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34칙 仰山不曾遊山 - 앙산화상이 산놀이를 묻다

수선님 2018. 7. 29. 11:47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34칙은 앙산혜적 선사가 어느 스님에게 ‘여산의 오로봉에 산놀이한 적이 있었는가’를 질문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앙산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최근 어디서 왔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여산에서 왔습니다.’ 앙산 화상이 물었다. ‘오노봉(五老峯)도 가 보았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앙산 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아직 산놀이를 하지 못했군!’ 운문 선사가 말했다. ‘이 말은 모두 자비심 때문에 중생을 위한 방편의 말(落草之談)이다.’”

 

擧. 仰山問僧, 近離甚處. 僧云, 盧山. 山云, 曾遊五老峰. 僧云, 不曾到. 山云, 사黎不曾遊山. 雲門云, 此語皆爲慈悲之故. 有落草之談.

 

이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中卷)에 수록하고 있다.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 선사는 위산영우 선사의 제자로 위산과 앙산의 선풍을 종합하여 일원상(一圓相)을 제시하는 독창적인 위앙종의 종지를 천양한 훌륭한 선승으로 〈벽암록〉 제18칙 평창에도 언급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임제의 행록과 선문답에 위산과 더불어 촌평을 붙이고 있는 것처럼, 독자적인 안목으로 임제의 지혜작용(禪機)을 비평하면서 인정하고, 예언하는 말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임제록〉의 편집자가 당시 최고의 선승으로 안목을 구족한 위산과 앙산의 권위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당집〉 제18권에 앙산은 날마다 법당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고 한다. “그대들 모두 각자가 광채를 돌이키고 자신을 되찾도록 하라. 나의 말을 기억하지 말라. 나는 시작 없는 예부터 밝음을 등지고 어둠을 향하여 허망을 쫓는 뿌리가 깊어져 단법에 뽑기가 어렵게 된 그대들을 가엽게 여긴다. 그러므로 거짓 방편을 사용하여 여러분들이 수량 겁에 쌓인 수많은 나쁜 지식을 뽑아 버리려고 한다. 마치 누른 나뭇잎으로 아기의 울음을 달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백가지 재물과 금 은 보화를 한 자리에 뒤섞어 놓고 찾아온 사람의 정도에 맞추어 물건을 파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석두(石頭)는 순금가게(眞金)지만 나는 잡화가게(雜貨)이니 찾아온 사람이 잡화를 찾으면 잡화를 주고, 순금을 찾으면 순금도 준다.”

 

본칙에서 운문이 앙산의 자비심을 언급한 것처럼, 앙산은 다양한 지혜와 방편법문으로 수행자들을 지도하여 각자의 불심을 체득하도록 하면서 “내 말을 기억하지 말라(莫記吾語)”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마조의 설법에도 강조하고 있는데, 나의 설법은 우는 아기를 달래는 일시의 방편과 같은 것이니 내 말에 집착하지 말고 불법의 진실을 각자 체득하라고 주장한 말이다.

 

어떤 스님이 앙산 화상을 참문 하러 왔기에 앙산은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은 선지식이 처음 온 학인에게 말하는 평상시의 인사말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학인의 수행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지는 문제인 것이다. 그 스님은 “여산(廬山)에서 왔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너무나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본분에 계합된 맛이 있기에 원오는 “정직한 사람이라, 앙산은 이 스님의 안목을 파악하기 어렵게 됐다”고 코멘트 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물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던진 말이 “그러면 오노봉(五老峯)에도 올라가 보았는가?”라는 질문이다. 여산은 중국 강서성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백련사의 혜원(慧遠) 법사가 은거 수행한 곳으로 유교의 도연명(陶淵明), 도교의 육수정(陸修靜)의 대표적인 은거수행자 3인이 담소하며 여산에 흐르는 호계라는 개울을 처음 건너게 된 ‘호계삼소(虎溪三笑)’ 라는 고사로 유명하며, 또한 송대 소동파가 동림상총 선사를 참문하여 참선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뒤에 읊은 “여산은 안개, 절강은 조수”라고 읊고 있는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산의 서쪽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고, 남쪽에는 오노봉이라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는 아름다운 경치이기 때문에 관광지로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앙산 화상이 스님에게 “오노봉에 산놀이 가 보았는가?”라는 질문은 이 스님을 시험하기 위한 두 번째 의 질문이었다. 그 스님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앙산 화상이 질문한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앙산 화상이 질문한 ‘오노봉’은 여산의 오노봉을 제기한 것이지만, 단순히 경계를 묻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본래 구족한 깨달음의 경지인 오노봉을 말한다. 〈벽암록〉 23칙에서 말하는 묘봉산의 정상과 같은 의미로 각자의 발아래서 전개되는 진실의 세계, 지금 여기서 자기의 본래심으로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오노봉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기와 깨달음의 경지인 오노봉이 하나가 되어 지금 여기 자신의 삶에서 전개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세월을 행각한다고 할지라도 불법의 깨달음을 체득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과 오노봉이라는 경계와 주객(主客)의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앙산 화상은 “그대는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체험했는가?”라는 질문을 “오노봉에도 가 보았는가?” 라고 질문한 것인데, 그 스님은 정직하게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다. 앙산 화상은 “그대는 아직 한 번도 산놀이를 해보지 못했군!”이라고 말했다. 앙산 화상이 말하는 산놀이는 각자가 구족하고 있는 본분(本分)의 산(山: 깨달음의 경지)을 말하며, 본래면목, 혹은 본지풍광을 체득하여 유희삼매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한마디의 말이다. 원오도 “이런 스님과 대화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선문답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의미한 것이다.

 

운문 선사는 본칙의 선문답에 대하여 “이 말은 모두 자비심 때문에 중생을 위한 방편의 말(落草之談)”이라고 비평하고 있다. 낙초지담(落草之談)이란 말은 운문의 독창적인 말로서 사바세계(풀밭)에서 중생을 위하여 자비심의 방편법문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즉 앙산 화상은 그 스님을 위해서 지극한 자비심으로 방편 법문을 설한 위대한 선승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요컨대 산길을 알려면 산에 갔다 온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운문 선사가 오노봉에 산놀이를 한 경험이 있는 선승이기 때문에 앙산의 경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칙은 지극히 평범한 선승들의 일상 대화로서 평상심으로 깨달음(道)의 삶을 일상생활에서 전개하고 있는 모습을 여실하게 전하고 있는 것처럼, 선의 수행은 평상시의 대화에서 본래심을 상실하지 않고,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는 일상생활의 대화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처음 “풀밭에서 나오고, 풀밭에 들어가고”라는 말은 앙산의 경계는 깨달음을 체득하게 하는 향상(向上)과 중생 구제를 위한 자비심의 향하(向下)를 자유자재로 펼친 선승이라고 ‘출초입초(出草入草)’라고 읊고 있다. 이러한 앙산의 자유 자재한 경지를 “그 누가 판단 할 수 있을까?” 앙산의 향상과 향하를 마음대로 전개하는 출입자재한 경지를 “흰 구름 겹겹이 쌓이고, 붉은 해는 높이 솟았네”라고 읊고 있다. 즉 구름에 쌓인 앙산의 깨달음의 경지(向上)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붉은 태양이 솟아 오노봉(向下)의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오노봉은 팔면이 영롱한 옥과 같이 조금도 흠(티)이 없는 것처럼, 앙산은 철저히 무심의 경지에서 설법하고 있으며, 일체의 범부의 경계를 초월했다는 의미를 “왼쪽으로 돌아봐도 흠이 없고,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벌써 늙어 버렸다”고 읊고 있다. ‘늙었다’는 말은 범부의 경지를 완전히 뛰어 넘은 의미이다.

 

또 설두는 오노봉의 산놀이에 대하여 한산시를 인용하여 “그대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한산자에 대하여. 너무 일직 길을 떠나, 십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왔던 길마저 잊어버렸다”고 읊고 있다. 앙산의 오노봉 산놀이를 천태산 근처에서 한산과 습득이 무심의 경지에서 산놀이를 하는 유희삼매와 대비하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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