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불법 안에서 12인연(因緣)114)을 심히 깊다 하셨다. 곧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이 인연의 법은 심히 깊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관찰하기 어려우니, 마음이 섬세하고 지혜가 공교로운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얕고 가까운 법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심히 깊은 인연이겠느냐”고 말씀하셨거늘 이제 와서 어찌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인연을 관찰하라 하는가? |
[답]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서 소나 양같이 어리석다는 뜻은 아니다. 이 사람은 진실한 도를 구하고자 하면서도 삿된 마음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갖가지 |
109) 범어로는 cetovyādhi. |
110) 범어로는 aśubhāvanā. 5정심관(停心觀) 가운데 하나이다. 번뇌와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육체의 부정한 특징을 관찰하는 관법이다. 예를 들어 버려진 시신이 차례로 썩어가서 이윽고 백골이 되고 흙으로 돌아가기까지를 관찰한다. 그 관찰의 단계를 아홉으로 나눈 것이 9상(相)이며, 열로 나눈 것이 10상(相)이다. |
111) 범어로는 maitrīcitta. |
112) 범어로는 manasikāra. 작위(作爲)라고도 한다. |
113) 범어로는 hetupratyayaparīkṣa. 연기관(緣起觀)을 말한다. |
114) 범어로는 dvādaśahetupratya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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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된 소견을 내나니,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법을 관찰해야 한다. 이것을 좋은 대치방법이라 한다. |
만일 성을 내거나 탐욕을 행하는 사람이 쾌락을 구하거나 남을 괴롭히려 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아서 대치방법이 아니다. |
부정이나 자심(慈心)으로 사유함은 이런 두 가지 사람에게는 좋으며 대치의 법이 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관법은 성냄과 탐욕의 가시를 뽑아 버리기 때문이다. |
또한 영원함[常]에 집착하는 전도된 중생은 모든 법이 비슷하게 상속(相續)함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이 무상(無常)을 관한다면 이는 대치실단은 될지언정 제일의실단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자성(自性)115)이 공하기 때문이다.116) |
게송에 이런 것이 있다. |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면 |
이것을 뒤바뀜[顚倒]이라 한다. |
공한 가운데는 무상도 없거니 |
어디에서 항상함이 있음을 보랴. |
[문] 온갖 만들어진 것[有爲法]117)이 모두 무상의 모습이라면, 응당 무상이야말로 제일의제[第一義]일 것이거늘 어찌하여 무상이 진실이 아니라 하는가? 온갖 유위의 법은 생(生)․주(住)․멸(滅)의 모습이니, 먼저는 생하고 다음은 머무르고 나중에는 멸한다. 그러니 어찌 무상이 진실치 않겠는가? |
[답] 유위의 법에 세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 가지 모습이 진실치 않기 때문이다. |
115) 범어로는 svabhāva. 고정된 속성을 지니고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본체 내지는 실체를 말한다. |
116) 그런 사람은 다시 무상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로 일체법은 자성이 없이 공하기에 무상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
117) 범어로는 saṃskṛta-dharma. 다양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 일체를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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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모든 법의 생․주․멸이 유위의 모습이라면 지금의 생 가운데에도 세 가지 모습이 있어야 하리니, 생이 유위의 법인 까닭이다. 이와 같이 낱낱 곳에 역시 세 가지 모습이 있어서 끝이 없을 것이며, 주와 멸도 그러할 것이다. |
만일 모든 생․주․멸에 각각 다시 생․주․멸이 없다면 유위의 법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위법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이 무상하다 함은 제일의 실단이 되지 못한다. |
또한 온갖 것의 진실한 성품118)이 무상하다면 행업(行業)119)의 과보(報)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상을 생멸이라 부르는 허물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썩은 종자는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
이러한 즉 행업이 없을 것이요, 행업이 없으면 어떻게 과보가 있겠는가? 지금 온갖 성현의 가르침에 과보가 있음을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믿어 받드는 바이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은 무상의 성품이 아니다. |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무상의 성품이라고말할 수는 없다. 곧 일체의 유위법이 무상하며, 고(苦)․무아(無我)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모습을 대치실단이라 부른다. |
제일의실단이라 함은 온갖 법성(法性)120)과 온갖 논의․언어, 온갖 옳은 법․그른 법은 낱낱이 타파되고 흩어지지만 부처님들이나 벽지불121)․아라한122)들이 행하는 진실한 법은 파괴할 수도 없고 흐트러뜨릴 수도 없는 것 |
118) 진실한 성품은 범어로는bhūtasvabhāva이다. |
119) 범어로는 karmavipāka. 행위의 결과가 익는 것을 말한다. 업이숙(業異熟)이라고하기도 한다. |
120) 범어로는 dharmatā. |
121) 범어로는 pratyekabuddha. 벽지불(辟支佛)이란 홀로 수행해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수행자로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무불(無佛)시대에 출현해 스승이나 도반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는 성자를 뜻한다(獨覺). ‘인연법 혹은 12연기를 관해 깨달음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
122) 범어로는 arhat. 불교흥기 당시의 인도의 여러 종교에서 ‘수행완성자,’ ‘존경할 만한 수행자’를 의미하던 말이다. 원래 아라한(arhat)이란 어근 √arh(~할 가치가 있다, ~에 필적하다)에서 유래한 현재분사의 형태로 ‘공양드릴 만한 가치가 있는 자’를 의미한다. 여래 10호에서 보듯이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을 가리키던 말이지만, 부파시대가 되면 그 의미는 협소해져 단순히 불제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위를 가리키게 되었다. 응(應)․응공(應供)․불생(不生)․살적(殺賊) 등으로 의역하거나, 나한(羅漢)․아라가(阿羅訶)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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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위의 세 가지 실단 가운데에서 통(通)하지 않던 것이 여기에 모두 통한다. |
[문] 어떻게 통하는가? |
[답] 통한다고 하는 것은 온갖 허물을 여의어 바꿀 수 없고 이길 수도 없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제일의실단을 제하고는 나머지 논의나 실단은 모두 타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중의경(衆義經)』123)에 이러한 게송이 있다. |
제각기 자기의 견해에 의해 |
부질없이 싸움을 일으키나니 |
그들이 그른 줄 알기만 하면 |
그는 바른 견해를 아는 이라. |
다른 이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
이를 어리석은 이라 하나니 |
이러한 희론을 일삼는 이는 |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
자기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 |
온갖 희론을 일으키고 |
이를 맑은 지혜라 한다면 |
맑은 지혜 아닌 이 없으리. |
이 세 게송 가운데에서 부처님은 제일의실단의 모습을 설명하셨으니, |
123) 범어로는 Arthavargīyasūtra. 실역(失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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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세간의 중생들은 스스로의 견해에 의지하고, 스스로의 법에 의지하고, 스스로의 이론에 의지해서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희론은 다툼의 근본이 되고 희론은 모든 견해에 의해 생겨나니,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
받아들인 법이 있기에 왈가왈부하거니와 |
받아들임이 없다면 무슨 논의가 있으랴. |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견해를 |
이 사람은 이미 모두 제해버렸네. |
행자(行者)가 이 이치를 여실하게 알 수 있다면 온갖 법과 온갖 희론을 받아들이거나 집착하거나 보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다투지 않음이니, 불법의 감로미(甘露味)124)를 잘 알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곧 법을 비방하는 일이다. |
만일 남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알지도 못하고 취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지혜 없는 사람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논쟁자들은 모두 무지한 자이리라.
왜냐하면 서로가 상대방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법이 제일의로서 깨끗하다. 하지만 다른 법은 거짓말이요 깨끗하지 못하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
비유하건대 세간에서 법을 다스리는 것과 같나니, 법을 다스리는 이는 형벌을 주거나 살육을 하는 등 종종의 부정한 일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믿고 받아 들여 참되고 깨끗하다 여기거니와 세상을 벗어난 성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는 가장 부정한 것이 된다. |
외도의 출가한 사람들의 법에는 5열(熱)125) 속에서 한 발로 서 있거나 터럭을 뽑는 일을 니건자(尼犍子)126)의 무리들은 묘한 지혜라 여기지만 |
124) 범어로는 amṛta. 불사의 맛 또는 경지를 의미한다. |
125) 범어로는 pañca-tapas. 다섯 가지 가학적인 고행방식을 말한다. |
126) 범어로는 Nirgrantha-putra. ‘속박을 여읜 자’라는 뜻으로 쟈이나(Jina)교의 실질적인 교주이다. 부처님과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본명은 Vardha-māna이며, 득도 후에는 Mahāvīra, 혹은 Jina라 불렸다. 30세에 출가해 12년 동안 고행한 끝에 42세에 깨달음을 얻어 승리자(Jina)가 되었다. 72세에 입멸하기까지 인도 각지를 유행하며 교화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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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은 이것을 어리석은 법이라 여긴다. 마치 이와 같이 갖가지 외도․출가․백의(白衣)127)․바라문128)이 각각 자기의 법을 좋다 하지만 다른 이는 모두가 거짓이라 한다. |
이 불법 안에서도 독자비구(犢子比丘)129)들은 “4대(大)130)가 화합해서 안법(眼法)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5중(衆)이 화합해서 사람[人法]이 있다” 고 말한다. |
독자부의 『아비담(阿毘曇)』131)에서는 “5중이 인(人)을 여의지 않고 인이 5중을 여의지 않으니, 5중이 곧 인이라거나 5중을 여읜 것이 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이란 다섯 번째의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장(法藏)132) 안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
127) 범어로는 śvetāmbara. 재가를 의미한다. 재속인은 주로 흰옷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
128) 범어로는 brāhmaṇa. 인도의 사성계급 중 최상위에 위치하는 성직자 계급이다. |
129) 범어로는 Vātsīputra. 독자부(Vajiputtiyā)는 20부파 가운데 하나로 상좌부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용수에 의하면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은 독자부의 소의논서라 한다. |
130) 범어로는 caturmahābhūta. 4대란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로 견고함을 본질로 하는 지대(地大, pṛthivi-dhātu)․습기를 모으는 수대(水大, ab- dhātu)․열을 본질로 하며 성숙작용을 지니는 화대(火大, tejo-dhātu)․생장작용을 하는 풍대(風大, vāyu-dhātu)를 말한다. |
131) 범어로는 Abhidharma. 그 어의는 ‘법(dharma)에 관하여(abhi)’라는 의미로 아비달마(阿毘達磨)․비담(毘曇)이라 음역하거나 대법(對法)․무비법(無比法)․승법(勝法) 등으로 의역한다. 이 중 무비법․승법은 dharma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고 이에 대한 불제자들의 해석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이 말은 불제자들의 아비담에 대한 이해를 묶은 책인 논서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기원전 2세기 부파불교시대부터 만들어진 논서들을 모아 논장(abhidharma- pitaka)이라 부른다. 여기에 원시불교시대에 성립된 경장과 율장을 더해 3장(tri-pitaka)이 된다. 스리랑카 상좌부와 북쪽의 설일체유부에서는 6족론에 『발지론』을 더해 7론을 논장으로 삼았는데, 뒤에 이 7논을 주석한 아비담이 다수 만들어진다. 이렇듯 본래 아비담의 취지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시대가 지남에 새로운 교리체계로 발전되는 등 그 분석방식이 지나치게 세밀해지면서 오히려 번쇄함을 더하게 된다. 이는 결국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진의를 일탈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
132) 범어로는 dharmapiṭa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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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일체유부[說一切有]133)의 도인(道人)들은 “신인(神人)134)은 온갖 종자[種]와 온갖 때와 온갖 법문 안에서 구해도 얻을 수 없나니,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아서 항상 없는 것이다”고 하며, 또한 “18계135)와 12입136)과 5중137)이 실제로 있으나 이 가운데 인법이라고 할 것은 없다”고 한다. |
또한 불법 안의 방광도인(方廣道人)138)은 “온갖 법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아서 항상 없다” 하나니, 이와 같은 논사[論議師]들은 모두 스스로 자신의 법만을 고수하고 남의 법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것만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거짓말이다”고 한다. |
만일 스스로가 그 법을 받아들여 자기의 법에만 공양하고 자기의 법만 수행하면서 남의 법을 받아들이거나 공양하지 않는다면 허물이 된다. |
만일 이로써 청정을 삼아 제일가는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면 온갖 것이 청정 아닌 것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저 일체란 모두 스스로 애착하는 특성인 까닭이다.139) |
대지도론(大智度論) 6. ★ 희론은 다툼의 근본이 되고, 희론은 모든 견해에 의해 생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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