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스크랩] 33. 아쌀라야나경

수선님 2018. 12. 16. 12:23


<아쌀라야나경>을 읽은 것은 스리랑카 팔리 불교대학 교수시절, 불교사회철학과 교재로써 팔리어로 된 경문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였다.
 
이 경전은 팔리장경 중부의 93번째 경전으로 제1결집에서 성립된 초기 경전에 해당한다. 이 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한 생생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아쌀라야나경>에서는 당시 사회의 지배계급인 500명 바라문들과 부처님과의 계급평등에 대한 대토론이 벌어진다. 이 대토론에서 부처님은 지혜로운 설득과 자비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박차를 가하게 된다.
 
<아쌀라야나경>에 따르면, 지배적인 상층계급인 성직자계급은 베다의 권위를 이용해서 ‘성직자야말로 최상의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저열하다. 성직자들이야말로 밝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어둡다. 성직자들이야말로 청정하고 성직자가 아닌 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성직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적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난 자이고 하나님이 만든 자이고, 하나님의 상속자이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500명의 바라문들에게 아주 논리적인 명쾌한 반론을 제시한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이 그러한 계급의 사람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월경, 임신, 출산, 수유를 갖는 인간적인 여인에게서 태어난다는 휴머니즘적인 평등사상을 전개하여 절대신의 창조설을 부인한다. 

 
둘째, 계급이라는 것이 신이 만든 것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도변경까지 들어와 있던 희랍 사회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희랍사회는 인도사회와는 달리 두계급 밖에 없는데, 귀족이 노예가 되기도 하고 노예가 귀족이 되기도 한다는 계급변동에 의한 평등사상을 전개시켜 바라문들의 고정관념을 타파시킨다.
 
셋째, 다음과 같은 반문 즉 ‘성직자만이 이 나라에서 원한을 품지않고 화내지 않고 자비스런 마음을 지닐 수 있는데, 귀족이나 평민이나 노예는 그렇지 못한가?’를 통해서 모든 계급은 도덕적으로 기회균등하며 인간의 가치는 도덕적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 인간의 의식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우며 그러한 무한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평등사상을 전개시켜 성직자계급의 우월론을 타파시켰다.

 

넷째,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값비싼 전단나무로 불을 밝히는 것과 천민들이 더러운 돼지먹이통나무로 불을 지피는 것은 그 밝기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반문하여 인간은 누구든지 깨달음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는 불성론적인 평등사상을 전개시킴으로써 바라문만이 밝고 청정하다는 정부정(淨不淨)의 사상을 논박했다.

 

다섯째, ‘성직자계급의 아들과 귀족계급의 딸이 결혼하여 나온 자식이 성직자계급인가 귀족계급인가?’라고 반문하여 계급이 유전형질에 따라 상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생물학적 평등사상을 전개하여 사회적인 계급상속의 부당함을 고발했다.
 
여섯째, 종교적 지식의 획득은 도덕적인 기반위에서 사회적인 가치를 지니며 사회적인 평가의 일차적인 대상은 도덕적인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고 지식의 독점에 의한 계급사회의 취약성을 폭로함으로써 바라문이 주장하는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인간의 도덕적인 평등을 강조하였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인간의 평등에 관해서 이렇게 간략하고 자명하고 깊이있는 사상을 설명한 어떤 성자도 철학자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심오한 인간에 대한 연기법적인 접근이 전제되어 있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떠한 강이든 바다에 이르면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듯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을 따르면 모든 계급이 소멸하여 다만 완성자의 아들로 불리운다.
 
<아쌀라야나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든지 착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가장 높은 계급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밝혀주는 경전이다. 
 

전재성/한국빠알리어성전협회장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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