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해설

[스크랩] 입보리행론 해설 136. 외도와 내도

수선님 2018. 12. 16. 11:49

입보리행론 해설 136. 외도와 내도


“외도와 내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외도와 내도의 차이가 있으니 마음속 깊이 삼보에 귀의하는 자가 불교도이고

삼보에 의지하지 않고 세속의 신에게 마음으로 귀의하는 자가 외도인 까닭이다.”

 

이것도 대부분의 외도로 해석해야 합니다.

순세파처럼 신을 인정하지 않는 외도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보 법보 승보 이렇게 세 가지를 두고 이런 삼보를 바른 의지처로 인정하는 이를 불교도라고 합니다.

 

삼보를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불법과 법을 보이신 부처님, 길을 감에 있어 선지식역할을 하는 승가,

이런 삼보를 마음 깊이 믿는 자가 불교도입니다. 이외는 외도가 되는 것이지요.

        

'귀의'는 외도에게도 가능한 얘기입니다. 특히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에게 자신의 삶 전체가 달려있다고 여긴다면 이런 창조주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순세파처럼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한다면 특별한 귀의처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외도와 불교도의 종의제창자(提唱者)의 차이 또한 있으니

교조 교법 견해 이 세 가지에 의해 구분하는 까닭이다.

불교의 교조는 덕이 원만하고 교법은 유정에 해로움이 없고

견해는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아(我)가 없음을 인정하는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제행무상. 일체유루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사법인을 인정하는 이를 불교종의제창자, 이를 인정치 않는 이를 외도종의제창자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조께서 보이신 사법인을 얘기할 때 제행무상. 일체유루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인데 먼저 제행무상이라 할 때 변화성을 얘기합니다. 변화성을 가지는 법은 무루와 유루로 나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유루는 일반적으로 번뇌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유루에 영향을 받는 모든 것은 고통이다

        즉 제행이 변화하므로 무상하고 그런 유루와 무루 중에 유루는 고통의 본질이다'

 

이것이 일체유루개고(一切有漏皆苦)입니다.

 

        '이런 고통을 없앨 수 있는가 하면 고통의 근원은 탐진이고 탐진의 뿌리는 아집이다.'

 

아집이 만일 전도된 지견이 아닌 바른 지견이면 이와 상위되는 지견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이를 다스릴 대치법(對治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집은 전도된 지견이며 전도된 지견인 이상 이것을 다스리는 지견이 존재합니다. 아닌 것을 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전도된 지견이 된 것입니다.

    

실제 존재방식은 진실상에 머물고 이것을 언젠가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진실을 깨달은 의식이 전도된 지견에 대적하는 지견이 되고 대치법은 정당성을 가져 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제법이 공하고 무아이므로 아집이 전도된 지견이라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집에 대치법이 존재하고 이로 인해 아집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완전히 아집을 제거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줄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뿌리를 없애는 것은 많은 사유를 통해 가능합니다.

아집이 대치법에 의해 멸했을 때 고통의 근심에서 벗어난 열반입니다. 이것이 열반적정입니다.

    

이러한 것을 설명하므로 비로소 해탈에 관한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해탈이 어느 특정한 장소인 정토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란 고통을 초래한 번뇌의 허물이 사라지는 것이고 번뇌의 뿌리는 아집이고 무아인 의미를 깨달은 지견이 아집을 멸할 때 지견으로 생긴 고통도 사라지는 것이죠. 따라서 모든 근심을 넘어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을 얘기하는 것이죠.

   

이 이치를 보이는 교조야말로 다른 교조와 다른 특별함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조들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무아를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분뿐 그 누구도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교조는 모든 허물이 다하여 덕이 원만하고 교법은 유정에게 해가 없으며”


교법에서 유정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것으로 치면 나형파가 불교보다 낫습니다.

외도승자(勝者大雄-Rsabha Jina)를 따르는 이들을 나형파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교조이므로 승자라고 합니다.

 

아마 비폭력 행위에 있어서는 불교보다 더 앞서 있습니다.

그들은 비폭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모두가 인정해야할 바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비폭력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비에 있습니다.

 

물론 10가지 불선업의 계율을 가르칠 때 타인에게 해를 입히면 그 결과로 고통이 돌아온다는 고통의 과보를 두려워하므로 해를 가하지 않도록 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불교는 자비에 뿌리를 둔다는 말씀처럼 타인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귀한 존재이며 그 대상에게 해를 입혀서 안 된다는 생각에 있습니다.

   

그러나 초심자에게는 해를 입히는 것이 악업이며 곧 자신에게 해를 초래한다는 식의 나쁜 결과를 보임으로 그 원인을 없애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비가 가능한 이유는 오늘 아침 말씀 드린 것처럼 사법인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뇌로 인한 고통의 시달림에 연민의 마음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안됐다고 생각하는 정도겠지요. 별다른 생각이 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제거할 수 있음을 안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벗어나지 못하고 시달리는 것을 보면 강한 연민이 일 것입니다.

 

벗어날 방법이 보이는데 벗어날 방법을 구하지 않고 고통을 원치 않으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어쩌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겠지요. 더욱 강한 자비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혜로 일어난 자비심이란 많은 고통들이 존재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알았을 때 일어나는 자비심입니다. 이성과 지혜가 함께 하는 자비심이지요. 고통을 없앨 방법을 모른다면 고통에 시달림을 보고 ‘어떻게 하나’ 하고 자포자기해서 한숨 쉬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겠지요. 이것은 지혜가 없는 자비심입니다.

 

    ‘비폭력’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비폭력을 이끌어내는 사상에서 불교가 가지는 다른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교법은 유정에게 해로움이 없으며 견해는 상일주재의 아가 없음을 인정하는 세 가지 차이가 있다.”

 

대종의론에서 이르기를 “아집의 경계를 막고 막지 않는 내외의 두 가지 지견이 있네.” 여기에 뜻이 다 드러납니다. 아집의 경계인 아의 독립적 실체를 성립하는 것 외에도 이를 막는 혹은 막으려 노력하는 이가 불교도입니다. 견해는 상일주재의 아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불교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외도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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