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해설 139. 대승경전은 비불설이 아니라, 불설이다.
부처님이 입적하시고 400년이 지나 용수보살이 계셨던 당시에도 불설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용수보살의 ‘보관보만론’에서 대승을 불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비롯한 인도 나란다 스승들이 대승이 불설임을 밝히는 논서를 지으시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불설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에도 역사학자들은 대승이 부처님 입멸 후에 불교가 발전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자세히는 ‘난해현론’에서 대승이 불설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승장엄론’에서도 언급하지만 청변논사께서 지으신 ‘난해현론’에서 가장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 용수보살의 ‘육십정리론’일 겁니다. ‘육십정리론’에서 공성, 연기의 진여가 일체종지를 이루기 위해 필요함은 물론이고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도 이것의 증득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소승의 경서에서 보시나 지계 인욕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을 심화시키는 특별한 도가 없다면 수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만일 대승이 불설이 아니라면 대승의 논서가 근거가 없는 셈이 됩니다.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해탈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일체지의 지위획득은 제쳐두고라도 해탈조차 성취할 수 없습니다. 사성제를 인정하는 이들에게 고. 집. 멸. 도제를 말씀하시게 됐지만 공성을 인정치 않으면 멸제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멸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도제가 성립되기 힘듭니다.
따라서 대승이 불설이 아니라 이후에 부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은 것이라면 결국 부처님보다 부처님을 따르는 이들이 더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농담으로 자주 말합니다만 부처님보다 용수보살이 더 뛰어나고 그분보다 우리가 더 뛰어나겠지요. 앞서 나온 경서를 알고 더해 현대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적 지식을 용수보살께서 아실 리 없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요. 부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다고 하게 됩니다. 부처님을 평범한 범부로 여겨서 말입니다.
컴퓨터처럼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으니까요. 결국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부처님을 평범한 범부로 두고 선한 마음과 지혜를 가진 자 정도로 여겨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대 무량겁의 자량은 무의미하게 되고 이것을 인정할 수 없는 아니 인정하지 않겠지요. 따라서 이것은 대단한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용수보살이란 분은 대단히 뛰어나신 분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이치적으로 따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굉장한 지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무조건 받아들이는 분이 아닙니다. 요의와 불요의의 경을 구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따지는 것이지요. 뛰어난 지성.
제가 아는 산스크리트 학자들은 중론의 저술 방식이 뛰어나다고 놀라워합니다. 중론의 산스크리트어 문체가 뛰어나다고 굉장한 칭송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뛰어난 지성과 이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당시 인도의 역사에서 250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이 부처님에 대해 추측하는 것이 쉬울지, 부처님 입멸 후 4~5백년이 지난 그때의 스승들이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부처님 입멸 후 4~5백년이 지난 그때의 스승들이 더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들은 인도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신지 4~5백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얘기를 하던 때이지요. 선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혹은 스승의 스승의 스승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4,5백년이 되지 않았던 시대의 분이고 지성과 이성을 가지신 분이 하셨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대학자라 하더라도 다소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용수보살은 비구이십니다. 절대로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계율을 여법이 지키는 비구이고 뛰어난 지혜를 가지며 석존 입멸 후 4,5백년이 지난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 존재하셨던 용수보살께서 부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어리석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중론에서도 부처님 경장을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집학론’에서 많은 경을 인용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집학론’에서 인용하셨던 대승의 경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인정 하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용수보살을 따르는 성천보살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뛰어난 지혜와 내외도 사상을 모두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뒤로 불호, 청변논사도 뛰어나신 분들입니다. 견해에 있어서 조금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긴 있지요. 월칭보살께서 이치적으로 따져봤을 대 청변의 견해에 오류를 말씀하긴 합니다만 이것으로 놀랄만한 지성과 예리한 이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봤을 때 대승의 경을 바른 하나의 근거로써 제기하기 때문에 대승이 불설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반야부의 경을 영취산에서 설하실 때 장소가 광활해 무수한 천인무리가 함께 법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실제 영취산 설법 장소에 가보면 일이십 명이 다리를 오므리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범부에게 공개적으로 설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설하신 것은 결집삼장입니다. 일반 역사에서도 이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기에 비해 대승은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배열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아 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가르침의 내용을 생각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했지만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반야경에서 사리자와 관세음보살 혹은 수보리와 관세음보살의 질의 응답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사리자와 수보리는 인간의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서로 대화나 접근이 가능했지만 사리자와 관세음보살과의 질의응답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신의 형상인 관세음보살과 질의응답은 업이 정화된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지 업이 정화되지 않은 사람이 십지보살과 질의응답의 기회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일 필요가 없습니다. 업이 정화된 중생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나투어 법을 설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밀교의 경이 불교인지 의심하는 이들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밀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업이 정화된 대근기에게 설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성천보살의 논서 가운데 오종성의 뜻을 풀이하신 논서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무착행, 바라밀행, 유착행 세 가지로 소승행에게는 무착행을, 넓지 않은 이에게는 바라밀행, 심원함에 나아가지 않는 이에게는 유착행이라는 심행을 말씀하시고 비구의 모습인 부처님께서 만다라의 분노본존의 모습으로 변해 밀교경을 설했다고 인연을 밝힐 때 나오며 사실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가장 업이 정화된 1,2명에게 나타나서 설하실 지도 모릅니다. 가장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살아계셨던 동안-80세 정도 사셨지만 그 동안 설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후에 근기가 되는 이들에게 나타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티베트에 종파를 떠나 많은 스승들께서 부처님뿐만 아니라 용수보살과 성천보살을 직접 친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쌀마(후에 발전한 새로운 종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닝마(기존의 종파)에서 해심밀이라는 것이 나오고 성천보살이 나타나 어떤 본존에 의지할 것인지 말씀하고 그에 맞는 비밀의 가르침과 수행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업이 정화된 특별한 이들에게 만다라의 본존이 나타나 특별한 비밀의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500년 전 인도에서 가능한 것이 티베트에서 발생하지 않으란 법이 없습니다. 만약 인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 한다면 민족우월주의가 됩니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지요. 이렇게 볼 때 일반적 방법으로 규정한 역사로 얘기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래서 성언량 이런 경을 해설한 논서로 용수보살을 비롯한 분들이 지으신 논이 두 번째로 나오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과 논서 이 두 가지를 깨달아 교학과 수행을 갖춘 바른 스승, 상사량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바른 스승에 의지하므로 제자의 체득이 가능하므로 증득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확신을 얻는 순서로 말하자면 반대로 먼저 자신의 마음에 경험이 생기고 스스로의 경험으로써 이전에 공부할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의식에 이런 변화가 왔고 변화로 인해 마음이 행복하고 몸이 편안해져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고 이보다 더한 체득으로 일반인에게 없는 특별한 공덕이 갖춰지면 증득량이 되는 것입니다.
증득량은 자신의 경험으로 직접 이해되는 것이지요. 이런 증득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가르침을 보이신 스승에 의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스승이 믿고 의지할 만한 스승이라는 바른 스승 상사량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스승은 용수보살을 비롯한 분들의 경서를 배우고 수행함으로써 교학과 수행을 갖춘 스승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논서에 대한 확신이 들고 논서의 저자인 용수보살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또 용수보살이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는 확신과 함께 거짓을 설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승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어제 말한 단견자(斷見者)인 순세파 주장의 하나로써 만약 전생이 존재하는 근거를 의식에 둔다면 의식이란 육체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육체가 무너지면 의식도 사라짐을 수천 년 동안 인도의 순세파는 주장해 왔습니다.
현대에는 의식은 뇌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뇌가 죽음으로 의식도 없어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과학자들이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열려있는 의식으로 사물을 관찰합니다. 몇몇 젊은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1979년 소련의 몇몇 과학자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식(識)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어 오식(五識)과 ‘의식(意識)’을 말하자 과학자들이 soul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나 봅니다. 예수교에서 말하는 영혼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라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종교의 영역이라면서요.
이런 과학자의 경우는 예외입이다.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태도 말입니다. 특히 중국 과학자들 가운데 처음부터 종교를 부정하고 공산주의만 옳다고 결정한 뒤 과학에서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으려 하면 치우치지 않은 의식이 아닙니다. 또 불교인이 불교입장에서 옳고 그른 것을 미리 결정한 뒤, 뒤에 옳은 이유를 제시한다면 이 또한 치우친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뜻을 구할 수 있다’는 말처럼 백 퍼센트 열려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취할 바와 버려야할 바, 옳고 그름을 먼저 결정한 후에 성립이유를 댄다면 이미 한쪽에 치우친 생각이지요. 처음부터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어떤 것을 성립시키고 그 필요를 밝히기 위해 이유를 댄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열려있는 의식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 위에서 따져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실상을 알았다면 그 실상을 취할 것인지 아닌지는 다른 의식으로 살펴보아야지 처음 실상을 파악하는 의식이 처음부터 실상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러면 치우친 의식이 됩니다. 때문에 불교에서 열려있는 마음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뜻을 구한다.’
쫑카파 대사께서 “편견의 어둠에 가리지 않아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지혜의 힘을 가진 이”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편견의 어둠에 가리지 않는’이라 했듯이 한쪽에 치우쳐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과학자들과 많은 모임을 가지지만 ‘이것이 불교사상이다’라고 절대 얘기하지 않습니다. 불교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의 생각을 물어오면 불교에선 이렇게 얘기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생에 대해 물어올 때면 불교도나 전생을 믿는 사람들의 주제이지 당신이 관여해서 밝힐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얘기를 합니다.
중국과학자의 경우 처음부터 공산주의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어떤 근거를 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과학자, 열려있는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얘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 것이 옳다고 결정하고 과학에서 근거를 찾으려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과학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어떤 이유를 대든지 원하는 대로 이유를 찾는다면 열린 의식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담입니다만 과학자들과 교류한지 20년이 되어갑니다. 과학자들과 교류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초창기 과학자들과 교류를 고려할 때 일입니다. 미국의 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불자였는데 저에게 이런 조언을 하더군요. 과학의 교류는 여러 위험요소를 가진다. 과학은 영어로 ‘killer of Religion'이다. 종교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과의 교류를 위험하다 하더군요.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무엇을 하는가? 진실을 규명합니다. 규명하는 대상은 한계를 가지지만 주로 형체가 있는 대상입니다. 인식할 수 있고 형상이 있는 대상, 현전(現前)의 경계, 측량이 가능한 것을 대상으로 해서 과학이 이루어집니다. 분야 자체가 한계성을 집니다. 불교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규명하는 대상은 한계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입니다.
불교 또한 진실을 규명합니다. 불교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방법으로 네 가지 도리(道理), 정리(正理)를 들어 말합니다. 법이(法爾), 작용(作用), 관대(觀待)도리 세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은 우선 바탕이 본래 존재하는 것, 예를 들어 우리에게 나라는 생각이 존재함과 그와 관련한 행불행 감정의 존재 이런 것은 법. 자연입니다. 이것은 업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자연성입니다.
마찬가지로 바깥에 형상, 안팎의 모든 사물의 결과가 원인에 의존함은 자연(法爾)입니다. 각 사물이 가지고 있는 작용과 성질 예를 들어 불의 뜨거움 들의 성질은 법이입니다. 이러한 것을 법이도리(法爾道理)라고 합니다.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작용도리(作用道理)란 사물이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아마 현대의 화학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각 물질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고 다른 물질과 만났을 때 성질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다른 물질과 섞었을 때 또 다른 하나의 물질이 나오게 됩니다. 사물의 본성이 다른 물질과 상호 관련성을 가지기 때문에 성질에 변화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물질에 다른 두 물질을 첨가했을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사물에 새로운 결과를 가지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관대도리(觀待道理)라고 합니다. 결과가 원인에 의한 것이다.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고 결과가 원인에 의존하는 것 이런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이러한 자연법칙을 인정하고 이 바탕 위에 자연의 존재,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한 것이 증성도리(證成道理)입니다. 증성도리는 이러하기 때문에 저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을 원하는 것은 본성이며 자연입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 이런 요건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또 저러한 조건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원인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증성도리입니다.
이러하므로 저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러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필요치 않다. 불필요한 것을 없애기 위해 상호관계성을 가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이와 더불어 각각의 자용, 성질을 파악하고 그것의 연관성을 이해함으로써 이익이 되는 물질은 취하고 해가 되는 것은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관점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이 네 가지의 도리로 성불하셨습니다. 먼저 식(識)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 대적되는 의식이 존재합니다. 그 속에 상위(相違) 상반(相反)되는 의식이 존재합니다. 바깥 사물에 상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변화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상위성이 없다면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내면의식에 있어서도 상반되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의식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지 상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내면의식에 있어서 상위의식은 어떤 것인가.
우선 바깥 사물의 성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예를 들면 뜨거움과 차가움은 상반되는 성질입니다. 연속선상에서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함께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밝음과 어둠 또한 그렇습니다. 동시에 같이 존재할 수 없는 상위모순되는 존재입니다.
내면의식은 바깥물질처럼 상위성을 따지는 대상은 없지만 인식하는 것이 상반되는 것 예를 들어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상반된 인식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한 시점에 좋다 나쁘다는 인식은 상위모순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불쌍한 중생을 향한 자비심과 그 중생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미움은 상반된 인식입니다.
내면의식에 상반된 의식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바깥 사물에 뜨거운 성질이 커질수록 차가운 성질이 줄어들고 밝아질수록 어둠은 줄어듭니다. 이처럼 내면의식에는 중생을 향한 미움이 더 커지면 사랑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고 중생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날수록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실제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인해 변화를 가집니다. 법이도리, 작용도리, 관대도리를 그 아래에서 증성도리.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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