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스크랩] 혜거스님 유식 30송 강의 제 3 강

수선님 2018. 8. 5. 12:17

< 혜거스님 유식30송 > 제 3 강

 

제 4 송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제8 아뢰야식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니 촉(觸) 등 오변행심소(五行心所)도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움직임(恒轉)이 마치 폭류(瀑流)와 같으니 아라한(阿羅漢)의 자리에서 버려진다.


이 송문(頌文)은 이미 3송(三頌)에서 아뢰야식의 체성(體性)을 밝힌 데 이어 아뢰야의 성질(性質)을 밝힌 구(句)이다. 아뢰야의 성질이란 범부로부터 불보살(佛菩薩)에 이르기까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품성을 말한다.

인간은 품성에 따라 불보살이 되기도 하고 고뇌중생이 되기도 한다. 만약에 중생이 고뇌에서 벗어나기를 진정으로 염원한다면 고뇌의 근원인 마음의 체(體)와 성(性)을 깨달아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마음의 체성을 깨닫고 나면 고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품성은 무한해서 뜻을 발하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나 본래 생멸이 없는 큰 길은 버리고 작은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래장(如來藏)을 설하시어 아뢰야가 천하의 주인임을 밝히신 것이다.

무부무기(無覆無記) : 무부는 물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번뇌가 일지 않고 경계에 부동함을 말하고 무기는 그 원인이 선악에 속하지 않고 결과 또한 고(苦)와 낙(樂)을 받지 않음을 말한다.

제8아뢰야의 성질은 물들지 않으므로 번뇌가 없고 선악이 없으므로 인과(因果)가 없고 인과가 없으므로 고락(苦樂)을 받지 않는다. 아뢰야의 성질이 무부무기(無覆無記)이기 때문에 스스로 업을 짓는 일이 없고 업을 받는 일도 없다. 다만 여래장 또는 진여법성이라고도 하는 제8식은 맑고 깨끗하여 자체의 성(性)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7식이 선악을 지어 훈습한 습기(習氣)를 섭수하여 보존하여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촉등(觸等) : 송문 제2구에서 말한 촉등은 제8식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로서 촉·작의·수·상·사(觸·作意·受·想·思)를 말한 것이니 곧 오변행심소(五行心所)이다.

오변행심소는 제8식의 심소로서 말하자면 감각을 일으키는 자리가 촉(觸)이요, 분별하고 변화하는 자리가 작의(作意)요, 선악의 경계를 수용하는 자리가 수(受)요, 면전의 경계를 분별하여 생각하는 자리가 상(想)이요, 스스로 사량(思量)을 일으키는 자리가 사(思)이다. 이러한 오변행심소도 역시 작용은 하되 물들지 않고 장애도 받지 않으며 인과를 짓지 않으며 고락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오변행심소의 작용도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다.

이렇듯 아뢰야식은 심체(心體)가 무부무기요, 작용도 무부무기여서 본래청정이라 하고 본래청정하므로 일체만법에 상응하고 일체만법에 상응하므로 심왕(心王)이라 하는 것이다. 심왕(心王)이 청정하므로 심소(心所)도 청정하여 체(體)와 성(性)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 한계가 무한하여 중생의 식견으로는 가히 알 수 없어서 불가지(不可知)라 한다. 제8식의 한계를 가히 알 수 없는 것은 8식의 체성이 본래 없고 오직 만법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8식은 일체법과 모두 상응하면서도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법이 장애되지 않는 8식의 한계를 어찌 중생의 식견으로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물들지 않고 전변하지 않는 자리에서 8식의 체(體)와 성(性)을 요지(了知)할 수 있는 것이다.

항전(恒轉) : 항전이란 항상하면서 변화한다는 뜻이다. 8식의 마음은 불생불멸하여 항상하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부지불각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변화의 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다. 6식(六識)의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의 변화는 누구나 흔적을 느끼지만 8식의 변화는 미세하여 변화의 상황을 겉으로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폭류(瀑流) : 폭류는 급류(急流)하는 물이라는 뜻이다. 물의 흐름은 표면상으로는 인식할 수 없으나 안으로는 흐름이 급속해서 멈춤이 없다. 8식도 이와 같아서 외관상으로는 생각의 실처를 알 수 없으나 안으로 끊임없이 분출되어 나오는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어서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일어나고 멸하는 8식의 마음을 폭류에 비유한 것이다. 8식은 6식의 업인(業因)과 7식의 번뇌가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8식에 함장되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어서 항전(恒轉)하기를 폭류와 같다는 것이다. 8식이 항전함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제8 아뢰야식의 실체는 상주불멸하여 본래 생사(生死)가 없어서 육신이 멸할 때 6식과 7식만이 따라서 멸하고 8식은 불멸(不滅)한다. 불멸할 뿐 아니라 불변하기 때문에 마치 금(金)으로 가락지나 목걸이를 만든다면 형상은 변했어도 금의 실체가 변하지 않듯이 육신이 윤회를 계속한다 해서 8식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둘째, 7식은 때로 선악의 업을 지어서 선악의 습기가 종자가 되어 8식에 함장(含藏)시켜 다음 과(果)를 받게 하므로 항전의 뜻이 있고 이를 업인의 습기가 진행한다는 뜻으로 진(進)이라고도 한다.

셋째, 8식 안에 훈습되어 성숙된 종자의 수량은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자류(自類)와 같은 외연(外緣)을 기다려 서로 합하여 외연이 충족되면 현행(現行)하다가 연(緣)이 다하면 점차 소멸되므로 이를 출(出)이라 하여 업인이 다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8식은 업인에 일진(一進)하고 업인에서 일출(一出)함을 반복하기 때문에 항상 불멸하는 뜻으로 항(恒)을 쓰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전(轉)을 써서 항전(恒轉)이라 했다. 이러한 8식은 외형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는 폭류처럼 변한다.


아라한(阿羅漢) : 아라한은 성문사과(聲聞四果) 중 제4위에 해당되며 증과(證果)하는 최상의 위치가 된다. 아라한과가 수행자의 최상의 위(位)에 해당되지만 아직 소승(小乘)에 속하는 것은 비록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타파하여 밖으로 경계에 물들지 않고 안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나 보리심을 발하여 중생구제의 대원(大願)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범어로서 세 가지의 뜻이 있다.

① 살적의(殺賊義) : 수행자에게 가장 큰 적(賊)은 번뇌이기 때문에 번뇌라고 하는 적(賊)을 파해 없앤다는 뜻이다.

② 응공의(應供義) : 아라한은 이미 모든 루(漏)가 멸하여 덕(德)이 수승하여 세상에 존경의 대상이 되어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응공이라 한다.

③ 불생의(不生義) : 불생불멸하는 열반을 증득하여 다시는 생사의 길에 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한다.

사(捨) : 사(捨)는 7식의 업인(業因)에 물들지 않으므로 버릴 사(捨)를 써서 사위(捨位)라 한다. 사(捨)는 집착을 버리고 외경(外境)에 부동함을 뜻한다. 여기에는 인식전환의 뜻이 있으니 탐진치(貪嗔痴)를 집착하던 마음이 탐진치를 버리고, 유루(有漏)를 집착하던 마음이 무루(無漏)를 증득하여 범부의 식견을 버리고 성현의 위에 진입하고자 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뜻한다.

성문사과의 수행인이 인식의 대전환을 성취하여 아라한위에 이르고자 한다면 먼저 한결같이 아공관(我空觀)을 닦아야 한다. 아공관이란 아뢰야의 실체가 공함을 깨닫고 마음이 분상에서 마음이란 영원함이 없어서 무상하고 법의 분상에서 모든 법이 실체가 없어서 무아임을 인식하므로 본래 내가 없음을 관함을 말한다.

이렇듯 아공관(我空觀)을 닦아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이집(二執) 가운데 아집을 끊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2장(二障) 가운데 번뇌장을 끊는다. 이를 버린다는 뜻으로 사(捨)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법집을 끊지 못하고 소지장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나(我)는 버렸다 하더라도 진리를 집착하여 주창할 사상(思想)을 고집하고, 바깥 경계에 순역(順逆)함이 자유롭지 못하여 마음이 부동하지 못하고, 악(惡)은 끊었으나 선종자(善種子)가 남아 있어 다시 과(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 이 위(位)이다.

수행자는 오직 아공(我空)의 이치를 깨달아 분별아집을 끊고 번뇌장을 끊은 후에 다시 구생아집(俱生我執)을 끊고 소지장을 끊어 선악을 모두 초월하여 일체법에 부동하고 허덕임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발심해야 한다. 본래 청정한 8식이 상황에 따라 폭류처럼 변화하지만 아라한의 위에 이르러 번뇌와 집착이 모두 쉬어서 고락의 과(果)를 받지 않고 생사에 물들지 않음을 사(捨)라 한 것이다.


제 5 송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다음 두 번째의 능변(能變)은 이 식(識)을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말나식은 8식을 의지하여 움직이고 8식을 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으로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삼는다.


1송(一頌)에서부터 4송(四頌)까지에서 이미 제8 아뢰야식의 체(體)와 성(性)을 설명했고 여기에서는 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의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밝히게 된다. 말나(末那)는 범어로서 번역하면 의(意)가 되는 바 제6 의식을 의식(意識)이라 번역하기 때문에 6식과 7식을 구별하기 위해서 말나(末那)라는 범어의 음을 그대로 쓰게 된 것이다.

제7 말나식의 특성은 항심사량(恒審思量)이다. 항심사량이란 항상 살피고 사량한다는 뜻으로 제8식의 견분(見分)을 항상 살피고 사량하여 나(我)의 본체(本體)로 여겨 깊이 집착한다. 7식이 항심사량(恒審思量)으로 성상(性相)을 삼는 데 반해 제8식은 항상하지만 사량하지 않으며 제6식은 사량하지만 항상하지 않고 전5식(前五識)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는다. 오직 7식만이 항상하면서 사량하고 아애(我愛)를 집착한다. 따라서 사량하고 집착하는 것은 제7식의 유일한 공능(功能)이라 하겠다.

사량(思量)하고 아애(我愛)를 집착하는 제7 말나식을 능변(能變)이라 하는 것은 아집(我執) 아애(我愛)의 바탕이 되어 제6 의식과 전5식(前五識)을 소연경(所緣境)으로 삼아 사량분별하고, 제8의식의 심처(心處)를 소연경(所緣境)으로 삼아 8식의 공능(功能)을 집착하여 근신(根身)으로 여기고 아상(我相)을 지으며, 아(我) 이외는 모두 소연경으로 삼아 인상(人相)을 분별하여 안으로는 끝없는 중생심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일체만법을 분별하여 중생상(衆生相)을 일으켜서 식(識)을 임의로 주재하기 때문이다.

제7 말나식은 사량분별하고 집착하는 심소(心所)로서 예지력과 잠재의식을 발휘하지만 수행자는 반드시 이를 극복하여 분별의 주체인 집착을 끊고 무심을 이루어 법계에 자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법계는 본시 상도(常道)가 없어서 영원함이 없고 아(我)도 또한 본래 없어서 집착할 아(我)가 없는 것이다. 진아(眞我)를 찾는다는 것이 본래 꿈이어서 분별을 쉬고 집착을 끊어서 끊을 집착이 없고 쉬어야 할 분별이 없으면 바람이 멎고 물결이 잔잔해서 천하가 고요하듯이 적정한 그 자리가 중생이 성취해야 할 경지인 것이다.


제2능변(第二能變) : 제1능변은 아뢰야이고 제2능변은 말나식이다. 본래청정하여 생멸이 없는 진여열반을 등지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식(識)이 곧 말나식이다. 이를 능변이라 하는 것은 아견(我見)에 집착하여 주관적 사고(思考)를 고집하기 때문에 객관적 분별이 생겨서 능소(能所)·피차(彼此) 등을 자기 입장에서 하므로 능변이라 한다.

의피전(依彼轉) : 7식은 8식 중의 종자와 현행작용(現行作用)을 의지하여 집착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피(彼)는 아뢰야식을 말한 것이다. 7식의 의지처가 아뢰야식이기 때문에 의피(依彼)라 했다. 의(依)는 의지한다는 뜻이고 전(轉)은 움직인다는 뜻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잇다.

첫째는 유전의(流轉依)니 제7식 자신이 스스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유전(流轉)하여 작용함을 말하고,

둘째는 수전의(隨轉依)니 제7식이 8식을 따라서 전현(轉現)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7식은 8식을 따라 작용하기도 하고 7식 스스로 작용을 일으켜 유전하기도 하여 부단히 탐진치를 계탁(計度)하는 등 사량분별을 일삼고 아집(我執), 아애(我愛)를 성상(性相)으로 삼기 때문에 중생의 윤회가 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7 말나식은 능연(能緣)의 심식(心識)으로 제8식을 소연대상(所緣對像)으로 삼아 8식의 공능(功能)을 집착하므로 아상(我相) 등의 상(相)이 있게 된 것이다.

중생이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8식을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지만 수행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이 끊어지면 집착도 끊어져서 비로소 법계를 소요하여 대자연과 더불어 대자재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송문(頌文)의 3구(三句)에서 의피전(依彼轉)이라 한 것은 7식이 8식을 의지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연피(緣彼) : 제7식이 8식을 소연대상(所緣對像)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범부가 오관(五觀) 6식(六識)이 경계를 잘못 분별하여 착오를 일으키는 것은 제8식에 소집(所執)된 자신을 더 과신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무지(無知)할수록 아견이 강해서 오류가 많고 지혜가 향상되면 사량분별하여 집착하지 않으므로 착오가 적어진다.

사량위성상(思量位性相) : 제7식의 작용은 사량분별이다. 성상(性相)이란 성품과 성품의 모습이니 곧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말한다.


7식과 8식은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서 극히 친밀하여 불가분(不可分)하다. 의장(依仗)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말나는 능의(能依)가 되고 아뢰야는 소의(所依)가 된다. 8개식(八個識)의 심(心)과 심소법(心所法)은 모두 소의(所依)가 있으니 소의(所依)에는 3종(三種)이 있다.

① 종자의(種子依) : 인연의(因緣依)라고도 한다. 모든 법은 반드시 자류(自類)의 종자에 의지해야 생기(生起)할 수 있으니 이것을 인(因)이라 하고 그밖에 환경조건을 연(緣)이라 하는 바 이를 종자의(種子依)라 한다.

② 증상의(增上依) : 구유의(俱有依)라고도 한다. 증상이란 그 효과를 증가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뜻으로 수행으로 그 능력을 무한히 증장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구유(俱有)란 상호 인과가 되고 서로 의지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을 의지하고 안근이 안식을 의지함을 뜻한다. 만약에 그 하나가 결핍되면 쌍방 모두가 작용할 수 없게 된다.

③ 무등간연의(無等間緣依) : 개도의(開導依)라고도 한다.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서로 같아서 등이라 하고 상속(相續)하여 부단(不斷)하므로 무간이라 한다. 이는 전념이 후념의 소의(所依)가 됨을 말한 것으로 생각이란 전념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곧 지난 과거의 관념에 의해 생기(生起)함을 뜻한다. 만약에 심(心)과 심소(心所)의 법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틈이 생긴다면 생각이 재생(再生)할 수 없고 전현(轉現)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개도(開導)란 전념이 후념을 개도한다는 뜻이니 과거의 잘못을 귀감삼아서 미래를 향상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제7식이 8식 중의 종자와 현행(現行)을 의지하여 작용이 일어나는데 종자를 의지하면 인연의(因緣依)라 하고 현행(現行)을 의지하면 구유의(俱有依)라 한다.

송문(頌文) 가운데 의피전(依彼轉)이라 한 전(轉)의 뜻은 7식이 8식의 종자와 현행 2법(二法)을 의지하여 전생전기(轉生轉起)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7식은 8식에 의해서 마음작용을 일으키고 6근에 의해서 그 공능(功能)을 발휘한다. 7식은 8식을 의지하고 8식은 7식을 의지하여 상호 존재하므로 구유의(俱有依)라 한다.

이렇듯 7식의 성상(性相)이 사량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사량(思量)하는가. 사량이란 연려(緣慮) 관찰(觀察) 분별(分別) 집취(執取)의 뜻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작용하는 한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사량의 의미를 인도의 옛 유식가(唯識家)들의 설명을 참조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① 7식은 8식의 심왕(心王) 자체를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라고 여기고 8식의 심소(心所)를 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② 8식의 견분(見分)을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고 8식의 상분(相分)을 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③ 8식의 현행(現行) 곧 과숙과보(果熟果報)를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고 8식 중의 종자를 연려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이상의 설(說)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모두가 8식을 의지해서 작용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8식이 심왕(心王) 또는 심체(心體)가 분명하고 6근(六根)이 마음작용의 선봉이 분명한 데 반해 7식의 작용이 그 중간의 역할로서 미묘한 듯하지만 아탐(我貪) 아애(我愛)하고 분별사량하는 주체로서 수행자가 반드시 타파해야 할 관문임에는 여지가 없다.



제 6 송

四煩惱常俱 謂我痴我見

幷我慢我愛 及與觸等俱


제7식은 4번뇌(四煩惱)를 항상 갖추고 있으니 말하자면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이며 그리고 이밖에 촉(觸) 등과 상응하여 함께 한다.

 

 -이글은 월간 '불광'지에 연재 된 혜거스님의 글입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마니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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