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21. 견성성불(見性成佛) 8

수선님 2018. 7. 1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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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신행이 지금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 데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
 
이 지면의 주제가 ‘선과 21세기’인데, 그 동안 주로 선(禪)의 종지(宗旨) 그 자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 지금 21세기의 우리의 삶과 무슨 연관이 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항공사에서 새로 최신형 여객기를 구입해서 도착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앞에 상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낸다는 얘기를 듣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상에는 돼지머리와 북어포, 과일이 놓여있고 술잔도 채워 올렸으리라 짐작된다. 오래 전에 들은 얘기지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지금껏 여전하지 않을까 싶다. 비행기, 그것도 최신형 점보 여객기라면 그야말로 현대 과학기술의 총화라 할 만한 물건이다. 그 앞에서 지내는 고사(告祀), 즉 ‘고하는 제사’는 누구에게 무엇을 고하며 무엇 때문에 하는 일인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비행기를 새로 들여와 운용하게 되었음을 신령님들에게 고하고 앞으로 그것이 탈 없이 날아다녀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물리, 전기, 전자, 기후 등등에 관한 온갖 첨단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이 가진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비행기를 만드는 데에는 도대체 신령님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여지가 없고 신령님이 개입할 여지도 없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운용하려고 할 때에는 신령님부터 찾고 있는 것이다. 글쎄, 신령님도 여러 가지인데 과연 어떤 신령님에게 고사를 올리는지는 모르겠다. 막연하게는 그냥 천지신명이라 하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비행기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신령님이 아닐까.

 

또 하나 비슷한 얘기로, 십여년전, 슈퍼컴퓨터라고 하면 큰방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장치였던 시절의 얘기가 있다. 그것을 큰 돈 들여서 장만하게 된 어느 기관에서 컴퓨터 앞에다가 상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냈다는 얘기이다. 그 심정도 앞에서 이야기한 항공사의 심정하고 같은 것일 터이다. 개인 컴퓨터가 옛날의 그 슈퍼컴퓨터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성능을 가졌는데도 값은 훨씬 싼 요즘, 개인 컴퓨터를 장만하고 그 앞에서 고사 지낸다는 얘기는 못 들어 보았다. 그러니 같은 기계라 할지라도 아마 꽤나 값이 나가는 것이어야만 고사를 받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요즘 개인 컴퓨터에게는 고사를 안 지내지만 자동차를 새로 장만하면 흔히들 그 앞에서 고사를 지낸다는 사실이 그 짐작을 뒷받침해준다.

 

그런 행태는 이른바 물신숭배(物神崇拜)의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바깥의 어떤 대상에 대하여 그 자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이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선(禪)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하는 망념(妄念) 망상(妄想)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나아가 불교의 기초교리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의 기본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비행기든 슈퍼컴퓨터든 자동차든 다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고 이에 부여하는 의미도 다 우리가 지어낸 것인데, 거기에 머리를 조아리고 노예 노릇을 자청하는 것, 이것이 바로 21세기에도 성행하고 있는 원시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신행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윤원철/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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