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 마하시 사야도 법문

[스크랩] 12연기...19. 남신도 마하담미까의 이야기

수선님 2018. 7. 15. 13:42

THE STORY OF MAHĀDHAMMIKA UPĀSAKĀ


In the time of the Buddha there were in Sāvatthi city five hundred upāsakās each with 500 followers.

 

19. 남신도 마하담미까의 이야기


부처님 당시 사왓티(Savatthi)성에 남신도 500명이 각각 50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They all practised the dhamma. The eldest of them, Mahādhammika, the head of all

upāsakās had seven sons and seven daughters who also lived up to the teaching of the Buddha.


그들은 모두 법을 열심히 닦았습니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로 그들의 우두머리인 마하담미까(Mahādhammika)는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일곱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As he grew old, he became sick and weak. He invited the Bhikkhus to his house and while attending their recitation of the dhamma, he saw the celestial chariot arriving to take him to the deva-world. He said to the devas, “Please wait”.

 

마하담미까는 나이가 듦에 따라 병들고 쇠약해졌습니다. 집으로 모셔온 비구들이 법을 독경하고 있는 자리에 있을 때 천상의 마차가 천신계로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천신들에게 “기다려 주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The bhikkhus stopped reciting as they thought that the dying man had told them to do so. His sons and daughters cried, believing that he was babbling for fear of death.


비구들은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들에게 하는 말인 줄로 알고는 독경을 그만두었습니다. 그의 아들과 딸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혼미해서 중얼거린다고 생각하고는 울었습니다.




After the bhikkhus, departure he came round, told the people around him to throw a garland of flowers up into the air.


비구들이 떠난 다음에,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환을 공중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자 화환이 공중에 둥둥 떠있었습니다.




They did as they were told and lo! the garland remained hanging in the air. The upāsakā said that the garland indicated the position of the chariot from Tusita heaven, and after advising his daughters and sons to do good deeds like him for rebirth in the deva world, he died and landed in Tusita.


그러자 마하담미까는 화환이 있는 곳이 수시따 하늘을 가리킨다고 말하고는 아들과 딸들에게 천신계에 재생하기 위해 자기처럼 선행을 많이 하라고 충고하고는 죽어서 수시따 천에 났습니다.




This is how the vision of deva-world appears to the good man on his death-bed. A layman in Mawlamyaing said just before he died that he saw a very good pucca building. This too may be a vision of the devaworld.


이 이야기는 선한 사람의 임종의 순간에 천신계의 표상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보여줍니다. 몰라먀잉(Mawlamyaing)의 한 남신도는 죽기 바로 직전에 아주 훌륭한 푸쨔(pucca)건물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천신계의 표상일 것입니다.




Some dying persons who are to be reborn as human beings have visions of their would-be parents, residence and so forth. A Sayādaw in Mawlamyaing, was killed by robbers.


사람으로 태어날 운명의 어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가 될 사람, 거처 등의 표상을 봅니다. 몰라먀잉의 한 사야도는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Three years later a child from Myeik came to Mawlamyaing and identified by name the Sayādaws with whom he said he had lived together in his previous life.


3년 후에 한 어린이가 메르귀(Mergui)에서 몰라먀잉으로 와서 전생에 자신과 같이 살었던  사야도들의 이름을 확인해주었습니다.




He said that the robbers stabbed him when they did not get the money, that he ran away to the jetty where he got into a boat, reached Myeik and dwelt in the home of his parents.


그는 강도들이 돈을 얻지 못하자 자신을 칼로 찔렀고 부두로 도망쳐와서 배를 타고 메르귀에 와서 현재의 부모 집에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The flight, journey by boat, etc., were perhaps visions of the Sayādaw’s afterlife.


 그러한 도주, 배를 탄 것 등은 어쩌면 사야도의 내생의 표상이었을 것입니다.




Flashbacks of kammic acts and visions of a future life occur even in cases of instant death.


업의 표상(kamma-nimitta)과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은 즉사할 경우에도 나타납니다.




According to the commentary, they occur even when a fly on a bar of iron is crushed to pieces with a hammer. Today there are nuclear weapons that can reduce a big city to ashes in a moment.


주석서에 따르면 철봉위에 앉아 있는 파리를 망치로 내리칠 때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큰 도시 하나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가 있습니다.




From the Buddhist point of view, these weapons have appeared because of the evil kamma of their potential victims. Those who are killed by these bombs also see the flashbacks and visions.


불교적 견해에 따르면 이런 핵무기는 잠재적 피폭자의 악업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 핵폭탄에 죽는 사람들 또한 회상과 표상을 봅니다.




This may sound incredible to those who do not know the mechanism of the mind thoroughly but it presents no difficulty to the yogi who contemplates the nāma-rū pa in action.


마음의 매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릴 것이지만 정신과 물질을 찬찬히 관찰하는 수행자는 쉽게 이를 수긍할 수 있습니다.




For it is said in the scriptures that units of consciousness arise and pass away by the billions in the twinkling of an eye.


왜냐하면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도 식 단위들은 수십억번이나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경전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yogi who has attained udayabbaya insight knows empirically that hundreds of mental units arise and dissolve in a moment. So he has no doubt about the possibility of consciousness centering on flashbacks and visions in those who meet violent and instant death.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를 얻은 수행자는 한 찰나에도 수없이 많은 정신의 단위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사고나 갑자기 죽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회상과 표상들에 집중된 식의 가능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Consciousness is always focussed on objects. We often recall what we have done and think of the deva world or the human society. If a man who has done good deeds die with these thoughts, he will be reborn as a deva or a human being.

식(識)은 항상 대상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주 이전에 한 행위들을 회상하거나 천상계나 인간계를 생각하곤 합니다, 선행을 한 사람이 만약 이러한 생각들을 하면서 죽는 다면 천신이나 사람으로 재생할 것입니다.




The objects of these thoughts on death-bed are called gatinimitta, visions of objects associated with kamma are called kammanimitta.


임종 때 가지는 이러한 생각의 대상들을 태어날 곳(gati-nimitta)의 표상이라고 하고, 업과 관련된 대상의 표상들을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라고 합니다.




 References to these death-bed phenomena are to be found not only in the commentaries but also in the Pāli piṭaka.


임종할 때의 현상들에 대한 언급은 주석서뿐만이 아니라 빠알리 경장에서도 발견됩니다.




In the Bālapaṇdita and other suttas the Buddha speaks of the death-bed memories of good or bad deeds and likens them to the shadows of a mountain dominating the plains in the evening. It is impossible to remove them.


「우현경(愚賢經 Balapandita Sutta)」(M.129)와 그 밖의 다른 경들에서 부처님께서는 임종 때의 선행이나 악행에 대한 기억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저녁때 들판에 드리워진 산의 그림자로 비유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Once I saw a dying woman who showed great fear as if she were face to face with an enemy who was out to treat her cruelly. She was speechless and her relatives tried to comfort her but it was in vain.


한때 나는 죽어가는 여인이 무자비하게 다루는 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극도의 공포감을 보이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말을 하질 못했고 친척들이 안심시키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Perhaps she was having a foretaste of her unhappy future as a result of evil kamma.


아마도 그녀는 악업의 결과로 태어날 불행한 내생을 미리 맛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So it is necessary to do good kamma that will produce mental images of objects and persons associated with it and visions of a good afterlife at the moment of dying.


그러므로 선업을 지어서 죽는 순간에 선업과 연관된 대상이나 사람의 표상과 좋은 내생의 표상이 생기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If the good deed is rational, strongly motivated and one of the eight kinds of good deeds in sensual sphere, the resultant consciousness is one of the four kinds of rational vinnāṇa.


만약 선행이 이지적이고 목적의식이 강하며 욕계의 여덟 가지 유익한 마음중의 하나라면 과보식은 네 가지 지혜가 있는 식(識)중의 하나입니다.




Rebirth is then associated with amoha (non-ignorance) and as such it takes place with three root-conditions (hetu) viz., amoha, adosa (nonaggressiveness) and alobba (non-craving).


그러면 재생은 어리석음 없음(amoha)과 결부되고, 그렇게 어리석음 없음(amoha), 성냄 없음(adosa), 탐욕 없음(alobba)의 세 가지 뿌리와 조건, 즉 원인(hetu)과 함께 일어납니다.




A person reborn with these innate tendencies can attain jhāna and psychic powers if he practises samatha and can attain the holy path and Nibbāna if he devotes himself to vipassanā.


이러한 선천적인 성향을 타고난 사람이 사마타를 닦을 경우에는 선(jhāna)과 신통력을 얻을 수 있고 위빠사나에 매진할 때에는 성스러운 도와 닙바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Good acts that are motivated by the desire for Nibbāna lead to such good rebirth and finally to the path and Nibbāna through contemplation or hearing a sermon.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한 선행들은 그러한 선한 재생으로 인도하고 궁극에 가서는 관찰이나 법문을 들음으로써 도와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If the motivation is weak or if it is a good but unenlightened deed, that is, a good deed divorced from the belief in kamma, the result is one of the four kinds of unenlightened (mohavipāka) consciousness.


만약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이 약하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없는 행위, 즉 업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선행일 경우에는 네 가지 지혜 없는 과보심(moha-vipāka)이 됩니다.




The rebirth is then devoid of amoha (non-ignorance), there being only the other root-conditions, viz., alobha and adosa. It is termed dvehetupatisandhika.


그러면 재생은 어리석음 없음(amoha)이 없이 다른 뿌리와 조건, 즉 탐욕 없음(amoha)과 성냄 없음(adosa)만을 가지고 일어납니다. 이를 두 가지 뿌리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dvehetupatisandhika)이라고 합니다.




A man reborn in this way cannot attain jhāna or the Path as he lacks the innate intelligence for it. If the good deed is unenlightened and half-hearted, the result will be good rebirth consciousness without any good predispositions.


이렇게 태어난 사람은 선천적인 지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선(jhāna)이나 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선행이 지혜와 결부되지 않았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선근(善根)도 없이 선한 재생연결식만을 낳을 것입니다.




The person concerned is likely to have defective eyes, ears, etc.


그러한 사람은 불완전한 눈과 귀 등을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So when you do a good deed you should do it with zeal and with Nibbāna as your objective. If you set your heart on Nibbāna, the good deed will lead you to it and the zeal with which you do it will ensure rebirth with good predispositions.



그러므로 선행을 할 때에는 열반을 목표로 하고 열과 성을 가지고 해야만 합니다. 마음을 열반으로 향하게 한다면 선행은 열반으로 인도할 것이며 선행을 할 때의 열과 성은 선근(善根)를 가지고 재생하도록 할 것입니다.




It is not necessary to pray for such noble rebirth because you are assured of it if you do good deeds intelligently and zealously. But if you lack zeal in doing good, yours will be a rebirth with only alobha and adosa.


 지혜롭게 열과 성을 다해 선행을 한다면 고귀하게 재생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행을 함에 있어서 열과 성이 없다면 탐욕 없음(alobha)과 성냄 없음(adosa)이 없는 재생이 될 것입니다.




Some people say that dāna and sila mean good kamma-formations (punnābhisaṅkhāra) which being rooted in ignorance lead to rebirth and samsāric suffering.


어떤 사람들은 보시와 지계는 재생과 윤회고에 이르는 무명에 뿌리박은 선한 업형성력, 즉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This is a mistaken view that stems from ignorance. If the practice of dāna and sila is motivated by the desire for Nibbāna, it will ensure the noblest rebirth and lead to the supreme goal.


 이는 무지에서 생긴 그릇된 견해입니다. 열반을 바라는 마음에서 보시와 지계를 행하면 가장 고귀한 재생을 보장하고 최고의 목표에 이르도록 합니다.




It was due to dāna and sila that Sāriputtra and other disciples of the Buddha finally attained Nibbæna. The same may be said of paccekabuddhas.


 사리뿟타(Sāriputta)와 다른 부처님의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열반을 얻은 것은 보시와 지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벽지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The bodhisatta, too, attained supreme enlightenment in the same way by praying that his good deeds contribute to the attainment of omniscience (sabbannutanana).


보살도 또한 자신의 선행이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 sabbaññutā-ñāṇa)를 아는 지혜를 얻게 해달라고 서원하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위없는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었습니다.




Here rebirth with three good predispositions, viz., amoha, adosa and alobha involved in the genesis of Buddhahood is of two kinds, viz., consciousness associated with joy (somanassa) and consciousness associated with equanimity (upekkhā).


 여기서 부처님이 될 보살의 태어남과 관련된 어리석음 없음(amoha), 성냄 없음(adosa), 탐욕 없음(amoha)의 세 가지 선한 근기를 가진 재생은 기쁨(somanassa)과 함께하는 마음과 평온(upekkhā)이 함께하는 마음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Again each of these two vinnāṇas is of two kinds, viz., asaṅkhārika (spontaneous) and sasaṅkhārika (non-spontaneous). The bodhisatta’s rebirth consciousness was

powerful, zealous asaṅkhārika.


그리고 이들 두 가지 마음은 각각 자극받지 않은(asaṅkhārika) 마음과 자극받은(sasaṅkhārika)마음이 있습니다. 보살의 재생연결식은 강력하고 열정적이고 자극받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According to ancient commentaries, it was somanassa consciousness. For the bodhisatta wanted very much to promote the welfare of all living beings. He had infinite mettā (good-will or loving kindness) for them.


옛 주석서들에 따르면 그것은 기쁨(somanassa)이 함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중생들이 행복해지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에 대해 무한한 자애(mettā)를 가졌습니다.




A strong-willed mettā is usually coupled with somanassa and hence the bodhisatta’s rebirth consciousness was tinged with joy.


강력한 의지의 자애는 보통 기쁨(somanassa)과 함께하므로 보살의 재생연결식은 기쁨과 함께한 것입니다.




 But Mahāsiva thera suggested upekkhā as its (bodhisatta’s rebirth) concomitant. In his view the bodhisatta’s mind was firm and profound, thereby making equanimity rather than joy the characteristic of his rebirth consciousness.


하지만 마하시와(Mahāsiva)장로는 평온(upekkhā)이 보살의 재생 마음부수로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보살의 마음은 확고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평온이 그의 재생연결식을 특징짓는다고 합니다.




In any event this rebirth viññāṇa had its origin in his good deed that was motivated by the desire for supreme enlightenment.


 여하튼 이 재생연결식은 위없는 깨달음(無上正等覺)을 바라는 욕구에 자극받은 선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Thus although the enlightened good kamma-formation (saṅkhāra) leads to rebirth, it does not prolong samsāric existence; on the contrary it contributes to liberation form the life-cycle.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선한 업 형성력(saṅkhāra)이 재생에 이르게 했지만 윤회를 연장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윤회로부터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Consciousness of any kind, whether it be rebirth consciousness or otherwise, is a matter of very short duration. It has only three points of time, viz., arising (upāda), being (thi) and passing away (bhaṅga).


식(識)은 재생연결식이거나 다른 것이거나 매우 짧은 시간만 머뭅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측면에서 일어남(生 upāda), 머묾(住 ṭhiti), 무너짐(滅 bhaṅga)이라는 세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According to the commentaries, these mental units arise and pass away by the

millions in the twinkling of an eye. The moment of each unit is so short that it does not last even the millionth part of a second.


주석서에 따르면 이들 정신적 단위는 눈 깜짝할 동안에 수백만 번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합니다. 각 단위의 순간들은 너무나 짧아서 백만분의 1초도 머물지 않습니다.




After the cessation of rebirth-consciousness there follows the stream of subconsciousness (bhavaṅga) which flows ceaselessly unless it is interrupted by a different kind of consciousness called vithi, that is the kind of mental activity involved in seeing, hearing, and so forth.


재생연결식이 소멸한 다음에는 보고 듣는 등과 결부된 정신활동의 일종인 과정(vīthi)이라고 불리는 다른 종류의 식(識)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 잠재의식, 즉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The stream of bhavaṅga lasts as long as there is life, its mainspring being saṅkhāra as in the case of rebirth consciousness.


삶이 이어지는 한 이 바왕가의 흐름은 계속되며 그 주된 원인은 재생연결식과 마찬가지로 바로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Its duration, too, depends mainly on saṅkhāra or kamma. Its duration, too, depends

mainly on saṅkhāra or kamma. It may be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air. The stone will travel a long way if the hand which throws it is strong but it will not go very far if the hand is weak.


바왕가의 흐름이 지속되는 기간도 주로 상카라, 즉 업(kamma)에 의존합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 던져진 돌과 같을 것입니다. 돌을 던진 손의 힘이 세다면 돌은 멀리 올라가겠지만 힘이 약하다면 그다지 멀리 올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The force of kamma may also be compared to the initial velocity of the bullet, rocket and so forth. Death means the dissolution of the consciousness that is born of the same kammic force.


 업의 힘은 또한 총알이나 로켓 따위가 처음 발사되었을 때의 속도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은 그와 같은 업의 힘에서 나온 식(識)의 소멸을 뜻합니다.




Hence the initial rebirth consciousness, the stream of subconsciousness and the last dying (cuti) consciousness of an existence comprise the mental life that is wholly rooted in past kamma.


그러므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때, 맨 처음 일어나는 재생연결식, 바왕가의 흐름, 마지막 죽음의 마음(cuti-citta)은 전적으로 과거 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신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Also due to kamma or saṅkhāra are the five kinds of vithi consciousness, viz, those involved in seeing, hearing, smelling, eating and touching as well as the mental unit that focuses on the sense-objects, the consciousness that reflects (santirana-citta) and the consciousness that registers (tadarammana-citta) the objects of impulse-moments (javana).


또한 업, 즉 상카라(saṅkhāra)로 인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과 결부된 다섯 가지의 인식과정(vīthi-citta)이 있으며 감각대상들에 초점을 둔 정신적 단위,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 속행(javana)의 대상들을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이 있습니다.




These have their roots in original kamma that leads to rebirth or other kinds of kamma.


이들은 재생에 이르게 하는 원래의 업이나 다른 종류의 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The Abhidhamma piṭaka attributes all kinds of consciousness, including wholesome,

unwholesome and non-kammic or kiriya-citta to saṅkhāra.


논장(論藏)에 의하면 선한 마음, 불선한 마음, 업이 되지 않는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을 포함하는 모든 식(識)의 원인을 상카라에 돌립니다.



This view is reasonable since the kiriyacittas, too, evolve from the bhavaṅga-citta that is rooted in saṅkhāra.


이러한 견해는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 또한 상카라에 뿌리를 둔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합리적입니다.




But the doctrine of Paticcasamuppāda specifically describes the three rounds (vaṭṭa) of defilements, kamma, kammic results and their cause-and-effect relationships.


 하지만 연기법은 특히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So it ascribes to saṅkhāra only the 32 types of mundane resultant cittas that stem from kamma vaṭṭa. Of these 32 cittas we have described 19 cittas that comprise rebirth, sub-conscious state and death of the other cittas.


그래서 업의 회전(kamma-vaṭṭa)에서 나온 32가지 세간의 과보심의 원인을 상카라에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32가지 마음 가운데 우리는 재생연결식, 바왕가(잠재의식), 죽음의 마음 등으로 이루어진 19가지 마음들을 설명하였습니다.




Of the other cittas some are wholesome according to the saṅkhāra.


나머지 마음들 가운데 일부는 상카라에 따라서 선한 것도 있습니다.




In the dotrine to Paticcasamuppāda the first two factors i.e., avijjā and saṅkhāra are described as the causes in the past life, vinnāṇa, nāmarūpa, phassa and vedanā as the consequences in the present life; taṇhā, upādāna and bhava as the causes in the present life and jæti and jarāmaraṇa (old age and death) as the consequences that will occur in the future life.


12연기법에서 처음의 두 요소인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는 전생의 원인으로 설명하고, 식(識), 정신과 물질(名色), 감각접촉(觸), 느낌(受)은 현생의 결과로, 현생의 갈애(愛), 취착(取), 존재(有)로 인하여 내생에 태어남(生), 늙음과 죽음(老死)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출처 : 슬기롭고 온화하게
글쓴이 : 금강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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