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해설

[스크랩] 입보리행론 해설 138. 의타기성, 원성실성, 변계소집성

수선님 2018. 12. 23. 12:52

입보리행론 해설 138. 의타기성, 원성실성, 변계소집성


 

        

무실유의 의미에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외경으로 성립된 진실이 없다는 것,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 법이 각각의 존재 방식으로 성립되어 있는 궁극의 자성으로 보입니다. 

 

‘자성으로 성립한다면 자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승의로 성립하는 것이고,

어떤 경계의 자성을 규명해 들어갈수록 그 자성이 분명해져야 하는데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색을 비롯한 제법이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합니다.

 

‘더 들어가서 어떤 대상이 보일 때 대상자체에서 성립하는 것 같지만

대상 자체에 성립되는 것이 없다. 저편에 가설한 것 명언가유다’라고 설명합니다.

        

명언가유로 인과와 행위, 행위자를 규정할 수 있다면 마음의 아집과 실집을 가장 강력히 대적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저쪽에 성립된 것이 결코 없다. 오직 이름으로 가설된 것 뿐’이라는 것이 가장 강력합니다.

        

명언가유의 이치로 행위와 행위자를 규정하지 못하면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성 없이 연기라는 이유로써 무자성과 진실로써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이해를 한다면 아집이나 실집에 이보다 더한 대치법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종의철학을 단계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모든 소지(所知)가 삼성(三性)으로 귀납됨을 인정하니

제행이 의타기성, 제법성을 원성실성 이외의 것을 변계소집성으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이 세 가지를 자체에서 성립(自體有)하는 것과 자성으로 성립(自性有)하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진실로써 성립(眞實性-實有)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차이가 있으니

이는 변계소집성은 진실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며

의타기성과 원성실성 두 가지는 진실로써 성립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삼성(三性)을 얘기하는 것은 물론 제법을 삼성으로 설명하는 이유가 있지만

주된 것은 제행인 의타기성 특히 불청정의타기성,

“바른 것이 아니나 의타기성은 존재하네. 거기에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네.” 라는 말씀처럼 불청정의타기성에 관련해 탐.진이 생깁니다.


무루의 법에 의해 탐진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주로 불청정의타기성에 의해 윤회하고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해 탐진이 생기고 이로 인한 고통의 발생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변계소집성이 공하다는 원성실성의 자성이라는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승의로써 성립되진 않으나 분별의 가성으로 성립하는 것이 변계소집성의 정의이다.

분류하면 차별변계(差別遍計)와 상단변계(相斷遍計) 두 가지이다.

전자는 소지(所知) 따위이고 후자는 이종아(二種我:인아, 법아) 따위다.

두 가지 실집(實執)의 집착 대상인 법아와 인아를 말합니다.


다른 인연의 힘에 의지하여 생기며 원성실성의 바탕이 되는 것이 의타기성의 정의이다.

분류하면 청정의타기성과 불청정의타기성 두 가지이다.

전자는 성현의 후득지(後得智)와 불상호(佛相好)따위고

후자는 유루근취(有漏近取)의 오온(五蘊)따위이다.

두 가지 아(我) 가운데 어떤 아든 아가 존재하지 않는 진여가 원성실성의 정의이다.

    

이 두 가지 중이라는 것은 인아와 법아를 말합니다. 인아와 법아 가운데의 아가 존재하지 않는 진여가 원성실성이라 인정하고 있으므로 법무아와 인무아 모두를 원성실성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한 가지를 말하니”를 해석할 때 법무아만을 원성실성으로 인정하고 인무아를 원성실성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는 비전도원성실성과 불변원성실성으로 분류된다.

주로 원성실성을 얘기할 때 불변원성실성을 의미합니다.

불변원성실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현의 선정지를 비전도원성실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전자는 성현의 선정지(禪定智)와 같고 후자는 법성(法性)과 같다.

전도되지 않은 원성실성을 원성실성으로 분류하지만 원성실성이 아니니 이는 어떤 것을

소연(所緣)하면 장애가 다하게 되는 청정도(淸淨道)의 궁극 소연이 아닌 까닭이다.

 

진제인 공성, 실집의 대치법인 공성을 규명하기 위해 삼성(三性)을 설하신 것입니다.


이 또한 불청정의타기성이 보이는 대로 성립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외경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외경으로 성립한다면 이것저것으로 이름과 분별로 가설하기 이전에 가설의 바탕이 이전부터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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