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상(禪思想)
목차
선사상이란 무엇인가?
초기불교(初期佛敎)의 선정수행(禪定修行)
선사상(禪思想) - 성본스님
선의 역사
선어록이란 무엇인가?
좌선의
선사상이란 무엇인가?
1. 선의 어원
선은 인도에서 발생한 유일한 사유법인 `요가(yoga)'에서 발전한 것으로 부처님이 불교를 개창한 이래 불교 수행자들은 선을 통해 해탈의 길을 걸어왔다. 선이 인도에서만 발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성본스님은 그의 저서 〈선사상〉에서 몬순의 계절풍 영향을 받은 우기지역에 자리한 인도의 지리적 특성에서 찾고 있다. 즉 4월부터 3~4개월간 많은 비가 내리는 우기(雨期)에 유행을 금지하고 한 곳에 안거(安居)하며 수행토록 했는데 불교에서는 이 기간을 하안거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선은 굳게 뿌리를 내리며 발전을 거듭해왔다.
선은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ana)와 팔리어 쥬안(jhan)의 음역이다. `디야나'는 중성명사형인데 이 말의 동사 어근인 `dhyai'의 의미는 `심사(沈思)하다' `숙고(熟考)하다'라는 말이다. 중국에 들어와 고요한 사유(靜慮), 종교적 명상(定), 직관(思惟修)등으로 풀이됐으며 한역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의 정(定)은 원래 사마디(三昧 samadhi)로서 `집중하다'를 뜻하는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며 하나의 대상에 주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등지(等持)라고도 의역한다.
부처님의 성도는 바로 선정에 의해서 관찰된 법의 깨달음으로 성취됐다고 말해진다. 〈불교대사전〉(홍법원간)의 풀이에 의하면 선은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혼란해짐을 막고 지혜를 몸에 배게 해서 진실의 이치로 나아가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2. 선의 유래
선사상(禪思想)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人)이 인도에 침입하기(BC 1300년경) 이전으로 생각된다. 인도 원주민의 것인 인더스문명(BC 2800∼BC 1800년경)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음. BC 2500년경)이나 석제의 흉상(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 BC 2000년경)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瑜伽]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 베다》(BC 1200∼BC 800 편찬)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카타카 우파니샤드》 및 《마이트라야나 우파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ahman:우주의 원리)과 아트만(嚆tman: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요가사상은 불교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三學:戒·定·慧), 사무량심(四無量心:慈·悲·喜·捨), 사념처(四念處:身·愛·心·法의 네 염처), 그리고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 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등이 모두 선(禪)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초선·제2선·제3선·제4선), 팔등지[八等至:사선+四無色定(空無邊處·識無邊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處)], 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사무색정+滅盡定)을 들고 있다. 부파(部派)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해설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상기한 원시불교의 9종 이외에, 삼등지(三等持:空등지·無相등지·無願등지), 식염관(食厭觀), 계차별관(界差別觀), 오정심관(五停心觀:不淨觀·慈悲觀·因緣觀·界分別觀·數息觀) 등인데, 그 공통의 특색은 ‘실재관(實在觀)’에 의해 고정화되었다는 점과,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즉 반야(般若)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리(自利)·이타(利他)를 삼매(三昧)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외도선(外道禪)·성문선(聲聞禪)·보살선(菩薩禪), 《능가경(楞伽經)》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외도·성문·연각의 선)·관찰의선(觀察義禪:法無我, 반야경의 空, 즉 객체는 모두 실체가 없다는 의미를 관찰하는 선)·반연여선(攀緣如禪:모든 분별을 떠남)·여래선(如來禪:일체중생의 구제에 전념하는 선정) 등과,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외도선·범부선(凡夫禪)·소승선·대승선·최상승선(最上乘禪) 등으로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 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때에 한국에 전래되어, 고려시대에는 9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하였고, 지눌(知訥)과 같은 고승을 낳았다.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 크게 보아 선종이라 할 수 있다.
3. 선사상
선은 불교의 정신을 배우고 직접 실천하여 각자가 스스로 진리를 체득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수행을 말한다.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각각의 시대와 인도나 중국, 한국 등의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점은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불교의 수행과 실천은 선이 중심이 되고 있었음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선은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를 각자가 직접 실천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선은 불교의 정신을 깨달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며 수행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사상도 시대의 변화와 지역적인 발전에 따라 다양화됨과 동시에 각각의 시대와 지역, 민족에 맞는 사상과 실천정신으로 발전시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에서 발전된 조사선(祖師禪)의 선불교가 형성된 점이라 하겠다.
사실, 오늘날 스즈키(鈴木)의 활약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불교(Zen-Buddhism)는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祖師禪)의 선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실천하고 있는 간화선(看話禪) 혹은 공안선(公案禪)도 조사선의 새로운 발전인 것이기에 우선 조사선의 선불교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선은 인도에서 발생되었지만 선불교의 선사상은 중국에서 완성된 것이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형성된 요가 명상이나 불교의 선정법(禪定法)이 아니라, 당대의 조사들에 의해 새롭게 완성된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중국에서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한 정신집중이 요가나 산란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뇌를 퇴치시키는 좌선의 실천적인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佛性)의 자각과 실천, 그리고 본래심의 지혜와 인격적인 덕성을 일상생활 가운데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로 발전시킨 것이다.
초기불교(初期佛敎)의 선정수행(禪定修行)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붓다의 修行과 成道
1. 붓다의 成道前 修行
2. 成道와 禪定
Ⅲ. 禪定修行에 대한 諸敎說
1. 禪定의 意義
2. 禪定說의 諸形態
3. 諸禪定說의 관계성
Ⅳ. 맺는 말
初期佛敎의 禪定修行
Ⅰ. 들어가는 말
불교는 해탈의 종교이다. 해탈(解脫)이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苦)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윤회와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진리를 구하고 종극(終極)에는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이다. 따라서 진리를 탐구하고 해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궁구(窮究)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믿고 의지하여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탈에 이를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는 불교사상(佛敎思想)의 주류(主流)와 그 역사적 상황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여러 길들이 제시되었고 받아들여져 왔으며, 그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이에 본고(本考)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띠는 수행도(修行道)의 근원, 즉 해탈도(解脫道)의 원초적 형태를 밝혀 보고자 한
다.
Ⅱ. 붓다의 修行과 成道
1. 붓다의 成道前 修行
붓다는 출가 이후 여러 사상가들을 만나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불전(佛傳)에는 당시의 대표적 선정자였던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다(Uddaka Ramaputta)에게서 각각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전수받은 사실만을 기술하고 있다.
《중아함(中阿含)》 <羅摩經>에는 붓다가 두 수승 밑에서 수행하는 장면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어 당시의 붓다의 태도와 수행과정에 대해 잘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는 <羅摩經>의 대응 니카야(Nikaya)인 김준호의 중부(中部) <聖求經> 번역을 인용한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말하자 알라라 칼라마는 나에게 말하기를 '존자여, 머물러라. 이 법(法)의 성격이 바로 그러한 것이니, 지자(智者)는 오래지 않아 스승과 같은 경지를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도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법(法)이다.' 비구들아, 그리하여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법(法)을 성취했다. 그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말로써만 지혜(智慧)를 얻었다고 말하고, 장로(長老)의 말을 흉내내어 '나는 지견(知見)하였다'라고 말하였다. 비구들아, 그때 나는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알라라 칼라마는 혼자만의 신념으로써 나는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도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참으로 이 법(法)을 지견(知見)해서 머물고 있다.' 비구들아 이렇게 해서 나는 알라라 칼라마의 처소에 가서 물었다. '존자여, 당신은 어떠한 정도로 이 법(法)을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도달하여 설하십니까?' 비구들아,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알라라 칼라마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선설(宣說)하였다. 비구들아, 그때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알라라 칼라라만 信(saddha)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신(信)이 있다. ……정진(精進, viriya) …… 염(念, sati) …… 정(定, samadhi) …… 慧(panna) …… 나 역시 혜(慧)가 있다.
이제 알라라 칼라마가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도달해서 머문다는 그 법(法)을 스스로 자증(自證)하도록 노력하자.' 비구들아, 이렇게 해서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법을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도달해서 머물게 되었다……."
(웃다카 라마풋다와의 대화 내용도 非想非非想處定을 제외하고는 위와 같음.)
위 경문(經文)에서 붓다는 알라라 칼라마와 같은 신(信)·정진(精進)·염(念)·정(定)·혜(慧)의 오력(五力)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確信)하고 분심(奮心)을 내어 스승과 같은 경지인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법(法)을 자지(自知)·자각(自覺)·자증(自證)하게 된다. 그러나 붓다는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 이유를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알라라 칼라마 스승의 경계와 같이 나도 또한 스승의 경계와 같아서 그것은 최상의 공경이요 최상의 공양이며 최상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이 법(法)은 지혜(知慧)로 나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열반(跡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이 법(法)을 버리고 다시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죽음·근심·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자'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곧 이 법(法)을 버리고…… 웃다카 라마풋다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에게 물었다……. 나는 또 `이 법은 지혜(智慧)로 나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열반(跡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위 경문(經文)에 의하면 붓다는 두 스승이 각각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단계에 머물러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법(法)에 의해서는 지혜(智慧, 正覺)와 열반(跡槃)으로 나아갈 수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두 스승의 법(法)의 한계를 인식한 붓다는 그들의 곁을 떠나 우루벨라 촌의 네란자라(Neranjara, 尼連禪河)강 근처에서 홀로 6년간 고행(苦行)을 닦았다고 한다. 경전은 다음과 같이 붓다의 고행(苦行)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때에 나는 외양간에 가서 송아지 똥을 보면 곧 그것을 집어 먹었고 송아지 똥이 없으면 소 똥을 집어 먹었다.…… 몸은 쇠약해서 뼈는 서로 맞붙고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겨 가죽과 살이 절로 떨어졌다.…… 내가 손으로 배를 만지면 곧 등뼈가 손에 대이고 또 등을 어루만지면 뱃가죽이 손에 대이었다.…… 나는 곧 모든 구멍의 숨길을 막았다. 모든 드나는 숨길을 막음으로써 곧 머리와 이마가 아팠다. 마치 어떤 사람이 송곳으로 머리를 쑤시는 것처럼 내 머리 아픔도 그와 같이 심하였다.…… 혹은 가시 위에 눕기도 하고 널빤지나 쇠못 위에 눕기도 하며…….”
위의 경문(經文)을 보면 당시 붓다가 얼마나 극심한 고행을 행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붓다는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할 정도의 극단적인 고행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고행을 통해서는 성현(聖賢)의 계율(戒律)·삼매(三昧)·지혜(智慧)·해탈(解脫)의 네 가지 근본법(根本法)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이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경전은 붓다가 고행을 포기하게 된 직접적 원인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붓다가 고행시(苦行時) '사선(四禪)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때에 나는 생각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도(道)를 성취하는 근본이 아니다. 반드시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기억한다. 옛날 내가 부왕의 나무 밑에 있을 때에 음욕(淫欲)과 음심(淫心)이 없어 온갖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버리고 첫째 선정(禪定)에 놀았고, 각(覺)과 관(觀)이 없는 둘째 선정(禪定)에 놀았으며, 보호하는 생각이 청정해 어떤 생각도 없는 셋째 선정(禪定)에 놀았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어 생각이 청정한 넷째 선정(禪定)에 놀았었다. 이것이 혹 그 길일는지 모른다. 나는 이제 그 길을 찾자.'라고"
위에 의하면 붓다는 사선(四禪)의 경지를 이미 출가(出家) 이전에 체험한 적이 있으며 사선(四禪)을 정각(正覺)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편, 팔리니카야 중부(中部) <살차가대경(薩遮迦大經)>에서도 붓다는 자신의 성도(成道) 과정을 설하면서, 과거 출가 이전에 석가족의 농경행사 때의 선정체험이 성도에 이르는 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이를 수행한 끝에 성도를 이루게 되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고행으로는 성현의 삼매와 아리안(ariyans)으로의 위없는 지혜에 이를 수 없다. 다른 깨달음에의 도(道)가 있을까?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석가족 부왕의 행사중에, 나는 근처의 염부수 그늘에 앉아서, 제욕(諸欲)을 떠나,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유심유사(有尋有伺)하고, 이(離)에서 생긴 희(喜)와 낙(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도달하여 머물렀던 것으로부터,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에의 도(道)일 것이다'라고 깨달았다. 아기베싸나여, 나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생겼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에의 도(道)이다'라고."
이와 같이 붓다가 성도(成道) 이전에 이미 선정(禪定)을 체험한 적이 있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6년간의 고행을 포기하고 수행의 새로운 방향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붓다의 성도를 가능케 한 가장 근본적인 수행의 원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리니카야 <살차가대경(薩遮迦大經)>에는 붓다가 초선의 경지를 체험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한역 아함에서는 제사선(第四禪)까지를 모두 체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경전의 작성, 편찬 시기가 다르며 후대에 사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또는 교리체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경전의 윤색이 가해졌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어痔든 붓다는 초선(初禪)의 경지를 이미 출가 이전에 체험했던 것 같고, 그러한 선정의 경험이 고행을 포기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2. 成道와 禪定
경전에 의하면, 고행을 포기한 붓다는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는 위없는 도(道)를 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먹고 체력을 회복하여 근처의 숲으로 가 보리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성도(成道)의 과정, 즉 붓다가 성도할 때의 수행법은 무엇이며 무엇을 깨달아 각자(覺者)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異說)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십이연기관(十二緣起觀)에 의한 성도, 팔정도(八正道)에 의한 성도, 사성제(四聖諦)에 의한 성도, 사선삼명(四禪三明)에 의한 성도, 오근(五根)에 의한 성도, 칠각지(七覺支)에 의한 성도, 오온(五蘊)의 여실(如實)한 관찰(觀察)에 의한 성도 등이다.
이처럼 성도의 과정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붓다가 상황에 따라 또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붓다의 성도 과정에 대한 여러 이설(異說)에도 불구하고 그 성도의 근저에는 선정수행(禪定修行)이 바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위와 같은 깨달음의 내용들이 모두 선정의 수습에 의해 여실히 관찰되고 체달(體達)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붓다가 어떻게 선정(禪定)에 의거하여 성도(成道)하였는지 그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증일아함(增一阿含)》 <증상품(增上品)>을 살펴보면,
"나는 그 위에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었다. 그때에 나는 탐욕이 풀리고 온갖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없어지고 다만 각과 관이 있어 마음이 첫째 선정에 놀았고 다음에는 각과 관이 모두 없어져 마음이 둘째·셋째 선정에 놀았으며, 보호하는 생각이 청정해지고 근심과 기쁨이 모두 없어져 마음이 넷째 선정에 놀았다. 그때에 나는 이 청정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가 없어지고 두려움이 없게 되어 과거에 무수히 변해 내려온 전생 일을 알았다. 나는 곧 스스로 무수한 세상일을 기억하였다. ……또 나는 청정하여 흐림이 없는 하늘 눈으로 중생들의 나는 이와 죽는 이, 좋은 세계와 좋은 몸, 나쁜 세계와 나쁜 몸, 혹은 좋고 추한 것은 모두 그 행의 근본을 따른다는 것을 관찰해 알았다. ……그래서 나는 청정하여 흐림이 없는 삼매의 마음으로 번뇌가 다하고 번뇌가 없게 되어, 마음이 해탈하고 지혜가 해탈하였다. 그래서 나고 죽음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태를 받지 않을 줄을 여실히 알고 곧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었느니라."
위의 경문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과정을 도식화해 보면 사선성취(四禪成就) → 삼명획득(三明獲得) → 해탈지견(解脫知見)의 구조로 나타낼 수가 있다. 한편 《중아함》 <염경(念經)>9)에서도 사선성취(四禪成就) → 삼명획득(三明獲得) → 사성제여실지견(四聖諦如實知見) → 해탈(解脫)의 경로에 의해 성도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어 선정(禪定, 四禪)이 성도의 필수적 요소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선정이 성도의 중요한 계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선정 자체가 해탈은 아니라고 본다. 즉 제 사선(第四禪)의 경지에서 나아가 일체(一切)를 직관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되어 진리(十二緣起, 四聖諦)를 여실지견(如實知見)할 때 비로소 해탈이 성취되는 것임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3. 禪定修行에 대한 諸敎說
1. 禪定의 意義
1) 선정의 의미
선정은 수도상 항상 그 중심이 되는 것으로 불교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수행법이다. 선정을 나타내는 말은 Pali어로는 samadhi(定, 定意, 三摩地, 等持, 正受), jhana(禪, 禪那, 精慮, 思惟修), samapatti(定, 三摩鉢底, 等至), samatha(止, 奢摩他), cittekaggata(心一境性), yoga(瑜伽) 등이 있다. 이들 중 jhana는 선(禪)·선나(禪那)·태연나( 衍那)·지아나(持阿那)라고 음사(音寫)되며, 구역(舊譯)에서는 사유수(思惟修)·사유수습(思惟修習)·기악(棄惡)·공덕총림(功德叢林) 등으로, 신역(新譯)에서는 정려(精慮)로 번역되는데 사유수(思惟修)와 정려(精慮)가 원어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보고 있다.
위에 의하면 선정은 jhana의 음사어인 선(禪)과 samadhi의 번역어인 정(定)이 결합된 말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어원을 살펴보면 보다 명확한 선정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jhana(禪)는 그 어원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jhayati와 jhapeti가 그것이다. jhayati는 '생각하다(think upon)', '명상하다(to meditate)', '불태우다(to burn)'의 뜻이고, jhapeti는 '불태워 버리다(burn up)', '불을 놓다(to set fire to)', '요리하다(to cook)'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불태워 버리다'라는 것은 집중과 통찰을 방해하는 '정신적인 더러움'을 불태워 없앤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samadhi(定)의 어원은 sam-a-dha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어근 dha는 '마음이나 주의를 (대상으로)향하게 하거나 고정시키는 것', '숙고하다'라는 뜻이므로 '마음의 통일 또는 집중'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와 같이 jhana와 samadhi는 공통적으로 '명상', '마음의 집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역 아함에서는 선(禪)과 정(定)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jhana와 samadhi는 분명히 의미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Pali-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jhana는 결코 막연히 명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정신 상태의 특정 단계에 도달하는 특별한 종교적 경험에 관한 기술적 용어라는 것이다. 반면 samadhi는 '집중 집중된, 침착한, 여념이 없는 마음·명상의 상태'라고 설명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선(禪)은 선정수행의 과정적인 면을, 정(定)은 선정수행상의 의식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2) 선정(禪定)의 목적과 의의
앞에서 선정이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붓다가 수행자들에게 이러한 내적 통찰의 수행을 강조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禪定)을 닦아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비구는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혀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 참다이 관찰(觀察)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참다이 관찰하는가. `이것은 色이다. 이것은 색(色)의 모임이요, 이것은 색(色)의 멸함이다. 이것은 애(受)·상(想)·행(行)·식(識)이다. 이것은 그것들의 모
임이요. 이것은 그것들의 멸함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니라…… 참다이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느낌을 즐겨하고 집착하여 잡음[取]이 생긴다. ……어떤 것이 색의 멸함이며, 수·상·행·식의 멸함인가.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모든 괴롭고 즐거우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으면, `이것은 느낌의 모임이요 느낌의 멸함이며 느낌의 맛이요 느낌의 근심이며 느낌을 떠남이다'라고 참다이 관찰하나니 참다이 관찰하기 때문에 느낌에 대한 즐거움과 집착이 멸한다. ……그러므로 비구는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히어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한다.
비구가 선정에 머물러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 꾸준히 힘쓰고 방편을 쓰면 참다이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니라."
위의 경문에서 붓다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오온의 이미지에 대해 참다이 관찰하지 못하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다문성제자(多聞聲弟子)들은 선정수행으로써 의식의 연기적 발생과정을 참다이 관찰(如實觀察)하여 집착이 멸하고 마침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붓다는 비구들에게 선정수행을 힘써 닦아 그 마음의 고요함을 성취하면 십이연기와 사성제(四聖諦)의 진리가 참다이 밝게 나타난다고도 설한다. 이와 같이 선정수행의 목적은 존재의 요소(五蘊 色·受·想·行·識)와 그것의 생멸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을 여실히 관찰하는데 있으며 수행자들은 끊임없는 내적 통찰 수행으로 여실지견을 성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여실관찰(如實觀察)은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지혜(智慧)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그 직접적 원인이 무엇이었든 선정중의 일이었고 성도 후에도 붓다는 항상 선정수행을 계속한 것을 경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입멸시(入滅時)에도 제사선(第四禪)에서 반열반(般跡槃)하였다고 하니 초기 불교에 있어 선정수행의 중요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초기 불교 당시 수행승들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선정수행의 비중을 잘 알 수 있다. 비구(比丘)들의 정명(正命)으로서의 일상은, 하루를 네 시간 단위로 구분하여 비구가 잠을 자는 시간은 중분(中分, 밤 10시부터 새벽 2시) 4시간뿐이고, 후분(後分, 새벽 2시에서 6시)에는 일어나 좌선(坐禪)에 힘쓰고 조분(朝分, 오전 6시에서 10시)에는 선정에서 나와 세면·청소·탁발(托鉢) 등을 행하고, 오분(午分, 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에는 오전까지 식사를 마치고 식후의 휴식 및 좌선을 행하며, 석분(夕分, 오후 2시에서 6시)에는 좌선을 하거나 또는 저녁에 좌선에서 나와 다른 비구들이나 신자들을 위한 설법을 하고 초분(初分, 저녁 6시에서 10시)에는 다시 좌선에 힘쓰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승들의 일상생활은 대부분이 선정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당시 수행승들이 남긴 아름다운 시를 통해 더욱 생생하고 선명한 선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바람이 불어 대지는 서늘해지고 하늘에는 번갯불 빛난다. 어지러운 마음 거두어들이니 내 마음 고요하여라.
새들이 통로, 비에 싸인 하늘에 우레 소리 요란할 때, 비구는 홀로 산동에 들어가 고요히 선정에 잠긴다 -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꽃들은 피고 풀빛은 산뜻한데, 무화과나무 무성한 냇가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혀 선정에 잠긴다 -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깊은 밤, 고요한 숲속에 비가 내리고 짐승들이 포효할 때, 비구는 홀로 산굴에 들어가 고요히 선정에 잠긴다.
건강을 기뻐하고, 고뇌를 없애고, 장애가 없고, 욕심이 없고, 괴로움이 없고, 모든 번뇌를 멸하여 고요히 선정에 잠긴다 -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선정수행 자체가 깨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정에 의한 참다운 관찰 그리고 여실지견(如實知見)이 성취되었을 때 비로소 선정이 완결된다고 생각된다. 또한 철저한 계율수행이 함께 할 때 진정한 선정수행이 가능하리라 본다. 어痔든 초기 불교의 수행도에서 선정수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모든 수행의 기초가 되었으며 정각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3) 선정(禪定)의 예비적 수행
선정(禪定)은 수도상 항상 그 중심이 되었으며 선적(禪的) 사유(思惟)를 통해서만이 참다운 해탈의 수양이 가능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붓다는 선정수행에 있어 수행자들이 갖추어야 할 예비적 수행덕목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하고 있다. 이들은 경전마다 조금씩 그 내용이 다르며 체계적으로 정리된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붓다가 제시한
선정의 예비적 수행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중아함경(中阿含經)》 <상적유경(象跡喩經)>을 보면 붓다는 수행자가 출가하여 범행을 닦아 해탈지견(解脫智見)을 성취하기까지의 구도과정을 상세히 설하고 있다. 그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에 대한 믿음 → 지극한 신심(信心)에 의한 출가(出家) → 계(戒)의 구족(具足)과 성취(成就) → 지족(知足)의 행(行) → 제근(諸根)의 수호(守護) → 수행승의 위의(威儀)/정명(正命)에 대한 정지(正知) → 원리독거(猿離獨居) → 오개(五蓋)를 끊음 → 사선(四禪) 성취 → 해탈지견(解脫知見)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문을 살펴보면 본격적으로 선정이 실수되어지는 것은 원리독거의 단계부터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전 과정까지를 선정의 예비적 수행덕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수행승으로서의 바른 생활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선정과 지혜의 구족을 가능케 해 주는 중요한 수행덕목으로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禪定說의 諸形態
우리는 앞에서 선정수행이 초기 불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보편적 실천 수도법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실 선정(禪定, 坐禪)이 어떤 방법으로 실수되었고 마음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선정의 자세에 관한 가장 전형적인 서술인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몸을 바로 하고 마음을 바로 하여 선정에 든다"라는 대목만으로 선정의 모습을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초기 경전에 나타난 여러 선정의 종류와 내용을 고찰하여 선정 수행의 구체적 실천방법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불교 선정의 종류는 각각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지관(止觀)·삼삼매(三三昧)·사무량심(四無量心)·사념처(四念處)·팔해탈(八解脫)·십상(十想)·십편처(十遍處)·십념(十念)·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들 다양한 선정법(禪定法)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붓다가 제자들에게 설한 선정 수행의 구체적 내용과 그 의미를 파악해 볼 것이다.
1) 사선·사무색정·멸진정
초기 불교의 선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 등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 수행도(修行道)이다. 이들 선정설(禪定說)을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사선(四禪, Cattari jhanani)
사선(四禪)은 초선(初禪)·이선(二禪)·삼선(三禪)·사선(四禪)의 네 단계의 선정을 총칭하는 말로서, 선정의 단계 구분은 정신의 통일 상태가 점차 깊고 고요하게 되어 가는 정도에 따른 것이다. 사선(四禪)의 연원에 관해서는 당시 선정가들의 영향을 받아 불교가 채용한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붓다의 독창적 선관(禪觀)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사선(四禪)은 붓다 성도의 직접적인 계기로 묘사되기도 하고, 붓다가 반열반(般跡槃)에 들 때에도 사선에 의거했을 정도로 초기 불교에 있어서 선정수행의 중요한 하나의 방식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사선의 전형적인 서술 방식을 보여 주는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사법(四法)이 있다. 이른바 사선(四禪)이다. 이에 비구는 욕악불선(欲惡不善)의 법(法)을 없애고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으면서 떠남에서 생기는 희락(喜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간다. 각관(覺觀)이 멸하고 내신(內信)의 일심(一心)으로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으면서 정(定)에서 생긴 희락(喜樂)이 있는 제이선(第二禪)에 들어간다. 기쁨을 떠나 평등을 닦아 생각이 나아가 스스로 몸의 즐거움을 알고 모든 성인이 구하는 바 억념사락(憶念捨樂)이라 부르는 제삼선(第三禪)에 들어간다. 고락(苦樂)의 행(行)을 떠나고 먼저 걱정과 기쁨을 멸해 기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 생각을 버려 청정하여 제사선(第四禪)에 들어간다."
경문(經文)을 보면 초선(初禪)의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의 장애가 끊어지고 마음을 선정의 대상에 집중하여 마침내 감각적 욕망이 없어지고 불선법(不善法)을 떠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아직 대상에 대해 분별하고 사려하는 마음이 있어 고요히 가라앉지 못하는 단계다. 제이선(第二禪)에서는 각(覺)과 관(觀)이 없어져 분별적인 사유작용이 그치고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게 되어 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제삼선(第三禪)에서는 제이선(第二禪)에서 생긴 희락(喜樂)의 감정까지도 버리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로써 신체가 가볍고 편안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끝으로, 제사선의 단계에 와서는 신체의 편안함까지도 사라지고 완전히 고락(苦樂)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이 더욱 순화(純化)되어 부동(不動)이 되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정형화된 서술방식과는 다른 사선(四禪)의 형태를 보여 주는 자료도 있는데 김준호는 <원시불교의 선정설 연구>27)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中阿含》 卷60, <五下分結經> (大正 1, p.779c) 初禪成就遊. 彼依此處觀覺興衰. 彼依此處 觀覺興衰已. 住彼必得漏盡.
① 사선(四禪)은 무상(無常)하여 멸하는 법[有爲法])
② 사선(四禪)의 각 단계에서 일체법(一切法)을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 등으로 관찰할 것.
③ 사선에 의해 생기는 악(惡)에서 벗어난 희열(喜悅)에 집착하지 않을 것.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사선(四禪)의 구체적 내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사선(四禪) 각 단계의 희락(喜樂)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의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실상(實相)을 끊임없이 관찰하여 정각(正覺)을 성취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사무색정(四無色定, Catur aruppa samapati)
사무색정(四無色定)의 네 가지 선정(禪定)은,
① 공무변처(空無邊處, akasanancayatana)
the stage of infinity of space
②식무변처(識無邊處, vinnanancayatana)
the stage of infinity of perception
③무소유처(無所有處, akincannayatana)
the stage of nothingness
④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nnanasannayatana)
the stage of neither ideation nor non-ideation
위와 같은 네 가지 처(處, Ayatana)에서 행해진다. 이것은 각각 '허공(虛空)과 같은 무한한 장소', '인식(認識)과 같은 무한한 장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장소', '의식(意識)도 무의식(無意識)도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사무색정의 내용을 경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는 일체(一切)의 색상(色想)을 넘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염(念)하지 않으며 한량없는 공(空)인 이 무량(無量)한 공처(空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비구는 일체의 무량한 공처를 넘어 한량이 없는 식(識)인 무량(無量)한 식처(識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넘어 무소유(無所有)인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비구는 일체의 무소유처를 넘어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인 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 마음은 안에서 머무르는 것이오."
경문(經文)을 통해 볼 때,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란 일체의 물질관념을 타파하고 단지 끝없는 공간만을 염(念)하여 마음을 집중시키는 상태이다.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이란 공처(空處)의 심경을 더욱 진전시켜 식이 무변하다는 사실을 염(念)하여 식(識) 중에 일어나는 차별상을 제거하는 수행이다.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서는 공간도 식도 초월하여 일체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상태에 도달한다. 마지막으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란 일체 공(空)이라고 하는 상(想)까지도 뛰어넘어 상(想)도 없고 무상(無想)도 없는 데까지 수련을 진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붓다에 의해 이미 비판되었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 불교의 선정법으로 채용되고 사선과 함께 대표적 선정 체계를 이루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것은 아마 당시에 행해지던 선정의 의미와는 다른 관점에서 붓다가 수행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사무색정(四無色定)은 원래 사선(四禪)과는 별개의 수행방식이었으나 후대에 선정법이 체계화되면서 점차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의 결합된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3) 멸진정(滅盡定)
멸진정(滅盡定, nirodha samapatti)은 상수멸정(想受滅定, sannavedayita)이라고도 하는데 이 선정의 단계에서는 수(受)와 상(想)의 작용이 멸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하게 되면 감각기관을 통한 느낌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즉 대립 분별적인 심작용인 상(想)과 고(苦)를 일으키는 원인인 수(受)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멸진정(滅盡定)은 수(受)와 상(想)이 완전히 멸한 경지로 죽은 사람의 상태와 비슷하나 이 정(定)에 들어간 사람은 오근(五根)이 그대로 갖추어져 있고 온기(溫氣)가 사라지지 않으며 생명(生命)이 붙어 있다는 점에서 사자(死者)와는 다르다고 한다. 또한 불교 외에서 최고의 경지라고 여겨지는 무상정(無想定)과는 달리 멸진정에서는 생각[想]과 알음[知]이 완전히 멸
(滅)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의 체계 위에 멸진정(滅盡定)을 부가하여 구차제정(九次第定)의 형식으로 서술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외도의 선정에 대해 우위를 보이기 위해 후대에 멸진정(滅盡定)이 부가·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어째든 구차제정(九次第定)은 초기 불교의 선정설 가운데 가장 발달된 체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장아함(長阿含)》 <십상경(十上經)>에는 구차제정 각지(各支)에서 멸하는 요소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선(初禪)=:소리가 멸함
=이선(二禪)=:각(覺)과 관(觀)이 멸함
=삼선(三禪)=:희(喜)가 멸함
=사선(四禪)=:호흡(呼吸)이 멸함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색상(色想)이 멸함 -50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공상(空想)이 멸함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식상(識想)이 멸함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무소유상(無所有想)이 멸함
=멸진정(滅盡定)=:상(想)과 수(受)가 멸함
2)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ana-apana-sati)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은 안반념(安般念), 또는 간단히 줄여 안반(安般)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정신통일을 이루게 되는 수행법을 말한다. 다음의 경문(經文)을 통해서 구체적인 수행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 <1> "나는 이 두 달 동안 아나아파아나를 계속 생각하면서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숨이 들어올 때에는 숨이 들어온다고 생각하여 참다이 알고, 숨이 나갈 때에는 숨이 나간다고 생각하여 참다이 알며, 혹은 길거나 짧거나 일체 몸에 숨이 들어온다고 깨닫는 생각을 참다이 알고, 일체 몸에 숨이 나간다고 깨닫는 생각을 참다이 알고, 몸의 행에 들어오는 숨이 그
쳤다는 생각을 참다이 알고, 나아가서는 나가는 숨이 멸하였다는 생각을 참다이 알았다."
<2> "혹 어떤 비구는 몸과 뜻을 바로 하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아나아파아나를 생각한다. 즉 이른바 아나아파아나란, 만일 숨이 길 때에는 `나는 지금 숨이 길다'고 관해 알고, 만일 숨이 짧으면 `나는 지금 숨이 짧다'고 관해 알며, 만일 숨이 매우 차가우면 `나는 지금 숨이 차갑다'고 관해 알고, 만일 숨이 뜨거우면 `나는 지금 숨이 뜨겁다'고 관해 안다. 그리고 머리에서 발에까지 온몸을 두루 관해 안다. 만일 숨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면 `숨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고 관한다. 마음을 쓰고 몸을 단속해 숨의 길고 짧음을 모두 알며, 숨의 나고 찾아 분멸해 환히 안다."
위의 경문에서 알 수 있듯이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은 호흡을 면밀히 관찰하여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이다. 이와 같은 안나반나념을 수행하면 큰 결과의 복된 이익이 있다고 하는데 그 여러 효과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율을 배워 가짐
소욕소사소무(小欲小事小務)
음식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음
잠에 빠지지 않음
한적한 곳에서 모든 시끄러움을 떠남
몸이 피로하지 않음
눈은 대상을 싫어하거나 즐겨하지 않음
관을 따라 즐거이 머뭄
신통을 이룸
사문과를 얻고 열반에 이름
사념처를 만족케 함
한편, 안나반나념 수행을 통해 사선정(四禪定), 사무색정(四無色定) 사무량심(四無量心)을 구족할 수 있다고 설하는 경문도 있으며, 안나반나념을 수행한 결과 사선(四禪)·삼명(三明)을 얻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앞의 자료 <1>에서 붓다가 일체의 외부의 출입을 삼가고 두 달 반 동안 안나반나념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안나반나념은 모든 선정수행의 기초적인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 이상의 비중을 가졌던 중요한 수행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사념처(四念處, Cattari satipatthanani)
사념처(四念處)는 사념주(四念住)·사의지(四意止)·사념(四念)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네 가지 관찰 대상인 몸[kaya, 身], 감정[vedana, 受], 마음[citta, 心], 마음의 대상[dhamma, 法]을 명상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사념처 각지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중아함》 <염처경(念處經)>에 자세히 설해져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념처(身念處)는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명상의 포인트로 삼는다. 즉 호흡의 생멸이나 행주좌와(行住座臥)의 일상적인 움직임, 몸의 불결한 구성성분등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관찰 대상만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방식이다. 곧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미세한 움직임들을 항상 깨인 의식으로 자각하는 수행을 말한다. 수념처(受念處)는 외부 대상에 대해 일어나는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정 그리고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감정[樂受·苦受·不苦不樂受]에 주목해서 마음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심념처(心念處)는 이러한 고락(苦樂)의 감정이 발생한 후에 등장하는 다양한 심리적 반응들, 즉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괴로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침울한 마음, 평정한 마음작용 등을 가만히 거리를 두고 내관하는 것이다. 법념처(法念處)는 육입처연기(六入處緣起)를 통해 7일어나는 번뇌나 다섯 가지 수행의 장애인 오개(五蓋),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인 칠각지(七覺支) 등을 관찰 대상으로 한다.
이상에 의하면, 사념처 수행은 몸과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 욕망, 이미지들을 조건에 따라 생멸 변화하는 현상으로 면밀히 내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육체와 의식현상의 내적 전개 과정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게되면 아라한과를 얻거나 구경의 지혜를 얻게 된다고 붓다는 설하고 있다.
4) 지관(止觀, Samatha-vipassana)
초기 불교의 선정법 가운데 관법의 대표적인 것으로 지관을 들 수 있다. 지관의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Smatha(止)는 동사 sammati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sammati는 영어의 to be appeased, calmed(마음을 진정하다, 가라앉히다), to be cease(그치다), to rest(쉬다), to dwell(오래 머무르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Samtha는 `마음의 고요, 평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Vipassana는 vi와 passati가 결합된 용어로서, vi는 영어의 duality(二元) 또는 separation(分離)의 뜻이고, passati는 영어의 to see(보다) 또는 to find(발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Vipassan은 `분간(分揀)해서 본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분간한다는 것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모든 현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분간한다는 뜻이고, 본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관(直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음의 경문들을 살펴보면 지(止)와 관(觀)의 의미가 좀더 명확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비구가 지(止)를 얻으면, 곧 계율을 성취하여 위의를 잃지 않으며, 금하는 행위를 범하지 않아 온갖 공덕을 지을 것이다. 만약 비구로서 다시 관(觀)을 얻으면 고(苦)에 관하여 여실히 알고, 고(苦)의 쌓임과 고(苦)의 사라짐과 고(苦)를 벗어나는 길을 관하여 여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관함으로써 …… 해탈의 지혜를 얻는다.
이 경에 대응하는 팔리니카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를 닦으면 어떠한 이익이 있는가. 마음이 계발된다. 마음이 계발됨으로 해서 어떤 이익이 있는가. 모든 욕망이 포기된다. 비구들이여, 관을 닦으면 그것은 또한 어떤 이익이 있는가. 통찰력이 계발된다. 통찰력이 계발되면 그것은 또한 어떤 이익이 있는가. 모든 무명이 사라진다.……"
이상(以上)을 통해 볼 때 `지(止)한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모든 조작적이고 취착하는 행을 그쳐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임을, `관한다'고 하는 것은 지의 수행을 토대로 하여 존재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경전에서는 지와 관의 관계에 대해, `지(止)를 닦아 익히면 마침내 관(觀)을 이루게 되고, 관(觀)을 닦아 익히고 나면 또한 지(止)를 이루게 된다.' 라고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지와 관은 상호 보완적인 불리(不離)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선정 수행자는 끊임없는 지관구족(止觀具足)의 수행을 통해 존재를 여실지견(如實知見)하여 무명을 타파하고 궁극의 해탈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5) 삼매(三매 , Samadhi)
경전(經典)에는 선정의 한 형식으로서 삼삼매(三三매)와 사종삼매(四種三매)가 설해져 있다. 붓다는 이 삼매(三매)의 수행을 열반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법(法)이라고 설하고 있다. 삼삼매(三三매)란 공삼매(空三매), 무상삼매(無相三?=無想三?), 무원삼매(無願三?=無作三?)의 세 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삼매(空三 )란 모든 법은 공(空)하다고 관하는 것이고, 무상삼매(無想三?)란 모든 법이란 전혀 생각할 것도 볼 것도 없다고 관하는 것이고, 무원삼매(無願三?)란 모든 법을 원하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특히 붓다는 모든 삼매 중에서 가장 수승한 삼매는 공삼매(空三?)이며 이를 왕삼매(王三?)라고 칭찬하고 있다.
다음으로 사종삼매(四種三?)란 무량(심)삼매(無量三?), 무상(심)삼매(無相三?), 무소유(심)삼매(無所有三?), 공(심)삼매(空三?)를 말한다. 무량심삼매(無量心三?)란, 사랑하는 마음으로 원망도 없고 미움도 없고 성냄도 없어, 너그럽고 넓고 무거운 마음으로 한량없이 닦아 익히고 두루 인연해 사방(四方)·상하(上下) 모든 곳에 충만하고 일체세간에 두루 인연해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무상심삼매(無相心三?)란 일체 모양을 생각하지 않아서 무상삼매를 몸으로 증득하는 상태이다. 무소유심삼매(無所有心三?)란 이른바 일체 한량이 없는 식입처(識入處)를 건너 소유가 없이 소유가 없는 마음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공심삼매(空心三?)란 세상이 공한 것을 세상이 공하다고 여실히 관찰하고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것은 `나'도 아니요 `내것'도 아니라고 관하는 것이다.
삼삼매(三三?)와 사종삼매(四種三?)는 무량심삼매(無量心三?)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사한 체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삼매(三?)의 체계 중에서 공(空), 상(相), 원(願=所有) 등의 개념은 사무색정(四無色定)의 공(空), 식(識), 무소유(無所有),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등의 개념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6) 사무량심(四無量心, Catasso appamannayo)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네 가지 무량한 마음 곧 자무량심(慈無量心)·비무량심(悲無量心)·희무량심(喜無量心)·사무량심(捨無量心)을 지칭하는 말로서 사범실(四梵室)·사범당(四梵堂)·사등심(四等心)·무량심해탈(無量心解脫)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경문(經文)을 통해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다야, 나는 이전에 너를 위하여 사무량심을 설명하였다. 비구는 마음이 사랑과 함께 하여 일(一)방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닐고 이렇게 이(二)·삼(三)·사방(四方)·사유(四維)·상하(上下)의 일체(一륀)에 두루하여 마음은 사랑과 함께 하기 때문에 맺음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어, 지극히 넓고 매우 크고 한량없이 잘 닦아 일체세간에 두루 차서 노닌다. 이렇게 비희(悲喜)도 그러하며 마음은 사(捨)와 함께 하기 때문에 맺음도 없고……."
위의 경문에서 나타나듯 사무량심 각각에 대해 설명한 경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학자들의 일반적인 설명에 따르면, 자무량심(慈無量心)이란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락을 얻게 하고 그들과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고, 비무량심(悲無量心)이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슬픔을 같이 나누고 고병을 덜어 주는 것이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이란 중생들이 고를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을 좋아함이며, 사무량심(捨無量心)이란 모든 중생에 대하여 평정한 마음으로 동요나 편향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무량심은 선정수행의 한 형식이라기보다 타수행의 보조 수행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56) 그러나 《장아함(長阿含)》 <삼명경(三明經)>에서 `여래(如來)는 이 사무량심에 유희하면서 스스로 노닌다'고 하며 `사무량심을 행하는 비구는 자재를 얻는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사무량심 또한 열반 성취를 위한 선정의 방편으로서 설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7) 팔해탈(八解脫, attha-rimokkha)
팔해탈(八解脫)은 선정수행의 상태를 그 깊이에 따라 여덟 단계로 나눈 것이다. 경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팔법(八法)이 있다. 이른바 팔해탈(八解脫)이니 색(色)이 색(色)을 관찰(觀察)하는 것은 일해탈(一解脫)이다. 안으로 색상(色想)이 없이 바깥 색을 관찰하는 것은 이해탈(二解脫)이다. 깨끗한 해탈은 삼해탈(三解脫)이다. 색상(色想)을 초월하여 성내는 생각을 없애고 공처해탈(空處解脫)에 주하는 것은 사해탈(四解脫)이다. 공처(空處)를 넘어 식처(識處)에 주하는 것은 오해탈(五解脫)이다. 식처(識處)를 넘어 불용처(不用處)에 머무는 것이 육해탈(六解脫)이다. 불용처(不用處)를 넘어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에 주하는 것은 칠해탈(七解脫)이다.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를 넘어 상지멸(想知滅)에 주하는 것은 팔해탈(八解脫)이다."
위의 경문을 보면 삼해탈(三解脫)까지는 색(色)을 여실히 관찰하여 색(色)에 대한 집착을 끊는 단계이며, 사(四)에서 칠해탈(七解脫)까지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의 세 단계와 동일하고, 팔해탈의 상지멸(想知滅)은 멸진정(滅盡定)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팔해탈 각 단계의 의식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궁극의 목표는 모든 상(想)과 감정(感情)이 소멸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생각된다.
8) 십념(十念, dasa-anussati)
십념(十念)이란 불(佛)·법(法)·승(僧) 등의 10가지를 내관(內觀)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선정수행의 일종이다. 그 경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너는 생각하기를 수행하라. 즉 부처를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비구승을 생각하고 계율을 생각하며 보시를 생각하고 하늘을 생각하며 휴식[止觀]을 생각하고 안나파나를 생각하며 몸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이와 같은 법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열 가지를 생각하면 곧 큰 과보를 얻어 단 이슬 법의 맛을 얻는다는 것이다."
《증일아함(增一阿含)》 <선악품(善惡品)>에서도 이와 동일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 십념(十念)을 행하면 열반(跡槃)에 이르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십념(十念)의 수행 가운데 염법(念法), 염안나반나(念安那般那), 염신(念身), 염사(念死) 등은 사념처 수행에 대응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삼보(三寶)와 계율(戒律), 보시(布施)를 염(念)하는 것은 선정수행이라기보다는 수행자의 기본적 마음가짐에 관한 수행덕목이라고 생각된다.
9) 십일체처(十一륀處, dasa-kasinayatana)
십일체처(十一륀處)는 십편처(十遍處)라고도 한다.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열 가지 일체(一륀)의 경계가 있다. 어떤 것이 열인가. 어떤 비구는 상·하와 모든 방위가 둘이 아니라는 한 생각을 닦는다. 이른바 한량이 없는 땅의 경계·한량이 없는 물의 경계·한량이 없는 불의 경계·한량이 없는 바람의 경계·한량이 없는 푸른 경계·한량이 없는 누른 경계·한량이 없는 붉은 경계·한량이 없는 흰 경계·한량이 없는 허공(虛空)의 경계·한량이 없는 의식(意識) 등, 이러한 상·하와 모든 방위가 둘이 아니라는 한 생각을 닦는다. 중생은 이렇게 일체(一륀)의 경계를 즐겨하고 뜻으로 이해하지마는 그것도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만일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로서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경문(經文)에서 지무량처(地無量處) 또는 지일체처(地一륀處)라 함은 일체(一륀)의 무량(無量)한 지(地)의 영역에 머물러 그 무상(無常)함을 관(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머지도 각각 이와 같이 관(觀)함으로써 일체처(一륀處)에 대한 애착심(愛着心), 탐욕심(貪慾心) 등이 없어지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 일체(一륀)에 대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경전에서는 무명(無明)을 끊고 무명을 별지(別知)하고자 하면 이 십일체처를 닦아야 한다고 하고,62) 또한 이 십일체처의 삼매에 들어 청정하게 되면 진실한 이치를 마음에 두어 지극히 고요하여 어지럽지 않게 된다고 한다.
3. 諸禪定說 관계성
앞에서 초기 불교의 여러 선정설의 형태와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 선정설(禪定說)들(선정 수행의 예비적 수행덕목을 포함한)이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수행도상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들의 관계를 도표를 통해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선(四禪)·삼명(三明)의 선정 체계
==至信出家
==戒具足成就
==諸根守護 -100
==正念正知
`
=四無量心 =遠離獨居 敷尼師檀結跏趺坐. -10
`
= =斷五蓋 [安那般那念·四念處(觀)·不淨觀·十念 등의 수행]
==初禪:不善法을 떠남
==二禪:覺觀(분별사유)이 멸함, 定의 喜樂
= 止·觀=三禪:定의 喜樂 소멸 -10
`
==四禪:苦樂의 감정 완전히 消滅, 捨念淸淨
==三明獲得:신통의 지혜로 징험
==解脫
==解脫智見 -17
<2>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의 선정 체계
`
==遠離獨居 敷尼師檀結跏趺坐.正身正願返念不向.
==斷五蓋 [安那般那念, 四念處(觀), 不淨觀, 十念 등의 수]
==<九次第定>=<八解脫>=<十一륀處>=<三三 >
`
=四無量心=初禪 :소리가 멸함=內有色想外觀色= (無量心三 )
= =二禪 :覺觀이 멸함=內無色想外觀色
=止·觀 =三禪 :喜가 멸함 =淨解脫 =地水火風無量處(觀) -14
`
==四禪 :호흡이 멸함==靑黃赤白無量處(觀)
==空無邊處定:色想이 멸함 =無量空處解脫 =空無量處(觀) =空(觀)三
==識無邊處定:空想이 멸함 =無量識處解脫 =識無量處(觀)
==無所有處定:識想이 멸함 =無所有處解脫 ==無願三
==非想非非想處定:無所有想이 멸함=非有想非無想處解脫 =無想三
==滅盡定 :想과 受가 멸함=想知滅
위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초기 불교의 선정체계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도표 <1>의 사선삼명(四禪三明)의 선정체계와 도표 <2>의 사선사무색정(四禪四無色定)의 선정체계가 그것이다. 먼저 사선의 성취까지는 양쪽의 수행과정이 일치하고 있다. 선정의 예비적 수행덕목을 철저히 수습한 후 원리독거(遠離獨居)의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사무량심(四無量心),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사념처(四念處), 십념(十念), 지관(止觀) 등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사선(四禪)의 성취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선성취는 삼명(三明)의 획득으로 이어지는 해탈지견(解脫智見)으로 나아가거나 선정의 더 높은 단계인 사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의 계발로 진전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도표 <2>의 팔해탈(八解脫), 십일체처(十一륀處), 삼삼매(三三 )는 사무색정(四無色定)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보이고 있는데,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의 체계는 이들 선정법을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지관(止觀)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은 그 성격상 선정수행의 모든 과정에 적용될 수 있는 수행이라고 생각된다.
Ⅳ. 맺는 말
지금까지 붓다의 성도(成道)와 선정(禪定)의 관계를 살펴보고 붓다가 제시한 여러 선정설(禪定說)들과 이들 제선정설(諸禪定說)의 관계성을 고찰하여 보았다.
먼저 붓다와 선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경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붓다는 성도(成道)와 열반시(跡槃時)에 사선(四禪)에 의거하였고 특히 붓다가 출가 이전에 염부수 아래에서 초선(初禪, 四禪)의 경지를 체험하여 그것이 고행에서 선정으로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된 것으로 보아 붓다의 선정의 원초적 형태를 사선(四禪)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붓다 성도의 과정에 관하여 여러 이설(異說)이 있으나 선정의 수행이 그 기본이 됨을 알 수 있었으며 사선(四禪) 삼명획득(三明獲得) 사성제(四聖諦) 여실지견(如實知見) 해탈(解脫)의 성도(成道)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선정의 원형으로서 사선(四禪)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정(禪定)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는 데 앞서 선정의 의미와 선정의 의의 그리고 선정의 예비적 수행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선정을 의미하는 용어로는 선정(禪定), 삼매(三 ), 정려(精慮), 사유수(思惟修), 등지(等至), 심일경성(心一境性), 지관(止觀)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선정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解脫)에 있겠으나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관찰하여 지혜(智慧)를 증득하는 것이 선정이 추구하는 중요한 목표임을 붓다는 강조하고 있다. 또한 당시 수행승들의 일상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선정 수행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붓다는 선정의 예비적 수행덕목으로 믿음 - 계구족(戒具足) - 감관(感官)의 제어 - 바른생활 숙지(熟知)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선정의 실수만큼이나 중요한 수행의 필수적 요소라 생각된다.
선정(禪定)의 제형태에 있어서는 사선(四禪),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사념처(四念處), 지관(止觀), 삼삼매(三三 ), 사무량심(四無量心), 팔해탈(八解脫), 십념(十念), 십일체처(十一륀處) 등의 여러 가지 다양한 체계가 보이고 있다. 이들은 크게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사념처(四念處), 지관(止觀) 등의 구체적 선정법과 사선(四禪),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 등 선정시 의식상태를 나타내는 선정설의 두 가지 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초기 불교의 선정(禪定)체계를 사선(四禪)·삼명(三明)의 선정체계와 사선(四禪)·사무량심(四無色定, 滅盡定)의 선정체계로 나누어 제선정설(諸禪定說)의 관계성을 살펴보았는데 삼삼매(三三 ), 팔해탈(八解脫), 십일체처(十一륀處)의 선정체계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이 후대에 보다 일관된 체계를 갖춘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 구차제정(九次第定)으로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지관(止觀)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수행은 선정의 모든 단계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이상과 같이 불교 해탈도(解脫道)의 정수인 선정(禪定)의 원형적 형태에 대해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선정의 가장 기본적인 체계를 그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앞으로는 한역아함(漢譯阿含)과 팔리니카야의 면밀한 비교연구를 통해 초기 불교 전체의 수행체계 속에서 선정이 갖는 의미와 선정설(禪定說)의 전반적 체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선사상(禪思想) - 성본 스님
1. 선(禪), 선불교의 의미
1) 선(禪)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관심
2) 인더스 문명과 선의 풍토
3) 요가와 선정
4) 선불교 성립과 선사상
5) 선불교의 사상
6) 선불교의 정신과 목적
2. 선의 수행과 실천
1) 선불교의 실천구조
2) 선수행의 구조
1. 선(禪), 선불교의 의미
1) 선(禪)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관심
오늘날 세계적으로 선에 대한 관심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과학문명과 더불어 물질 만능주의, 황금 제일주의로 치달리면서 인간성의 말살과 인간 상호간의 신뢰와 불신, 혹은 인간 소외의 현실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에 새롭게 눈뜨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처럼 동양의 마음인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예로부터 선의 풍토적인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인도나 중국, 한국, 일본 등 선불교의 정신에 젖어 있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의 문화권밖에 있는 서구(西歐) 여러 나라에서 비롯된 새로운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27년부터 1934년 사이에 영문으로 출판한 스즈키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선학논문집(Essay in Zen Buddhism) 3권을 비롯하여 선불교 관련의 저술과 선과 문화 등, 그 밖에 그의 많은 영문 저술이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과학문명과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되고, 신(神)중심이 종교관과 인간관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서구인들에겐 신에 의한 피조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인 선을 통하여 자아의 참된 인간관과 각자 스스로 창조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관을 되찾을 수 있는 선의 정신과 선불교의 문화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선의 풍토와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동양에서 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된 소위 선 붐의 현상은 이처럼, 서구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널리 주목된 선에 대한 관심이 서구의 과학문명과 함께 동양으로 다시 전래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기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선의 정신속에 살면서 매일 매일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가치를 바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인더스 문명과 선의 풍토
세계의 고대문명을 통해서 살펴볼 때 고대 인도문명의 독창적인 문화의 하나가 일반적으로 요가(yoga)라고 불리는 사유와 명상의 문화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요가의 사유 문화는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나 철학, 예술 등 인도의 전문화를 배양시킨 원동력이 되고 있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B.C. 3000년에서 B.C. 2500년경에 성립된 고대 인더스 무명의 유적지인 모헨조다로(Mohen-jo-Daro)나 하랍빠(Harappa) 등의 지역에서 발견된 요가의 사유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印章)과 성자(聖者)의 흉상(胸像)으로써 확인할 수 잇는 것처럼, 사실 요가 같은 사유의 문화는 B.C. 1500년경에 인도를 침입한 아리야(Arya) 민족에 의해서 이루어진 문화가 아니고 인도 고대 원주민(토착민)인 드라위다(Dravida)족과 문다(Munda)족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독창적인 사유 명상의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모헨조다로나 하랍빠 등이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활석재(滑石製)로 만들어진 인장에는 신의 모습과 환상적인 그림, 성스러운 나무 등, 반상형(半象形) 문자와 400여 종에 달하는 음절(音節)문자와 표의(表意)문자등의 기호가 새겨져 있는데 아직 이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모헨조다로에서 출토한 3개의 인장 가운데 수주(獸主, Pasupati)의 모양과 요가 사유의 좌선하는 모습이 새겨진 문양들이 보이고 있다.
요가 사유의 좌선하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을 보면, 좌선상(坐禪狀) 위에 양쪽 다리를 편안히 벌리고 앉아 두 손을 양쪽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받치고 있으며, 깊은 명상의 세계에 몰입한 성자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실제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제의 흉상(石製胸像)이 발견되었다. 이 흉상은 B.C. 2000년경이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오늘날 수행승들이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의 맨살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의상을 걸치고 있으며, 눈은 반쯤 뜨고, 코는 높이, 입은 꼭 다물고 있는 표정의 용모는 바로 요가를 수행하고 있는 성자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의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볼 때 고대 인더스 문명을 이룩한 원주민들이 요가 명상의 사유를 통한 종교적인 실천을 전개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독창적인 요가 명상의 사유법이 인도라는 지역에서만 개발하고 발전하게 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요가 명상의 사유법이 인도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와 조건,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중요한 요인이 하나를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과 기후 등에 의한 풍토적인 입장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풍토(風土)란 인간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 그 모두를 말한다. 인간은 예로부터 각자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 속에서 사유하고 노력하여 보다 좋은 생활의 지혜와, 정신적 육체적인 안정과 평안 그리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가라는 사유법도 고대 인도인들이 지리적. 기후 풍토적인 생활 환경속에서 생활의 지혜로 이룩한 종교 문화이기에 그러한 요가 사유의 명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환경과 조건 등을 선의 풍토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지형적으로 북쪽에는 히말라야산이 우뚝 가로질러 솟아 있고, 왼쪽에는 갠지스강이 흐르고 있으며, 기후적으로는 서남 계절풍이 부는 몬순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몬순지대는 약 반년을 주기로 하여 겨울에는 대륙에서 대양으로, 여름에는 이와 반대로 대양에서 대륙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대륙 변방지대이다. 인도에는 이러한 계절풍이 부는 4월에서 7, 8월까지의 우기에는 거센 비바람이 불어닥치며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밖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또한 다닐 수도 없다.
인도뿐만 아니라 동양인들은 집을 짓고 가정을 꾸미며, 농사일을 하면서 안정되고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는 농경문화인이다. 따라서 대지나 흙, 산천초목은 물론, 눈. 비. 바람 등 모든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즉, 인도인들은 몬순이란 계절풍과 더불어 세차게 몰려오는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의 은혜를 참고 받아들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막에서나 농경지대에서나 비(물)는 그야말로 생명수이며 감로수이다. 산천초목 등 대지의 모든 존재를 양육시키는 생명수이기도 하다. 때문에 인도인들은 대지의 생명수와 같은 그러한 자연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몬순의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조용히 집안에서 요가 사유의 명상을 하며 몬순이 끝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은 보다 좋은 생활환경을 찾아다니기 위해 항상 끊임없이 옮겨다니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생활풍습에서 정신적인 안정으로 전개되는 요가 선정의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 인도인들은 몬순이라는 거센 비바람이 부는 우기에는 외부의 출입을 자재하고 가만히 집에서 안주하여 신(神)을 사유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관찰하며, 괴로움의 세계인 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잇는 종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요가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몬순이라는 계절풍과 기후나 풍토가 인도인이 정신인 요가, 사유의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예지와 종교적인 정신이 그러한 풍토를 이용해서 신을 사유하고 자신의 존재를 사유. 명상하며, 종교적인 인생과 삶의 지혜를 창조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도 붓다 당시부터 몬순이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일체 수행승들이 유행을 하지 말고 사원에 머물며 안거하면서 선정(禪定)을 닦도록 하는 수행생활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기간을 하안거(夏安居)라고 한다.
3) 요가(yoga)와 선정(禪定)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선(禪)이란 말은 고대 인도의 사유 명상법인 요가에서 비롯된 것인데, 붓다의 깊은 사유와 정각을 통하여 불교의 실천 수행인 선정으로 체계화된 말이다. 여기서 먼저 요가나 선정(禪定)등에 대한 어원과 기본용어 그리고 그 말의 개념부터 정리해 보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요가의 기원은 B.C. 3000년경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고대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이나 성자의 흉상 등의 발굴로 입증된 것처럼, B.C. 1500년경 아리야인들이 인도를 침입하기 이전에 이미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행된 요가 명상 사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요가 사유의 문화는 약 5,000년 내지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가란 각자의 산란된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통일시키는 수행 방법을 말한다.
요가란 말은 "연결시키다"라는 의미로서, yuj(연결하다)라는 어근(語根)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영어의 yoke(멍에)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결합', '억제' 등의 뜻이며 또 유가라고 음역(音譯)하고 상응(相應)이라고 의역(意譯)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가라는 말이 '사유하다', '명상하다'라는 의미로 문헌상에 최초로 기록되고 있는 곳은 B.C. 6세기경에 성립된 "카타-우빠니샤드(Katha-Upanisad)"이다. 이 책에서는 '명상 사유를 통하여 5가지 감각(感覺)을 제어하고, 산란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이며, 이와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정지되어 움직이지 않고 잘 유지해 가는 것(執持, dharana)을 요가라고 한다.'라고 요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카타-우빠니샤드"에는 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항상 긴장하지 않고, 밝고 분명한 인식(認識)도 없는 지각에 대해서는, 그 지각기관은 마치 말이 주인을 대하듯 유순하지 못하다. 그러나 항상 긴장하고 밝고 분명한 인식이 있는 지각에 있어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마치 잘 길들여진 말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유순하다.'
'카타-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항상 긴장된 마음(uktena manasasada)이라고 하는 한 구절이 바로 요가의 실천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밝은 인식 혹은 지각은 주인에, 마음(意)은 고삐에 비유되고 있는 것처럼, 긴장된 마음은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고삐와 같은 상태를 말한다. 고삐를 잠시라도 늦추면 말은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마는 것처럼, 마음을 잠시라도 놓지 말고 한 곳을 집중하여 항상 긴장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요가라는 말의 의미는 '말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말고삐를 말뚝에 꼭 묶어 두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하는 정신통일의 수행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은 인도의 모든 종교 내지 철학의 모체가 되고 있는 수행법인데, 불교의 선정(禪定)도 붓다가 처음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을 받아들이고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키고 독자적인 깨달음의 선정과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는 불교의 기본 수행으로 체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 요가와 같은 말로 선나(禪那, dhyana)와 삼매(三昧, samadhi)라는 말도 우빠니샤드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불교에서는 요가라는 말보다 선나, 혹은 선정, 선이라는 말로 일반화되었으며, 지관(止觀), 선바라밀(禪波羅密, 禪定의 완성)이라고도 한다.
선, 혹은 선나라는 말은 범어 dhyana(드야나), 혹은 빨리어 jhana(즈하나)라는 말을 중국의 한자로 음사한 말이다.
한자로 선이란 글자는 원래 땅을 깨끗이 하여 천지의 신과 산천에 제사를 올리는 의미이며, 또 토지를 열고 다툼 없이 평화스럽게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선이라는 한자에는 원래 요가나 드야나와 같은 사유나 명상의 의미는 없는데, 경전을 번역할 때 중국인들이 드야나(dhyana)혹은 즈하나(jhana)라는 말을 선나 혹은 선이라는 말로 음사하면서 새롭게 선정이 요가 사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말로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범어 dhyana와 빨리어 jhana는 우빠니샤드에서 yoga와 마찬가지로 사유와 명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dhyana는 중성 명사인데, 이 말의 어근인 dhyai는 '깊이 생각하다', '숙고하다'라는 동사이다. 이 말을 중국에서는 '조용히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정려(靜慮)' 혹은 '선사(禪思)'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선사는 음역과 의역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는데, 선나(禪那), 선사(禪思)의 줄인 말이 선(禪)이다.
붓다는 요가라는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당시 브라만들이나 이교도들의 사상과 실천적 차원이 다른 입장에서 불교 선정의 내용을 지관으로 하는 dhyna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불교의 사상과 실천적인 입장에서 선정이 내용은 지(止, samadhi,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이라고 할 수 있다. 지(止, samadhi)는 '집중하다'라는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삼매(三昧)라는 말로 유행되고 있다. 관(觀)은 '지혜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의 선정은 고대 인도의 요가처럼 고요히 앉아 산란심을 없애는 명상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삼매의 경지에서 근원적인 지혜로 일체의 사물과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 지혜로운 자기의 삶을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선은 또 선정(禪定)이라는 술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의 정(定)은 samadhi(三昧)라는 말을 번역한 '집중하다'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남성명사인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며 하나의 대상에 주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등지(等持)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dhyana나 samadhi라는 말에는 모두 선정(禪定)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시불교의 실천덕목인 팔정도의 정정(正定, samma-samadhi)은 samadhi를 번역한 말이나, 대승불교에서 보살도의 실천인 6바라밀의 하나인 선정(禪定)은 dhyana를 번역한 말이다.
4) 선불교 성립과 선사상
선은 불교의 정신을 배우고 직접 실천하여 각자가 스스로 진리를 체득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수행을 말한다.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각각의 시대와 인도나 중국, 한국 등의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점은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불교의 수행과 실천은 선이 중심이 되고 있었음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선은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를 각자가 직접 실천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선은 불교의 정신을 깨달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며 수행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사상도 시대의 변화와 지역적인 발전에 따라 다양화됨과 동시에 각각의 시대와 지역, 민족에 맞는 사상과 실천정신으로 발전시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에서 발전된 조사선(祖師禪)의 선불교가 형성된 점이라 하겠다.
사실, 오늘날 스즈키(鈴木)의 활약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불교(Zen-Buddhism)는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祖師禪)의 선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실천하고 있는 간화선(看話禪) 혹은 공안선(公案禪)도 조사선의 새로운 발전인 것이기에 우선 조사선의 선불교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선은 인도에서 발생되었지만 선불교의 선사상은 중국에서 완성된 것이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형성된 요가 명상이나 불교의 선정법(禪定法)이 아니라, 당대의 조사들에 의해 새롭게 완성된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중국에서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한 정신집중이 요가나 산란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뇌를 퇴치시키는 좌선의 실천적인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佛性)의 자각과 실천, 그리고 본래심의 지혜와 인격적인 덕성을 일상생활 가운데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로 발전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에서 전래된 외래의 종교이며 요가 명상법인 선을 중국적인 차원에서 일상생활이 종교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이 형성된 사실을 돈황본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주장하고 있는 좌선의 정의를 통해서 살펴보자.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다음과 같이 좌선의 새로운 정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 남종(南宗)의 법문에서는 무엇을 좌선이라고 하는가?
이 법문에서는 일체에 무애자재(無碍自在)하는 것이다. 즉, 밖으로 일체의 경계에 임하여 망념(妄念, 번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座)라고 하며,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고 산란됨이 없는 것을 선(禪)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중국 선조의 새로운 좌선에 대한 주장은 인도불교이래 역사적으로 발전된 선의 실천을 종합하고 있는 종래의 북종선(北宗禪)에 대한 남종의 새로운 선사상을 밝히고 있는 유명한 일단이다.
여기서 일체의 경계에 번뇌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라고 한 것은 우리들이 본래심(本來心)인 불성이 본래 청정한 그 당체(當體)를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번뇌나 망상을 퇴치시키는 종래의 선정이나 명상 사유의 차원을 훨씬 벗어나 일체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입장에서일상생활에 흩어지거나 망각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실천 정신은 '열반경' 등에서 설하고 있는 자각의 주체인 불성사상과 '금강경', '유마경', '반야경' 등에서 설하고 있는 공의 실천을 통한 반야의 지혜를 일상생활에서 무애자재하게 전개하는 반야사상을 통합하여 일상생활의 종교로 새롭게 정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도의 요가 명상법이 붓다의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통하여 불교의 자각적인 실천 수행법으로 완성되었고, 또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선승들이 이룩한 조사선에서는 일상 생활의 종교인 선불교로 발전시켰다.
사실, 중국 선종 혹은 선불교는 수. 당대의 여러 종파불교 가운데서도 가장 후대에 성립된 수행 불교의 운동으로 성립되었다.
선의 실천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불법을 체득하는 수행자의 집단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즉, 조사선의 선불교는 종래의 전불교(全佛敎)의 역사적인 입장과 수. 당대의 여러 종파 불교에서 주장한 불교사상 및 실천적인 입장을 전부 종합하여 새롭게 자각적인 종교로서, 선불교의 사상과 실천 수행을 근본정신으로 하여 전개된 실천불교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붓다의 정신을 선의 실천으로 재정립하고 붓다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복고 운동임과 동시에, 이러한 정신을 중국인들의 정신과 풍토에 알맞은 새로운 현실적인 생활종교로 전개한 종교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당나라 시대에 일상생활 종교인 선불교가 완성될 수 있게 된 것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중국 고유의 노. 장자(老壯子)사상과 유교의 현실 긍정 사상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인들은 현실을 절대 긍정하며 진리를 가까이에서 찾는 현실적인 사유정신과 생활풍토 등이 외래 종교인 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과 수행으로 각자 깨닫고, 새롭게 현실적인 일상샐활 종교로 재편함과 동시에 그 가운데서 불법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일상의 매사를 본래심으로, 진실된 삶을 자각과 지혜로 창조하는 생활불교의 선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히 번뇌나 산란심을 없애기 위한 좌선의 실천이나 선정을 닦기 위한 종파불교의 하나인 선종의 입장이 아니라, 붓다 이후 종래의 전불교를 선의 사상과 실천으로 종합한 중국불교의 새로운 입장이었기에 선불교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생활종교인 선불교를 완성시킨 사람이 남종선의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 ~ 713)이며,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 ~ 788)과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 ~ 790),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 ~ 814)등 당대의 띄어난 선승들이다.
특히 조사선의 대성자인 마조 도일선사는 이러한 생활종교인 선불교의 입장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인간 각자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것이 진실한 도)'라고하는 유명한 조사선의 새로운 도의 정의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역시 앞에서 살펴본 '육조단경'의 좌선의 정의를 발전시켜 일상의 종교인 선불교의 사상으로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사(祖師)는 선의 실천 수행으로 불교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체득한 사람이며, 또한 붓다의 정법(正法)을 계승하여 지혜와 인격으로 불법을 펼치는 당대(當代)의 교화주인 선불교의 새로운 인격을 말한다.
5) 선불교의 사상
불교사상 이외에 또 달리 선불교의 정신이나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여기 선불교의 사상을 논하는 것은 불교 정신의 본질이 붓다의 가르침인 경전을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어디까지나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음을 체득하여 불교의 정신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사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선승(禪僧)들이 대승불교의 정신을 선의 수행과 실천적인 입장으로 새롭게 정립함과 동시에 이를 현실생활의 종교로 만들어 전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불교의 사상적인 입장과 그 배경을 살펴보자.
선불교의 기본정신은 많고 다양한 대승불교의 사상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불성과 반야의 공사상 등 대승불교의 정신만을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전개하도록 간소화하고 있다.
즉, 앞에서도 인용한 '육조단경'의 좌선의 정의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사상적인 골격은 대승불교의 실천적인 정신의 핵심인 불성(佛性)사상과 반야 공(空)사상의 실천이라고 하겠다. 즉,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만법(萬法)의 근원인 인간 각자 자각의 주체를 깨닫는 것이며, 그리고 그 자각된 각자의 불성(本來心)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집착되지 않는 공(空)의 실천을 전개하여 반야(般若)의 지혜로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사상적인 배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금강경, 반야경, 유마경, 열반경, 대승기신론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대승경전에서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각자 자기의 자각의 주체인 불성을 깨닫고,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공의 실천을 통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일체의 경계에 걸림없는 무애자재한 지혜로 자아구명(自我究明)과 중생구제(衆生救濟)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선불교에서는 언제나 각자의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다. 선의 수행과 실천 방법이나 선사상도 사실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방법과 자각적인 지혜를 전개하는 정신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의 수행은 결국 각자의 불성을 깨닫기 위한 기본적인 수행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견성(見性)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에서 만법(萬法)의 근원인 연기의 법칙을 관찰하여 깨닫도록 강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일체 만법의 근원이 각자의 마음에 있으므로 마음의 법(心法)을 깨달음으로써 일체의 만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조작하는 것(一切唯心造),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 다만 이 마음이 짓는 것일 뿐(三界虛妄但是心作), 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또 십지경에서도 "삼계는 오직 이 마음뿐이다(所言三界 此唯是心)." 라고 설하고 있고, 대승기신론에서도 '한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의 법이 일어나고,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체의 법이 일어나지 않는다(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라고 설하고 있는 것은 선불교에서 각자의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한 견성(見性)사상의 사상적인 배경이 된다고 하겠다.
열반경 제35권 가섭보살품등에서 '일체의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라고 한결같이 설하고 있으며, 법화경 제1권 방편품에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할 것임에 의심이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화엄경 제35권 보왕여래성기품에서도 '불자여! 여래(如來)의 지혜, 무상(無相)의 지혜, 무애(無碍)의 지혜는 중생의 몸 가운데(身中)에 구족되어 있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전도(顚倒)된 망상에 뒤덮여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신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또 화엄경 제10권 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도 '마음과 부처 및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심(衆生心)인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설하고 있다.
그래서 마조어록에서 마조 도일선사도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각자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이 마음이 부처임을 확신하라. 달마대사가 멀리 인도에서 일부러 중국으로 건너온 것은 오직 이 상승의 일심법을 전하여 너희들이 각자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속장경 119~406, a)
이와 같이 불교의 경전이나 어록에서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각자의 불성을 자각하는 견성의 주장은, 각자 스스로 만법의 근원을 자기의 마음(佛性)으로 깨달아 한 법(法)도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을 깨달아 각자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구족하여 참된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경전이 주장을 문자상의 이해로 끝나지 않고 직접 선의 수행으로 깨달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 선사상인 것이다. 즉,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견성은 각자의 마음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의 지혜와 덕성을 개발하여 각자의 생활상에 그대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를 생활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조 도일이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道)'라고 단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설법은 조사선의 선불교가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은 몰자각적이고 경계에 집착하여 차별과 분별을 일으키는 범부심,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이 수행과 깨달음의 철저한 체험을 통하여 자각된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체의 번뇌나 분별. 차별심의 미혹이 없는 본래심인 불성을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경계나 주위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범부심(凡夫心, 衆生心)이 아니라, 자각된 주체인 본래심(本來心, 불성)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매몰(埋沒)되지 않고 또 걸림 없으며, 일체의 번뇌나 망념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상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일상심(日常心)인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平常心)이 그대로 부처이며,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그 모든 일상생활의 매사가 그대로 진실된 도(道)의 삶이 된다. 각자의 자각된 평상심(본래심, 불성)으로 지혜로운 삶을, 진실에 계합된 평상의 매사를 전개하는 이것이 선의 수행이며 선사상인 것이다.
자각된 평상심(平常心)에서 전개되는 지혜가 붓다와 똑같은 반야의 지혜인 것이며,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의 모든 일을 걸림 없이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가 다름 아닌 평상심이 도인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6) 선불교의 정신과 목적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이 깨닫고 설한 경전과 어록의 기본 정신을 지금 우리들 각자가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만법이 근원을 스스로 체득하고, 각자 자신의 진실되고 올바른 인생관과 삶의 가치관을 확립하여 일체이 불안과 불편함이 없이 평안하고 안락하게 전개하는 일상생활의 종교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각자의 인생관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체의 권위나 형식 등 피상적인 가치관이나 관념에서 탈피하여 각자 인간 본래이 자연 그대로의 존재인 참된 자아인 본래심(佛性)을 깨닫고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자기를 깨달음의 주체인 주인이 되어 생생하게 살아가는 현실성의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은 남의 일이나 외부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문제로 하고 있다. 철저히 '지금 여기의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참된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아는 일이 전부인 것이다.
임제 의현(? ~ 866)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지금 여기의 자기'가 주위나 경계 환경의 분위기에 끄달리고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본래심이 주인이 되어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임제는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언제, 어디서나 곳에 따라 자각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이 있는 곳이 모두 그대로 진실된 세계가 된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고 설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선불교의 정신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의 수행과 깨달음인 정각(正覺)을 모범으로 하여 우리들 각자가 성스러운 인격의 주체인 본래심(佛性)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각된 자기가 붓다와 더불어 여러 조사들과 똑 같이 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정법(正法)이 안목(眼目)을 구족하며,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진리의 세계에 손잡고 우리들 각자의 일상생활속에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유희삼매(游 三昧)의 생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의 수행과 실천생활로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을 자각하여 붓다와 여러 조사들과 똑같이 반야의 지혜로 각자의 인생관과 종교관을 확립하여 일체의 망념(妄念)과 근심 걱정, 초조 등의 불안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여유있게 각자의 인생과 삶을 유희적인 일상생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은 선의 수행을 통해서 각자의 피와 땀으로 전신(全身)을 투쟁하며 사유하고 실천 연마하여 체득한 철저한 확신과 자기 확립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불교는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기도와 바람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스스로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확립하지 않으며 안 되는 자각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선의 수행과 실천
1) 선불교의 실천구조
선불교의 본질은 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 수행과 자각을 통한 체험으로 자기화시키고, 구체적인 생생한 생활의 지혜로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의 실천과 수행은 선불교의 기본이며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선의 실천과 수행이라고 해서 불교 이외에 달리 선의 실천과 수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실천과 수행이 바로 선(禪)이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이러한 불교의 실천 정신을 선의 수행으로 재정립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각의 종교인 불교의 실천 구조를 신. 해. 행. 증(信解行證)의 4단계로 나누어서 체계 있게 정리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信)이란 일신교에서 주장하는 창조자인 유일신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불교(全佛敎)의 가르침과 실천방법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즉,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와 그리고 우리들 각자도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구족하고 있기에 필경 성불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일체 중생이 법부나 성인이나 모두 동일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구족하고 있음을 깊이 확신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심신(深信)은 유마경, 관무량수경, 대승기신론 등에서 불교의 실천적인 입장에서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입사행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참된 수행과 실천은 범부나 성인이 모두 동일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구족하고 있음을 깊이 믿는 것이며, 이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종지(宗旨)인 것이다. 선불교이 실천은 스스로 심원(深遠)하고도 올바른 신념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믿음(信)은 반드시 불교의 올바른 이해(解)와 실천(行) 그리고 깨달음(證)으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며, 자기의 종교적인 삶의 근본이 되고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화엄경 현수품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일체의 공덕을 낳는 어머니(信爲道元功德母)'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대지도록 권1에서 진리의 세계인 불법(佛法)의 큰 바다는 믿음(信)으로서만이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지혜로서 능히 건너갈 수가 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올바른 이해(解)는 불법의 정신과 사상, 실천방법 등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 이러한 확실한 신심과 실천 방법을 토대로 한 올바른 수행(行)은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진리의 세계, 깨달음이 경지를 각자가 체득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행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그 진리의 세계로 가는 올바른 길을 확실히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갈 길과 목적지를 향해 수행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각자가 오로지 좌선의 수행에 전념하며 좌선의 한 가지를 실참(實參)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 한 가지를 중심으로 닦는 수행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하며, 혹은 각자의 몸으로 직접 연마하고 수행하는 것이기에 임제선사는 체구연마(體究硏磨)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행삼매의 좌선 수행과 깨달음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붓다나 조사들이 설한 불법의 세계를 자각하여 붓다의 말씀을 직접 확인하고 더 이상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을 갖게 된 자각을 깨달음(證)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통해서 알고 있던 지식적인 불교의 이해와 한계성을 각자의 수행과 체험으로 확신을 얻고, 그러한 불법의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을 얻음으로써 각자가 자기의 생활종교로 만들고 확립한 것을 말한다. 즉, 불교정신을 직접 몸으로 갈고 닦아 깨닫고 익힌 불법(佛法)을 자기화한 것이며 혈육화(血肉化)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깨달음은 관념적인 이해나 사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몸으로 연마하고 익힌 것이기에, 철저한 확신으로 불법의 정신이 자기의 인격과 일상적인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승화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정신이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이루어진 삶이 전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신. 행. 행. 증은 불교의 가르침을 각자가 직접 믿고 수행하여 깨달아 자기의 종교로 확립하게 하는 자각적인 종교의 수행구조를 체계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을 알기 위한 것이며, 불법을 수행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선사 도우겐(도원, 1201 ~ 1253)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고 있다.
불도를 닦는 것은 자기를 수행하는 것이며, 자기를 수행한다는 것은 자기를 무아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무아로 하는 것은 자기가 만법(萬法)으로 실증되는 것이며, 자기가 만법(萬法)으로 실증(實證)된다는 것은 자기의 신심(身心) 및 타인의 신심까지도 모두 함께 탈락(脫落)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해 갈 때 깨달음의 자취도 없어지며 그 없어진 깨달음의 자취로 오래오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불교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관념론이나 인식론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수행과 실천을 통한 체험으로 자각하여 생활의 체험과 지혜로 되살리는 것이다.
실천수행이란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불교의 사상을 심화하는 바로 그것이며, 불교의 정신을 각자가 자기의 일상생활의 삶 속에서 나타나 주객(主客) 등 일체의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차별심이 모두 탈락된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구체적인 지혜의 생활이며 참된 삶을 전개하는 사실인 것이다.
2) 선수행의 구조
선수행은 지극히 정신적인 자기 훈련의 방법이다.
인간 사회 문명의 형태에서 벗어나 철저한 자기 자유의 탐구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형체가 없는 마음과 정신적인 자기 훈련의 문제이기 때문에 도리어 매일매일 구체적인 생활이 형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 수행의 기본은 좌선(坐禪)과 선문답(禪問答)이다. 좌선을 통한 자기 조명과 선지식(善知識)과의 선문답으로 진실을 깨달아 확인하고, 진리인 정법(正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또 좌선을 통한 본래심의 자기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선 수행의 문제인 공안 참구를 통한 선문답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러 부처들과 조사들과의 진실한 대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좌선은 신체적인 수행의 형태이고 선문답은 언어(말)를 통한 구체적인 실천 형태로 볼 수가 있다. 원래 정신적으로 인간 존재의 최후의 조건을 추궁해 가 볼 때 신체와 언어의 문제에 봉착되는데 선의 수행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실천 수행의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선 수행의 기본적인 구조를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가 있다.
① 실천적 행위의 규범을 준수
선 수행의 목적은 각자가 일체 만법의 근원인 불성을 자각하고 일체의 차별적인 관념과 개념에서 해탈하고 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처럼 선은 각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의 확립을 강조하면서도 그 수행에 있어서는 결코 자의적이거나 방종적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일정한 수행 방법의 체계와 행위규범을 엄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천적 행위의 규범으로는 첫째, 불교정신에 따른 출가 수행자의 교단 규범인 대소승의 계율이 있고, 선원에는 선원 청규(淸規)가 있다.
그리고 좌선 수행의 좌선법이 있으며, 훌륭한 어느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엄격한 지도와 편달을 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규범과 수행의 방법이 있다. 선의 수행은 먼저 이러한 실천의 행위와 규범을을 준수해야 한다.
종교적인 수행의 출발점이 선각자의 수행과 체험을 통한 말씀을 믿고 올바른 수행으로 그러한 사실과 경지를 추체험(追體驗)을 통하여 확인하고 확신을 얻어 자기의 구체적인 생활의 지혜로 살리며 인격으로 전개하는 것이기에 교주나 종조(宗祖)의 수행 방법과 실천이 똑같은 일정한 규범과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화살로 과녁을 겨냥하는 것처럼, 누구나가 한결같이 똑같은 방법과 행동으로 불법의 목적지인 성불이라는 과녁에 맞추어야 한다. 성불이라는 과녁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게 되면 불교가 아닌 것이며, 외도로 전락되는 것이기에 불법의 수행으로는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만다. 선 수행자의 한결같은 목적으로 강조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화살의 목표물인 과녁과 같은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출가 수행의 규범을 원칙으로 한 선수행은 먼저 올바른 스승(선지식)의 문하에 들어가 여법(如法)한 좌선과 수행의 지도를 받으며 자기 자신을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않된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구조를 법문(法門), 관문(關門), 무문(無門), 입문(入門), 입격출격(入格出格)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훌륭한 스승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스승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을 입문(入門)이라고 하며, 불법을 깨달아 진리의 세계이 문을 깨달음의 체험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을 관문(關門)이라고 한다.
조당집 제5권 운암선사전에 '문(門)으로부터 들어온 것은 참된 보물이 아니다'라는 설법을 하고 있다. 이 말을 벽암록 제5칙에서는 '종문입자 불시가진(從門入者 不是家珍)'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것은 어떤 보물이나 정신사상, 혹은 아름다운 말이라도 참된 자기의 보물이나 살림살이가 될 수 없다.
인연 따라 얻고 배우고 익힌 것은 결국 때가 되고 인연이 다하면 나가고 없어지게 마련이다. 참되고 다함이 없는 무진장(無盡藏)한 무가보(無價寶)의 보물은 자기의 불성으로 철저한 수행을 통한 체험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선 수행의 구조를 무문(無門) 혹은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종의 공안집(公案集)인 무문관에서는 '대도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라고 강조하고 있다.
불법의 수행은 철저한 스승이 지시에 따른 수행 방법을 이수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구조를 입격(入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격(格)은 틀이나 격식(格式)을 기준으로 실천 수행의 구조적인 규칙이나 규범, 혹은 틀을 말한다. 규범과 규칙을 원칙으로 한 실천 수행은 올바른 스승(正史)에게 나아가는 것처럼, 여법(如法)한 선 수행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모든 교육이나 기술, 예술이 배움에는 먼저 그 어떤 기준이 되는 격식에 자기의 모두를 투입시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체구연마(體究硏磨)시켜서 익히고 숙달시켜야 한다.
즉, 자기 개인의 제 마음의 제 마음대로의 자유와 방종을 모두 버리고 비좁고 부자유스러운 수행의 틀(格式) 속에 뛰어들어가 그 격식과 규칙을 몸으로 익히고 배워, 그 부자유스러운 규칙과 격식의 틀이 몸에 익어서 자유스럽게 될 때 마침내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이를 출격(出格) 혹은 파격(破格)이라고 한다.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를 체득한 사람을 임제는 출격견해인(出格見解人)이라고 하며, 원오심요(圓悟心要)에서는 출격대도인(出格大道人)이라고 한다.
선에 있어서의 자유는 이러한 기본적인 수행규범을 익히고 몸에 푹배게 하여 그 수행의 규범을 자유 자재롭게 사용하고 구사하며 자기의 평범한 일상생활로 되어 버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무애(無碍) 자재롭게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에 유희(遊戱)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지는 규범이나 법규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 경지에서 마음에 내맡긴 채로 자유롭게 거니는 임운자재(任運自在)로 해탈 자재인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② 선 수행의 간결성과 단순성
선 수행이 실천은 무엇보다도 간결하고 단순한 실천행이 되지 않으면 실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 수행은 일행삼매의 좌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좌선이라는 한 각지 수행으로 실천하는 곳에 다른 불교의 전사상과 정신을 포용하고 응집한 실천이다. 그것은 단순한 좌선이라는 한 가지 수행(一行)이지만 불교의 근원인 진리의 세계를 깨달음의 자각으로 전향시키는 질적심화(質的深化)의 수행인 것이다.
즉, 한 가지의 실천 수행을 꾸준히 닦아야만 깊이 있는 깨달음이 경지를 체득할 수가 있다. 단순한 좌선 한 가지만의 실천 수행이라고 해서 폭이 좁고 천박하며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전불교의 정신과 사상을 모두 섭렵하고 충분히 소화한 뒤에 부차적인 것은 모두 제쳐두고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응집하고 집약하여 좌선의 실천으로 불법의 궁극적인 진리를 직접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한 가지의 수행인 일행(一行)의 좌선은 결국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좌선의 일행으로 모든 불법의 정신을 자기화하는 가장 구체적인 수행이며 실천법인 것이다.
좌선의 실천 방법을 적은 지남서(指南書)로는 송대(宋代) 종색(宗 )이 지은 좌선의(坐禪儀)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좌선의 기본은 신체를 조절하는 조신(調身),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는 조식(調息), 그리고 번뇌가 없는 자각된 마음을 갖는 조심(調心)에 있다.
이처럼 좌선 수행의 기본적인 행위 그 자체는 지극히 간결하며 누구나가 직접 좌선을 참구할 수가 있다. 좌선이 일행삼매를 선 수행의 기본으로 하고 있음은 단순함과 간결함이 복잡하게 일어나는 번뇌나 두뇌적인 사고를 물리치고, 반대로 전신심(全身心)을 직접 단적으로 부딪쳐 실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주관과 객관, 자기 자신과 주위의 경계와의 구분과 차별심이 모두 없어져 그야말로 하나가 되어 버린 삼매의 경지는 이러한 좌선의 실천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인간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살기는 쉬워도 단순한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행삼매의 좌선을 수행이라고 한다. 과학자가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것이나, 예술가가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일종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가 좌선의 한 가지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선 수행이다.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진리의 자각과 지혜가 체득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나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일과 행위에 전심전력하여 주관과 객관이 끊어지고 대상이 끊어진 절대적인 경지가 되도록 하는 행위가 일행삼매인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한 가지 일에 절대적인 수행으로 행한다(一事에 絶對를 行함). 라고 말한다. 즉, 지금 행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자기 자신의 힘을 다 쏟는 수행을 말한다. 선에서는 대나무잎 하나하나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혹은 우리들 '인간의 생활에 있어 행동 하나하나, 행위 한 걸음 한 걸음에 청풍을 일으킨다.'라는 의미이다.
즉 본래심(本來心)의 자기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에 그대로 본래심의 전체가 그대로 작용되어 구현되는 삶이 바로 선의 수행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③ 언어나 문자의 매개(媒介)에 의존하지 않는 직접 체험주의
진리의 세계는 각자의 깨달음을 통한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언어나 문자로서는 보여 주거나 전해 줄 수가 없다라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주장은 잘 알려져 있는 선불교의 슬로건이다.
이를 언어나 문자의 설명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언전불급(言詮不及)이라고도 하며, 물의 차고 더운 맛은 물을 마셔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냉난자지(冷暖自知)라고도 말하고 있다.
즉, 불법은 자기의 몸으로 직접 수행하여 체험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선의 문헌은 조사들의 이러한 생생한 수행과 체험이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임제록에 임제 선사는 자기의 수행생활과 경력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여러분! 출가 수행자는 먼저 도를 배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산승(山僧)도 지난날 일찍이 율장 공부에 전심하기도 하고 경전이나 논서(論書)의 연구에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률론 삼장이 모두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약과 같은 것이며, 언어 문자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단번에 경전을 뿌리치고 곧바로 선의 수행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훌륭한 스승과 도반들을 만나게 되어 비로서 도의 안목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어 이제 천하 선사들의 견해를 바로 볼 수 있고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곧 알 수 잇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몸으로 참구하고 연마하여(體究硏磨) 수없이 많은 좌선의 수행을 반복하여 어느 날 갑자기 깨닫고 알 게 된 것이다.
임제가 주장하고 있는 체구연마(體究硏磨)는 경률론(經律論)으로 표현된 언어 문자에서 벗어나 각자가 직접 선 수행을 통하여 불법을 깨닫게 된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처럼 선의 본질은 언어 문자의 경전이나 과학적인 지식, 대상적인 인식이나 분석적인 판단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험적인 직관지(直觀智), 반야(般若)의 지혜로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직관적인 지혜나 반야의 지혜는 임제가 주장하는 불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며 진정한 견해인 것이다.
상대적이고 분별. 차별의 2원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근원적이며 직관적인 지혜로 자기를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직관적인 지혜는 우리들 각자의 불성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와 똑 같은 지혜를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자각과 깨달음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즉, 이성에 대한 인식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좌선의 실천으로 체득한 직관(直觀)은 믿음(信)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은 차원에서 서로 상대를 공격하는 관계가 아니다. 믿음은 지식의 한계성을 보완하고, 지식은 믿음의 독단을 수정(修正)하는 것으로 양자는 상호 보완의 기능을 갖는다.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사실 진리에 대한 의심 없는 확인이며 철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신(信)은 힘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한편 신(信)은 맹목(盲目)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의성(兩義性)은 충분히 자각하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혜는 구체적인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지혜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직접체험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④ 실천이 반복과 수행의 지속
선 수행의 실천은 일정한 수행 방법과 양식인 규범이나 좌선법, 청규 등 격식에 규정되어 있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수행도 일행삼매의 좌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자 그러한 기본적인 좌선 수행의 격식과 규범의 생활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 수행은 사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단순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좌선 실천을 반복하고 지속하는 구조로 성립되어 있다. 단기간의 선 수행은 형태상으로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수행의 의미와 효과를 얻기 이해서는 어떤 일정기간의 수행과 지속을 필요로 하게 된다.
지속(持續)이란 수행생활의 끊임없는 연속을 말한다. 즉 좌선이라는 단순한 실천행을 반복하고 반복하여 계속해 가는 것이며, 마치 나사 모양으로 나아가는 것이 선 수행의 기본이 된다.
이것은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계속적으로 지속해야 한다. 이렇게 좌선의 수행의 반복과 끊임없는 지속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지극히 단순화된 행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이성적인 사유의 지배를 벗어나 신체가 거의 기계적으로 규범과 격식 속에서 행위 양식에 반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반복의 과정에 서서히 행위 양식을 안으로 정착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행위) 규범을 무조건 받아들여 기계적으로 박복하여 이론을 제거하고 지속하는 것이 선 수행인 것이며, 이러한 단순한 일행삼매의 실천만이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 경지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의 종교에서 추구하는 길을 도(道)라고 말하면서 그 도를 체득하는 수행은 먼저 어떤 형식과 격식에 자기를 집어넣는 일부터 출발하고 있다. 일종의 신체적인 조건을 붙임은 계층적인 구조를 갖춘 인격의 바탕에 습관화한 행위의 여러 특성과 행동 경향을 배양하는 것이 된다.
서경에 '배워서 성(性)이 되도록 한다.'는 습성(習性)이란 말처럼, 선 수행도 좌선의 실천으로 습성화한 자기를 구체적인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그대로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체구연마(體究硏磨), 숙달(熟達), 순숙(純熟)이라고 하며, 장자에서는 많은 연습과 반복된 훈련으로 단련하고 익혀서 자연이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연달자연(練達自然)의 이야기를 많이 전하고 있다.
⑤ 수행(修行)의 어려움
선의 수행은 불법을 각자가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선불교는 수행과 실천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으며, 실천과 수행이 없는 선은 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불법의 수행과 실천이란 어디가지나 개인적인 것이며 개개인이 각자 충분히 납득되지 않으면 실천 수행은 될 수가 없다.
적어도 종교적인 실천은 깊은 진리의 자각을 수반하고 있다. 선의 문헌들은 모두가 고차원의 실천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선이 수행과 실천은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조당집 제3권 조과화상전에 조과화상과 백낙천과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는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이야기다.
백낙천이 조과화상에게 질문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수행해야 도(道)와 상응할 수 있습니까?
조과화상이 대답했다.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行)하시오(諸惡莫作 衆善奉行)"
백낙천이 말했다.
그 정도의 말씀은 세 살 난 아이라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조과화상이 말했다.
세 살 난 아이가 이 말을 잘 알고 있을지 모르나, 팔순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말을 실행하기란 어려운 것이오."
이처럼 선이 실천과 수행이란 불교의 정신이나 실천방법을 알고 있고 외우고 있는 그 지식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정신과 실천 방법을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의 인격과 정신으로 만들어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삶인 것이다.
경전이나 선지식의 지시를 받는 등, 비록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해서 자기가 몸으로 직접 실천하고, 또 지혜롭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인 것이다.
선의 역사
선의 원류(인도의 선)
선의 시작은 고대 인도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본격적인 시작은 석존의 수행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석존에게 있어 깨달음의 내용과 형식과 그 수단은 좌선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생활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선은 처음에는 종교적 형태를 띠었지만 종교의 개념만으로는 다할 수 없는 내용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인도의 지적(知的)인 것과 중국의 행적(行的)인 것과 한국의 정적(情的)인 문화양식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발전을 이루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1. 선의 어의
그러면 이와 같은 선이란 용어는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가. 선은 인도의 속어(俗語) jhana에서 마지막 모음 a가 탈락한 jhan의 음역이다.
이 jhana에 해당하는 아어(雅語)는 dhyana이다. dhyana의 어근 dhyai는 ‘심사숙고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dhyana라는 용어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Chandogya Upanishad이다. 불교의 구역(舊譯)에서는 이것을 사유수(思惟修)라 하였고, 신역(新譯)에서는 정려(靜慮)라 하였다. 사유수(思惟修)는 심(心)을 하나의 대상에 전주(專注)하여 그것을 자세하게 사유(思惟)하고 수습(修習)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사유와 실천이 불리(不離)의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정려(靜慮)는 적정주려(寂靜籌慮 혹은 寂靜籌量), 또는 적정심려(寂靜心慮)라 해석되듯이 심(心)을 고요하게 하여 대상을 자세하게 숙고하는 실천이다. 그런데 선은 오개(五蓋 : 貪欲·瞋 혜 ·婚 沈·掉擧·疑) 등의 악을 모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기악(棄惡)이라 의역되기도 하고, 또한 온갖 공덕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공덕총림(功德叢林)·공덕취림(功德聚林)이라 의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곧 선을 닦으면 지혜와 신통과 같은 공덕이 집적되기 때문이다. 다만 신통은 선에 의해 획득되는 내면생활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선은 또한 정(定)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정은 동요(動搖)나 산란심(散亂心)을 떠나 심(心)이 안정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정〔(定 adhicitta : 수승한 마음)은 종종 삼매(三昧 samadhi)의 번역어로 간주되기도 한다.
삼매는 심(心)을 ‘한 곳에 집중한다’, ‘한 곳에 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을 등지(等持)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것은 곧 심(心)을 평등하게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평등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심(心)이 지나치게 축 늘어져 가라앉는다든가 들떠 산란하다든가 하지 않고 균형잡힌 작용을 하는 것이다. 삼매(三昧)는 원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그 본질로 삼는다. 심일경성이란 심을 하나의 대상에 전주(專注)하는 것이다.
문헌을 검토해 보면 선(禪)과 정(定)은 그 범위를 엄밀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도 자주 나온다.
선의 번역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보리달마(菩提達摩)의 서래(西來 527년)에 의해서 선이 독립적인 한 계통을 형성하게 되자 그에 따라서 선이 의미하는 내용도 적잖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선종은 교종이 불어종(佛語宗)이라 불리우는 것에 상대하여 불심종(佛心宗)이라 불리운다. 여기에서 불심(佛心)은 불성(佛性)이고 진성(眞性)이며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그리고 불성은 불(佛)의 본질로서 성불의 선천적인 근거이다.
달마선(達摩禪)에서는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이 본각진성(本覺眞性)을 그대로 선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그 본각진성을 오수(悟修)하는 것을 선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여기 달마선에서의 선은 인도적인 사유수나 정려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내용을 지니게 된 것이다. 중생에게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는 진성(眞性)을 깨달아 드러내는 것을 혜(慧)라 하고, 이것을 수(修)로 보여주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이와 같은 정과 혜를 통칭하여 선이라 하였다. 그리고 오(悟)라 해도 진성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각지(覺知)하는 것이 아니다. 곧 진성 그 자체에 계합하여 심성 그 자신이 되어 불성 전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깨닫는 심(心)과 깨달아진 진성이 일체(一體)가 되는 체험이다.
그리고 수(修)라 해도 진성을 깨닫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성 그 자체에 계합한 바로 그 곳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묘수(妙修)이다. 그 때문에 중국의 선종에서는 본각진성이 서로 융즉(融卽)하는 혜(慧)와 정(定)으로 현현된 구극의 체험을 선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좌선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그 종교적인 진리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변환경을 정리하고 의대(衣帶)를 정제하며 호흡을 조정하여 신상(身相)을 단정하게 하여 결가부좌(結跏趺坐) 혹은 반가부좌(半跏趺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좌법은 몸의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제일로서 음식물을 소화시키기 좋고 기식(氣息)이 조화를 이루는 데 좋은 방법이다.
또한 행(行)과 주(住)의 자세라면 몸이 쉽게 피곤해지고, 만약 기와(倚臥)의 자세라면 쉽게 혼침이 증가한다. 그러나 오직 결가부좌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없기 때문에 그 결가부좌로부터 수승한 선법(善法)을 수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선은 일체의 망상을 떠나 현세에 있어서 신심적정(身心寂靜)의 법락을 받고 안심부동(安心不動)을 얻기 때문에 현법락주(現法樂住)라 불리운다. 후세에 좌선을 안락법문으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선정의 전개
규봉종밀(圭峯宗密)은 그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을 5종으로 분류하여 외도선·범부선·소승선·대승선·최상승선이라 하였다. 외도선은 불교와 다른 견해를 품고 선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현세를 싫어하고 생천(生天)을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의 선이다.
범부선은 바르게 불교의 인과설을 믿지만 삼계의 고를 싫어하여 출리(出離)의 즐거움을 즐기는 사람들의 선이다. 소승선은 흔염취사(欣厭取捨)의 상대관을 부정하고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지만 아직 제법개공(諸法皆空)의 이치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들의 선이다.
대승선은 아법이공(我法二空)으로 나타난 진리를 깨달아 수행하는 사람들의 선이다. 그러면서도 대승선은 또한 경전에 의하고 교판에 토대를 두며 이상을 먼 피안에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여기에 당연히 달마가 전한 최상승선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최상승선은 곧바로 자심(自心)의 청정과 번뇌가 본래 공함을 깨닫고 오롯하게 진지(眞智)가 본래 구족되어 있고 중생과 부처가 일여하다는 것을 믿고 수행하는 사람들의 선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의 분류는 다분히 주관적인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편의상 인도불교의 선정을 a) 석존의 선정 b) 부파불교의 선정 c) 대승불교의 선정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a) 석존은 수행시대에 알라라 까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뿌타(Udaaka Ramaputta) 등으로부터 선정을 배웠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마침내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찾아 정각을 성취하였다.
두 선인의 정(定)과는 완전히 그 입장을 달리하였지만 불타가 깨달음을 얻은 것도 보리수나무 밑의 선정에 의한 것이다.
성도 이후에도 낮과 밤으로 깊은 선정에 들어 법을 설하고, 입멸에 이르러서도 구차제정(九次第定 : 四禪·四無色定·滅盡定)을 순(順)과 역(逆)으로 행하여 반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석존이 설한 수행덕목 가운데 선정을 떠난 것은 하나도 없다. 선정은 언제나 실천수행의 기체(基體)를 이루고 있었다.
석존이 중도의 내용으로서 보인 팔정도 가운데 마지막의 정정(正定)은 일반적으로 사선(四禪)이라 말해지고 있다.
초선(初禪)은 모든 장애를 끊고, 몸을 단정히 하여 마음을 집중하여 곧 오개(五蓋)를 여의는 것이다.
제이선(第二禪)은 신(信)을 얻어 명정(明淨)하게 되어 내적으로 청정과 기쁨을 느끼며, 심신이 경쾌하고 편안하게 되는 심경으로 곧 각〔覺:추리작용에서 마음의 거친 작용, 신역에서는 심(尋)이라 함〕과 관〔觀:추리작용에서 마음의 미세한 작용, 신역에서는 사(伺)라 함〕이 모두 멸한다.
제삼선(第三禪)은 기쁜 감정도 버리고 마음이 평등해져 정념정지(正念正知)가 나타나며, 심신에 쾌락을 느끼는 것으로서 곧 희(喜)가 멸한다.
제사선(第四禪)은 불고불락(不苦不樂)에 머물고 내면이 순화되어 간찰지(觀察智)가 촉진되는 것으로 곧 쾌락이 멸한다.
이 사선의 기원은 불교 이외에 있지만 석존은 그 정신을 채용하여 불교적인 의미 내용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형(型)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형(型)이 되기 이전의 것, 또한 이와 같은 형(型)을 벗어난 것 속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석존 선정의 특질은 무엇인가.
불타의 선정은 이상으로서의 열반(전체와 개개가 일체된 인격 완성)을 체현(體現)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방법으로서 두 선인의 수정주의자처럼 그것을 결코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만약 선정을 무조건적으로 목적시 한다면 선정을 닦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어느 정도까지 고를 여읠 수가 있겠지만 선정을 잠시 멈추는 동시에 그 선정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단지 성도 이후에 그 입장을 두고 또한 불성의 본유(本有)를 설하는 선문에서는 좌선을 단순히 방법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의 법문으로 간주한다.
불타의 선정은 현세에 있어서 열반의 체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두 선인의 수정주의자와 같이 사후에 거기에 상응하는 천(天)에 태어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외부 학파의 제일원리(第一原理)로부터 일체가 전변유출(轉變流出)된다는 전변설(轉變說) 등의 독단적인 형이상학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행해진 것이다.
생각컨대 불타의 관심은 항상 현실의 반성에 있으며 단순한 우주론과 세계관을 필요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물며 생천(生天)과 같은 것은 결코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심일원론(物心一元論)에 기초하여 두 선인의 수정주의자처럼 물심에 대하여 각각 실체를 인정하는 일은 없었으며, 또한 그러한 이원론적 대립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외부의 수정주의자는 육체를 고의 근거로 삼아 그 자극을 느끼지 않게 되어 마음의 산란을 멈추는 선정을 닦았다. 그리고 마음에는 실체로서의 아(我 atman)의 존재를 긍정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법인(法印)으로 그러한 사상을 배척하고 무아설에 기초한 선정을 역설하였다.
석존이 행한 선정의 목적은 현세에 누진(漏盡:번뇌를 멸하는 것)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외부 학파와 같이 신통을 얻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불타는 누진통(漏盡通)과 신변(神變)을 제외한 다른 초자연적인 힘을 극력 배척하였다. 한편 석존은 무아에 철저하여 대비를 기반으로 삼고 있어서 외부 학파와 같은 착미(著味)·사견(邪見)·아만(我慢) 등 삼과환(三過患)을 떠난 근원적인 실천이다.
b) 부파불교시대는 현실을 주(主)로 삼아 그로부터 향상(向上)하려 하기 때문에 저절로 자리적(自利的)인 입장이 되었다. 또한 전통의 호지(護持)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고정화시키는 경향이 강하여 일종의 상식적 실재론에 빠졌다. 그리하여 부파시대의 선정은 사선(四禪)·사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삼등지(三等持)·삼삼매(三三昧)·삼중삼매(三重三昧)와, 이것들에 기초한 사무량심(四無量心)·팔해탈(八解脫)·팔승처(八勝處)·십변처(十遍處) 등의 공덕이 열거되고 있다. 기타 십수념(十隨念)·십부정관(十不淨觀)·식염관(食厭觀)·계차별관(界差別觀)·오정심관(五亭心觀)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삼삼매(三三昧)는 공(空:我·我所의 空)·무상(無相:差別의 相狀이 없는)·무원(無願:願求할 것이 없는)에 주하는 선관이다. 오정심관은 탐욕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성냄이 많은 사람은 자비관(慈悲觀)·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은 연기관(緣起觀)·아(我)에 집착한 사람은 계차별관(界差別觀)·산란심이 많은 사람은 수식관(數息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부파시대의 선정은 그 이원적인 실재관에 의하여 형식적으로 고정화되었고, 팔정도의 앞 칠지(七枝)를 정정(正定)의 방편으로 삼아 이것을 목적시 하였으며, 수정(修定)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단계를 중요시하였고, 그 단계설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설에 결부시켜 선관의 항목이 조직적이 아닌 수집적(蒐集的)인 경향을 취하였다.
또한 그 선수(禪數)의 어떤 하나를 취하여 닦아도 그 최후는 심지(心地)가 구경적인 것이 되어 대승으로 변화하고, 부파의 법수(法數)를 선관으로 삼아 닦은 유가사(瑜伽師)와 이외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파선정의 특징은 소위 착문사문(著文沙門)과 구별되어 한 쪽에만 무게를 둔 점이다.
번쇄한 부파불교의 학설은 본래의 종교적인 목적을 낮추어 구원과 수정을 소홀히 하여 현저하게 스스로 형식불교·해석불교에 떨어져 세간의 대중을 떠나 거의 전문가들만의 위안물이 되어 불타의 참된 정신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폐풍을 일소하고 석존의 근본정신을 시대에 되살리려고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이다. 반야경을 선구로 하는 대승불교가 대두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었다. 반야경의 주요 핵심은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설하고 있다. 제법개공이란 모든 존재의 고정적인 실체관념과 거기에 고집하는 태도를 타파하는 것이다.
c) 인도의 초기 대승경전은 반야경·유마경·법화경·화엄경 등이다. 반야경 속의 금강경은 반야의 불가득공(不可得空)을 설하여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응무소주’는 반야개공을 가리키고, ‘이생기심’은 공관을 매개로 한 자기의 각성 곧 불성의 현전을 말한다. 따라서 이 경전은 선문과 깊은 관계를 지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선종에서 선자에게 마음을 지니는 방법을 가르칠 때 쓰던 문구이기도 하다.
유마경은 소승자리(小乘自利)의 독선을 파하고 이타를 기본으로 하는 불법의 생활화를 강조한다. 그리고 묵묵히 문자언어라는 것도 없다고 하여 직심(直心)이 곧 도량(道場)임을 말하고, 좌(坐)하는 것도 반드시 연좌(宴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며,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실천적 파악을 보여주고 있는 점 등은 진실로 선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엄경은 불타의 자내증(自內證)에 기초하여 광대한 묘유(妙有)의 세계관을 전개하여 일즉다(一卽多)·다즉일(多卽一)·주반구족(主伴具足)·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관계를 보여 유록화홍(柳綠花紅)의 절대현실에 철저하고, 전일(全一)한 불법생활을 역설한 경전이다.
그리고 정(淨)의 일심(一心)을 앙양하여 전일한 생활을 강조하여 보리심에 기초한 변참(遍參)을 중시하는 그대로 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과 화엄의 결합은 일찍부터 행해져 화엄선이라는 것도 출현하였다.
중기 대승경전으로서는 열반경·승만경·해심밀경 등이 있다. 열반경은 법신〔理法〕은 영원하여 변역(變易)되지 않는다고 하며, 일체의 중생에게 성불의 선천적 근거(佛性)가 있다는 것을 보이고, 단선근(斷善根)이라는 일천제(一闡提)까지도 또한 성불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경전이다.
그 실유불성설(悉有佛性說)이 선문의 즉심시불(卽心是佛) 내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여래장을 설하고 있는 승만경·무상의경·부증불감경에 있어서도 하등의 차이가 없다.
후기 대승경론은 능가경·기신론 등이다. 능가경은 대승의 제교설을 비망적(備忘的)으로 잡록한 것이지만 아뢰야식과 여래장을 조화시키려고 시도한 경전이다. 그 불심과 여래장을 설하여 4종류의 선을 말한다.
특히 여래선을 설명하여 여래의 일자불설(一字不說) 혹은 불설즉불설(不說卽佛說)의 이치를 설명하고, 불립문자를 강조하며, 사돈사점(四頓四漸)을 설명하고 있는 점은 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근거이다. 달마는 4권 능가경을 혜가에게 주고 그것을 심요(心要)로 삼을 것을 부탁하였다.
대승불교는 가르치는 입장에 서서 무애자재를 중시하기 때문에 우선 그 근본 정신을 취하고, 다시 이상을 주로 삼는 불위(佛位)에 기초하여 향하(向下)하려고 하기 때문에 저절로 이타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한결같이 불타의 근본 정신으로 살아가며 그것을 우리네 인격에 구현하여 사회에 그 이상을 실현하려는 점에 있다.
때문에 대승의 제 경전은 불타의 체험 내용을 보여주려는 문학적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불교정신을 그 근저에서 취하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데에는 선정 이외에는 취해야 할 길이 없을 것이다.
대승의 제 경전이 한결같이 입정 또는 출정이라는 설법의 형식에 의하여 나타나 있는 이유도 확실히 여기에 있다. 이것은 가령 반야경의 등지왕삼매(等持王三昧)·법화경의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열반경의 부동삼매(不動三昧)와 같은 것에 현저하다. 대승선관으로 중요한 것은 관불삼매(觀佛三昧)·법화삼매(法華三昧)·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일행삼매(一行三昧)·제법실상관(諸法實相觀)·관무량수경법(觀無量壽經法:반주삼매는 그 일례이다) 등이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선정은 그것이 대승경전에 있는 이상 고정적인 실체 관념을 부정하는 공사상을 기체로 하고 있으며, 객관적으로 이상을 추구하여 선관의 근거를 경전 자체에 두며, 자성청정심의 본유(本有)를 상정하면서 선정의 과정을 주로 삼고, 번쇄한 선관을 배척하고 일법에 철저하려는 것이며, 단순히 좌선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그 정신으로 삼아 일관하려고 하고, 삼계설(三界說) 등과 결합하는 것을 피하고 현세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한다.
선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석존으로부터 달마에 이르기까지 28조의 상승(相承)이 있고, 나아가서 과거 6불을 더하여 불타에게 연결되는 전등(傳燈)을 보인다. 이것은 중당(中唐) 이후 선종이 실천적으로 독립하면서부터 교조(敎祖)의 완결성과 전등의 순수성을 과시하여 석존의 성도에서 근원을 추구하고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정통성을 연결시켜 만들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중국선의 전개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된 것은 A.D 67년으로 가섭마등과 축법란 등이 낙양 백마사에 머물면서부터다. 이후 선경(禪經)이 전래돼 안세고에 의해 소승계통의 <안반수의경> <선행법상경>과 지루가참에 의해 대승계통인 <반주삼매경> <도행반야경>, 구라마집에 의해 <선법요해> 가 전개되었다.
중국에서의 선의 역사도 이와 같은 선의 본질적 성격을 고려하면 불교가 처음 전래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후한대의 안세고나 지루가참이 번역한 초기의 소승, 대승의 여러 경전 가운데는 직접 선 내지는 삼매의 실천을 선양한 곳이 몇 군데 보인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볼 때, 선은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후에 곧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선의 실천에 열심인 불교인 즉 선자(禪者)가 점차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불교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선과 유사한 종교적 실천방법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장자>에서 설한 진인(眞人)의 호흡법이나 이것에 영향을 받아 후에 태식법(胎息法)으로서 완성된 신선방술의 호흡법이 그것인데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 경지의 표현도 불교의 선의 경지의 그것과 대응하는 면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중국선이 노장사상이나 신선도와 종종 교섭하면서 전개되어가는 것은 오히려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양상을 가진 선의 실천은 선자들을 배출하면서 각지로 전해져 갔다. 그러나 북위시대가 되면 다시금 새로운 선이 중국에 전해지게 된다. 이것이 이후 중국선의 개창자가 되는 보리달마(菩提達摩)의 선이다. <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페르시아 출신이다. 중국으로 건너와 양녕사 구층탑의 금반(金盤)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종소리가 바람을 머금고 울려퍼지는 것을 듣고 “나는 150살이 되는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사원은 보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입으로 나무(南無)를 외우고 매일매일 합장했다고 한다. 또한 담림의 기록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인도 국왕의 셋째 아들로서 대승의 도에 마음이 끌려서 출가하여 세상에서 뛰어난 덕을 갖추었으나 멀리 산과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건너 왔다고 한다. 보리달마의 출신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으며 건너온 경로에 대해서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서역을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달마의 가르침은 이입사행(二入四行)으로 총괄되는 것으로 즉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으로 구별되는 행입(行入)이다.
먼저 이(理)에 들어가는 이입(理入)이란 마음을 편안히 하는 실천으로서 그것은 경전의 취지를 깨달아서 중생의 동일한 진성(眞性)을 깊이 믿고 벽관(壁觀)에 확고히 머물러서 차별, 상대의 입장을 떠나 진리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다음에 행에 들어가는 행입(行入)에는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의 네 가지가 있다. 보원행(報寃行)이란 어떠한 괴로움이 닥쳐도 그것을 자기의 악업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달게 받아 들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 소득도 없는 죄라고 호소하지 않는 것이다. 수연행(隨緣行)이란 고락, 득실은 모두 연에 의한 것이라고 관하여 마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스스로 도에 따르는 실천이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 만유는 공이며, 현실의 세계는 편안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아무 것도 구하거나 원하지 않는 실천이다. 칭법행(稱法行)이란 본래 청정한 진리에 들어맞는 실천을 말하며, 직접적으로는 더러움이나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관(空觀)에 입각해서 행해지는 육바라밀을 말한다. 이상에서 보리달마의 선은 명확히 공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구체적, 현실적이라는 것, 그리고 벽관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보리달마의 선은 혜가(慧可)에게로 전승되었다. 혜가는 6년간 달마에게 배우고 일승을 깊이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선사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확실한 것은 그에게서부터 능가종(楞伽宗)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능가종은 <능가경>을 소의로 연구하며 그 정신을 추구하였는데 <속고승전>에는 달마가 이것을 혜가에게 전하고, 혜가가 처음으로 그 요지를 체득한 것으로 이후의 계보에 기재되어 있다.
후세의 전등설에 따르면 선종의 제3조는 승찬(僧璨)이다. 승찬의 사적은 현재 거의 알 수 없으며 <속고승전>에 혜가문하의 한 사람으로 ‘찬선사’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설에는 사공산에 숨어서 좌선에 전념하고 12년간 그를 섬긴 도신에게 법을 전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제4조 도신(道信)의 사적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12살이 지나자 서주 완공산에 들어가 두 스님에게서 10여년간 선을 배웠으며 601년 경에 출가하여 길주사에 머물렀다. 그 후 형산으로 향하는 도중 주위의 만류로 노산의 대림사에 10년간 머물렀으며 초대를 받아 쌍봉산에 들어가 문도 500명 이상의 대교단을 형성하였다. 저서에 <보살계본>,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도신의 사상적 입장은 명백하지 않다. 그러나 <능가사자기> 등에 의하면 그가 천태 지의와 마찬가지로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중시하고 그것을 통해서 불성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신의 선은 문하의 홍인(弘忍)에게 계승된다. 그는 황매현 출신으로 7세 때 도신에게 사사하고 마침내 그 법을 이었다. 수행시 낮에는 노역에 종사하고 밤에는 열심히 좌선했다고 한다. 황매현의 동쪽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선을 알렸으므로 그의 선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동산법문의 사상적 내용을 분명히 알기는 어렵다.
홍인 이후 선종은 크게 북종(北宗)과 남종(南宗)의 두 파로 나뉜다. 이 가운데 처음에 우세했던 것은 북종선으로 숭산, 장안을 중심으로 북지(北地)에 널리 전해진 선계통이며 그 대표적 인물은 신수(神秀)이다.
신수는 젊어서 노장, 유학에 정통하고 652년 낙양의 천궁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50세 가까이 되어 홍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6년간 사사했다. 홍인의 법을 이은 후 의봉(儀鳳)년간에 형주 옥천사의 승적에 속하여 그 근처에서 도문사를 열었으며 그의 주변에는 많은 수행자가 모였다고 한다. 701년에 측천무후의 부름을 받아 가마를 타고 어전에 들어갔으며 그 때 그는 가신(家臣)의 예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양경(兩京)의 주주(注主), 삼제(三帝)의 국사라고 불리운다. 저서에 <관심론> 1권, <화엄경소> 30권, <묘리원성관> 등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후대의 서적 인용 가운데서 그 일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신수 다음 대까지는 보적(普寂)이나 의복(義福) 등의 활약으로 북종선이 융성했지만 그 후로는 점차로 쇠약해져서 주류의 자리를 완전히 남종선에게 양보하게 된다.
남종선의 시조는 혜능(慧能)이다. 혜능의 선조는 대대로 범양에 살았지만 아버지의 좌천으로 인하여 신주(新州)민이 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남해로 이주했으며 집이 가난하여 땔나무를 팔아서 어머니와의 생활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이윽고 어느 날 마을의 손님 한 사람이 숙사로 돌아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홍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8개월간 방아지기로 생활하면서 법을 이었다. 이 때 혜능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라고 전한다. 그 후 676년에 <열반경>의 학자로서 이름난 인종(印宗)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후 소주의 조계 보림사에 거주하면서 많은 선자를 키우고 선풍을 날렸다. 남종선은 도생(道生)에 의해서 시작되는 돈오(頓悟)사상의 전통 위에 서서 본래 자기의 청정성, 완전성의 철저한 자각을 지향하고 있다.
혜능의 문하 가운데서 남종선의 정통성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또한 그 입장을 분명히 한 이가 신회(神會)이다. 신회는 양양 출신으로 오경, 노장을 배운 후 출가하여 혜능의 만년에 그 평판을 듣고 문하가 되어 수년간 배웠다. 720년 칙명에 의해서 남양의 용흥사에 머물고 732년에는 융성을 자랑하는 북종에 대해서 종론(宗論)에 도전했다. 745년 경에는 낙양의 하택사에 들어가 크게 남종선을 선양했으나 753년 북종의 입장에 선 관리에 의해서 유배되어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2년 후 안록산의 반란을 계기로 다시 낙양에 초대되어 국가정책의 협력을 통해서 양경(兩京)의 부흥에 공헌하고 숙종으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신회의 만년은 그 자체가 북종의 몰락과 남종의 흥기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혜능의 선을 계승한 것 가운데서 점차로 발전해간 것은 홍주종(洪州宗) 즉 남악 회양(懷讓), 마조 도일(道一)의 계통이다. 그 주된 이유의 하나는 마조 도일이 선사상의 혁신을 이룩하고 선을 중국에 토착화시켰기 때문이다. 도일은 한주 출신으로 속성은 마씨이다. 어려서 홍인의 법을 이운 지선의 제자인 처적(處寂)에게 배우고 구족계를 받았다. 이윽고 회양의 문하에 들어가 심인(心印)을 전해 받은 후 강서의 임천, 홍주 등에서 크게 선을 알렸다. 본격적인 선의 융성은 강서(江西)의 마조와 혜능의 문하의 청원 행사(行思)의 법을 호남(湖南)의 석두(石頭)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조의 선은 80여 명의 제자들에 의해서 장안을 위시하여 각지로 전파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백장 회해(懷海)가 유명하다.
회해는 선종 사상사에서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첫째는 당시까지 대부분 율사에 속해 있던 선원을 독립시키고 대소승의 계율을 집약, 절충해서 교단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사회적 독립의 기초가 확고해진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마조의 선이 자유로운 생활의 절대긍정에 빠질 위험에서 구제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마조의 정신을 토대로 당시 이미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던 승려의 노동을 명확히 긍정하여 ‘하루 노동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사상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선종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지지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지만 동시에 출가자의 생산노동, 경제행위를 엄격히 부정하는 불교의 전통적인 노동관을 뒤엎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중국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말의 회창의 폐불사건은 이미 쇠퇴하고 있던 불교계를 사정없이 습격하였다. 그 때 파괴된 사원이 약 4만5천이며 환속된 승려는 26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원을 의지처로 했던 불교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거의 멸망의 위기에 빠져들었지만 오직 선종만은 그렇지 않았다. 선종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단숨에 상승기류를 타고 당말에서 오대에 걸쳐 눈부신 오가(五家)의 선시대를 출현시킨다.
오가(五家)란 선풍의 상위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서 위앙종, 임제종(臨齊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을 말한다. 여기서 다시금 송대에 임제종에서 분리된 황룡(黃龍), 양기(楊崎)의 2종을 합쳐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고 한다. 이 오가칠종은 어느 것이나 혜능의 남종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송대에 들어서 선종의 공안이 만들어지게 되는 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설두중현(雪竇重顯)이 뽑은 송고백칙(頌古百則)과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뽑은 송고백칙이다. 설두 중현이 묶은 송고백칙은 원오극근이 벽암록(碧巖錄)으로 펴냈고, 굉지 정각의 송고백칙은 종용록으로 남았다. 어쨌든 벽암록과 종용록(從容錄)에 이르러 선종의 기연어구(機緣語句)와 문답상량(問答商量)이 정형화된 틀로 묶여서 수행의 지침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일본 조동종의 조사인 도오겐은 선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백해무익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는 선종적 독립의 시기를 송대 정도로 보고 있기도 하다.
선의 문답이 곧 불교의 정수를 거량(擧量)하는 법의 문답이라고 할때에, 어찌 송대에만 있고, 선종에만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에서 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간화선(看話禪)의 종풍(宗風)이 형성되고 난 이후에 발전된 조사선(祖師禪)의 면목속에서 드러나는 여러가지 문답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러하기에 중국선종의 성립을 간략히 고찰한 것이다. 하지만 간화선이 아닌 묵조선 계통의 조동종과 초기 선종사에 선의 문답이 없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 많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불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 바로 간화선의 종풍이며, 여기에 기반한 문답상량이 많기 때문에 간화선을 주로 고찰하는 것이다. 아무튼 간화선의 종풍은 대혜종고에 이르러 거의 완결적 구조를 갖추게 되며, 여기에 비해서 굉지정각의 선풍이 차별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대혜종고와 굉지정각이 서로 비판하는 가운데, 간화선과 묵조선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국의 선종사상
한국불교가 4세기에 처음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래로 여러가지 형태와 부파들을 이루면서 시행되어 왔다. 오늘날 여러 군소종파들이 난립한 양상이기는 하나, 주종(主宗)을 이룬 조계종(曹溪宗)이 가장 대표적인 종단으로서 선종(禪宗)을 표방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실상산문(實相山門) 실상사(828년)와 가지산문 보림사(迦智山門 寶林寺 860년경)가 개창된 이래로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구산선문(九山禪門)이 개설되어 각 문파별로 고려조를 통하여 그 교세를 떨쳤었다. 그 가운데 희양산문 봉암사(曦陽山門 鳳岩寺) 실상사·보림사는 지금까지 면면히 존속해 오고 있는데, 봉암사는 지금도 많은 운수납자가 모여서 정진하는 참선도량이다. 선문개창조(禪門開創祖)들의 법계(法系)를 살펴보면 대부분 마조문하(馬祖門下)에서 이어오므로써 조사선(祖師禪) 도리를 천양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에 와서 구산선문은 그 쇄퇴기를 맞이하였고, 이 무렵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1)와 나옹혜근(懶翁惠勤:1320~1376)및 백운경한(白雲景閑:1298~1374)등이 원(元)나라에 가서 임제선맥(臨濟禪脈)을 직접 받아 옴으로써 이후 계승되어 온 선종의 내용은 임제종맥인 것이다. 고려조의 부파불교는 이조의 억불정책 아래서 갖은 고초를 받으면서 부침(浮沈)을 거듭하다가 급기야는 선(禪) 교(敎) 양종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고, 배불정책의 박해 때문에 불교는 산중으로 숨어들면서 선종 위주의 불교로 그 양상을 나타낸 나머지, 오늘날 중추종단(中椎宗團)인 조계종이 선종중심의 교단을 표방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큰 불법사태(佛法沙汰)였던 당대(唐代)의 회창법란(會昌法難:842~845))의 결과로 당시의 모든 교종(敎宗)들은 거의 멸절하기에 이르렀던 반면, 산중과 변방에서 선종만이 살아 남아서 당·송 이후 중국 불교를 담당하여 꽃을 피웠던 일로 비춰볼 때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선종이 표방한 그 이념은 부처님께서 붓다가야에서 몸소 실참실오(實參實悟)하여 중생에게 베푸셨던 도리로서 바로 불교의 핵심이며 요체이기 때문에, 불교가 혹독한 시련 다음에 물려받은 선종의 이 임무는 당연한 귀결(歸結)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선사상은 한 마디로 간화선법(看話禪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혜(大慧宗果:1089~1163)의 <서장(書狀)>에서 확립된 이 참선법은 조사선 가풍과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활발발(活盡盡)한 임제종지를 그대로 전승한 것이다. 달마스님(達磨:?~529)이 동토(東土) 중국에 와서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자성을 보아 성불하는(直持人心見性成佛)」법을 표방하므로써 선종의 원류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부처님 경전을 중심으로한 교가(敎家)에서 방편적인 말씀과 우회적인 수행법으로써 추구한 내용이 아니라, 방편과 차제(次第)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성을 사무쳐 깨달아 성불케하는 돈오견성법(頓悟見性法)이다.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臧)을 마하가섭이 전지한 이래 서천 인도에서 면면히 계승되어 제 28대인 달마스님이 그의 스승인 제 27조 반야다라의 부촉을 받고 이를 동토에 전래한 것이다. 이후로 6대로 계계상승(繼繼相承)하여 동토 제6조 혜능대사(慧能:638~713)에 이르렀는데, 6조대사의 법어집인 <단경(壇經)>은 선종의 돈오견성법을 극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육조의 돈법사상(頓法思想)은 한마디로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아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룸(識心見性 自成佛道)」에 있다.라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번 듣자 말끝에 크게 깨치고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 보았느리라(我於忍和尙處 一聞言下大悟 頓見眞如本性一壇經) 고 하여 선종의 돈오견성법을 고취하였으며, 또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다(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徹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 壇經)고 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은(內外明徹)경계를 요달하여 구경묘각(究竟妙覺)을 성취하면 이것이 견성해탈이고 반야삼매이며, 곧 이는 무념이라고 하였다. 이 무념은 제 8아뢰야 미세망상까지 탕진한 구경무심(究竟無心)을 일컬으며, 이후 선종은 이 무념을 종취(宗趣)로 삼아 계승되어 온 것이다. 곧 <단경>에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취로 삼는다(比敎門 立無念爲宗)고 분명히 말하였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이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님의 지위에 이른다.(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位地)고 하여, 무념의 돈법을 깨치므로써 부처님 지위에 이르는 구경극칙(究竟極則)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말하기를 나는 이 가르침의 법을 뒷 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한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한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보아라. 고 하므로써, 바야흐로 조사선의 지취(旨趣)를 보여주고 있다.
육조 아래로 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과 청원행사(靑原行思:?~740)의 두 맥(脈)으로 나뉘고, 아래로 5가7종(五家七宗)이 파생하여 천하에 대총림(大叢林)을 이룬다. 회양의 아래서 이른바 한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다 밟아버린다(一馬駒踏殺天下人)고 하는 마조(馬祖道一:709~788)가 출현하였고, 그 아래로 백장(百丈懷海:749~814) -황벽(黃檗希運:?~850) -임제(臨濟義玄:?~866)로 이어지면서 조사선이 형성되었으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수 많은 공안(公案)들이 산출되는 것이다. 특히 임제스님에 이르러서는 활발발(活盡盡)한 대자유인을 구가(謳歌)한 산조사(活祖)의 가풍이 이뤄지면서 이러한 전통과 이념을 이어받아 임제종파는 5가7종 가운데서 가장 왕성한 종가(宗家)로서의 교세를 자랑하였고, 지금 논의코저 하는 간화선은 바로 임제문하에서 개발된 가장 훌륭한 참선법이 된다.
임제 아래로 9대로 전하여 오조법연(五祖法演:?~1104)에 이르는데, 법연은 조주(趙州從劤:778~897)의 무(無)자 공안으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음을 보게 되며, 법연의 제자인 원오(圓悟克勤:1063~1135)는 그의 <심요(心要)>에서 보더라도 조사공안으로써 역시 화두 공부인을 다스렸고, 원오의 아래 대혜는 그의 <서장>에서 바야흐로 간화선참선법을 확립시켰다.
<서장>은 서간체(書簡體)의 법어집이다. 송(宋)나라 말 고위관직에 있는 사대부(士大夫)들이 대혜에게 편지로 법을 물어온데 대해서, 대혜가 답장 형식으로 설한 법문들이다. 전체 62편의 서장(書狀)들 가운데 60편이 당시의 지식층들을 상대로한 참선에 관한 내용들이다. 각 편마다가 그 독특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소홀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흐르는 주된 내용은 묵조사선(默照邪禪)을 공박하면서 조사언구(祖師言句)인 화두(話頭)를 참구하여 일단대사인연(一段大事因緣)을 요달(了達)토록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서 무(無)자 공안을 「생사의심을 부수는 칼(破生死疑心底刀子也)」이며 「허다한 나쁜 지각들을 꺾는 무기(逐許多惡知惡覺底器仗)」로서, 모든 공안 가운데 가장 간명하고 날카로운 조사방편으로써 제시하고 있다.
이 무’자 공안은 <선관책진(禪關策進)>의 모두(冒頭)에서 황벽스님이 공부인의 화두로써 최초로 제시한 이래 오조법연선사가 구체적으로 적용하였고, 대혜의 <서장>에 와서 간화선의 대표적 공안으로 확립되었다. 황벽선사는 말하기를 장부라면 저 공안을 보되, 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자 조주가 대답하기를 「없다(無)」고 하였으니, 오직 하루 스물네시간 가운데 저 「무」자를 보아 낮이고 밤이고 참구하라(선관책진)고 하였다.
보조(普照知訥:1158~1210)는 그의 말년(209)에 발표한 <절요(節要)>말미에서 「생사를 벗어난 한가닥 활로(出身一條活路)」로서 제시하였는데, 이는 한국불교에 간화선법이 도입된 최초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또 멀리는 <단경>을 스승 삼고, 가까이는 <서장>으로 벗삼는다(遠師壇經近友書狀)고 한 그의 수행관에서 보더라도, 그는 일찍부터 이 <서장>을 수행의 지침서로써 중시하였음을 알수 있다. 그의 입적 후에 발표된(1215)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은 <서장>에서 말한 내용을 가지고 경절문활구참선법(經截門活句參禪法)을 세웠다. 보조는 초년의(수심결(修心訣)>과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등에서 돈오점수적(頓悟漸修的)인 방법으로 선과 교를 융합시켜보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말년에는 선과 교를 분리하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간화결의론>과 함께 발표하므로써 선과 교의 수행체계를 분명히 하였다.
보조는 <간화결의론>에서 이 이치(교리)가 비록 가장 원묘(圓妙)하지만 이 이치(교리)가 비록 가장 원묘(圓妙)하지만 모두 정식(情識)으로 들어 해석하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에, 선문인 경절문에서는 낱낱이 불법에 대한 알음알이의 병으로 모두 가려내는 것이다. - 원돈신해(圓頓信解)의 참다운 언교가 항하의 모래 수 같이 많으나 죽은 말(死句)이라고 부르니, 사람들에게 알음알이의 장애를 내게하기 때문이다. 무릇 참학하는 이는 모름지기 산 말(活句)을 참구 할 것이요 죽은 말(死句)을 참구하지 말라. 산 말 아래서 깨치면 영겁토록 잊지 않고 죽은 말 아래서 깨치면 자기 마저도 구제하지 못한다. - 지금 논하는 선종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지름길(徑截)로 깨달아 드는 문(門)은 격량(格量)을 초월하기 때문에, 비단 교학자가 믿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본 선종의 하열한 근기와 식견이 얕은 사람도 아득히 알 수 없다. -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홀연히 한 번 밝힌(一發)이는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를 몸소 증득한다.고 말하므로써, 경절문활구인 화두로써 자성을 확철히 깨치면 구경(究竟)을 요달한 것임을 명언(明言)하였다. 이러한 법은 보조의 제자인 진각(眞覺慧諶:1178~1234)에게로 이어졌고, 이후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계승되면서 현재 한국의 선사상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면 불조의 공안인 화두가 활구(活句)라고 하였는데, 활구와 사구(死句)의 차이는 무었인가? 활구란 일체의 정식망상과 분별의식을 초월한 불조의 간명직절(簡明直截)한 기연(機緣) 언구(言句)로서, 여기에는 말과 생각이 끊어지고 이치의 길·말의 길·뜻의 길이 끊어졌으며(沒理路 沒語路 沒義路), 아무 재미도 없고 만져볼 만한 아무 단서도 없는 것이다(沒滋味 無摸索底巴鼻). 마음의 길(心路) 마저 끊어진 이 활구는 팔만장교의 교리로써도 미치지 못한다. 활구와 반대된 사구란 말과 생각이 작용하며, 원돈문(圓頓門)의 교리로서 이치의 길 뜻의 길 말의 길이 있고, 들어서 헤아리는 알음알이와 생각(聞解知見思想)이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오는 그의 <심요(心要)>에서 말하기를 그들은 활구를 참구하였고 사구를 참구치 않았다. 활구 아래서 깨치면 영겁토록 잊지 않고, 사구 아래서 깨치면 자기마저도 구제하지 못한다. 만약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되고자 할 진댄 모름지기 활구를 밝힐지니라(他參活句 不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自救不了 苦要與祖佛爲師 須明取活句)고 하였다. 여기서 그들’이란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가운데 덕산·설봉(雪峰) 암두(岩頭)의 3부자(父子)를 말한다.
공부의 명제(命題)인 화두를 왜 공안(公案)이라고 하는가? 공안이란 관공서의 안건(公府案牘) 곧 공공법규(公共法規)를 말한다. 법률·법규가 있어야만 나라를 다스리듯이, 조사문중에서 공부인을 바로 잡아 이끌고 안목(眼目)의 밝고 어둠을 판별하는데는 최후의 관문에 도달한 불조의 공안으로써 바른 법령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봉명본(中峰明本:1243~1323)은 말하기를 대저 공안이란 번뇌망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이며, 보고 듣는 것에 가리운 장막을 벗겨주는 금칼이며, 생사의 뿌리를 잘라버리는 날카로운 도끼이고, 범·성의 면목을 비춰주는 신령스런 거울이다. 조사의 본뜻이 공안으로써 분명히 밝아지고 부처님의 마음이 공안으로써 드러난다. 생사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득히 벗고 크게 통달하여 함께 증득하는 요결은 이 공안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른바 공안이란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 할 뿐이니, 진실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찌 그 비슷한 점이라도 엿볼 수 있겠는가. -산방야화”고 하였다.
화두(話頭)란 말’ 또는 말씀’의 뜻으로서 공부인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인 불조의 기연(機緣)과 언구(言句)를 말한다. 곧 우리는 자기의 본참공안인 화두를 타파(打破)하여 자성을 확철히 깨치면, 그 자리가 생사를 요달한 곳이며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된 곳이라. 이러한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서장>과 그 이후에 나온 간화선 지침서들 가운데서 그 요점들을 살펴봄으로써 한국불교 선사상의 대강을 짚어보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
<서장>은 고봉원묘(高峰原妙:1238~1295)의 <선요(禪要)>와 함께 이조 초기 이래로 지금까지 전통강원의 사집교재(四集敎材)로서 꾸준히 읽혀오면서 한국의 선종사상에 기여한 바가 크다. 같은 사집교재인 <도서(都序)>와 <절요(節要)>에 영향을 입어서 한국의 선종사상이 돈오점수법(頓悟漸修法)에 있는 것처럼 자못 변형적으로 시행되 왔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장>의 거의 모든 법문들이 재가신자(在家信者)들을 위한 것이므로, 대혜가 잠시 선교방편(善巧方便)을 베풀어 이끌어준 내용 때문에 돈오점수적인 법문으로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장>은 <선요>와 함께 선문의 본문도리를 깨쳐서 자성을 요달케하는 간화선의 법문들이다.
대혜는 처음 조동종(曹洞宗)의 두 스님 밑에서 그 종지를 얻었다고 인정받았으나, 여기에 만족치 않고 다시 담당문준(湛堂文準:1061~1115)을 참례하여 칠년만에 깨친 곳이 있더니, 담당이 임종에 원오극근을 찾아뵙고 큰 일을 성취하라는 부촉을 받았다. 원오에게 가서 그의 말끝에 크게 깨치고 나서, 초년에 조동의 두 스님의 지시로 참구했던 묵조선이 병폐가 많음을 알고 뒷날의 공부인을 위하여 그 폐해를 없애주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전편을 통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묵조선을 묵조사선(默祖邪禪)으로서 공박하여, 오늘날 일종의 머리깍은 외도들이 있어, 자기의 눈이 밝지 못하면서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쉬어가고 쉬어가라 하는데, 만일 이와같이 쉴진댄 천불이 출세함에 이르더라도 또한 쉴수가 없이 마음으로 하여금 더더욱 미민케 할 뿐이다. 비춰오고 비춰가며 지녀오고 지녀가매 더더욱 미민(迷悶)을 더하여 요달할 기약이 없으리니, 자못 조사의 방편을 잃어서 사람을 잘못 지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일향으로 헛되이 낫다가 헛되이 죽게 하도다. ---- 이런 사람은 도리어 독해(毒害)로서 사람의 눈을 멀게함이 작은 일이 아니로다”고 하였다. 위에서「조사의 방편을 잃는다」고 한 것은 조사공안인 화두를 참구치 않고, 다만 말없이 고요히 비춰보라고 가르치는데, 사람에게 이렇게 공부를 지시하면 공에 잠기고 고요함에 응체해서(沈空滯寂) 사람을 구제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조동의 묵조선은 본시 자성의 본연자리를 관조하는 것이지만, 이는 자칫 죽은 물 속에 가라앉은 용(龍)과 같아서 아무 활기가 없는 참선이 되기 쉬우므로 생사해탈법을 성취하기가 어려움을 말한다.
묵조선은 결국 조용한 가운데 공부(靜中工夫)에 치우쳐서 시끄러운 가운데서 힘을 얻지못한 병폐가 따르기 때문에,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양쪽에서 다 힘을 얻는 공부를 하도록 지시하여 만일 고요한 곳으로써 옳음을 삼고 시끄러운 곳으로 그름을 삼는다면, 이는 세간상을 무너뜨리고 실상(實相)을 구하며 생멸을 여의고 적멸을 구함이니,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할 때 바로 힘을 잘 들일지어다. 시끄러운 속에서 고요한 때 소식을 갑자기 쳐서 뒤집으면 그 힘이 대의자·포단 위 보다 능히 천만 억배나 더 수승하니라”고 하였다. 위에 말한 병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생사에 자유자재한 대해탈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조사방편인 화두 특히 조주의 무’자를 참구하도록 지시한다.
“근년이래로 일종의 삿된 스승들이 있어 묵조선을 말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열두 때 가운데 이 일을 상관치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서 소리를 내지 말지니, 지금에 떨어질까 두렵다」고 하나니, . 다시 현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다만 묵연하므로써 극칙(極則)을 삼으므로, 내가 구업(口業)을 아끼지 않고 애써 이 폐단을 구제했더니, 이제 그름을 아는 이가 점점 있게 되었다. 원컨대, 공(公)은 다만 의정(疑情)을 부수지 못한 곳을 향하여 참구하되 행주좌와에 「승이 조주께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없다’하심」을 놓아버리지 말지어다. 이 한 글자(無)는 바로 생사의심을 부수는 칼이니라..그저 다만 의심을 부수지 못한 곳에다 대고 밀어붙여서 곧 스스로 기꺼이 목숨을 한번 버린다면 문득 요달할 것이다. 그때에 바야흐로 고요한 때가 곧 시끄러운 때요 시끄러운 때가 곧 고요한 때며, 말할 때가 곧 잠잠할 때요 잠잠할 때가 곧 말할 때인줄 믿어서 사람에게 애써 묻지 않아도 자연히 삿된 스승의 함부로 설하고 어지러이 말함을 받지 않으리라.또 대혜는 말하였다.
“나도 또한 일찌기 이런 무리에게 그르친 바가 되었더니, 뒷날 만일 참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던들 일생을 거의 헛되이 보낼뻔 했더니라. 매번 사량컨대, 바로 가히 견딜수 없는지라, 그러므로 구업을 아끼지 않고 애써 이 폐단을 구제했더니, 이런 점점 그름을 아는 이가 있게 되었다. 만일 요컨데 지름길(經截)로 깨달아 알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이한 생각이 홀연히 한번 부숴짐을 얻어야 바야흐로 생사를 요달하며 바야흐로 이름하여 깨달아듦이라 한다. 그러나 절대로 마음을 두어 부수기를 기다리지 말라. 만일 마음을 두어 부수려는 곳에 두면 영겁토록 부술 때가 없으리라. 다만 망상전도된 마음과 사량분별하는 마음과 삶은 좋아하고 죽음은 싫어하는 마음과, 지견으로 이해하는 마음과 고요함을 기뻐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꺼번에 눌러내려서, 다만 눌러내린 곳으로 나아가서 「승이 조주께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시되 없다’하는 화두」를 볼지어다. 위에서 이런 무리’란 조동의 삿된 스승들을 일컫는다.
종문(宗門)에 수많은 공안들 가운데서 오로지 한 공안만을 가지고 뚫으면 법계의 무량한 회향(法界無量回向)이며 삼세를 요달한 곳(三世了達處)이라고 하였다. 오로지 한 의심만을 부수면 모든 의심이 한꺼번에 부숴진다고 말하여 갖가지 수승함을 한꺼번에 탕진해 버리고 나서야 바야흐로 뜰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삼서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屎猛) 개는 불성이 없음(拘子無佛性) 한 입에 서쪽 강의 물을 다 마심(一口知盡西江水) 동쪽산이 물 위로 간다(東山水上行)등의 화두를 잘 보아서, 홀연히 한 언구 아래서 뚫어야만 바야흐로 법계무량회향이라 한다. . 다만 「승이 조주께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시되 없다’하심을 볼지니, 청컨대 다만 부질없이 사량하는 마음을 잡아서 무’자 위에 돌이켜 두어 시험삼아 생각해 보아라. 홀연히 생각할래야 미치지 못하는 곳을 향하여 이 한 생각이 부숴짐을 얻으면 문득 삼세(三世)를 요달한 곳이니라. .천 의심 만 의심이 다만 한 의심이니, 화두 위에서 의심이 한꺼번에 부숴지리라.고 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참선법의 본령(本領)은 한 말씀 끝에 단박 생사를 요달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지 않을 때는 모름지기 장원심(長遠心)을 갖고 오래오래하면 자연히 순숙(純熟)해져서 성돌 맞듯 맷돌 맞듯(築着啓着) 본래마음에 계합한다고 하였다.
“오로지 한 말씀 한 구절 아래 직절(直截)하게 알아차려서 멀리 우회하지 않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니, 실제로 말한다면 터럭 끝만큼도 간격이 없다. 부득이하여 직절(곧장 끊는다)이란 말도 하지만 이것도 벌써 우회하여 굽은 것이며, 알아차린다(承當)고 한 말도 벌써 빗나가 버린 것인데 하물며 다시 가지와 덩굴을 이끌어서 경을 들먹이고 교를 들먹이며, 이치를 말하고 일을 말하며 구경(究竟)을 삼고자 하겠는가.고 하여 선종의 근원을 바로 끊는(直截根源) 이치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또 운문(나)도 평소 부득이해서 사람들에게 좌선토록하여 고요한 곳에서 공부를 짓도록 하지만, 이는 병따라 주는 약으로서 실제로는 이렇게 사람을 지시할 곳이란 없는 것이다”고 하여, 선종의 근본법은 좌선에 국집하지 않는 것임을 말하였다.
결국 이 도리는 왁! 한 소리쳐서( 地一下) 단박에 깨치지 않고는 안되는 것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장구한 신심(信心)과 원력(願力)을 가지고 오래오래 공부를 지어가면 자연히 순숙해져서 본마음(本心)에 계합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그 도리를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리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如人飮水 冷暖自知). 그리하여 선 곳은 이미 익고 익은 곳은 이미 설어진다(生處己熟 熟處己生). 익은 곳이란 어떤 것인가? 오온·육입·십이처·십팔계·이십오유에 있어서 무명업식의 사량계교하는 심식이 주야로 아지랑이처럼 잠시도 쉬지않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대혜의 중요한 법문이다. 이럴 때 우리의 공부힘은 어떤가? 힘덜린 곳이 힘얻는 곳이며, 힘얻는 곳이 힘덜린 곳이어서(省力處卽是得力處 得力處卽是省力處), 이 공부는 결국 추호의 힘도 허비하지 않는데 있음을 말하였다. 이 힘 덜리고 힘얻는 것을 일용간의 경계에 비춰서 점검하는데, 종문에서 이른바 「공부의 3분단(工夫三分段)」을 말한다. 곧 움직이거나 가만있거나 간에 공부가 한결 같음(動靜一如)과 잠자면서 꿈꿀 때 생시와 마찬가지로 공부가 한결같음(夢中一如)과 깊은 잠이 들어서 아무 생각도 작용하지 않고 꿈도 없는 경지에서 공부가 한결같음(寤寐一如)의 3단계이다. 이것은 화엄 10지(華嚴十地)에다 배대(配對)해서 점검할 수도 있는데, 몽중일여가 되면 병중일여(病中一如)로서 화엄7지에 해당하고 오매일여는 제 8아뢰야 미세망상 경계로서 제8부동지 부터 10지 등각까지가 이에 해당되며, 이는 자재보살(自在菩薩)지위로서 다음 생의 몸을 자기의 뜻대로 태어날 수 있는 의생신(意生身)을 얻어서 생사에 부분적인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문에서 표방한 근본법은 이 오매일여 경계까지도 투과하여, 여기에서 화두를 바로 깨쳐서 무심을 사무쳐 증득해야만(徹證無心) 크게 일해마친 사람(大了事人)이며 대무심무사도인(大無心無事道人)이다.
대혜는 이 3분단 이외에도 날로 오면서 연(緣)을 따라 놓아 비워서 뜻과 같이 자재하느냐? 네 위의 가운데 진로(塵勞)의 더 수승한 바가 되지 않느냐? 옛을 말미암는 곳에서 내달려 지음이 없느냐? 생사의 마음이 상속하지 않느냐? 다만 범부의 정을 다함이언정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느니라. . 일상에 연(緣)을 따르는 곳에서 상응(相應)하느냐? 일용의 연을 따르는 곳에 바깥 경계에 빼앗긴 바가 되지 않느냐? 사물과 서로 마주칠 때 능히 움직여 졸리느냐? 적정한 곳에 머물매 망상하지 않느냐? 그 일을 체구하매 잡념이 없느냐?고 하여 여러가지 경계를 가지고 공부의 힘을 점검하고 있다.
또한 공부인이 빨리 성취하고 속효심(速效心)냄을 경계하여, 너무 급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늘어지게 하지도 않아서 팽팽함과 느슨함이 득중해야만(緊緩得中)공부의 묘(工夫之妙)를 얻는다고 말하였다.
<서장>의 대의(大義)는 삿된 견해를 물리치고 바른 지견을 드러냄(斥邪解現正見)에 있다. 임제(臨濟)의 재현(再現)이라 일컫는 대혜가 <서장>전편을 통해서 말한 간화선, 특히 무(無)자 공안에 관한 이론은 조동종 묵조선을 위시한 종래의 참선법이 지닌 여러가지 병폐들을 종합적으로 다스리는 처방법에서 결론적으로 나온 참구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동의 묵조선을 묵조사선(默照邪禪)으로 공박하여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조사의 방편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을 잘못 지시하여 일향으로 허생랑사(虛生浪死)토록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자칫 침공체적(沈空滯寂)하여 조사의 뜻을 매몰시켜 버리고 본분도리를 영원히 참구(參句)치 못한 병통을 극복하여, 조사공안인 화두로써 깨달아 들도록 하는데 있다. 「여래의 안목(如來眼目)이요 조사의 골수(祖師骨髓)」라고 일컫는 공안으로써 참구하여 삿된 알음알이와 나쁜 견해(邪知惡解)를 물리치고 바른 견해를 얻어서 진정으로 크게 쉴 땅(大休歇地)에 이르는 가장 훌륭한 방편으로서 채택된 것이 간화선이며, 특히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가 분별의식을 초월하는데 지름길(徑截)의 언구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 간화선 활구참선법(看話禪活句參禪法)은 날로 더욱 치성해지는 현대인의 정습망상(情習妄想)과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다스려서 스스로 깨달아 생사를 초월케하는데 최선의 참선법이 되는 것이다.
<서장>과 함께 4집교재로서 통용되어온 고봉의 <선요>는 이 도리를 밝히는데 분연(憤然)한 신심과 원력을 고취시키는 분발심(憤發心)의 어록이다. 고봉이 실제로 3년을 죽기로 한정하고(三年死限) 혼침과 산란(昏散二魔)을 이기기 위해서 서서만 정진하다가 3년이 다 되던 즈음에 홀연히 깨치게 되었다. 5년이 지난 다음 설암조흠(雪岩祖欽:?~1287)에게 공부 3분단으로써 점검을 받은 결과, 아직 몽중일여의 경계에 도달하였을 뿐 오매일여를 투과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여기에서 고봉은 설암으로부터 오늘부터는 부처를 배우고 법을 배울 것도 없고 고금을 궁구할 필요도 없으니, 다만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고 잠이 깨면 곧 정신을 가다듬어 「나의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은 필경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할 것인가?」하라.는 지시를 받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내 일생을 바보처럼 지낼지언정 이 한 일을 결정코 밝혀내고야 말리라”고 하면서 5년을 정진하던 끝에 한 암자에서 지내다가 밤중에 잠이 깨어 이 일을 바로 의심하고 있던 차에, 같이 자던 도반이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의단을 타파하니, 그물에 갇혔다가 뛰쳐나옴과 같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고봉 스스로가 공부 3분단의 점검을 거쳐 공부를 성취한 기록은 간화선 납자에게 가장 실제적이면서 모범된 행리(行履)가 되는 것이다. 또한 고봉이 내세운 공부3요건(工夫三要), 곧 큰 믿음의 뿌리(大信根) 크게 분연한 뜻(大憤志) 큰 의심(大疑情)은 공부인의 중요한 경구(警句)로써 작용한다.
간화선 지침서로서 가장 중요한 책은 역시 <선관책진(禪關策進)>이다. 여기에 실린 여러 선지식들의 간절한 법어들은 납자들을 격발(激發)시키는데 충분하며, 그분들의 법을 위해 몸을 잊는(爲法忘軀)행리들은 우리를 크게 경책해 준다.
근세 한국에서 통용되어 온 <선문촬요(禪門撮要)>는 선문의 핵심법문들과 몽산법어(蒙山法語) 선경어(禪警語) 등이 함께실리므로써 간화선 지침서로서 크게 역할을 해 왔다. 여기에 포함된 보조의 <수심결> <정혜결사문> 등은 근세 한국의 선사상에 다분히 돈오점수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또 여기에 함께 실린 보조의 <간화결의론>과 <원돈성불론>등으로 보건대, 보조는 초년의 <수심결>과 <정혜결사문>등에서 보인 선과 교의 융합적 방법에서 탈피하여, 선과 교의 수행체계를 분명히 분리시켰음을 보게된다.
이조불교의 거장인 서산(西山休情:1520~1604)의 <선가구감(禪家龜鑑)>은 한국선문에서 가장 친숙한 지침서이다. 선문의 귀감이 되는 언구들을 발췌 수록하였는데, 이 책은 서산의 40대의 저술로서, 교학을 배운 다음에 선문에 드는(捨敎入禪) 공부방법을 제시하였다. 서산의 60대 저술인 <선교석(禪敎釋)>에서는 선과 교의 우열을 대비(對比)하여, 선은 군왕(君王)이 용상(龍床)에 군림한 것이며, 교는 만조백관(滿朝百官)으로 비교하였다. 그의 말년에 제자인 사명유정(四溟惟政:1544~1610)에게 부촉한 <선교결(禪敎訣)>에서는 공부인이 알지 못한다고 하여 교리로써 이끌어서 가르치지 말고, 곧바로 본분도리(本分道理)로써 보여주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증득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므로써, 본분종사로서의 약여(若如)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국의 선문은 신라 때 구산선문이 형성된 이래로 육조문하의 조계선종이 계승되어 왔다. 고려 말 태고와 나옹 등이 임제종맥의 참선법을 전래하고 부터 이씨조선을 통하여 간화선법이 시행되어 왔으며, 결국 오늘날 한국의 선종법은 간화선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선어록이란 무엇인가?
1) 불교 경전의 갈래
흔히들 사람들은 기독교의 성전은 신약과 구약 두 종류뿐인데, 불교의 성전은 왜 그렇게 많으냐고 한다. 그 차이는 불교에서는 부처가 한 말은 물론 그 제자들이 한 말도 성전 속에 넣어서 계산한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한 말을 이해하기 쉽도록 쓴 이른바 자습서(혹은 참고서)도 성전에 넣어서 계산한다. 이렇게 잡다한 불경들의 분류를 연구하는 것이 불전 목록학이다. 이 목록학을 바탕으로 대장경을 편집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어록은 무엇인가?
부처님을 믿고 수행하는 선사 스님들의 말이나 편지, 일생을 살면서 겪었던 일화, 죽었을 때에 남이 써준 비문 등을 모두 합쳐서 ‘선서(禪書)’라고 부르는데, 그 ‘선서’ 중에서 ‘어록’의 형태를 취한 것을 선어록이라 한다. 그러면 먼저 ‘선서’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그것들은 어떻게 분류되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가? 현재 학계에서는 이렇게 분류한다.
① 종의(宗義) ② 사전(史傳) ③ 어록(語錄)④ 명(銘)·잠(箴)·가송(歌頌) ⑤ 송고공안(頌古公案) ⑥ 선문학(禪文學) ⑦ 청규(淸規)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면 선서가 8만이 넘는 대장경 가운데 어디에 끼어 있는지가 궁금하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목록’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과 《만자속장경(卍字續藏經)》의 목록이다.
그리고 각종 대장경의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 《25종장경목록대조고역(25種藏經目錄對照考釋)》과 《불교총서(7종)색인(佛敎叢書(七種)索引)》(小關貴久, 名著普及會, 소화 59년)이다. 후자의 경우는 한역 장경은 물론 일본 번역 대장경도 수록되어 있고, 영인 대장경의 페이지 수를 기준으로 되어 있어 열람에 편리하다.
2) 선어록의 형태
경전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강사 스님들이 교학의 용어와 경전의 행상(行相)을 이용하여 불교의 핵심을 밝히려 노력한다면, 선사 스님들은 실제 수행에서 생기는 문제를 일상 회화를 통해서 설하게 된다. 선승들은 자신이 법상에 올라 이른바 상당설법(上堂說法)을 한다. 이와 함께 수행자들의 조참(朝參)이나 만참(晩參)에 ‘시중(示衆)’을 하거나, 문답을 통해 상대의 견지를 탐사하는 감변(勘辨) 등을 한다.
이런 것들이 본인 내지는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선어록이다. 선사들도 초기에는 물론 강사들처럼 정형화된 틀을 고수하지는 않지만, 경전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 불전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선서를 논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풍에 변화가 일어난다.
당나라 말기를 전후로 하여 경전 인용의 빈도가 줄어든다. 이 점은 후대의 선서들이 경전과는 무관하게 진행된 것을 상기할 때에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여하튼 이렇게 선어록이 편집되고 나면, 그 선어록을 교과서로 삼아 선사들이 강의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송고(頌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설두(雪竇:980∼1052) 스님의 《설두송고(雪竇頌古)》이다.
송고란, 말 그대로 옛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기연들을 운문체로 ‘코멘트’한 것이다. 송대에 이르러서는 ‘송고’를 ‘코멘트’하면서 선 수행자를 지도하는 이른바 ‘평창(評唱)’이라는 강의 형태가 생긴다. 대표적인 예로 원오(?悟:1063∼1135) 스님의 《벽암록》이라든가 만송(萬松:1166∼1246) 스님의 《종용록》 등이다. 한편, 개별적인 선서의 출현과 더불어 족보(=선종의 역사서)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들이 바로 ‘등사(燈史)’로서 《조당집(祖堂集)》이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등이다.
여기에서 다시 중대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것은 각 선사들의 이야기를 어떠한 순서로 편집 정리하느냐이다. 《조당집》이나 《경덕전등록》만 하더라도,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그 배열에는 상당한 특색이 있다. 즉, 혜능 스님 이하의 배열에 있어서 《조당집》은 청원행사(靑原行思) 스님의 계열을 먼저 하고, 《경덕전등록》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스님의 계열을 먼저 기술하는 점이다. 이 점은 결국 찬술자의 족보 의식과도 결부되는 것으로, 선종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런 현상은 《오등회원(五燈會元)》이나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등에 가서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3) 선종의 족보
우리가 알고 있는 당나라의 선승으로 달마 스님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달마 스님은 석가모니로부터 쳐서 28대 조사이고, 중국선종의 시조라고 한다. 이 달마 스님으로부터 해서 여섯 대를 내려와 그 정통을 이은 분이 제6대 할아버지, 즉 6조 혜능이다. 그러나 이것은 날조된 족보이다. 실제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주(周)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가 만들어낸 중국적인 각색이다.
더구나 5조 홍인 선사의 법맥은 후세 사람들이 북종이라고 깔아 뭉개는 대통신수에게 갔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이 계통을 뒤집어 놓은 사람이 하택신회(荷澤神會)이다. 신회 선사 자신이 7대 조사가 되기 위해서 자기 스승인 혜능을 6대 조사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세상은 묘하게도 선종 족보의 정통성은 신회 선사 쪽으로 가지 않았다.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가 나와서 자기의 스승 남악회양 선사를 추켜세우기 위해서 혜능의 정통제자는 남약회양이고, 남악회양의 정통 제자가 자기(=마조도일)라고 했다.
그리하여 하택사에 살던 신회 스님을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인다. 이런 전통이 굳어져 우리 나라에 지금도 “신회의 무리들은 절 문안으로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후손이 못나면 조상을 욕되게 한다. 그리하여 뒷날 선종사는 마조도일 계통을 최고로 쳤다. ‘붙인 일가’가 정통이 된 셈이다. 세간에도 족보 없는 사람들에게 쌀 몇 말 받고 족보에 넣어주는 것 있지 않은가?
이렇게 붙인 일가가 대종손 노릇을 한 것이다. 아니! 혜능을 6대 조사로 옹립한 사람이 누군데, 신회가 살아서 이 사실을 듣는다면 통탄할 일이다. 선종의 계보도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가 보다. 그러나 이렇게 날조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사회적 정치적 배경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배경을 무시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후세에 날조된 족보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좌 선 의
1. 해제(解題) 坐禪儀
좌선의란 좌선하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아무렇게나 앉아서 수선한다고 할 수 없고 반드시 일정한 방법을 취해야 올바른 참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신심명 . 십우도 등을 살폈는데, 일찍부터 좌선의 까지 넣어 선종에서 4부록이라 할만큼 보급돼 읽혔던 것은 좌선에 있어서 방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읽는 좌선의 텍스트는 일본에서 소개된 내용이 주류다. 일찌기 선종 4부록 이라 해서 일본에 전래된 것이 우리나라엔 이희익 선생이 그것을 번역 소개하면서 보급됐었다. 좌선하는 바탕이 중요시 되면서 널리 읽혀지고 있는 고전은 이 선종 4부록 에 들어 있는 좌선의 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만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수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면 그렇게 한 좌선법을 제공한 전기는 무엇인가. 적어도 경전에 근거해야 설득력을 가지므로 일찍부터 이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척돼 있었다. 우선 근거되는 경으론 관무량수경 이 있다.
[부처님께서 위제희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부인이여, 그대와 중생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 곳에 집중시켜 서쪽을 생각하시오.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모든 중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아니고 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볼 것이니,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해를 똑똑히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서 마음을 굳게 간직해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려는 해가 마치 서쪽 하늘에 매달린 북과 같음을 보도록 하시오. 해를 본 다음에도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그 영상이 한결같이 분명히 보이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을 해를 관하는 일상관(日相觀)이라 하며, 첫째 관이기도 합니다.]
즉 16관 중에서 일상관은 첫째 가는 관인데, 말하자면 극락세계를 관하고 거기에 나는 것을 희망하는 한 관법이다. 이것은 염불과 참선이 하나로 체계화되기 전의 원초적 입장을 제시한 것이다. 요점은 밑줄친 부분의 자세를 단정히 가다듬고 앉아 관하는 것인 바, 이것이 그대로 후세의 좌선법에 전승되었다. 즉 허리와 척추를 꼿꼿이 펴고 머리와 몸이 일직선이 되도록 하며 조용히 생각을 한 곳에 집중시켜 억념하거나 무념이 되거나 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눈은 코끼리처럼 조용히 뜨고 2미터 앞 정도를 응시하되 의식은 화두[公案]에 둔다. 두 손은 단전 앞에 포개어 놓고 둥근 원 모양을 취한다. 또는 두 팔을 무릎 위에 놓고 쭉 펴 자세를 견지할 수도 있다. 바깥 모습이 그렇게 되면 안 모습 즉 숨 쉬는 자세가 발라야 한다. 숨은 날 숨과 들 숨 그리고 멈추는 숨 세 가지가 있으나 날 숨과 들 숨의 한번 행한 과정을 1행정이라 할 때, 그 시간적 비율은 1대 1이 되도록 해야 한다. 즉 20초 동안 들이 쉬면 내뱉는 숨도 20초 동안이어야 한다. 빨리 들어 내쉬어서는 안된다. 되도록이면 천천히 길게 오래 들이 쉬고 내쉬어야 한다. 숨쉬는 자세가 바르면 심신의 대사가 원활해져 하는 일의 성취가 정확해진다.
그래서 옛부터 도를 닦는 수행자들은 자세를 신진대사를 고려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해 왔다. 요가니 단식법이니 하는 것은 그런 배경에서 온 것이다.
참선이란 일종의 정신적 수행이므로 자연히 정신집중과 마음 다스리기를 우선한다. 정신통일과 마음조절은 자세가 단정한 데에서 효과적이다. 오히려 자세가 흐트러지면 신진대사가 안돼 병이 침입한다. 자세가 발라야 신진대사가 잘되어 심신이 약해지지 않는다. 수행자들의 가장 많이 앓는 병은 기(氣)가 막혀, 火가 내리고 水가 올라가 기순환돼야 하는 것이 고장나 위는 열나고 아래는 차디 차는 병상을 초래한다. 이를 水火未濟라 하는 바 일종의 신진대사가 안되어 기가 막힌 현상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걸리는 병이라면 위장병이다. 섭생과정에서 문제도 있겠지만 그 근원은 자세의 부조화 때문에 오는 기혈(氣血)의 순환과정에서 발생돼 소화불량이 초래된다. 그 다음이 심장병이다. 모두 자세가 단정치 못해서 초래되는 병들이다. 따라서 자세는 참선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초보적이고 필수적이다. 지금 좌선의 는 그런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그런 중요성 때문에 일찌기 중국의 천태지의 스님은 마하지관 이나 천태소지관 등에서 좌선에서 갖춰야 할 자세를 잘 설명했던 것이다. 이 좌법이 다시 규봉종밀(780-841)에게 전승돼 원각경도량수증의 라는 좌선법을 편찬하게 만들었다. 비로소 종밀 스님에 이르러서 좌선에 따르는 실수적인 방법이 제시됐던 것이다. 종밀이 평생 원각경 연구와 선양에 힘썼고 또한 원각경 을 실천하는 자세로서 수증의 를 지었지만, 그의 명성과 저술이 널리 보급되고 실천되자, 그 수증의 도 수선의 길잡이가 됐던 것이다.
종밀 이후 점차 남악회양과 청원행사 등의 문하생들이 천하를 뒤흔들자, 수증의 는 정통 조사선의 수습과정에서도 의용돼 형편에 맞는 좌선의 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 남아 있는 좌선의 내용은 대여섯 가지나 된다.
1. 大藏一覽 권3(1157).
2. 禪苑淸規 권8(1202).
3. 禪宗四部錄 , 五味禪 계통, 1, 2와 비슷하다.
4. 勅修百丈淸規 권2(1336), 大正新修大藏經 제48권에 들어 있다. 明代의 重刻이다.
5. 道元의 普勸梵禪儀 등.
이중, 선종 4부록 에 있는 좌선의 가 가장 탁월하다. 언제 편찬됐는지는 모르나 1, 2 등을 보면 일찍이 좌선하는 법을 논하고 널리 보급시켰던 것이 확실하다. 天台-종밀로 이어지는 좌선의 가 선종에서 수용돼 공부하는 필수로서 인정됐다고 여겨진다.
앞으로 이 좌선의 를 강의할 것이겠지만, 그 기본 사상은 보살정신에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널리 이웃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이 전제된 자기 수행의 첫 자세가짐이다. 수선하고 공부하는 일차적 목표를 보살정신에 둔다는 것은 좌선의 에서 좌선하는 이들의 정신상태를 바르게 규정하는 핵심이다. 정신상태의 바른 점검이 앞서야 함을 강조한 셈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제방에서 좌선의 를 소홀히 하려는 통념이 퍼져 있는데, 이는 좌선하는 ABC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좌선하는 데에도 방식과 형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2. 좌선의 강의
[1] 좌선하는 이의 정신자세
부학반야보살(夫學般若菩薩) : 무릇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선당기대비심(先當起大悲心) : 우선 대비심을 일으켜,
발홍서원(發弘誓願) : 큰 서원을 세우고,
정수삼매(精修三昧) : 정교하게 삼매를 닦아,
서도중생(誓度衆生) : 맹세코 중생을 제도하려 할지 언정.
불위일신독구해탈이(不爲一身獨求解脫爾) : 자기 한몸만을 위해선 해탈을 구하지 말지니라.
[2] 몸과 마음의 조절
내방사제연(乃放捨諸緣) : 모든 인연을 포기해 버리고,
휴식만사(休息萬事) : 움직이고 머무는 것에 사이를 두지 않는,
신심일여(身心一如 : 몸과 마음의 일치로써,
량기음식(量基飮食) : 음식을 먹을 때도
불다불소(不多不少) : 많이도 적게도 아니하며,
조기수면(調其睡眠) : 잠잘 때도,
부절부자(不節不恣) : 덜도 많이도 아니한다.
[한자풀이] 恣(心, 6)방자할 자
[3] 좌선하는 법칙(1)
욕좌선시(欲坐禪時) : 좌선하려 할 땐,
어한정처(於閑靜處) : 고용한 곳에서,
후부좌물(厚敷坐物) : 두꺼운 방석을 깔고,
관계의대(寬繫衣帶) : 허리띠를 느슨하게 매고,
영위의재정(令威儀齋整) : 위의를 단정히 한
연후(然後) : 후에
결가부좌(結跏趺坐) : 다리를 서로 꼬아 앉되,
선이우족안좌폐상(先以右足安左陛上) :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를 누르고,
좌족안우폐상(左足安右陛上) : 왼쪽 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놓는다.
혹반가부좌역가(或半跏趺坐亦可) : 혹은 반가부좌하는 것도 좋으나,
단이좌족(但以左足) : 다만 왼쪽 발로,
압우족이이(壓右足而已) : 오른쪽 발을 누른다.
차이우수안좌족상(次以右手安左足上) : 다음 오른쪽 손을 왼쪽 발 위에 놓고,
좌장안우장상(左掌安右掌上) : 왼쪽 손바닥을 오른쪽 손바닥 위에 두고,
이양수대무지면상주(以兩手大拇指面相 ) : 두 엄지 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고,
서서거신(徐徐擧身) :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전후좌우(前後左右) : 앞과 뒤, 좌우를,
반복요진내정신단좌(反覆搖振乃正身端坐) : 여러번 왔다 갔다 하여 흔들고, 곧 몸을 바르게 해서 곧게 앉는다.
[한자풀이] 厚( , 7)두터울 후
敷( , 11)펼 부, 퍼질 부, 나눌 부, 두루 부
(肉, , 7)허벅다리 폐, 밥통 폐, 위 폐
拇(手, , 5)엄지손가락 무
(手, , 5)버틸 주, 손가락질할 주
搖(手, , 10)흔들릴 요, 흔들 요, 움직일 요
振(手, , 7)떨칠 진, 움직일 진, 거둘 진, 떨 진
(강 의)
좌선의 란 참선하는 이의 몸과 정신을 바로 잡고 정신통일하게 하는 길잡이 책이다. 좌법을 알려주는 것에는 인도의 요가행법이 있다. 결가부좌하여 심신의 안정과 신진대사를 위해 취하는 자세라고 한다. 이것이 중국에 와서는 천태지의 스님에 의해 재정리되고 전승되어 선가의 중요한 교과서가 됐다. 그의 小止觀 이 유행되고 선가에 의용됐던 계기는 규봉종밀 스님의 선전에 크게 의지했다. 종밀의 선교일치적 운동은 곧 교계 내외로 환영을 받아 선수행의 지침서로 정착됐던 것이다.
지금 좌선하는 법칙 그 (1)은 우선 앉는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놓고 다시 왼쪽 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포개 놓는다. 이렇게 되면 왼쪽 발이 오른쪽 발을 누르는 격이 된다. 반가부좌했을 때도 왼쪽 발이 오른쪽 발과 무릎을 누르는 현족이다. 이것은 중국적인 음양사상이 개입된 흔적이다. 오른쪽은 움직이는 것 즉 양이고 왼쪽도 멈추는 것 즉 음이다. 선을 닦는다 함은 정신을 통일하고 마음을 고요히 앉혀야 하므로, 상징적으로 그렇게 양 위에 음이 있는 형상을 지은 것이다. 즉 동(動)을 정(靜)으로 만들려는 요구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손을 둥그렇게 서로 무지와 집게를 맞대어 둥글게 하여 두 발위에 놓는데, 그러면 자연히 단전 앞에 둥근 손 모양이 놓이게 되어 있다. 이것을 일원상(一圓相)이라 하는데, 즉 무념무상이 그곳에 이르러야 함을 갈망하는 상징이다.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불안정하면 수선이 잘 안되므로, 앞뒤전후로 몸을 움직인 다음 바르게 앉아 곳곳이 응시해야 한다.
[4] 좌선하는 법칙(2)
부득좌경우측전궁후앙(不得左傾右側前躬後仰) : 왼쪽으로 기울거나 오른쪽으로 기울거나 앞으로 구부러지거나 뒤로 자빠지거나 하지 말고,
령요척두항골절상주(令腰脊頭項骨節相 ) : 허리.등.머리.목.골절이 직선이 되도록 버티어.
장여부도(狀如浮屠) : 부도와 같이 한다.
우부득용신태과(又不得聳身太過) : 또 몸을 지나치게 곤두세워,
령인기급불안(令人氣急不安) : 호흡을 급하게 해 불안하지 않도록 한다.
요령이여견대(要令耳與肩對) : 귀와 어깨는 똑바로 대하고,
비여제대(鼻與臍對) : 코와 배꼽이 직선이 되게 하며,
설주상악순치상착(舌 上 脣齒相着) : 혀는 위턱에 대고 입을 다물도록 한다.
목수미개면혼수(目須微開免昏睡) : 눈은 가늘게 떠서 졸음이 안 오도록 한다.
약득선정기력최승(若得禪定其力最勝) : 선정을 얻으면 그 힘은 강해지리라.
[한자풀이] 躬(身, 3)몸 궁, 몸소 궁
腰(肉, , 9)허리 요, 찰 요
脊(肉, , 6)등골뼈 척, 조리 척
屠(尸, 9)잡을 도, 무찌를 도, 죽일 도
聳(耳, 11)솟을 용, 솟게할 용, 권할 송, 공경할 송
(齒, 9)잇몸 악
[5] 좌선하는 용심(用心)
고유습정고승좌상개목(古有習定高僧坐常開目) : 옛날에 선정을 닦던 고승이 (있었는데), 늘 앉아서 눈을 뜨고 있었다.
향법운원통선사(向法雲圓通禪師) : 법운원통도
역가인폐목좌선(亦訶人閉目坐禪) : 사람들의 눈 감음을 꾸짖기를,
이위흑산귀굴(以謂黑山鬼窟) : '흑산의 귀신 굴이구나!' 했다.
개유심지달자지언(蓋有深旨達者知焉) : 대체로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이니, 달자는 이해하리로다.
신상기정기식기조연후(身相旣定氣息旣調然後) : 몸가짐을 이미 정하고 호흡이 벌써 조화된 후에,
관방제복일체선악도무사량(寬放臍腹一切善惡都無思量) : 하복부를 느슨하게 하고 모든 선악을 생각지 말라.
염기즉각각지즉실(念起卽覺覺之卽失) : 잡념이 일어나면 곧 바로 잡는다. 이를 바로 잡지 못하면 곧 잃고 만다.
구구망연(九九忘緣) : 오래오래 인연을 잊으면,
자성일편(自成一片) : 스스로 일편을 이루리니,
차좌선지요술야(此坐禪之要術也) : 이것이 좌선의 핵심이다.
절위좌선내안락법문(竊謂坐禪乃安樂法門) : 곰곰이 생각하면, 좌선이란 안락하는 법문이지만,
이인다치질(而人多致疾) : 사람들이 병을 많이 얻으니,
개불선용심고야(蓋不善用心故也) : 대개 마음을 잘못 쓰는 까닭이다.
[한자풀이] 窟(穴, 8)움 굴, 굴 굴
蓋(艸, , 10)덮을 개, 뚜껑 개, 숭상할 개
焉(火, 7)어찌 언, 이에 언, 이 언, 어조사 언
都(邑, , 9)도읍 도, 있을 도, 거느릴 도, 모두 도
(강 의)
여기선 호흡.몸가짐.마음쓰기 세가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먼저 몸가짐이란 자세 취하는 것을 말한다. 단정하게 앉아 호흡과 마음이 안정되도록 힘쓴다. 자세를 단정히 한 다음에는 호흡을 고르게 쉬어야 한다. 호흡조절은 선 수행에서 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마음쓰기는 몸가짐과 호흡조절 위에서 행위된다. 마음쓰기가 선 수행의 요체이다. 결국 참선이란 마음쓰기를 익히는 것이요 깨친다는 내용도 사실 그것이다.
우리는 흔히 추상화된 관념을 가지고 분석하며 맞느니 틀리느니 하며 왈가왈부한다. 단순한 지적 놀이로 그치기 쉬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러니 산만하고 헷갈리기 일쑤다. 검증할 수 없으니 다른 의견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세상을 어지럽힌다. 다양한 이견들이 공존함은 그런 대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 문제를 도외시하고 저너머로 체념하는 도피처에 안주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그런 행위를 그럴듯하게 변명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간지(奸智)이다. 구름이 오가듯 인생을 무의미한 존재로만 보려는 논리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지극히 인생의 현실에 집착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에서는 그런 이중 문제를 극복한다. 우선 문자 따위를 배격하니 추상화된 관념을 가지고 놀이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문제에 응해서 적절한 행위를 취하곤 한다. 즉 현실에 즉한 이상을 구현하는 발랄한 행위이다. 그것을 위한 입문적 단련이 몸.호흡.마음의 조화이다. 몸과 호흡이 잘 조화돼야 마음의 현실적 깨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부조화되면 신진대사가 안되어 선병(禪病)을 얻어 중도에 포기하기 쉽다.
[6] 좌선하는 공덕
약선득차의(若善得此意) : 만약 이러한 뜻을 잘 얻었다면,
직자연사대경안(則自然四大輕安) : 자연히 4대가 편안하여,
정신쾌리정념분명(精神快利正念分明) : 정신이 상쾌하고, 정념이 분명하며,
법미자신(法味資神) : 법미신이 자조해서,
적연청락(寂然淸樂) : 적연히 청락하게 된다.
약이유발명자(若已有發明者) : 만약 이미 발명했다고 하면,
가위여룡득수(可謂如龍得水) :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사호고산(似虎 山) : 호랑이가 산에 든 거와 같다.
약미유발명자(若未有發明者) : 만약 아직 발명하지 못했다고 하면,
역내인풍취화(亦乃因風吹火) : 바람에 의해 불을 때고,
용력불다(用力不多) : 힘 쓰기를 많이하지 말라.
단변긍심(但辯肯心) : 다만 긍정하는 마음을 통할 일이요.
필불상잠(必不相 ) : 반드시 우물쭈물하지 말지니라.
[한자풀이] 輕(車, 7)가벼울 경, 가벼이할 경
爽(爻, 7)시원할 상, 밝을 상, 굳셀 상
資(貝, 6)재물 자, 노비 자, 바탕 자, 자리 자, 도울 자
(非, 7)기댈 고
(貝, 10)속일 잠
[7] 마경(魔境)
연이도고마성(然而道高魔盛) : 그러나 도가 높으면 마도 성해서,
역순만단(逆順萬端) : 역과 순이 만단하다.
단능정념현전(但能正念現前) : 단 정념이 잘 현전하면,
일체불능유애(一切不能留 ) : 모든 것에 걸릴 것이 없다.
여능엄경천태지관규봉수증의(如楞嚴經天台止觀圭峰修證儀) : 능엄경 과
천태의 지관 그리고 규봉종밀의 수증의 에서 가르친,
구명마사(具明魔事) : 마사를 밝히고,
예비불우자(豫備不虞者) : 미리 생각해서 대비하는 이는,
불가부지야(不可不知也) : 가히 알지 못함이 없으리라.
[한자풀이] 預(頁, 4)미리 예, 즐길 예, 놀 예, 참여할 예
虞( , 7)생각할 우, 근심 우, 걱정 우
[8] 출정할 때 주의할 점과 일상적 공부
약욕출정(若欲出定) : 만약 좌선하다가 일어나려고 하면,
서서동신(徐徐動身) : 서서히 몸을 움직여,
안상이기(安詳而起) : 평온하게 일어나고,
부득졸폭(部得卒暴) : 갑자기 움직이지 말라.
출정지후(出定之後) : 좌선에서 일어난 뒤에는,
일체사중(一切事中) : 모든 일에 있어서,
상작방편(常作方便) : 늘 주의해서,
호지정력(護持定力) : 선정력을 호지하기를
여호영아(如護 兒) : 어린 아이 다루듯이 하라.
즉정력이성의(卽定力易成矣) : 그러면 정력(定力)으로 쉽게 이룰 것이다.
[한자풀이] 暴(日, 11)사리울 포, 급할 포, 나타날·나타낼 폭
(女, 14)간난아이 영, 두를 영, 닿을 영
矣(矢, 2)어조사 의
(강 의)
늘 좌선할 땐 숙지해야 할 자세를 밝힌 것이며, 좌선수행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를 꼬고 척추를 반듯이 세우고 호흡을 조용히 쉬며 마음을 가다듬는 절차가 좌선의 기본 자세이다. 그런 다음 화두를 드는데 보통 1시간씩 꼼짝도 않고 좌선하고 약간 쉬는(經行) 것은 말로는 쉬워도 실천으론 어렵다. 쉽지 않으니까 이처럼 강조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심신을 다루어야 하며 그럴 때 정력(定力)이 생겨 지혜가 발하고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행동의 신중함은 어디에나 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선하는 법을 무시하려 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9] 선정의 중요성
부선정일문(夫禪定一門) : 선정의 한 문이
최위급무(最爲急務) : 가장 급하다.
약불안선정려(若不安禪靜慮) : 만약 편안히 좌선하지 못하면,
도저리총수망연(到這裏總須茫然) : 이에 이르러 다 망연하고 말리라.
소이탐주의정랑(所以探珠宜靜浪) : 그러므로 구슬을 찾으려면 물결을 고요히 하라.
동수취응난(動水取應難) : 물결이 흔들리면 (구슬을) 찾기 어렵다.
정수징청(定水澄淸) : 물결이 자고 맑아지면,
심주자현(心珠自現) : 마음의 구슬이 나타난다.
고원각경운(故圓覺經云) : 그러므로 원각경 에서 이르되,
무애청정혜(無 淸淨慧) : '무애한 청정지혜는
개의선정생(皆依禪定生) : 다 선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였다.
법화경운(法華經云) : 법화경 에서도 이르되,
재어한처(在於閑處) : '고요한 곳에서
수섭기심(修攝其心) : 그 마음을 닦아
안주부동(安住不動) : 안주 부동함을
여수미산(如須彌山) : 수미산 처럼 하라' 하였다.
[한자풀이] 浪(水, , 7)물결 랑, 방랑할 랑
澄(水, , 12) 맑을 징, 맑게할 징
[10] 결 론
시지초범월성(是知超凡越聖) : 그러므로 알아라. 법성의 초월이란
필가정연(必假靜緣) : 반드시 바깥 인연에서 고요해야 하며,
좌탈입망(坐脫立亡) : 앉으나 서나
수빙정력(須憑定力) : 정력을 얻어야 한다.
일생취변(一生取辨) : 한 평생 호법하되,
상공차타(尙恐蹉 ) : 조금이라도 그르칠까 두렵도다!
황내천연(況乃遷延) : 하물며 게으르면,
장하적업(將何敵業) : 무엇으로 참선한다고 할까?
고고인운(故古人云) : 그래서 옛날 선지식께서 이르되,
약무정력(若無定力) : 만약 정력을 얻지 못하면,
감복사문(甘伏死門) : '죽음의 두려움을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으니,
엄목공귀(掩目空歸) : 눈을 감으면 헛되이 돌아가
완연유랑(宛然流浪) : 윤회계를 맴돌리라' 하였다.
행제선우(幸諸禪友) : 다행히 모든 선우들이
삼복사문(三復斯文) : 이 글을 다시 읽고 또 읽어서 실천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 : 너나 할 것 없이
동성정각(同成正覺) : 모두 정각을 이루리라.
[한자풀이] 憑(心, 12)기댈 빙, 의지할 빙, 클 빙, 건널 빙
遷( , , 11)옮길 천, 천도 천
延( , 4)끌 연, 끌릴 연, 늘일 연, 길 연
敵( , 11)원수 적, 적 적, 필적할 적
掩(手, , 8)가릴 엄, 숨길 엄, 비호할 엄
宛( , 5)완연 완, 작을 완, 굽을 완
(강 의)
이제 좌선의 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할 차례다. 끝 부분에서 '이 글을 부지런히 익히면 너나 할것 없이 다 깨치게 되리라'는 구절은 결국 성인의 말씀대로 하면 인생의 아름다운 가치가 실현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인의 말씀은 동양적 정서를 지닌 동양적 종교 뿐 아니라 서양의 것도 포함된다. 즉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는 잇단 인류의 스승이요 만인의 사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결국 깨쳐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 깨친다는 문제는 중생이 있는 한 끝없이 간구되는 주제이다. 그런 종교적 과제를 푸는 첫 작업에서도 이 좌선의 는 아주 긴요하다고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naver.com/seereligion.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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