한 집중에 의지하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이 더 쉬운 길입니다.

 

 

 

The problem of life becomes fairly clear when the development of paccayapariggaha insight makes the yogi well aware of the nature of death and conception.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가 개발되어 수행자가 죽음과 수태의 본성을 잘 알게 되면 삶의 문제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It becomes clearer when he attains sammāsana, udayabbaya and bhaṅga insights for then he sees clearly how the consciousness units arise and pass away ceaselessly one after another and how death means the passing away of the last unit to be followed by conception or the arising of the first consciousness-unit in a new existence.

 

명상의 지혜(sammāsana-ñāṇa),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 그리고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를 성취하면 삶의 문제는 보다 더 명확해지는데 왜냐하면 어떻게 식(識)의 단위들이 하나가 일어나고 사라진 뒤에 다음의 식(識)의 단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그리고 죽음이란 현생의 마지막 식(識)이 사라진 다음에 수태, 즉 내생의 첫 번째 식(識)단위가 뒤따라서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의미하는 지를 분명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But this insight is still vulnerable and it is only when the yogi attains at least the sotāpatti stage that he becomes wholly free all doubts about future life.

 

하지만 이 지혜도 아직은 취약한 것으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예류의 성위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내생에 대한 모든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The trouble is that people wish to inquire about is instead of practising vipassanæ. Some seek the verdict of Western scientists and philosophers while others accept the teaching of those who are reputed to be Arahats with psychic powers.

 

문제는 사람들이 위빠사나 수행은 하지 않고 내생에 대해서 묻기만 하려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양의 과학자와 철학자의 의견을 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통력을 지닌 아라한이라고 믿어지는 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But the best thing is to seek the answer through vipassanā practice instead of relying on other people.

 

그러나 남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해답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At the stage of udayabbaya insight the yogi can clearly see how in the wake of the consciousness unit that has passed away there follows a new unit attached to a sense-object.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의 단계에서 수행자는 어떻게 사라진 식(識)단위의 흐름에서 감각대상에 취착하는 새로운 식(識)의 단위가 일어나는 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On the basis of this experience he realizes how the new existence begins with consciousness-unit that arises, conditioned by attachment to an object at the moment of dying in a previous life.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수행자는 전생에서 죽은 마지막 순간에 한 대상에 대한 취착에 의해 조건 지어진 식의 단위와 함께 새로운 생이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Before death the stream of consciousness depends on the physical body and is continuous with one unit following the other uninterruptedly. After death the body disintegrates and the stream of consciousness shifts to the physical process in another abode.

   

죽기 직전의 식의 흐름은 물질적인 몸에 의존하면서 하나의 식 단위가 다음 식 단위로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죽은 다음 몸은 분해되고 식의 흐름은 다른 세계의 물질적인 과정으로 옮겨갑니다.

 

 

 

This may be likened to the continuous appearance of light in an electric bulb through the ceaseless generation of electricity.

 

이것은 전기를 끊임없이 공급받는 전구가 지속적으로 빛을 내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When the bulb is burnt up, the light goes out but the potential electric energy keeps on coming. Light reappears when the old bulb is replace with a new one.

 

전구가 나가면 불은 꺼지지만 전기는 계속해서 들어옵니다. 낡은 전구를 새 전구로 갈아 끼우면 빛이 다시 들어옵니다.

 

 

 

Here the bulb, energy and light are all changing physical processes and we should be mindful of their impermanent character.

 

여기서 전구, 전기, 빛은 모두 변화하는 물질적 과정이며 우리는 이들의 무상한 성질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The commentary cites the analogies of echo, flame, impression of a seal and reflection in the mirror. Echo is reflection or repetition of a sound produced by the impact of sound waves on walls, woods, etc.

 

주석서는 메아리, 등불, 도장의 인각, 거울에 비친 영상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메아리는 음파가 벽이나 숲 등에 부딪쳐서 나오는 소리의 반향입니다.

 

 

 

But it does not mean the transfer of the original sound to a distant place although we cannot deny the causal relation between the sound and the echo either.

 

우리가 소리와 메아리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소리가 먼 곳까지 전이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When you look at a mirror your face is reflected on it but you must not confuse the reflection with your face although it is causally related to the latter.

 

여러분이 거울을 볼 때 여러분의 얼굴이 그 거울 속에 비치는데 비록 자신의 얼굴과 거울에 비친 영상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둘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A lamp which is burning may be used to light up another lamp. The flame of the new lamp is obviously not the flame of the old lamp since the latter is still burning but neither is it causally unrelated to the flame of the old lamp.

 

불이 붙어 있는 등불은 다른 등불을 켜는데 쓰여질 수 있습니다. 불을 붙여준 등불이 여전히 타고 있으므로 새로운 등불의 불꽃은 이전의 등불이 분명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등불과 두개의 불꽃이 인과적으로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Lastly the seal leaves an impression that is like its face but it is not the face and it cannot occur in the absence of the seal either.

 

끝으로 도장은 그 표면과 같은 각인을 남기지만 실제로는 도장의 표면은 아니며 도장 없이 표면은 찍히지 못합니다.

 

 

 

These analogies help to throw some light on the nature of rebirth process. When a person is dying, his kamma, the signs and visions related to it and visions of the future life appear.

 

이 비유들은 재생의 성질을 어렴풋이 알게 해줍니다. 사람이 죽어갈 때 그의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납니다.

 

 

 

After his death there arises the rebirth consciousness conditioned by one of these visions at the last moment of the previous existence.

 

죽은 뒤에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이들 표상중의 어느 하나에 조건 지어진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So rebirth does not mean the passage of the last unit of consciousness to another life but since it is conditioned by the visions on death-bed, it is rooted in avijjā, Saṅkhæra, etc., that from the links in the chain of causation to the visions of the dying person.

 

그러므로 재생은 식의 마지막 단위가 다른 생으로 옮겨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임종 때의 표상들에 의해 조건 지어지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보는 표상들로 인도하는 인과의 사슬을 이루고 있는 무명, 상카라 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Thus rebirth consciousness is not the consciousness of the dying person but it is causally related to the previous life.

 

그러므로 재생연결식은 죽어가는 사람의 식은 아니지만 전생과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Two consecutive units of consciousness are separate but given the stream to consciousness, we speak of the same individual for the whole day, the whole year or the whole lifetime.

 

두개의 연속되는 식 단위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우리는 한사람을 하루 종일, 일년 내내, 또는 전 생애동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Likewise we speak of the last consciousness on death-bed together with rebirth consciousness as representing a single person. A man’s attainment of deva or any other world is to be understood in the same sense.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임종의 마지막 식을 재생연결식과 함께 동일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천신계나 다른 세계에 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It does not mean the transfer of nāma-rūpa as a whole. We speak of a

man or a person only because the rebirth concerns the stream of causally related mental units.

 

그것은 전체로서의 정신과 물질의 전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재생은 인과적으로 관련된 정신단위의 흐름과 관련 있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So it is ucchedadiṭṭhi to believe that a person has nothing to do with a previous life since every person is annihilated on death. Most every person is annihilated on death.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죽음과 동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전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 것이 단견(uccheda-diṭṭhi)입니다. 이 단견은 모든 사람들이 죽음과 동시에 소멸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Most Buddhists are free from this belief. As the two consecutive lives are causally related, we speak of one person in conventional terms.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이러한 견해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두 개의 연속된 삶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관습적인 용어로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But we must guard ourselves against the sassata view that rebirth means the

transfer of the ego to a new abode.

 

하지만 우리는 재생이란 자아가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는 상견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The yogi who has mature vipassanā insight does not harbour the two beliefs because he is fully aware of the rising and passing away of mental units in the present life and their causal relations.

 

성숙된 위빠사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수행자는 현생의 정신적 단위들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철저히 알기 때문에 이러한 단견과 상견을 지니지 않습니다.

 

 

This awareness leaves no room for the illusions of personal immortality or annihilation. The nature of consciousness is evident even to those who think objectively.

 

이렇게 알면 개인이 불멸하거나 단멸한다는 전도된 생각에 휘둘릴 소지가 없습니다. 식(識)의 본성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합니다.

 

 

 

Joy may be followed by dejection and vice versa or a serene mind may give way to irritation and vice versa.

 

낙담 뒤에 기쁨이 오고 또 기쁨 뒤에 낙담이 옵니다. 고요한 마음 다음에 짜증이 오고 짜증다음에 고요한 마음이 옵니다.

 

 

 

These changing states may be associated through similarity, as for example, the intention to do a certain thing at night may occur again in the morning. The mental states do not differ but are causally related to one another.

 

이러한 식(識)의 변화는 명확히 그 이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식들은 유사성으로 인하여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밤에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식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Those who understand this relation between the two mental elements that are separated only by death.

 

두 가지 연속된 식들 간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죽음으로만 격리되었을 뿐인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의 두 가지 식 사이에도 똑같은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슬기롭고 온화하게
글쓴이 : 금강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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