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33칙 陳操看資福 - 자복화상의 일원상(一圓相)

수선님 2018. 7. 29. 11:47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33칙은 자복 화상이 진조(陳操) 상서(尙書)에게 하나의 원상(圓相)을 그려서 제시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진조 상서가 자복 화상의 견해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 갔다. 자복 화상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하나의 원상을 그렸다. 진조가 말했다. ‘제자가 이렇게 와서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하나의 원상을 그려서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자복 화상은 곧장 방장실의 문을 닫아 버렸다.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진조는 단지 한쪽 눈만을 갖춘 인물이다.’”

 

擧. 陳操尙書, 看資福. 福見來, 便畵一圓相. 操云, 弟子恁來, 早是不着便. 何況更畵一圓相. 福便掩却方丈門.(雪竇云, 陳操只具一隻眼.)

 

자복 여보(如寶) 선사는 당말 위앙종의 선승으로 앙산혜적의 법손으로 길주(吉州, 江西省) 자복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펼쳤기 때문에 자복 화상이라고 부른다. 〈전등록〉 제12권과 〈회요〉 제11권에 약간의 선문답을 수록하고 있지만 이 공안은 보이지 않는다. 〈종문통요집〉 제6권 자복전에는 설두의 착어를 첨가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벽암록〉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조상서는 〈벽암록〉 제6칙 평창에 언급된 것처럼, 황벽의 제자 목주 화상(진존숙)을 참문하여 선법을 이은 거사이며, 상서는 대신(大臣)으로 장차관급의 고급관리이다. 원오는 평창에 진조 상서가 당대의 유명한 거사 배휴(裵休)와 이고(李)와 같은 유명한 거사로 그는 스님을 만나면 먼저 공양을 청하고 삼백량을 보시한 후에 반드시 그 스님의 안목을 시험하였다. 많은 선승들의 안목을 간파했지만 운문 선사는 간파하지 못했는데, 그가 목주 화상 밑에서 참선하여 정법의 안목을 갖춘 거사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어느 날 진조 거사가 여보 선사의 안목을 점검해보기 위해서 자복사를 참문하러 갔다. 그런데 자복 화상은 유명한 진조 거사가 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허공에다 하나의 둥근 원상(一圓相)을 그렸다. 위산과 앙산의 위앙종은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 독창적인 선풍을 펼쳤다. 일원상을 제시하여 선문답을 나누는 선풍은 혜충 국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인천안목〉 제4권에는 혜충 국사가 제자 탐원(耽源)에게 내린 일원상의 의미를 앙산혜적이 학인을 제접하는 교화의 수단으로 응용하면서 위앙종의 선풍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원상에는 96가지 의미가 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6종류로 정리된다.

 

선문답에서 일원상을 그려서 제시한 것은 첫째로 절대의 진실인 불법 그 자체를 상징하여 나타낸 것, 둘째는 수많은 선정의 삼매를 모두 이 일원상에 포함시킨 것, 셋째는 주객의 차별적인 대립이 나누기 이전의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 넷째는 일원상이 불법의 대의를 나타내는 문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 다섯째는 일원상이 불법의 종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 여섯째는 원상이 그대로 언어 문자를 초월한 경지에서 종지에 계합된 사실 등이다. 즉 일원상은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으로 제시한 것이다. 〈신심명〉에 “둥글기가 허공과 같이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읊고 있는 것처럼, 지도(至道), 진여(眞如), 불성(佛性), 불심(佛心)은 법계와 하나 된(萬法一如) 것이며, 일체 제법이 본래 공(空)한 모습을 그림(圖示)으로 제시한 법문이다. 하나의 원상은 무한의 시간과 공간을 중복시킨 법계를 상징한 동적(動的)인 도식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의 시간을 나타내고, 원상안의 공간은 시방(十方)세계를 표현한다. 즉 시방삼세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찰나의 시간에 삼세가 함께하고, 여기라는 공간이 시방세계인 것이며, 자기의 본래심(佛心)은 만법과 하나 된 법계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자복 화상은 일원상을 그려서 선법을 제시한 위앙종의 종지를 계승한 선승답게 불법의 근원과 본질을 텅 빈 허공에다 일원상을 그려서 진조 거사에게 보여준 것이다. 원오는 자복 화상이 일원상을 그린 것에 대하여 “도깨비는 도깨비를 알고, 도적은 도적을 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자복과 진조 거사의 경지를 똑같이 평하고 있다.

 

진조 거사는 “제자가 이제 막 화상을 참문하려고 와서 아직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지도 않았고, 한마디의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화상은 미리 허공에다 일원상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말했다. 자복 화상보다 나이도 많고 선법도 뛰어난 진조 거사가 자신을 제자라고 하는 말한 것은 거사로서 선승에 대한 겸손의 미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복 화상은 진조 거사가 자신을 방문하는 의도와 그의 선기를 먼저 파악하고 그가 받아먹을 수도 없고 문제를 파악하여 다시 제기할 수도 없는 일원상을 허공에다 그려 보인 것에 대한 반문이다. 즉 도적이 도적의 마음을 먼저 읽어보고 한 발 앞서서 쓸데없는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선수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자복 화상 당신이 그린 원상 가운데 빠져들지 않는다는 선기가 포함된 말이기도 하다.

 

원오는 진조 거사가 “오늘 비로소 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고, 진조 거사는 과연 “노련한 도적”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진조 거사보다도 한수 더 위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련한 도적이 자복 화상이다. 자복 화상은 진조 거사의 안목을 전부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조 거사의 비판적인 말에 한마디의 대꾸나 반응도 없이 방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자신의 살림살이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장실은 주지가 거처하는 공간이며, 본래 깨달음의 공간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진조 거사를 위해서 일원상을 그려서 방편 법문을 제시하고는 자신이 제시한 법문을 진조 거사가 파악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선승의 본분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설두는 “진조 거사는 훌륭한 안목을 갖춘 인물이지만 한쪽 눈만을 갖춘 사람”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자복 화상은 진조 거사가 자복의 견지를 시험하기 위해 오는 것을 보고 절대 깨달음의 경지인 원상을 방편문으로 제시한 것은 파악하고 있지만, 방장실로 되돌아 문을 닫고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경지에서 무애자재하게 살고 있는 자복 화상의 지혜작용은 파악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원오도 수시에 “낮잠 자고 있는가? 깨어있는가? 유심인가 무심인가, 도인인가. 범부인가 전혀 파악 할 수 없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복 화상은 정말 자유 자재한 선기를 펼치고 있는 훌륭한 선지식(작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둥근 진주는 구르고, 옥구슬은 돌돌돌” 진주나 옥구슬이 둥근 형체로 자복 화상이 제시한 일원상은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이 완전무결한 것이며, 옥이 그릇에서 구르는 것처럼, 자유 자재한 지혜작용이 빛난다.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鐵船)을 타고”라고 읊은 말은 둥근 주옥과 같은 진여 법성은 우주 만상을 그대로 들어내고 시방세계에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말에 싣고, 나귀에 얹고, 철선에도 가득 싣게 된다는 의미이다. “온 세상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나그네(海山無事)에게 나누어 주네.” 수없이 많은 구슬을 말과 나귀, 철선에 싣고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나누어 줄까라고 생각해보니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지만 깨달음의 자취도 없고 지옥과 극락을 초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증도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도의 수학을 일체 끊고(絶學)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 아니면 일원상을 수용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큰 자라를 낚을 때는 올가미를 던져라”라고 읊은 것은 자라는 낚싯대로 잡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진조와 같은 거물은 자라를 잡는 방법은 일원상의 올가미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설두는 “천하의 납승도 자복 화상이 던진 이 일원상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칭찬하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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