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제자의 이야기

해공제일 수보리

수선님 2020. 10. 25. 12:49

 해공제일 수보리

 

부처님 십대제자 가운데 부처님의 공(空)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해 해공제일(解空第一)로 불리는 수보리의 이야기다. 큰아버지 수닷타를 비롯해 아버지 등 가족들과의 불화로 세상에 대한 원망과 시기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설법제일 부루나를 만나면서 부처님을 알게 되고, 모든 중생을 차별 없이 품어주는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대화자로 등장하는 그는 부처님과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부처님의 공사상과 가르침을 후대에 전한 부처님의 십대제자다. 

 

수보리 존자는 수보리는 산스크리트 이름 수부띠(Subh쮎ti)의 한자 음역이며, 선(善)ㆍ선업(善業) 등으로 의역한다. 사위국(舍衛國)의 브라만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수보리는 16나한(羅漢) 중의 하나로서 무쟁삼매(無諍三昧)의 법을 깨쳐 모든 제자들 가운데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출가 전 수보리는 화를 잘 내고 스스로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부처님을 알게 되어 출가했고, 스승의 가르침에 큰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했다. 북방불교에서는 출가 후의 수보리를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깨우쳤다는 ‘해공제일(解空第一)’ 이라고 칭했으며 초기경전인 〈증일아함경〉에서는 ‘평화롭게 머무는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의미로 ‘무쟁제일(無爭第一)’ 이라고 한다. 또한 ‘공양을 받을만한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의미로 ‘피공제일(被供弟一)’이라고도 한다.

 

사위국 브라만가문 출생
가족과 불화일으킨 문제아
거리 무법자였던 수보리
부루나 만나면서 부처님 알게돼

 

◀ 그림 조향숙씨 석굴암 수보리상 판화

부루나와의 만남큰아버지와 아버지를 향한 원망
큰아버지인 수닷타 장자는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자 수보리의 아버지인 수마나 장자에게 매우 인색했다. 사위성에서 부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동생에게 쌀 한 톨 보태주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한 살도 채 안됐을 때 어머니를 잃고 홀아비 밑에서 자란 수보리는 철이 들면서 그런 큰아버지에게 노예 취급을 당하는 아버지가 불쌍했다.
하지만 아버지 수마나는 형에게 언제나 웃는 얼굴로 대했고 형을 원망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 수보리는 큰아버지만을 원망했지만 나이가 점점 들면서 아버지까지 미워졌다. 그러면서 수보리 자신마저 삐뚤어지게 됐고 거리의 무법자로 변해갔다.
수보리는 동네 불량친구들과 거리를 활보하며 지나가는 행인에 시비를 걸거나 상점에서 행패를 부리는 등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카와 친동생에게는 그렇게 인색했던 큰아버지가 부처님을 위해 기원정사를 짓는 공사에 전 재산을 다 내놓고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수보리는 큰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에 화가 났고 친구들을 모아 기원정사 불사 현장에 들어가 일을 방해할 계획을 세웠다.

친구들과 함께 기원정사에 도착한 수보리는 의아했다. 부루나가 사리불을 도와 기원정사를 지으면서 거리에서 탁발을 다니고 있었다. 신도들의 주머니를 털어 사원을 지으며 호의호식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었다.
수보리는 탁발을 하는 부루나에게 달려가 말했다. “이 나라 최고 갑부의 주머니까지 털어 절을 짓는 재주를 지닌 부처님의 제자께서 밥을 빌어먹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탁발은 출가 수행자의 기본입니다. 더불어 음식을 공양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는 시작이지요.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매일 같은 시간에 탁발을 하십니다. 이제 탁발이 왜 부끄러운 일이 아닌지 아셨습니까?”
“나같이 하찮은 놈이 그걸 어찌 알겠소.” 수보리가 대답했다.
“부처님 법에는 절대 하찮은 사람도 잘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올바르냐에 따라 평가될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그대를 하찮은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부루나는 팔을 뻗으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 손에 손가락이 다섯 개 입니다만, 길고 짧은 가운데 가장 으뜸인 것은 엄지가 아닙니까? 반면 새끼손가락은 가장 가늘고 짧지요. 그렇다고 차별을 하며 새끼손가락을 잘라 버리면 손이 어찌되겠습니까?
수보리는 “어찌되긴 불구가 되는 거잖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부루나는 “그렇습니다. 부처님법은 다섯 손가락이 어우러져 완전한 손이 되듯이, 길거나 짧은 차이를 조화로 잘나고 못난 차별을 없애며, 사람은 모두가 평등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위대하고, 차이는 있지만 잘나고 못난 차별은 없는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부루나는 인사를 한 뒤 탁발한 음식을 가지고 돌아갔다.
수보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루나라는 친구가 왠지 싫지 않았으며 기원정사 불사에 훼방을 놓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이윽고 기원정사가 낙성되던 날, 수보리는 부루나를 우연히 만난다. 수보리는 부처님이라는 인물이 궁금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스스로 길을 가리키는 분이시네. 사람에게는 불행으로 가는 세 가지 마음의 길이 있네.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도록 바른길을 가리키시는 스승이시네.”
부루나의 설명에 수보리는 점점 더 부처님이 누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그림 김흥인

앙굴리말라와 부처님
어느 날 아침, 부처님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어 늪에 빠진 이들을 염려하면서 신통으로 세상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위성 근처 숲에서 피범벅이 돼 돌아다니는 앙굴리말라를 발견했다. 그는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 수도인 사위성 주변에서 살인을 일삼으며 세상을 어지럽히던 살인마였다.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바라문 밑에서 공부하게 된 앙굴리말라는 도를 깨치게 해주겠다는 스승의 꼬임에 빠져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인 다음 손가락을 잘라 목에 걸고 다녔다. 999명을 죽인 그는 마지막 한 명을 채우기 위해 사위성 근교의 숲에 숨어있었다. 앙굴리말라는 저 멀리 부처님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봤다. 칼과 화살을 들고 부처님 뒤를 쫓았으나 이상하게도 전속력으로 따라가도 부처님과의 사이를 좁힐 수 없었다. 앙굴리말라가 외쳤다. “멈춰라!”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어 있다. 너야말로 거기 멈춰 서거라.” 부처님이 말했다.
앙굴리말라는 그렇게 말하는 뜻이 궁금했다.
“사문이여, 너는 걸어가고 있으면서 멈추어 서 있다고 하는구나. 너는 멈추어 서 있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앙굴리말라여, 나는 생물을 해치거나 괴롭히는 일로부터 떠나 자비와 인욕을 성취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멈추어 서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너는 살아 있는 것을 해치고 괴롭히며 자비와 인욕이 없다. 너는 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 그래서 너는 멈추어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제 정신이 든 앙굴리말라는 그동안 자신이 저질러온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깨닫게 됐다. 그는 부처님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참회하며 출가의 청을 올렸다.
“잘 왔구나, 비구여” 부처님은 희대의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수보리는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격이 매우 까칠하고 예민했던 수보리는 부처님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사람들을 보며 그동안 허비했던 삶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기원정사로 향해 다시 부루나를 만났고, 출가결심을 이야기했다.

 

살인마 교화하는 부처님보고
기원정사서 출가하기로 결심
“업을 씻고 마음의 주인이 돼라”
수행하러 죽림정사로 떠나

해공제일의 수보리
부처님 앞에서 머리를 깎은 수보리에게 부처님이 말했다.
“수보리야, 삭발하는 것만으로 번뇌망상을 지울 수 없듯이 진리 또한 쉽게 깨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마음의 주인이 돼 온갖 마음을 다스려 깨끗이 유지할 때 공(空)한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부디 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수보리가 간곡히 청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진정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 그동안 네가 사위성에서 쌓은 번잡했던 업을 씻고 법을 보려면, 죽림정사로 가 한적한 영취산에서 수행하도록 하거라.”
수보리는 기원정사를 떠나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 밖에 있는 죽림정사로 향했다. 이때 사리불이 수보리를 영취산 토굴까지 안내했다.
영취산의 정기가 흐르는 길목에 자리를 잡은 토굴은 목건련이 신통력을 터득한 곳이기도 했다.
수보리는 난폭하고 까칠했던 성격을 가다듬으며,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했던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겼다.
“모든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고 귀신이나 축생은 물론 지옥까지도 만든다. 그 때문에 도를 얻는 것도 마음이요, 온갖 법도 마음 따라 일어난다. 사람이 바른 마음을 쓸 줄 알면 천신도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가는 대로 따라 가서는 안 된다. 마음을 조복받아 부드럽고 순하고 스스로 텅비워야 한다.”

 

영취산 토굴서 용맹정진
마음의 작용원리 깨달아
무쟁도 행한 모범 수행자

 

◀ 거조암 수보리 나한상

 

수보리는 죽림정사에서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를 떠올렸다.
“수보리야, 포악한 성품에서 저지르는 나쁜 허물과 번뇌는 선근(善根)을 소멸시키고 악(惡)을 키우느니라. 설령 그 고통에서 벗어나더라도 용, 뱀, 귀신 따위로 태어나 악한 마음을 품고 서로 살해하게 되는 과보를 얻게 되느니라.”
수보리는 부처님이 설한 진실한 도리를 되새기며 지난 일을 참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일만이 참회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음의 작용을 깨닫다
수보리가 수행하러 떠나기 전 어느 날이었다. 한 수행자가 부처님께 말했다.
“구족계를 받고 고요한 곳에서 관법을 닦아 성취하고자 하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수행자가 어떤 원을 세우고 수행해야 하는지 일러주셨다.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이와 같은 서원을 세워야 한다.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구족계를 받고 고요한 곳에서 관법을 수행해 깨달음을 성취하리라는 원을 세워야 한다. 그대들에게 음식과 의복과 모든 생활도구를 보시하는 사람에게 큰 공덕이 있도록 하기 위해 관법을 수행해 깨달음을 성취하리라는 원을 세워야 한다.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모기와 등에의 괴롭힘을 참으며 몸에 병이 들어 목숨이 끊어지려 한다 하더라도 수행해 성취하리라는 원을 세워야 한다. 즐겁지 않은 일을 견디고 즐겁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집착하지 않기 위해 구족계를 받고 고요한 곳에서 관법을 수행해 깨달음을 성취하리라는 원을 세워야 한다.”
출가 전 남의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수보리였지만 부처님을 만나면서 상대의 모든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귀중하게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소중한 보물과도 같았다. 수보리는 부처님 설법을 기억하며 영취산 토굴에서 수행정진에 들어갔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겼다.
“수보리여, 마음을 청정하게 챙겨서 형상을 비롯해 소리나 냄새, 맛이나 감촉, 그리고 정신적인 대상에도 결코 휘둘려서는 안 되며,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수보리는 생각했다.
‘그래, 마음은 안과 밖에도, 또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마음은 허공과 같아 뜻밖의 문제들로 더럽혀지지만 번개와도 같아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 소멸해버린다. 왜 그동안 몰랐을까.’
그렇다. 마음의 정체는 분명 알 수도, 찾을 수도 없기에 얻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얻을 수 없는 것은 생기는 일이 없고, 생기지 않는 것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이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은 사라지는 일 또한 없으며, 허공이 어디에서 보아도 평등하듯 마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
수보리는 무릎을 쳤다. 자신의 인생을 시정잡배로 몰아넣은 것은 가족들이 아니라 내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동안 밖으로만 찾아 헤맸다. 좋다 싫다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누군가 나에게 성을 내고 비난하면, 나는 그들을 일일이 상대하고 성질내는데 급급했어. 난 왜 그리도 어리석었을까.’
수보리는 크게 뉘우쳤다. 모든 것에 분별하는 마음을 내며 상대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화를 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잘못 살아온 자신을 보게 된 수보리는 밤낮이 가는 줄 모르고 환골탈태를 위한 수행 정진을 이어갔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음의 본성을 통해 공(空)의 이치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부처님 법신을 맞이한 수보리
수행정진하는 동안 수보리는 부처님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죽림정사에 들러 사리불에게 부처님의 거처를 물었고, 사리불은 아나율에게 부처님의 안부를 물었다.
천안(天眼) 제일로 인정을 받은 아나율은 잠시 우주의 법계를 살핀 뒤 대답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도리천에 올라 당신을 낳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신 생모 마야왕비님을 위해 설법을 하고 계십니다.”
“그럼 언제쯤 뵐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석 달 후, 보름날입니다, 사리불 장로님.”
예전의 수보리였다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소린가 하고 반박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수보리는 그 순간 또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하고 있었다.
‘아, 내가 지금 찾아가려던 부처님은 누구인가?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법신(法身)인 것을, 내가 맞이하려던 부처님은 덧없는 ‘육신’이 아닌가? 법신의 참다운 모습은 공한 것이어서, 가고 오는 곳이 없으며, 바로 지금 여기에도 계신 데 굳이 부처님의 육신을 맞으러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보리는 이미 출가하기 전에 살인자의 칼날 앞에서도 허공과 같은 부처님의 모습을 보았다. 다만 그때는 불가사의한 현실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부처님이 그저 신비롭게만 보였었다.
그러나 이제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신비에 쌓인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부처님이 우주 법계에서 인간과 같은 육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은 진리에 대한 하나의 비유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처님은 분명히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품고 있는 부처의 씨앗을, 마음처럼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불성을 육신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통해 드러내고 일깨우기 위하는 것이 아닐까.’
수보리는 그 의문을 화두로 삼고 다시 영취산 토굴로 돌아와 용맹 정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나율이 말한 보름날이 왔다.
죽림정사의 모든 제자들은 도리천에서 내려오시는 부처님을 먼저 맞이하기 위해 다투어 마중을 나갔다.
영취산 토굴에서 화두와 씨름하던 수보리는 토굴을 빠져나가다 말고 멈추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진정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
출가할 때 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거듭 수보리의 뇌리를 스쳤다. 수보리는 생각했다. 부처님의 참모습은 마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법신(法身)이다. 그런데 지ㆍ수ㆍ화ㆍ풍 4대의 가합일 뿐인 육신을 맞이하러 그토록 절박하게 찾아나서려 했다니….
‘육신은 참다운 진리 그 자체인 공(空)이 아니므로 법신이 될 수가 없다. 법신의 참모습은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고 오는 곳 없이 항상 우주 법계에 머물고 있다. 지금 이 토굴 속에도, 내 마음속에도 볼 수 있는 법신을 두고 무엇을 찾아 나간다는 말인가.’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수보리는 토굴에서 나가려던 발길을 돌렸다.
이윽고 제자들은 도리천에서 내려오는 부처님을 맞이하게 됐다. 이때 연화색 비구니 스님이 신통력으로 제일 먼저 부처님께 환영 예배를 올렸다. 그러나 부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다들 마중을 나와 줘서 고맙다. 하지만 나를 가장 먼저 마중한 사람은 수보리다.”
모두들 말도 안 되는 말씀이라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부처님이 말을 이었다.
“수보리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진리를 깨닫고 나의 육신을 만나기 전에 이미 내 법신을 만났으며, 내 제자들 가운데 나의 법신을 최초로 보고 맞이한 제자는 수보리이니라.”

 

▲ 그림 김흥인

무쟁제일의 수보리
수보리는 이제 더 이상 출가 전의 수보리가 아니었다. 조용히 수행에만 정진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무쟁(無諍)과 팔정도의 삶에 대해 설법했다. 그것은 달라진 수보리를 이야기 하기 위함이었다.
“싸워서 이기면 원수와 적만 더 늘어나고, 패하면 괴로워서 누워도 편치 않다. 이기고 지는 것을 다 버리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편안하리라. 싸워서 능히 이긴다 한들 끝내는 원한만 더욱 커져서 이익이 없다. 서로 놓아주면 편안하고 안락해질 것이다.”
이어서 강가로 간 부처님은 강 가운데로 큰 나무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저 나무가 바다에 이르고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쪽 저쪽 언덕에도 닿지 않아야 하며, 중간에 가라앉거나 언덕 위로 오르지도 않아야 하며,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에 붙잡히지 말아야 하며, 물길을 거스르지도 썩지도 않아야 무사히 바다에 이를 수 있다. 수행자들이 수행하여 열반의 바다에 이르는 것도 이와 같다. 이쪽 저쪽 언덕에도 닿지 않아야 하며, 중간에 가라앉거나 언덕 위로 오르지도 않아야 하며, 사람이나 또는 사람 아닌 것에 붙잡히지 말아야 하며, 물길을 거스르지도 썩지도 않아야 열반의 바다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열반이란 바른 소견, 바른 다스림, 바른 말, 바른 업, 바른 생활, 바른 방편, 바른 사념, 바른 선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무더기를 없애지 못한 채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잘못된 행을 끊고 팔정도를 열심히 닦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설법의 마지막에 “비구들이여, 수보리는 무쟁도(無諍道)를 행하는 이다”라며 수보리를 무쟁의 삶을 사는 최고의 모범으로 칭송했다.

 

▲ 그림 김흥인

지붕없는 암자에서 별 벗삼아 수행
이미 깨달았지만 중생위해 설법 요청
〈금강경〉서 부처님과 대화자로 등장
1250 대중에게 무상함 일깨워

수보리는 이미 공의 이치를 가장 잘 깨우친 존자였다. 그런 수보리를 부처님은 대중 앞에서 무쟁제일(無諍第一)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걸맞게 수보리는 항상 자애와 함께하는 수행자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 또한 수보리는 〈금강경〉에서 공(空) 사상을 설하는 부처님과의 대화자로 등장한다. 부처님께 질문에 질문을 거듭해 우리들에게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다.

지붕없는 암자
수보리가 마가다국의 라자가하를 찾았을 때였다. 빔비사라왕은 수보리의 라자가하 방문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수보리의 설법을 들은 왕은 크게 감동했고 답례로 정사를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왕의 지시를 받은 부하들은 열심히 정사를 지었다. 하지만 당시 16대국 가운데 최강국으로 주변 국가의 병합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던 왕은 정사의 완성까지 세심하게 마음을 쓰지 못했다. 끝내 불사는 중지됐고, 지붕이 만들어지지 못한 채 정사는 몇 달 동안 방치됐다.
하지만 수보리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지붕없는 암자에 머물렀다. 수보리는 몇 달 동안 지붕 없는 암자에서 하늘의 별을 벗 삼아 평온하게 수행 정진하며 지냈다.
이 모습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수보리가 지붕 없는 암자에 머무는 동안 하늘에서는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마가다국 백성들은 타는 듯한 햇볕과 가뭄에 고통스러웠고, 보다 못한 왕은 비가 내리지 않는 연유를 알아보게 했다. 가뭄의 이유가 수보리의 정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왕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정사에 지붕을 올리도록 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곧바로 비가 내렸고 마가다국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지붕을 올려 주십시오.”
어렵지 않게 던질 수 있는 한마디였지만, 수보리는 하지 않았다. 지붕이 없어 비나 밤이슬은 피할 수 없지만, 벽이 있으니 바람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수보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공(空)의 진리를 체득한 수보리에게 지붕이 있고 없고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해공제일의 수보리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이 지붕을 올린 뒤 수보리는 게송을 읊었다.
“나의 토굴이 완성되니 소란한 주위가 고요하고 마음이 평화로우니 여기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라네. 하늘이여, 비를 내려 주오. 나는 진리를 찾았거늘 비를 내려 주오.”
지붕 없는 토굴을 공양받아도 즐겁게 살던 수보리 존자. 그래서 그를 부를 때 피공제일(被供第一)이라고도 부른다.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징

한 번은 수보리가 삿다(Saddhaㆍ信)라는 이름의 비구와 함께 부처님을 찾았을 때였다. 삿다 비구는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비구였다. 부처님께 절을 올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 비구는 누구인가?”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삿다라고 합니다. 신심이 두터운 재가신도의 아들입니다. 그 역시 신심이 두터워 출가해 비구가 됐습니다.”
“수보리여,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이냐? 어떤 경우에 그 사람은 신심이 두텁다고 말할 수 있느냐?”
수보리는 분명하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그 믿음의 특징에 관해 설해주십시오.”
부처님은 믿음이 지니는 특징에 관해 설했다.
“우선 계를 존중하고, 계를 잘 지키는 것이다. 이어 법을 듣고 그 법을 잘 기억해 수지하는 것이다. 또한 승가에서 도반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다. 교계를 받았을 때는 순수하게 받아들여 따르고, 수행에 있어서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법을 행할 때는 환희심을 갖고 해야 한다.”
믿음에 관한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한 수보리는 삿다 비구가 그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이시여, 이 비구는 지금 말씀하신 믿음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생각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잠시 수보리의 얼굴을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수보리야. 그렇다면 너는 이 비구와 함께 머물러라. 또한 나를 만나고 싶을 때는 이 비구와 함께 오너라.”

부처님께 법을 청하다
영취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수보리는 사위성의 기원정사로 돌아왔다.
사위성은 초강대국의 수도답게 90여 만 호의 집들이 밀집돼 있는 대도시였다. 90여 만 호에 사는 시민들 중 3분의 1은 직접 부처님을 친견할 정도로 부처님의 교단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부처님은 사위성에 나가 탁발한 공양을 마치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를 펴고 고요히 앉으셨다.
그때 1250명 대중 속에 있던 수보리가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상태로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합장하며 부처님께 말했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을 잘 보살피시고 항상 챙겨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완전한 깨달음에 마음을 낸 착한 이들은 어떻게 마음을 챙기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좋은 질문이다. 수보리여. 그대의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잘 당부하느니라. 그대들은 이제 자세히 들어라. 선남자선여인 가운데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반드시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 지니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즐겁게 듣고자 하나이다.”
이미 깨달음을 얻은 수보리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중생을 위해 부처님께 법을 청한 것이다. 부처님도 그러한 수보리의 뜻을 알아차리고 흔쾌히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했다.
이어서 부처님은 자신의 법신을 본 수보리의 깨달음을 확인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른두 가지의 남다른 모습으로써 여래라고 미루어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서른 두 가지의 남다른 모습으로써 여래라고 미루어 볼 수는 있습니다.”
“만약 서른 두가지의 남다른 모습으로서 여래라고 미루어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구나?”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반드시 서른 두 가지의 남다른 모습으로써 여래라고 미루어 볼 수 없겠습니다.” 부처님의 몸은 서른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전륜성왕도 32상을 갖추고 있었다. 전륜성왕은 인도인들이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군주였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짓고 덕을 닦아 생김새도 부처님과 똑같은 32길상을 갖추었다. 하지만 모습은 부처님과 같다 할지라도 깨달음은 이루지 못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32상을 미루어서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느냐 묻자, 수보리는 처음에 미루어서 볼 수는 있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구나”라는 부처님 말씀에 금세 깨닫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형상을 통해서 여래를 이해한다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相을 없애야 한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 찬 금은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 이가 있고, 만약 또 다른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있어서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경전을 가지고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다른 이를 위해서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앞의 복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하여 설명해 주는 것’ 인가하면, 상(相)에 끌려 다니지 않고 여여하게 동요하지 않는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1250 대중에게 상을 없애야만 한다고 일렀다.
“수보리여, 모든 작위(作爲)가 있는 것은 마치 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반드시 이와 같이 관찰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가르침이 있는 곳이면 모든 여래가 있는 것과 같음을 잊지 말거라.”
“하오면 지금 설하시는 경을 무어라 이름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습니까?”
“지금 설하는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라. 수보리여, 여래가 어떤 진리를 말씀하신 바, 법이 있느냐 없느냐?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임을 깨달아야 바른 법을 보느니라.”
부처님이 이 경을 다 말씀하자, 덕 높은 수보리와 여러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천신들과 아수라들이 크게 기뻐했다.

  

참고문헌
〈부처님의 십대제자(성각 스님 편저)〉 〈부처님의 십대제자(성법 스님 편저)〉 〈붓다를 만난 사람들(조계종 출판사)〉 〈금강경〉 〈아함경〉

수보리 존자는 수보리는 산스크리트 이름 수부띠(Subh쮎ti)의 한자 음역이며, 선(善)ㆍ선업(善業) 등으로 의역한다. 사위국(舍衛國)의 브라만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수보리는 16나한(羅漢) 중의 하나로서 무쟁삼매(無諍三昧)의 법을 깨쳐 모든 제자들 가운데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출가 전 수보리는 화를 잘 내고 스스로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부처님을 알게 되어 출가했고, 스승의 가르침에 큰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했다. 북방불교에서는 출가 후의 수보리를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깨우쳤다는 ‘해공제일(解空第一)’ 이라고 칭했으며 초기경전인 〈증일아함경〉에서는 ‘평화롭게 머무는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의미로 ‘무쟁제일(無爭第一)’ 이라고 한다. 또한 ‘공양을 받을만한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의미로 ‘피공제일(被供弟一)’이라고도 한다.

 

 

현대불교신문 정혜숙기자

 

 

 

 

 

 

 

 

 

[출처] 해공제일 수보리|작성자 이상한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