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스크랩] 37. 自說經(자설경-우다나)

수선님 2018. 12. 23. 12:43


91년 가을 실상사 선우도량에서 ‘깨달음의 교리적 해명’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한 적이 있다.
 
평소 깨달음에 대해 정리해 보고싶던 차였기에 좋은 기회다 싶어 준비에 들어갔고, 경전과 논서, 어록을 열람하는 가운데 만난 것이 <우다나(Udana)>였다. 낯선 경전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깨달음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우다나>란 깨달음의 순간을 노래한 것으로 말하자면 법열(法悅)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질문하는 자 없이 부처님 스스로 설한 경전이라는 의미에서 <자설경·自說經>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우다나>는 8품 80개의 경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제일품 보리품(菩提品)에서 깨달음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는 ‘깨달음의 과정’으로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결가부좌하신 채 7일간 해탈의 황홀감을 즐기신 후 선정에서 일어나 초저녁, 자정, 새벽녘에 각기 십이연기법을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통해 보시고 괴로움의 일어남과 없어짐의 이치를 노래하신다. 둘째, <우다나>의 게송은 깨달음의 근원적 체험의 기본구조를 보여준다. “실로 열심히 선정에 들어 있는 바라문에게 진리가 현현하게 될 때, 그 때 그의 모든 의심은 없어진다 라고 하는 것은 그가 연기의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경구를 살펴보면 존재가 법으로써 나타날 때 동시에 ‘깨달았기 때문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선정에서 깨달음이 일어남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선정에 의해서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선정은 깨달음의 마당이 된다. 
 
또 이 <우다나>는 십이연기를 순관과 역관을 통해서 읊으신 것이므로 선정의 장을 통해서 나타난 진리가 연기임이 관조(觀照)되어진 것임을 말한다. 말하자면 관조와 진리가 상응함에는 선정이 장이 되고, 이 선정의 장을 통한 관조는 제법이 연기함을 깨달은 것이 되므로 이 경전에서의 깨달음은 관조 즉 반야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인가? 이 경전을 통해 본다면 진리란 땅이나 하늘, 산, 바다, 나무 등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만 나타나며 갖가지 마음의 작용중에서도 마음의 고요함인 선정이라는 장을 통해서 연기라는 진리가 나타나게 되고 이와 동시에 마음의 깨어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깨달음과 모든 존재의 실상인 연기법이 불이(不二)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따라서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는 것이다’라 한 것은 모든 불교 즉 초기불교에서부터 선종(禪宗)에 이르기까지 모든 깨달음에 대한 기술은 바로 이 깨달음의 근원적 체험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이 경전에서의 귀중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파자나티(pajanati: 그는 깨닫다)가 반야(般若)의 동사형, 현재삼인칭단수로써 반야라는 점에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반야는 실천적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깨달았다 해도 깨달음의 가르침을 실천을 통하지 않고 지식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사상이나 철학일 뿐이다. 경전이나 논서나 어록의 문자만을 통해서는 진정한 깨달음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실천수행을 통해서만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보살의 수행은 바라밀이며, 이 육바라밀 중 보시바라밀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괴와 단절에서 회복시키고 이어주는 것으로서 상호의존적인 연기관계를 회복시켜주는 깨달음이자 동시에 중생구제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학습을 통해 사상이나 철학으로 전락시켜 지식화하는 교육으로는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깨달음이 단순히 교육차원에서만 머문다면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불법(佛法)이 오랫동안 머물러있게 하기위한 승가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는 것을 이 경전은 잘 말해주고 있다. 
 

지운/송광사 강원 강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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