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돈오돈수론의 돈오와 돈오점수론의 돈오는 다른 개념이며, 돈수와 점수가 반대말인 것도 아니라는 얘기를 했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일차 목적인 설법이라 할지라도 그 말, 그 개념 자체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거기에 담긴 사상의 체계를 그려본다거나 계보를 따져본다거나 하는 등등의 일도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학술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설법도 학자들에게는 받들어야 할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분석할 자료이다. 목사님들의 설교나 신부님들의 강론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 설법을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입장, 즉 수행자나 신자의 입장에서는 그 방편이 가리키고자 하는 뜻을 알아듣는 것이 중요하다. 낙처(落處), 즉 그 가르침이 떨어지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돈오돈수론을 지침으로 해서 이루는 깨달음과 돈오점수론을 지침으로 해서 이루는 깨달음이 과연 다른지 같은지 필자는 모르겠다. 달리 말하자면, 그 두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 같은 달인지 각자 다른 달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을 지침으로 삼느냐에 따라 수행하는 양상이 필연적으로 다르게 되는지 어떤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은 수행자들이 직접 체험을 하든지 실험을 하든지 해서 점검을 할 일이지 개념분석이나 이론으로 따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성철스님과 지눌스님이 선사(禪師)로서는 흠이 될 만큼 장광설을 풀어내는 수고를 감수하며 그야말 로 “눈썹이 세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입 아프게 말하고자 한 공통된 당부 하나쯤은 누구나 알아들을 만하다.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지눌스님의 글, 특히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나 수심결(修心訣) 같은 것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동료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수행에 매진토록 분발케 하려는 의도가 절절하게 나타난다. 정법(正法)이 쇠퇴한 말법(末法) 시대라 깨달아 성불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내생에 좋은 데 태어나기 위해 좋은 업을 쌓거나 극락에 가기 위해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부르는 데 힘쓰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대상이다. 이에 대해 지눌스님은 우선, 선정(禪定)을 닦아 성불한다는 최상승(最上乘)의 법문을 그대가 만난 것은 전생에 이미 오랫동안 인연을 쌓아온 덕분이요, 그것만으로도 그대가 최상근기(最上根機)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추켜세운다. 말법시대니 어쩌니 하는 것은 하근기(下根機)를 위한 임시방편의 가르침이니, 이미 선법(禪法)을 만난 최상근기로서는 거기에 매달려 내생에 좋은 데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할 일이 아니라 성불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불, 경(經) 공부, 선행(善行) 등도 해로운 건 물론 아니고 수행자가 마땅히 할 만한 일이지만, 그렇게 밖으로만 구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아 그 진상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선법에 의하면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님이니 바로 그 진상을 깨닫는 것이 성불이다. 그것은 이미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다 가르쳐준 진상이니 이를 굳게 믿고 분수에 따라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물러서느냐, 최상근기로서 최상이 아닌 수행에 매달리는 것은 비겁하고 나약한 짓이며 조상(부처, 조사)에 대한 배반이라고 말하면서 어르고 달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론도, 지눌스님의 돈오점수론도 다 방편설법이라는 얘기도 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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