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종교라든가 고대종교와 비교되는 고전종교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유태-기독교 전통에서는 세상 모든 것을 만든 주인이 따로 있고 자신도 피조물인 줄 모른 채 창조주를 배반하고 주인노릇을 하며 살려는 것이 문제요, 유교나 도교 등 중국의 고전종교에서는 세상의 궁극적인 이치인 도(道)를 모르고 소인배로 살아가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모두가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한 연기적(緣起的)인 존재임을 모르고 아집(我執)을 부리며 살아가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세상의 궁극적인 진상에 입각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고전종교의 이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며 당연시하는 삶의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큰 차이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이다. 불교의 용어를 쓰자면 세간적(世間的)인 삶과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삶의 차이이다. 우리는 출세간적인 진상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받들며 살고자 하여도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 쉽게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아무리 노력해도 어렵다. 고전종교들이 제시하고 지향하는 거룩한 삶의 이상은 가히 절대적이다. 내 존재의 모든 것을 거기에 걸 것을 요구한다. 모든 시간과 관심과 행동을 그것으로 수렴시키기를 요구한다. 심지어, 개인에게는 절대적인 목숨까지도 그 이상 앞에서는 절대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고전종교에는 순교(殉敎)라는 현상이 있다. 물론,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모든 시간과 관심과 행동을 그 이상(理想)으로 수렴시킨다는 것만도 해내기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 한 개별 생명체로 태어나 꾸려나가는 살림살이의 현실이 그것을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종교에서는 원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의 적당한 타협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을 변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또 타협 없이 궁극적인 이상을 들이민다. 그러니, 이상에 충실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매순간이 고통스러운 참회거리여야 한다.
어느 스님과 얘기하는 가운데, 돈오돈수론이건 돈오점수론이건 한마디로 하자면 모든 중생을 부처님으로 섬기라는 뜻이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내가 이미 부처님’이고 ‘중생이 모두 부처님’이라는데, 바로 지금 당장 부처님으로서 살지 못하고 중생을 부처님으로 모시며 살고 있지 못하다면 정직하게 참회하며 괴로워해야 한다. 돈오돈수론은 바로 그런 질책이다. 선(禪)은 그처럼 지금 당장 부처님으로서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섬기며 살라는 가르침을 절대절명의 비수로 우리의 목 줄기에 들이댄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시하며 추구하는 가치를 그대로 궁극적인 가치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 거리로 본다는 데 있다. 표현하는 말은 다 다르지만 이를테면 세속에 파묻혀 살며 그게 다인 줄로만 알고 더 큰 안목으로 세상과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그래서 세상의 큰 진상을 알지 못하고 소아(小我)를 붙들고 아끼며 살아가는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본다.
이런저런 군소리 변명 늘어놓지 말고, 내가, 중생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명제의 비수로 지금 당장 목을 찌르라는 질책이다. 한편 돈오점수론은 그나마 현실을 좀 감안하면서 격려해주는 분위기이다. 현실적으로는 힘들다고 생각되겠지만 사실상 마음먹기에 달렸을 뿐이니 물러서지 말고 노력하면 된다고 부추기고 다독인다. 분위기가 좀 친절하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라는 대목은 역시 날카로운 칼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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