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제일 아난존자
부처님의 십대제자의 마지막은 아난존자이다. 파리어로는 아난타라고 하며,『다문 제일』이라고 부른다.
아난존자는 부처님과 마찬가지인 석가족 출신으로 부처님의 종제(사촌 아우)가 된다. 그러나 부처님과 연령차가 상당히 많아서 스무 살이나 설은 살쯤 아난존자가 젊었던 것 같다.
우리는 불교 경전 여기저기에서 안나 존자의 이름을 곧잘 볼 수가 있다. 불전에 그 이름이 나온 횟수는 아마 십대제자들 가운데 이 아난 존자가 가장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부처님의 시자(비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누군가에게 시자를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희망을 말씀한 것은, 부처님의 보령 55~56세 때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불전에는 아난존자가 26년 동안 시자 역할을 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80세에 열반하셨기 때문에 역산을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시자의 인선을 쉽사리 결정되지 않았다. 최초에 장로들이 차례차례 그 역을 맡고 싶다고 제의했다. 녹야원에서 부처님의 초전 법륜(최초설법)의 자리에 같이 했던 콘단냐나 혹은 마하가섭 같은 제자들이다. 부처님은 그대들은 이미 나이를 먹어 체력도 쇠약해졌으니까... 라는 이유로 그들의 제안을 물리쳤다. 부처님께서는 바라던 것은 젊은 아난이었다. 동족이라는 아유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난 쪽에서 주저했다. 너무나 무거운 임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부처님의 신변을 보살펴 주고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에는, 그 대요(大要)를 기억해 두어야만 한다. 그것은 명예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과연 약질인 자기가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일종의 불안이 앞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지막으로 그 대임을 그가 맡았을 때 아난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새 것 헌 것을 불문하고 부처님을 위해 만들어진 의복은 받지 않는다.
둘째. 부처님의 위한 공양은 받지 않는다.
셋째. 비시(때 아닌 때)에 부처님과 만나지 않겠다.
부처님께서는 교단의 주재자이시다. 따라서 재가신자가 부처님을 초대해서 부처님을 특별히 공양 대접을 한다거나 특별히 좋은 옷을 공양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때에 지자에게도 몫을 나누어 줄지 모르지만, 그것을 사양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령 시자가 될 지라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모두 똑같은 불제자이기 때문에 특별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비시에 부처님과 만나지 않겠다는 것은 ... 지자라면 언제나 부처님과 만날 수가 있다. 가령 그것이 한밤 중 일지라도 화급한 용건으로 스승을 깨워야만 될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괜찮겠지만, 그 언제든지 부처님을 만날 수가 있다는 특권을, 자신의 수행상 편의 때문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을 아난 스스로가 경계한 것이었다.
교리에 관한 의문, 수행상의 망설임, 그런 일이생긴 때, 당장 부처님께 질의를 던지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심정이다. 그러니까 그 점을 아난은 자제하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같은 수행자의한 사람으로 인식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조건만을 달아, 그는 부처님의 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입멸과 아난존자
그로부터 25년 후, 부처님은 입멸하셨다. 그 25년 동안 아난은 줄곧 스승의 모셨다. 부처님과 함께 여행을 하고, 부처님께서 하시는 여러 가지의 가르침을 들어 그 것을 기억해 두었다. 그는 언젠가는 그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구시나가라 땅에서 입멸하셨는데, 스승이 최후의 숨을 거두는 순간도, 아난은 그 옆자리에 있었다. 형태에 붙어 다니는 그림자처럼 , 그는 언제나 부처님 곁에 따라 다녔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아난존자는 그 스승이 남기고 가신 가르침을 정리해 확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제각기 제 나름의 대로의 주장을 펴기 시작하면 교단이 분열돼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쳤으며, 어떤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가를 확인하고자, 왕사성교외에 있는 칠엽굴에 5백 명의 제자들이 모였다. 이것을 『결집』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경전편찬회의라고나 할까. 제 1회의 결집은 부처님께서 입멸하시던 해에 개최되었고 원로급인 마라가섭이 이를 소집했었다.
그런데 이 결집에 참석하는 멤버의 선출에 관해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름 아닌 아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난은 25년 동안이나 부처님을 모셨던 제자이다. 부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기억해 두야 하는 그런 중대한 임무가 원래 그에게 부과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문제일의 제자를 젖혀 두고 결집은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난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옳은 이치이나, 한편 그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있는 범부중생이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결집에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잇는 불제자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어 있었다. 아라한이란 이생의 모든 번뇌를 끊어버린 원시 불교의 성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아난은 아직 아라한은 아니었다. 결집에의 참가 자격을 아라한으로 국한 했으면 ... 생각하고 있던 마하가섭은, 그러므로 이 아난을 참가시키는 데에 주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난을 빼 놓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하는 수 없이 아난은 예외적으로 결집에의 참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도우심 이었는지 용케도 아난은 며칠 사위에 전격적으로 아라한이 되었다. 선배 비구들의 격려를 받으며 혼신의 노력을 계속하던 그는 결집이 열리는 날 아침, 마침내 아라한이 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결과 적으로는 결집은 모두 아라한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아난존자는 25년 동안의 부처님을 모신 한 제자로서 체험에 의해 결집을 시종리이드 하여, 경전을 완성해 내는데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이러이러한 땅에 계셨다....」
아난존자는 이렇게 말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확인하고 이어서 5백 명의 아라한이 아난존자가 말한 것을 그대로 복송을 했다. 경전 편찬회의는 그러한 순서로 진행되어 갔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오늘날 원시불교의 성전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은 이 아난존자에게 힘입은 바가 매우 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아난존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난은 왜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아라한이 될 수 없었던 것일까.....? 그 점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조금 행각해보면 부처님 시자였던 아난은 특별한 가르침을 다 얻어 들었을 테니까, 그 만큼 더 깨달음을 얻기가 쉬웠으리라고 생각되는 데도 아무튼 이상하지 않는가.
그 이유의 하나는 역시 시자로서의 임무 수행이 정신이 없을 만큼 바빴기 때문일 것이다.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려다 보니 자기 개인의 수행에 게을렀을 것임이 분명하다. 부처님께서의 명성이 드높아지면 질 수록 그를 만나고자 찾아오는 사람의 수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을 모두 맞아 잘 응대하는 것도 시자의 할 일이다. 아난은 거기에 시간을 뺏기니까 자신의 수행을 할 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십대제자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처님의 10대 제자 (0) | 2022.06.05 |
---|---|
해공제일 수보리 (0) | 2020.10.25 |
[스크랩] 9. 밀행제일 라후라(라훌라) (0) | 2018.10.07 |
[스크랩] 계율제일 우바리(우파리) (0) | 2018.09.30 |
[스크랩] 7. 논리(論理) 제일 가전연(마하캇쟈나) (0) | 2018.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