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

진각국사의 오도송 - 佛覺華 : 부처님의 꽃

수선님 2018. 9. 9. 13:37

【오도송으로 보는 한국禪】무산스님 - 진각국사의 ‘佛覺華’


진각국사는 명종8년(1178)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최식(崔寔), 법명은 영을(永乙), 법휘는 혜심(慧諶), 법호는 무의자(無衣子), 시호가 진각(眞覺)이시다. 국사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유년시절부터 불가에 출가하기를 원했으나 어머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국사는 항상 불경을 외웠으며,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2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오래지 않아 모친의 병보(病報)를 받고 귀향하게 된다. 1년여 동안 병간호 끝에 모친이 세상을 뜨자 국사는 모친의 장례를 치르고 바로 출가하게 된다. 그때 보조국사는 조계산에 수선사를 열어 그 도화(道化)가 한창이었고, 국사는 보조국사를 찾아가 불문에 귀의할 뜻을 밝혔다. 이렇게 출가를 한 국사는 불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피나는 고행을 하였다. 수참했던 곳은 지리산 금대암이었다. 3년간의 용맹정진은 글자 그대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고행이었다. 3년간의 고행정진을 마치고 억보산 백운암(白雲庵)에 머물고 있는 스승을 찾았다.


보조국사는 “그동안 수행은 어떠했는고. 불법은 무엇이고, 우주는 무엇인가.” 이에 국사는 돈오(頓悟)하여, 화엄선(華嚴禪)의 대각(大覺)을 이루었다.


불각화(佛覺華 : 부처님의 꽃)
普光明殿是吾家(보광명전시오가)
三法一源初睡起(삼법일원초수기)
百十由旬一念收(백십유순일념수)
世間時 都爲爾(세간시겁도위이)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신 곳(보광명전)은 그대로 나의 집이요,
삼법(敎法ㆍ行法ㆍ證法)의 한 근원에 첫잠이 깨다.

멀고도 너무 멀어서 생각하기 힘든 거리 한 생각에 거둬들이니,
세간의 시간이야 모두 헛된 것이구나.



이에 보조국사는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씀하였다.


수선사 2세로 선종의 주춧돌을 놓아다가 천 칸집을 짓게끔 국사에게 인가를 한 것이다. 보조의 수행은 회광반조(廻光反照:진여자성인 인간 본래의 모습을 깨달아 진심(眞心)을 통한 불성을 말함), 돈오점수(頓悟漸修:홀연히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이루되 이를 부동의 것으로 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수행정진을 하여야 된다는 뜻), 정혜쌍수(定慧雙修 : 적연부동(寂然不動)의 마음과 초월적 관조의 지혜를 일체화하여 무심의 경지에 이름을 말함), 간화경절(看話徑截 : 일체의 지혜를 떨쳐 버리고 오로지 조사들의 활구를 참구함으로서 무심합도(無心合道)의 깨침을 말함)이다. 오도송에서 볼 수 있듯이, 국사는 스승보다 좀더 실천적인 간화 중심의 수행을 견지하고 있다. 스승이 수행에 있어 병진수행주의(竝進修行主義), 심외무법 성외무법(心外無法 性外無法)을 말했다면, 국사는 색신(色身)으로 나를 보는 것도 사도(邪道)요, 보리와 열반이 원래 청정하다 하여 실천수행이 없는 것도 사도라고 말했다. 또한 국사는 화두 참구에 있어 사구(死句)에 들지 말고 활구(活句)의 본바탕에 들라고 강조했다. 한편 스승은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으로 돈오후(頓悟後)의 정혜쌍수를 말하는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을 선(禪)에 흡수, 교(敎)에 의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고 했으며,이와 함께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일체의 앎음을 끊고 활구만을 참구하는 간화경절문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국사는 간화경절문만을 강조하였다. 언설이나 경전에 의한 수행보다는 간화에 의한 참선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정혜쌍수까지도 간화에 포함시켰다. 또한 논리적 과정을 차단한 직관에 의한 돈오를 강조한 것이다. 즉 일심수행주의의 강조이다. 일체의 집착을 놓아 버리고 심즉불(心卽佛)의 경지에 들 것을 무심(無心)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국사는 수행에 있어 선관(禪觀)은 자독청정(自獨淸淨)의 나한적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망상을 여읜 무심(無心)이 곧 심이며 무심이 자기실존의 주체임을 강조 관념보다는 직관(直觀)을 통하여 내적 자아발현이 깨침이라고 하였다.



 


 

 

 

행자실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is834/93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