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禪詩)“깨달음의 세계.경지 문자로 형상화” |
수행자의 삶은 곧 시어, 즉 선시다. 해제를 마치고 산문을 나서는 스님들의 뒷모습에서 서슬퍼런 싯구가 떠오른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언어로 번뇌 부수고 해탈과 자유 노래 선사들의 불호령.몽둥이 한방과 견줘 깊은 수행 병행돼야 언어유희 벗어나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학 장르인 시(詩)는 언어의 배후를 캔다. 언어와 언어가 만들어낸 개념과 그 개념 뒤에 악착같이 달라붙는 편견을 단칼에 베어낸다. 대다수가 ‘먹을 것’이외의 의미에 대해선 관심을 두지 않는 호두 열매에서,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살결을 보는 식이다. ‘언어도단’, ‘불립문자’라는 말에서 보듯 언어 이전 혹은 너머를 지향하는 선(禪)은 시와 막역한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선사들의 불호령 한 마디, 몽둥이 한 대가 그대로 한 줄의 시, 한 소절의 노래가 된다. 본래 마음자리와 마음자리에 깃든 삼라만상 켜켜이 깨달음을 발라내는 것. 탈주와 자유다. 선시(禪詩)는 선적 통찰과 언어적 직관의 만남이다. 선지식들의 오도송, 열반송, 여러 게송이 모두 선시의 범주에 든다. 한없이 단순하고 투명한 마음을 극히 짧고 날카로운 언어로 내지른다. 중생의 무명을 한방에 날려버리겠다는 목적. 두운(頭韻)이네 각운(脚韻)이네 형식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는다. 선의 경지란 문자로 표현될 수 없으면서도 결코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선시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침묵과 여백, 비약과 기지를 동원한다. ‘없음’으로 ‘있음’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간다. 무쇠를 들어올린 깃털의 신비를 속삭이기도 한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깡그리 짓밟아버리는 서산대사의 오도송이나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며 짐짓 딴전을 피우는 성철스님의 열반송은 한 뿌리로 통한다. 한낱 변기를 전람회 작품으로 버젓이 내놓은 포스트모더니즘 화가 뒤샹의 행동도 선사들의 바람과 다르지 않다. 인식의 충격을 통한 각성.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봐야 인생을 안다. ‘크게 죽지 않으면 결코 다시 태어날 수 없다(大死却活).’ 6조 혜능스님과 신수스님 간의 깨달음 겨루기는 유명하다. 혜능스님이 5조 홍인스님 문하에서 배울 때 자신의 깨달은 체험을 시로 쓰곤 벽에 붙임으로써 인가를 받은 일이 있다. 홍인스님의 수제자라 일컬어지던 신수스님도 그에 앞서 시를 써서 붙였으나 갓 입문한 혜능스님의 경지에 못 미쳐 결국 스승의 의발(衣鉢)은 혜능스님에게 전해졌다. 이와 같이 당시만 해도 수행의 체험을 시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은 상당히 일반화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선시문학은 영가대사의 〈증도가〉나 동산스님의 〈보경삼매가〉 등으로 발달해 갔다. 특히 총 1858자 267구로 구성된 〈증도가〉는 대구(對句)를 절묘하게 살려 선의 이치를 매우 잘 표현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선시문학의 백미는 〈벽암록〉이다. 〈벽암록〉은 설두 중현스님이 1700공안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00가지를 뽑아 거기에 송고(頌古)를 붙이고 다시 원오 극근스님이 수시(垂示), 착어(着語), 평창(評唱) 등을 덧붙여 만든 책. 선의 고전일 뿐만 아니라 현대 시인들의 상상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선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보조 지눌스님의 제자인 진각 혜심스님이 저술한 〈선문염송〉에서 한국 선의 유려한 선기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우리 현대시의 중요한 시적 경향으로 선이 부각된 지 오래다. 선비의 지조와 기독교의 구원에 실망하면서 제3의 대안으로 찾아낸 주제가 선인 것이다. 한 줌도 안되는 언어로 세상의 본질을 설명하길 욕망하는 시인들에게 선은 대단히 매혹적이다. 그러나 선시는 능란한 말재주만으로 허락되는 경계가 아니다. “1980년대 후반으로부터 비롯된 대다수의 우리의 ‘정신주의 시’는 불교적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이미지 내지 분위기만 취하여 형상화한 시들이 대부분”이라는 동국대 불교학과 고영섭 교수의 우려는 여전히 유효하다. 짧은 글이 전부 시는 아니며 모두가 깨닫고 싶어 한다고 모두가 깨달을 수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벽 속에서 별을 꺼내겠다는 의지, 치열한 구도의 여정이 동반되지 않고는 진정한 선시의 창작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이 죽음 앞의 태연함, 자유에의 용기를 만들어낸다. 더불어 익숙한 것들에 대한 의심, 못난 것들에 대한 관심 없이는 끝내 언어와 사견(邪見)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날 길 요원하다. 일각에선 성철스님의 열반송을 불교를 비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곤 한다. ‘불교엔 구원이 없다. 성철스님은 죽을 때가 돼서야 그 사실을 깨우쳤다. 곧 열반송으로 자신의 잘못된 주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행의 길로 몰아간 일을 후회한 것이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옛말 틀린 게 없다.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 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선시! 주목! 만해스님 한시의 십우도 게송.
어찌해야 도의 흐름 그치지 않게 하리. 진여 비춤 가없어서 그에게 설해 주되 형상.이름 떠난 그것 사람들이 아니 받나니. 취모검(吹毛劍) 쓰고 나선 급히 다시 가려고. 沿流不止問如何 眞照無邊說似他 離相離名人不稟 吹毛用了急還磨’ - 임제선사 열반송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안 센다고 옛사람 일찍 말했던가. 이제 닭 우는 소리 듣고 장부의 큰 일 능히 마쳤네. 홀연히 본 고향을 깨달아 얻으니 모든 것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 수많은 보배와 같은 대장경도 원래 하나의 빈 종이로다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 忽得自家處 頭頭只此爾 萬千金寶藏 元是一空紙 - 서산대사 오도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生平欺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 성철스님 열반송
지수화풍 사대로 된 몸이 원래 주인이 없고 색수상행식 오음으로 된 몸은 본래로 공한지라. 머리에 칼날이 다다르니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 같네.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刃 猶似斬春風 - 승조(僧肇)스님 열반시
#禪詩의 역사 한국-고려말 시작~조선시대 명맥 중국-唐宋 황금기 후 元明代 위축 일본-중국 영향서 오산문학 흥기 깨달음의 경지를 시로 읊은 최초의 선시는 중국 당나라 초기에 활약했던 대통 신수스님과 중국 선종 제6조 혜능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에 반해 3조 승찬스님의 〈신심명(信心銘)〉이라는 잠언시가 최초의 선시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대통스님과 혜능스님의 개오시를 최초의 선시로 보고 있다. 이후 선의 체험을 그대로 시화(詩化)하는 풍조가 나타나는데 그 시초가 바로 왕유라는 시인이다. 왕유는 여러 선승들과 깊은 교분을 두며 좌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화두인 무(無)자 공안으로 유명한 조주스님은 십이시가(十二時歌)라는 격외선시를, 선월 관휴스님은 호방한 산거시(山居詩)를 많이 남겼다. 이후 당 말기 운문 문언스님은 일자시(一字詩)라는 독특한 선시를 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당 중기 이후 발전해 온 선과 시를 결합시킨 인물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송나라에서는 모든 시체(詩體)에 능한 설두 중현스님이 〈설두송고(雪竇頌古)〉라는 송고선시집을 남겼다. 묵조선의 거장인 천동 정각스님은 공안선시집인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저술해 선시의 금자탑을 쌓았다는 평을 받게 된다. 또한 송나라 시절에 나온 〈벽암록〉과 〈종용록〉은 중국 선시를 대표하는 공안선시집으로 추앙받고 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가 중국 선시의 황금기였다면 이후 원대와 명, 청나라 시절에는 점차 선시가 위축돼 갔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조 지눌스님의 제자인 진각 혜심스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선시가 나오기 시작했다. 혜심스님은 공안, 공안시, 공안평론집 등의 대백과사전인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해 중국 당송 이후의 모든 선어록을 총정리했다. 고려 말, 백운 경한스님과 태고 보우스님, 나옹 혜근스님 등에 의해 임제선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선시의 시대가 시작됐다. 백운스님은 한국 선시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으며, 태고스님은 주로 장시풍의 선시를, 나옹스님은 직관력이 번뜩이는 단시풍 선시를 많이 남겼다. 이후 배불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도 허응 보우스님과 청허 휴정스님, 무경 자수스님 등이 선시의 맥을 이어 나갔다. 이 가운데 청허 휴정스님은 중국 임제풍 선시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국 특유의 은둔적이며 체념적인 서정풍의 선시를 통해 새롭게 선시의 열풍을 이끌어냈다. 구한말부터 현대까지는 경허스님을 비롯해 만공스님, 한암스님, 경봉스님, 운봉스님, 향곡스님 등이 한국불교 선시의 전통을 이어왔다. 일본 선시는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인 영평 도원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 송나라 멸망 후, 중국에서 건너 온 난계 도륭스님과 요원 조원스님을 통해 수준 높은 선시가 일본에도 선보이게 된다. 이후 본격적인 선문학인 오산문학의 흥기는 중국에서 건너 온 일산 일녕스님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오산문학은 중국 선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단점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단점을 뛰어넘은 사람이 바로 일휴종순스님이다. 일휴종순스님은 선가에서 금기시해온 술과 여자를 주제로 한 파격적인 선시를 선보였다. 대우 양관스님은 일생 동안 일의일발(一衣一鉢)을 실천한 청빈한 수행자로서 시와 삶이 완전히 하나였던 스님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인탁 기자 parkintak@ibulgyo.com
#詩 쓰는 스님 누가 있나 오현.정휴.성우.청화스님 등 70여 명 교계.문단서 활동 선(禪)은 시(詩)적 영감과 창작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이로 인해 스님들은 시 창작을 통해 문단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현재 70여명 스님들이 시(詩)를 짓고 있다. 이 가운데 신흥사 주지 오현스님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문단에서도 공인하는 최고의 시조시인으로 평가된다.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한 오현스님은 그동안 설악산 백담사에 주석하며 〈심우도〉와 〈산에 사는 날에〉 등의 시집을 저술했으며, 현대시조문학상과 가람문학상, 남명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스님은 또 시인으로도 유명했던 만해 한용운스님이 주석했던 백담사 인근에 만해마을을 조성해 불자뿐만 아니라 문단 작가들이 뛰어난 자연환경속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서울 호압사 주지 정휴스님도 대표적인 문인으로 손꼽히는 스님 가운데 한명이다. 스님은 197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선재의 천수천안〉 〈슬플 때마다 우리곁에 오는 초인〉 〈고승평전〉 〈종정법어집〉 등 다양한 분야의 불교책을 펴냈다. 불교TV 회장 성우스님은 1970년 월간 〈문학〉 신인상과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 ‘산란’으로 등단했다. 저술한 시집으로는 〈산란〉 〈마음비워 좋은 날〉 등이 있다.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스님도 대표적인 시인으로 손꼽힌다. 청화스님은 197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서 시조 ‘미소’와 19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 ‘채석장 풍경’을 통해 잇따라 등단했으며 이후로도 많은 시를 발표하고 있다. 1976년 〈시문학사〉로 등단한 종단협 불교인권위원장 진관스님은 민주화운동을 하며 〈광주에 오신 부처님〉 〈분단의 나라〉 〈까마귀 우는 산〉 등 다수의 시집을 냈으며 현재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 지원스님은 1991년 〈문학공간〉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걸망도 내려놓고 마음도 내려놓고〉 〈이별연습〉 〈산문에 부는 바람〉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조계종 총무원 전 사서실장 현담스님도 1978년 〈문학사상〉에 계면조1, 2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햇살의 숲〉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를 펴냈다. 서울 삼보사 주지 지원스님은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장명등〉 등의 시집을 발간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공동의장 효림스님은 2000년 〈유심〉지를 통해 등단한 뒤 시집으로는 〈흔들리는 나무〉가 있다. 박인탁 기자
[불교신문 2253호/ 8월16일자] |
출처 ; http://www.buddhistnews.net/archive/75269/200608121155378477.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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