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69. 돈수(頓修)와 점수(漸修) 5

수선님 2018. 11. 11. 11:47


지눌스님이 그토록 많은 저술, 더욱이 매우 이론적인 내용의 저술을 통해서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말하고자 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수행하라는 가르침이다.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공덕이나 쌓고 아미타불에 의지해서 내생을 기약하겠다는 이들에게는, 성불이라는 것이 어디 저 밖에 멀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이미 부처이며 오직 제 마음의 문제일 뿐이니 지금 당장 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고 어른다.
 
한편,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우리가 본래 부처님인데 무엇 하러 수고롭게 억지로 수행하냐?’고 하면서 무애자재행(無碍自在行)을 빙자하며 지내는 이들에 대해서도, 얼음이 본래 물인 줄 알더라도 햇볕을 받아 녹아야만 비로소 물이 된다는 비유를 들며 치열한 수행을 권한다. 이치로서는 우리가 본래 부처님인 게 맞다. 하지만 물이 얼어 있는 상태에서는 물노릇을 하지 못하듯이 그 본래 부처님이 부처님으로서 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본래의 정체인 부처님노릇을 할 수 있으려면 중생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온 습관을 치열한 수행으로써 닦아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비유이다.

 

성철스님도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많은 글과 말을 남겼고 그 가운데에는 학술적으로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대목이 많지만, 수행자들에 대한 가르침으로서는 결국 그침 없이 열심히 수행하라는 얘기로 귀결된다.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표적으로 삼아 직격탄으로 가하는 이들은 그동안 불교에, 특히 선종에 구축되어온 제도의 틀 덕분에 선지식 대접을 받고 선지식 노릇을 하는 이들이다. 성철스님이 말하는 돈오돈수론의 요점은 자칭이건 타칭이건 선지식노릇을 하려면 깨달음을 이루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깨달음은 구경묘각(究竟妙覺), 성불의 깨달음이다. 본각의 이치를 지금 이 자리의 살림살이에서 그대로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어야 선지식노릇을 할 수 있다. 그러니 함부로 젠 체하지 말고 하염없이 겸손하고 치열하게 수행하라는 얘기이다. 성철스님이 생전에 누차 ‘가짜 선지식은 간판을 내리라’고 했다거나, 한 소식 한 체험을 가지고 점검 받으러 온 이들을 그거 다 아니라며 계속 더 열심히 수행하라고 물리쳤다는 일화들도 그런 취지를 말해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돈오돈수론을 지침으로 해서 이루는 깨달음과 돈오점수론을 지침으로 해서 이루는 깨달음이 과연 다른지 같은지 필자는 모르겠다. 그런 것은 세속학자가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수행자들이 직접 체험으로 알아볼 일이다. 어느 쪽을 지침으로 삼느냐에 따라 실제 수행하는 방법이나 양상이 필연적으로 다르게 되는지 어떤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그것도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어떤 수행방편이건 제게 알맞은 것을 제 분수대로 치열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터이다. 다만 성불 미만의 목표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두 가지 가르침의 공통점이다.

 

성불 미만의 그 어떤 경지에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들고 수행한다면, 잠깐잠깐 예불하거나 참선하거나 선행을 하고는 뭔가 해냈다는 뿌듯한 기분을 도무지 가질 수 없을 터이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데 도대체 왜 나는 지금 부처로 살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자성(自省)이 늘 고개를 우뚝 들고 있는 한 도저히 수행을 쉴 수가 없을 터이다. 돈오점수론이건 돈오돈수론이건 수행에 임하는 이들에게 바로 그런 치열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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