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 이른바 돈점논쟁이 한창 뜨겁게 벌어졌었다. 하지만 돈점문제와 나아가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는 그동안 학계와 불교계 일각에서 끊임없이 천착되어 왔다. 불교의, 특히 선종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 그처럼 본격적으로 진지하고 활발하게 논의가 이루어지는 예는 근래에는 한국불교에서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돈점논쟁 일각에는 사뭇 분열적이고 이른바 제로섬 게임 같은 분위기가 흐른다는 점이다. 애초에 성철(性徹)스님이 돈오돈수론을 역설할 때, 지눌(知訥)스님의 돈오점수론은 선종의 이단사설(異端邪說)이라고 강하게 매도한 데에서 그런 분위기가 야기되었다. 자연히 성철스님이 옳은가 아니면 지눌스님이 옳은가 판가름하려는 구도, 어느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구도로 관심과 논의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꼭 그런 구도로 논의를 진행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한쪽은 절대로 틀렸다고 해야 한다면 지눌스님과 성철스님 중에 한분을 잃게 된다. 그러나 두 분 모두 한국불교사의 귀중한 자산이다. 특히 선수행자들에게는 돈오돈수가 옳은가 돈오점수가 옳은가 하는 것을 두고 양단간에 결판을 지어야 할 궁극적인 문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돈오돈수, 돈오점수라 하여 마치 서로 대립하는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돈오돈수론의 돈오와 돈오점수론의 돈오는 다른 개념이며, 돈수와 점수가 반대말인 것도 아니다. 지눌스님과 성철 스님은 각자의 의도에 따라 나름의 뜻으로 그 개념들을 사용하였다. 그 각자의 의도란 곧 당대 수행자들의 문제에 대한 처방이다. 달리 말하자면 수행방편의 처방이다. 방편설(方便說)은 절대적으로 옳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는 식으로, 절대적인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대기방편설(待機方便說)이라고 하듯이, 설법 대상의 근기(根機)에 따라 알맞은 방법과 내용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방편이다. 근기라 하면 대개 개인의 자질, 소양, 재능을 뜻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뿐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 시절인연까지도 근기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근기는 한 개인에서조차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며, 따라서 방편도 결코 일정할 수가 없다. 다만 선교방편(善巧方便)이라 하여 솜씨 좋고 효과 좋은 방편인지 아닌지만 얘기할 수 있다. 더욱이 솜씨 좋다는 것, 효과 좋다는 것도 늘 일정하지 않다. 선종에서는 특히 그 점을 매우 민감하게 중시한다. 뗏목의 비유, 달과 손가락의 비유, 또 목불(木佛)을 쪼개 땔감으로 썼다는 일화가 말하듯이, 방편을 절대시하는 것을 아주 근본적인 어리석음으로 본다. 심지어 성불이라는 불교의 핵심 사안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요의(了義)가 아니라 방편설로 본다. 전에 어느 기독교 신학 학회에 참석했을 때, 한 신학자가 하는 말을 듣고 내심 깜짝 놀랐었다.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장애는 유일신관이라면서, 그것을 극복해야 기독교가 제대로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유일신 개념조차 방편이라고 볼 정도라면 가히 선의 정신에 필적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그때는 개념정리도 잘 안 된 상태였고 문중(門中)과 대찰(大刹) 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등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하여 논의가 제대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좀 겉돌다가 그만 수그러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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