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제일 목련(못갈라나)
전통적인 성자
인도에는 여러 모양의 성자들이 있다. 옛날에도 현재에도 그렇지만 아마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종교의 나라인 인도는 역시 성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인도 여기저기를 여행하고 있노라면, 늘상 이런 성자와 만난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빼빼 마른 마치 인도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간디옹을 연상케 하는 남자들이다. 대개는 성자의 말에 걸맞지 않은 인종으로, 정확히 말한면 걸식자이다. 손에 지팡이를 짚고 표연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 표연한 모습 이외에는 . 그들의 사는 보람이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예상 외로 세상사를 경계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카시아에서는 15년 동안이나 내내 그 자리에서 있는 사나이를 만났다. 카시아는 옛 이름을 구시나가라라고 하며, 석존이 입멸하신 성지이기도 하다. 그 사나이는 15년 동안을 결코 드러눕는 일 없이 살아았다고 한다. 선 채로식사도 하고, 선 채로 배설도 하고, 그리고 선 채로 잠도 잔단다. 그런 일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파토나에서는 태양을 맨눈으로 쳐다보는 사나이와 만났다. 성자 치고는 보기 드물게 뚱뚱한 사나이인데, 내가 보는 앞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쳐다보는 대담하고 기발한 재주를 연출해 보였다. 나 같은 자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눈이 곧 찌부러진다. 그러니까 이 사나이도 성자인 것이다.
저래 가지고 뭘 한다는 건가?.......그 때의 나의감상이었다. 구경거리 밖에 더 되겠는가... 사실 굉장히 살이찐 파토나의 성자는, 결국 나에게서 무언가 기증물을 얻어 냈다.
파토나는 그것으로 설명을 끝낸다. 그러나 카시아는 그렇지가 않았다. 카시아의 성자는, 남에게 보인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고, 또 남에게 보이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 그저 묵묵히 자신을 위해서 계속 서 있는 것이었다. 인도의 순박한 촌사람들은 이런 성자를 존경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차례를 정해 놓고 돌려 가면서 그를 공양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계속해서 서있기만 할 수도 있으며, 그래서 우리들로부터 물품의 기증을 바라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 성자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줄곧 서서 지내며, 또는 맨눈으로 그 강렬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
그들이 이와 같은 고행을 하므로써 추구하고 있는 것은 신통력, 즉 일종의 초능력인 것이다.
고행은 산스크리트어로(범어)『타파스』라고 한다. 타파스는 열이라는 의미이다.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열은 일종의 물질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가 고행을 쌓는다면, 그 고행자의 체내에 타파스(열적인 물질)가 축적 되어진다. 고대의 인도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타파스를 회득하기 위해서 고행을 계속했다. 현대의 행자들도 그와 같은 생각이 아닐는지......
그리고 고행자가 여성을 만나게 되면 , 애써 그가 체내에 축적해 놓은 타파스가 여성을 통해서 체외로 유출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고행자도 단순한 인간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아시는바와 같이 구미 선인이 이에 가까운 예이다.
최초에 내가, 고행을 하고 있는 인도의 성자라는 사람들의 의도를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은, 아마도 종교라는 것을 너무나 고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종교의 원점은 물론 불교에 있다. 불교를 기준으로 하여, 종교는 이러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통행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두 번째 제자는 뭐니뭐니해도 목련존자이다. 이 사람은 목건련이로도 불리 운다. 역시 파리어로도 마하못가라나로 나타내는 수도 있다. 종종 사리불고 나란히 두 제자로 손꼽히 기도하여, 지혜제일 인 사리불에 대해 목련은 신통제일로 되어 있다.
목련은 왕사성 근교의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죽마고우인 사리불고 함께 산정제의 현장에 제사 지내는 구경을 나갔다가, 그 시끄러운 가운데서 도리어 세상의 무상을 느끼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둘이서 출가를 결심한다. 맨 처음 그들은 회의론자인 산쟈야에게서 사사를 했지만, 회의론으로써는 궁극적인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다는 사실에, 언제나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목련과 사리불은, 회의론을 능가할 수 있는 스승을 찾아냈을 때는 , 서로 연락을 취해서 같은 길을 걷자고, 서로 약속을 하고 있었다.
위대한 스승,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야기를 먼저 들은 것은 사리불 쪽이었다. 목련은 사리불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둘이서 함께 석가모니를 찾아갔다. 그리하여 불교 교단에 들어가, 곧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앞에서 사리불에 관해 말하면서 거의 설명을 했었다. 목련과 사리불은 평생 변할 수 없는 우정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사이었다. 불교 교단에 들어간 후에도 두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기회가 많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제파다타의 반역 행위에 의해서 교간이분열의위기에 직면 했을 때 이 제파달타를 따라서 교단을 빠져나간 비구들을 다시 설득해 데려온 것이 이 두 사람이었다. 목련과 사리불이 함께 마음을 합쳐 비구들을 설득했기 때문에, 일단 떨어져나간 비구들이 되돌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때를 같이하여 입멸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성격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조적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참 우정이라고 하는 것은, 예상 외로 서로 상이한 타입의 사람들 사이에서 싹터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리불이 지혜제일 이라고 불리 우는, 사색형의 사람인데 반하여 신통 제일의 목련은 오히려 행동형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 신통력에 관해서는 뒤에 설명하겠다.
불교에는 사통행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정각에 이르는 길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써, 그리고 또 그 길이 편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괴로움을 참고 견디어 거기에 이르는가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낙(樂) 고(苦) 속(速) 지(遲)의 조합으로 네 가지가된다.
낙속통행(樂速通行)-고속(苦速)통행 - 낙지(樂遲)통행-고지(苦遲)통행 네 가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또 순서대로 우열이 매겨져 있다. 즐기면서 수행을 하여, 그리고 빨리 정각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리불은 이 낙속통행이 타입이었다. 목련이 질문을 받았을 때, 사리불은 자기의 수행이 그러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천재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목련은, 그의 자기 평가에 따르면 두 번째 타임이다. 즉 고속 통행의 타입인 것이다. 확실히 깨달음에 도달한 것은 빨랐지만 거기에는 무척 많은 괴로움이 따랐다는 것이다. 사리불이 천재형 인데 비해, 목련은 노력형의 불교제자였던 것 같다.
신통력의 육신통이란?
신통력에 관해서 불교에서는 육신통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토능력이다.
1. 신족통 - 원하는 장소에 자유로이 출현할 우 있는 능력.
2. 천안통 - 사람들의 미래의 운명까지도 내다보는 능력.
3. 천이통 - 예민한, 초인 적인 청력.
4. 타심통 - 즉 독심술로,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
5. 숙명통 - 자신이나 남의 과거 세상의 모습을 아는 능력.
6. 누진통 - 세계와 인생에 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누구나 곧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으나 이 육신통 가운데 1항부터 5항까지는 거의 비슷한데 마지막의 6항만은 다른 데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5는 심신의 능력이지만 누진통은 지혜인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1~5항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 의해서도, 얻어지는 능력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남다를 재사(才士)인 경우에도 이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진통, 즉 지혜만은, 다른 종교로써는 얻어질 수 없는 불교 특유의 초능력인 것이다
석모니 부처님께서는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셨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자는 누구나가 누진통을 포함한 여섯 가지의 신통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데 석존은 육신통 가운데 누진통을 제외한 다섯 가지의 신통력의 사용을 금지하고 계셨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지혜의 종교이지, 다른 종교처럼 기적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년 무렵의 사건이다.
코오사라국의 유리왕이 석가모니의고국인 석가국을 침공했을 때의 일이다. 유리왕은 젊은 시절에 석가국에 유학을 했었는데 , 그때 석가족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았으므로, 말하자면 복수를 해 주겠노라고 맹세를 하고 나선 공격이었다. 석가모니는 처음에는 석가국으로 통하는 거리의 큰 나무 아래서 조용히 명령을 하고 계셨다. 두 번, 세 번까지는 유리왕도 석가모니 부처님께 경의를 표하고 진격의 일시 중단을 명령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왕의 심경은, 분노에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던 것이니까.
석가국 멸망의 날은 가까웠다.
그래서 목련은 부처님께 제안했다.
“어떻게 신통력을 가지고, 석가국을 지켜 구원하지 않으렵니까?”고
석가국을 쇠울타리로 탁 쳐 덮어버릴 것을, 목련은 간절히 진언을 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신통제일의 목련이니까, 분명히 거뜬히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목련의 이 간청을 단호히 물리쳤다. 석가국 전체의 사람들이 쌓을 업의 응보를 그 누가 대신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즉, 석가국이 멸망하는 것도,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그 원인을 간파하여, 그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불교의 깨달음의 지혜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연기의 이법이지만, 그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곧 누진통이다. 누진통, 즉 지혜를 젖혀두고, 우선 신통력에 의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 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석가모니는 그와 같이 생각하여 목련에게 신통력의 사용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석가모니 부처님도 거리의 나무 아래에서의 좌선을 중지하셨다. 유리왕은 석가국을 공략하여, 석가국의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 그렇지만, 유리왕 역시 귀국 후 뱃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에, 갑자기 인 폭풍우에 배가 전복하여 그대로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목련의 죽음은
목련은 신통제일 이었다. 갖가지 초능력을 몸에 붙인 불제자였다.
물론 목련은 불교의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신통력은 누진통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초능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른 부류의 신통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고, 또 보통 일반 종교자의 신통력과도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목련은 인도적인 전통에 관련되는 성자였다. 그러니까 불교 교단을 미워하는 외도의 사람들은, 이 목련을 가장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석가모니의 불교 교단이 그처럼 흥성을 하는 것은, 거기에 목련이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도적을 사주하여, 그 목련을 죽이게 했던 것이다.
목련은 한 번은 그 위난을 모면했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업 - 운명 - 을 자각하고 ,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께 하직 인사를 드린 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무턱대고 신통력을 사용하여 도망쳐 다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목련의 이 죽음은 불교도로서의 한 가지 죽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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