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수(頓修)라 하면 말 그대로 하면 단박에 닦는다는 얘기인데, 그렇게 단박에 닦는 방법이 특별히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래전에 언급한 적이 있듯이, ‘본래’라는 말의 이중적인 뜻 중에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생이 곧 부처이다, 네가 그걸 알건 모르건 아무튼 너는 부처다, 더 이상 아무 얘기할 것 없다. 이처럼 ‘본래 그렇다’는 점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돈오돈수론이다. 한편으로, 본래는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또는 본래 그런 줄을 모르고 있다는 쪽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일도 중요하다. 여기에서 비로소 실제 수행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돈오돈수론이건 돈오점수론이건 선종에서 말하는 한은 다 본각을 전제로 한다. 돈오돈수론은 본각만 말하자는 것이고 돈오점수론은 본각을 전제로 하되 점수를 말하고자 한다. 양자의 대비는 전통적으로는 흔히 근기(根機)의 차이로 설명되었다. <육조단경>에 “무엇을 가지고 점(漸)이니 돈(頓)이니 하는가? 진리는 오직 한가지이나 그걸 보는 것이 더딜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보는 게 더디면 점이라 하고 보는 게 빠르면 돈이라 한다. 진리에는 점차니 단박이니 하는 게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에 점이니 돈이니 하는 것이다.”라 한 것이나, <육조단경>의 또 다른 곳에서는 “진리에는 돈(頓)이니 점(漸)이니 하는 게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영리할 수도 있고 우둔할 수도 있어, 어리석으면 점차 알아가지만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는다”고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단박에 닦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는다.”고 했듯이, 돈수(頓修)할 정도로 영리한 사람은 깨친 이뿐이다. 누차 언급했듯이 돈수라 하면 본각이라는 진상을 깨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범부 중에 영리한 이와 우둔한 이가 따로 있어 수행하는 방식이 단박과 점차로 다르다는 말로 보기는 어렵다. 본각 그 자체만으로 보면 돈수지만 범부의 현실에서는 점수를 논할 수밖에 없다. 지눌 스님이 말했듯이, “제 마음이 바로 참 부처이며 제 성품이 바로 참 법임을 알지 못하여, 법을 구하려 하면서도 멀리 성인들에게 미루고, 부처를 구하려 하면서도 제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며,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있다 하고 본성 밖에 법이 있다 생각하고 부처의 도를 구하려 하는” 이들, 즉 “어리석음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본각, 돈오, 돈수를 들이민다. 한편으로 ‘우리 마음이 본래 깨끗하거늘 뭣 하러 수고롭게 억지로 수행하냐?’고 하면서 무애자재행(無碍自在行)을 빙자하며 노닥거리는 이들은 점수의 처방을 가지고 질타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다만 본각(本覺), 즉 모든 중생이 본래 깨쳐 있고 본래 부처님이라는 이치를 강조하는 말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님이므로, 수행을 해서 깨침으로써 비로소 성불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깨달음, 성불은 닦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본각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그런 실제 수행에 관한 이야기는 어차피 점수론(漸修論)일 수밖에 없다. 점진적으로 닦아 나가 언젠가 단박에 깨친다는 식으로 본다면 점수돈오(漸修頓悟)라 했어야 한다. 그런데 점수돈오가 아니라 돈오점수라고 한 것은 여기에서도 돈오돈수론과 마찬가지로 본각의 이치를 전제로 걸어놓았다는 뜻이다. 본각의 이치에 입각해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돈오점수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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