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에이다까 사야도 법문 - 수행을 실천해야만 도와 과를 성취한다. |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06-09-01 23:44 조회 : 953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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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 / 호두마을 선원장 2006.5.23일 저녁법문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 머무르실 때 뿌띨라 존자를 위해 설하신 법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위국에 뿌띨라 비구가 있었습니다. 뿌띨라 스님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율,론 삼장을 통달하여 제자 500명에게 항상 강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하루 온종일 강의만 하였습니다. 뿌띨라 스님은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만 경,율,론 삼장을 강의한 것이 아니라, 과거 여섯 부처님이 출연하셨을 때도 그때마다 태어나서 경,율,론 삼장을 가르치는 삼장법사였으며, 그때도 제자 500명을 가르쳤습니다. 강의를 하고 남는 시간이 있었지만 남들처럼 수행하는 대는 관심도 없고 취미도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먼저 법문을 들어야하고, 법문을 들은 후에 몸소 실천 수행해야만 도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뿌띨라 스님은 실천수행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도와 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뿌띨라 스님이 경,율,론 삼장을 통달하고 수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돈을 벌기 위해 장사준비를 다 해놓고 일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현재로 비유 하자면 의사가 될 능력 다 갖추어 박사학위를 받아 놓고 병원에 가서 일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시가 되지 못함과 같습니다. 뿌띨라 스님도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행을 하기 위함인데 몸소 실천하지 못해 단 한가지의 깨달음도 얻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처님 법에 도와 과를 깨닫고 싶으면 두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부처님 법문을 들어야 하고, 들은 그대로 실천 수행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띨라 스님은 부처님의 설법은 다 이해를 하고 남들에게도 설해주었지만 자신은 한 번도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재로 법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뿌띨라 비구를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여래의 시대에만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과거 여섯 부처님의 시대에도 삼장법사로만 살다가 단 하나의 도와 과도 얻지 못하고 죽었고, 지금 여래의 시대에도 또 저렇게 삼장법사로만 강의만 하고 있으니, 여래가 출연한 목적이 깨달을 수 있는 생명은 모두다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저 비구에게 방편을 쓰지 않으면, 지금 여래의 시대에도 보통사람으로 죽고 말겠구나” 그래서 수행을 시키기 위한 한 방편을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날 부띨라 비구가 부처님께 왔을 때 부처님께서 뿌띨라 비구에게 “똑사(무용지물이라는 뜻) 뿌띨라 이리 오세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뿌띨라 비구가 부처님께 절하고 가까이 갔으나 부처님께서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자 돌아 가려고 다시 절을 하고 일어서니까 "똑사 뿌띨라 돌아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로 부처님께서는 뿌띨라 비구를 볼 때마다 “똑사 뿌띨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뿌띨라 비구가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나에게 저렇게 심한 말씀을 하실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문득 인생의 무상함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를 볼 때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똑사 뿌띨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내가 아무 선정신통도 없고, 단 하나의 도와 과도 성취하지 못해서 저렇게 무용지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출가사문이 도가 있어야 그것이 재산인데, 마치 세상의 사람이 아무것도 없으면 알거지라고 하듯이, 내가 출가사문으로 선정신통도 없고 도와 과도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역시 무용지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나보고 도와 과를 성취하라고 분개한 마음을 일으켜 실천수행하게 하시려고 저렇게 부르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수행을 해야겠다는 대결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친 후 바로 바루를 들고 가사를 챙켜입고 자기가 강의하던 절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율,론 삼장을 통달했다 하더라고 수행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성취한다는 것은 스승이나 선지식의 도움이 없이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근데 마침 그 산속에 30명의 비구들이 수행하고 있었으며, 제일 나이가 어린 7살짜리 막내 사미스님까지 그들 모두는 이미 아라한의 경지에 있었습니다. 뿌띨라 비구는 수행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 그들을 찾아 갔습니다. 그곳에서 제일 법랍이 높은 스님을 찾아가서 절을 한 후, 삼장법사로써의 모든 자존심 다 내려놓고 “스님 제가 수행을 하고자 하는데 의지처가 없습니다. 스님께서 제게 수행하는 방법을 지도해 주십시요”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가장 법랍이 높은 스님이 말하기를 "아이구 스님! 스님이 삼장법사신데 제가 오히려 스님에게 배워야지요. 어떻게 제가 스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스님이 제게 한수 가르쳐 주십시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스님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라 뿌띨라 스님을 어떻게 대해줘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뿌띨라 스님! 저는 미천하여 산중에서 수행만 했으며,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녕 가르침이 필요하시면 저쪽에 계시는 다른 스님에게 가서 청해보십시요”라고 하며 두 번째로 법랍이 높은 스님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법랍이 높은 스님에게 도착하여 다시 가르침을 정중히 청하였으나, 그 스님 또한 완전히 깨달은 분이라 뿌띨라 비구에게 “아이구 삼장법사 스님을 감히 제가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하며 또 다른 스님에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모든 스님이 한마디도 안 해주고 사양하고 사양하며 자꾸 다른 스님한테로 보내 마침내 서른 번째인 7살짜리 막내 사미스님에게 이르렀습니다. 여러분들 잘 들으셔야 합니다. 29명의 아라한들이 왜 부띨라 스님을 막내인 7살짜리 사미에게 보냈겠습니까? 왜냐하면 뿌띨라 스님은 경,율,론 삼장은 내가 확실하게 안다는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이 있는 한은 결코 도와 과에 계합하지 못합니다. 내가 부자라는 상이건, 내가 잘났다는 상이건, 똑똑하다는 상이건, 그 어떠한 상이라도 있는 한은 절대 도와 과에 개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상을 내려놓게 하기위해서 29명이 스님이 한마디도 안하면서 아주 좋은 말로 사양하고 사양해서 결국은 7살 먹은 막내 사미에게 이르게 하였습니다. 상이 완전히 내려져야 법에 대해서 철저히 겸손해지고, 그렇게 되었을 때라야 도와 과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아라한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뿌띨라 스님이 아무리경,율,론 삼장에는 밝다고 해도 그 지혜에 대한 상을 깨기 위해서 29명의 아라한 모두가 한마디도 안해주고 막내스님에게 보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상이라도 있으면 도와 과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표면이 동글동글하고 매끈한 둥근 돌에 아무리 물을 많이 부어도 물이 들어갈 구멍이 없기 때문에 부은 물이 모두 밖으로 흘러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일지라도 상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도와 과에 깨달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중한 거절도 한 두 번이지 29명의 스님에게 모두 거절을 당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기가 죽었겠습니까! 그 과장에서 뿌띨라 스님은 절로 경,율,론 삼장에 대한 지혜가 밝다는 상이 싹 내려 놓아진 것입니다. 뿌띨라 스님은 7살짜리 사미스님에게 절을 하면서 “스님 제가 지금 스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습니다. 그러니 스님께서 제가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십시요.” 하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때 이 7살짜리 사미스님이 "아이구 큰스님! 큰스님은 연세가 저의 증조할아버지와 같은 연배이시고 저는 큰스님의 손자 나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큰스님께서 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당연한데 오히려 제게 가르침을 달라고 하시니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산 중에 스님이라고는 그 30명이 전부이며 이미 29명의 스님이 정중히 거절을 하셨기 때문에 만약 마지막 남은 이 사미스님마저 거절한다면 뿌띨라 스님은 영영 수행을 배울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급해진 뿌띨라 스님은 막내 사미스님에게 "스님 제발 저를 가르쳐 주십시요. 스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그때 사미스님이 "큰스님이 이렇게 연세가 높으시고 저는 이렇게 어린데도 정말 제가 시키는 대로 다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하시겠다면 그때는 도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뿌띨라 스님이 말하기를 "아이고 스님! 스님이 불속에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고, 물속에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미스님이 "그래요 그럼 스님! 가사 벗지 말고 물속에 들어가 보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뿌띨라 스님은 가사를 둘둘 말아 입은 상태로 물속에 들어가면 헤엄을 칠 수 없어서 결국 빠져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사미스님이 시키는 대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가사가 흠뻑 젖기 시작하자 사미스님이 “큰스님 이제 됐습니다. 그만 나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미스님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사실은 뿌띨라 스님 마음속에 단 0.1%의 교만이나 상도 남김없이 뽑아 버려 깨닫게 해주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정도면 뿌띨라 스님의 상이 내려졌다. 상이 다 놓아졌으니, 이제 설법을 하면 도와 과를 깨달을 수 있겠구나’라고 사미스님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미스님이 뿌띨라 스님에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스님 이 세상에 포(팔뚝만한 작은 악어)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포가 집을 짓고 살 때, 항상 도망갈 구멍 여섯 개를 항상 뚫어 놓고 있습니다. 이 포를 잡으려면 구멍 여섯 개 중 다섯 개는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개의 구멍만 잘 지키고 있으면 잡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 한 개의 구멍에 그물이나 자루를 놓아 두면 포를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스님, 그 포에게 달아날 구멍 6개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마음이 달아나는 6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눈은 대상을 보기 때문에 보임으로 인하여 탐진치의 번뇌가 일어납니다. 귀는 소리를 듣기 때문에 들림으로 인하여 탐진치의 번뇌가 일어납니다. 코는 냄새를 맡기 때문에 맡음으로 인하여 탐진치의 번뇌가 일어납니다. 입은 음식을 먹고 말을 하기 때문에 먹음과 말함으로 인하여 탐진치의 번뇌가 일어납니다. 몸은 감촉을 느끼기 때문에 대상과 부딛칠 때마다 탐진치의 번뇌가 일어납니다. 마음은 분별하기 때문에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할 때마다 탐진치의 번뇌가 일어납니다. 스님 이렇게 마음이 달아날 구멍이 아주 많습니다. 마음이 바로 포와 같습니다. 몸은 구멍 여섯 개가 있는 포의 집과 갔습니다. 그래서 그 포를 잡으려면 구멍 다섯 개를 모두 막아버리고 나머지 한 개의 구멍만을 잘 지켜야 하듯이, 스님께서 도와 과를 성취하려면 집중력이 생겨야하는데 눈,귀,코,입,감촉은 모두 없는 것처럼 막아버리고, 알아차림하는 마음 하나만 잘 지니고 있으면 집중력이 생겨서 스님도 마침내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법문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좌선을 할 때 눈이 있지만 눈을 감고 수행해야합니다. 행선을 할 때는 눈을 뜨지만 여기저기 다른 곳을 보지 않도록 두 세 발자국 앞만 쳐다봐야합니다. 수행할 때나 생활할 때 자신의 눈이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 장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눈이 보고 싶어 해도 안보는 것은, 마치 그 포라는 짐승이 달아나려고 해도 도망갈 구멍을 모두 막아 버리면 달아날 수 없는 것과 갔습니다.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가 들릴 때 바로 들림을 알아차림하고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면 귀도 포의 구멍을 막아 놓은 것과 같이 마음이 달아날 수 없습니다. 코도 마찬가지로 냄새를 알아차림 하는 즉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던가, 냄새의 생멸을 관찰하다가 사라지면 즉시 몸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달아날 수 있는 구멍을 막는 것과 갔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고 마실 때에도 입안에 음식이 닿자마자 음식을 입에 넣는 것, 씹는 것, 삼키는 것 전부를 다 알아차림 하면, 입이라는 구멍으로 마음이 달아나는 것을 막는 것과 같습니다. 스님 이와 같이 스님에게 있는 6개의 구멍인 눈,귀,코,입,몸,생각 중에서 눈,귀,코,입,몸만 막아버리고 생각은 현재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모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sati) 스님은 쉽게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하고 법문하였습니다. 그래서 뿌띨라 스님은 사미스님 가르쳐준 방법대로 눈,귀,코,입,몸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집중적으로 알아차림을 하기 시작해 강한 집중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좌선을 하기 위해 앉을 때 알아차림 하고, 앉아서 느낌을 다 관찰하고, 일어나서 행선하면서도 열심히 쉬지 않고 현재 이 순간을 다 알아차림 하였습니다. 좌선 중에 갖가지 쑤시고 저리고 결리는 느낌들이 일어날 때도 정확하게 관찰하였습니다. 좌선 중 마음이 산란할 때는 산란함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마구 밖으로 달아날 때는 달아남을 바로 알아차리고, 탐의 마음이 일어날 때는 탐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성남의 마음이 일어날 때는 성남의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눈에 대상이 들어올 때는 보임을 알아차리고, 소리가 귀에 들릴 때는 들림을 알아차리고, 냄새가 맡아 질 때는 냄새라고 바로 알아차림 하였습니다. 그렇게 행주좌와 중에 끊이지 않고 계속 알아차림을 하니, 집중력이 일어나서 싸띠를 할 때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무상의 지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라고 하는 물질과 정신이 정말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끝임 없이 생멸하는 것을 보고 “무상의 지혜”가 일어나고, 너무나 빠르게 생멸하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저미듯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지혜”가 일어나고, 이렇게 모든 것이 무상하고 빠르게 생멸하고 고통스럽지만 어느 것 하나라도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 없다는 “무아의 지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무상,고,무아의 지혜가 일어나고 집중력이 강하게 형성된 뿌띨라 비구의 상태를 부처님이 아시고 ‘이정도 되었으니 여래가 가서 법문하면 뿌띨라 비구가 도와 과에 계합하겠구나’ 하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즉시 부처님이 신통으로 뿌띨라가 있는 산으로 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뿌띨라야! 이 세상에 수행을 열심히 쌓아서 힘이 모이면 이 지구상의 흙덩이처럼 높이 쌓을 수 있다. 수행을 열심히 해서 알아차림이 쌓이고 쌓이면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위빠싸나 지혜가 이 지구상의 흙의 양만큼 쌓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어떠한 지혜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열심히 수행을 닦으면 지혜가 무한히 끝없이 일어나고, 닦지 않으면 어떠한 지혜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온 힘을 다 쏟아서 수행을 하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수행이 탄력을 받고 있던 뿌띨라 비구는 때맞추어 부처님이 법문을 해주시니 엄청난 정진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정진력의 힘 때문에 싸띠의 힘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싸띠의 힘이 좋아지니까 집중력의 힘이 좋아지고, 일어남 사라짐의 지혜가 더욱 강해져서 즉시 아라한의 도와 과를 성취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수행이 발전할 수 있는 첫 번째가 노력의 힘입니다. 두 번째는 대상과 마음이 성성하게 알아차림하는 싸띠의 힘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하게 대상에 100% 집중하는 밀착하는 집중의 힘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하겠다는 노력이 없으면 대상과 마음이 분명하게 만나는 싸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성성하게 알아차림하는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한 대상에 오롯이 집중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한 대상에 오롯이 집중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위빠싸나 지혜가 일어날 수 없고, 위빠싸나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르므로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하겠다는 노력과 알아차림 하되 성성하게 관찰하는 싸띠, 한 대상에 오롯이 집중되는 힘, 이 세 가지가가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뿌띨라 존자가 단기간에 아라한이 된 것이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노력하고 싸띠하고 집중했기 때문에 도와 과에 들어간 것입니다. 만약에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뿌띨라 존자처럼 노력과, 싸띠와 집중력이 좋다면 여러분들은 다음 생까지 갈 것 없이 이생에서 바로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노력과 싸띠와 집중력이 도와 과를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없이는 백년을 수행하여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생기고 사라지는 실재를 알고 하루를 사는 것이 그것을 모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낫다. 노력과 싸띠와 집중력! 이 세 가지가 있으면 하루를 살아도 고귀하고 영원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모든 번뇌로 부터 벗어난 완전한 평화, 대자유인의 경지, 열반에 도착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여러분들 열심히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힘 모두를 쏟아 알아차림 해서 여러분들이 원하고 바라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깨달음에 도착하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사야도께서 주신 축원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
슬기롭고 온화하게 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sweetie65/5610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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