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해설

[스크랩] 입보리행론 해설 140. 불교와 과학과의 교류 [끝]

수선님 2018. 12. 23. 12:53

입보리행론 해설 140. 불교와 과학과의 교류

 

 

행불행과 관련 있는 것 바깥사물이든 내면의식이든 행복을 주는 필요조건과 그렇지 못하고 불행을 주는 불필요한 조건들을 없애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도 이 네 가지 도리로써 생각하셔서 점차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가져와 모든 허물이 다하여 공덕이 원만한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후에 또 언급될 것입니다.

        

허물이 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탐진이 줄어드는 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지만 완전한 제거는 많은 사유를 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점차 허물이 줄어들고 공덕이 원만해져 궁극의 경지의 단증에 이른 것이지 아무 것도 않고 처음부처 그렇게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방식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경우는 다릅니다. 부처 아닌 신이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그런 식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분석하여 존재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과학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 상위되는 점이 없다고 생각해서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이들은 의아해하며 가끔 묻기도 합니다. 불교가 과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교는 실상을 규명한다. 과학도 실상을 규명한다. 진실 혹은 실상을 구하는 입장에서 같다. 따라서 서로 교류가 필요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모순되는 바가 없지요. 20년간 과학과의 교류를 통해 어느 위치에 왔는가 하면 과학이 물리학과 신경병리학에서 얻은 결과는 대단합니다. 불교 경서에서 언급하긴 하지만 대략적인 것에 그칩니다. 과학이 놀랄만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과학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리학 특히 화학에서 미립자에 관한 설명은 자세합니다. 이것은 모두 분석해서 얻은 결과를 얘기한 것이지 추측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심리학 특히 강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분별 예를 들면 탐.진에 대해서는 불교가 굉장히 풍부한 설명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변화 방법이나 대치에 대해 이전의 인도종교 중 불교의 설명이 자세하고 뛰어나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분야 과학자들이 불교에서 어떤 설명을 하는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근래 과학자들 가운데 불교의 설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요즘 열린 의식을 가진 유명한 과학자들이 불교 특히 티베트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불법을 수행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생을 위해서 법을 수행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불교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전, 후생의 경우 일반적으로 중생의 심식을 기본으로 인식대상을 말할 때 직접지각 대상인 현전(現前)과 비현전(非現前), 극비현전(極非現前) 세 가지의 인식대상을 말합니다. 세 가지 인식대상이 존재함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

    

존재한다고 모두 보여져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오감으로 바로 인식되는 대상일 필요는 없지요. 감춰진 경계(非現前)가 많이 존재하지요. 예를 들면 미세한 무상(無常)은 우리가 실제로 인식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사유를 통해 어느 정도 추측할 뿐이지요.

    

근래 과학이 미분자 상태에서 원자가 찰나찰나 변하고 사라지는 것은 보고 측량으로써 어느 정도 일 수 있게 되었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지요. 직접지각대상(現前)이 아닌 감춰진 경계(非現前)가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100년 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근래에는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미경 망원경이 발달될수록 더 무한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에서 지구에 국한해 얘기할 뿐 더 자세한 내용은 없습니다. 바깥에 별과 해와 달 그리고 지금의 세상을 창조했다고 얘기합니다. 그 당시에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당시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각할 수 없는 감춰진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어떤 것은 극비현전(極非現前)인 것도 있습니다. 대상과 시대에 따라 비현전 가운데 이치적으로 따져서 인식 불가능한 극비현전의 대상도 존재합니다.

    

때문에 다양한 의식 가운데 대부분은 미세의식은 비현전입니다. 의식에는 미세하고 거친 다양한 의식이 존재합니다. 거친의식은 드러나기 때문에 현전이 되지만 대부분의 미세의식들은 비현전일 것입니다. 그중에 극비현전일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이런 선상에서 봤을 때 전생은 비현전입니다. 실제 직접지각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비현전은 알지 못하는 것, 인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지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이해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불교 경서에서 어떤 사물이든 원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원인 가운데 구생인(俱生因)과 근취인(近取因)이 있다, 원인이며 결과의 본질이 되는 근취인을 얘기합니다. 외부의 형체가 있는 것에 근취인이 필요하듯이 내면의식에도 근취인이 필요합니다. 의식의 본질인 명료(明了)라는 자성과 물질은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것입니다.

    

성향이 다른 물질은 성향에 맞는 각 근취인을 가집니다. 따라서 지금 의식의 흐름은 태어난 후의 의식을 이어온 것이고 태어난 후의 의식을 거슬러 가보면 수정란에 심어지는 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명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일반인은 제쳐두고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도 입으로는 명료라는 말을 수천 번 말하지만 마음 속으로 명료가 무슨 의미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관심과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알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대상을 한 지관수행으로 명료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일체종지를 제쳐두고도 먼저 사물을 규명할 때 색(色-물질체)과 식(識-정신체), 불상응행 세 가지 중 심식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명료의 체험 분별을 그친 상태에서 식의 작용이 없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 상태에서 의식의 본질이 무엇인가 자성을 알고 이와 상응하는 원인이 필요한가 아닌가. 어제 얘기했듯이 뇌로부터 의식이 생겨납니다. 뇌에 의존하죠. 뇌는 의식에 비해 훨씬 거친 물질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가 이런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와 자신의 고통으로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뇌신경이 같답니다. 그때 의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뇌라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입니다. 농담으로 말이죠. 큰 차이가 있지 않나요? 타인의 고통으로 마음이 불편한 것은 우러난 것이지 억지로 일어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타인에 대한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원치 않는 마음으로 저절로 우러난 것뿐만 아니라 근본에 용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고통을 원치 않음에도 고통 받고 있는 것이지요. 뇌가 이것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통의 감정을 느낄 뿐 어떻게 왔는지 뇌의 작용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의식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행불행의 삶속에서 이타를 생각하는 마음이 클수록 대담하게 되고 걱정과 마음의 불행이 적습니다. 도움이 됩니다. 필요한 것입니다. 취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원치 않기 때문에 해탈이나 일체지의 지위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생각은 자신에게 도움을 줍니다. 도움을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취하고 버려야할 바가 한 뇌신경에 동시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든 의식을 뇌구조로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거친 것은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모든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이러한 뇌에 의해 모든 의식이 생겼다고 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물론 이쪽으로 계속 발전하겠지만 생각해 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논란의 하나는 이 세상이 왜 생겼는가? Why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세상의 생성과정 (How)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What이라 해도 설명 가능합니다. 세상이 어떤 것인가 라고 하면 어느 정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지구와 태양, 열, 은하계 따위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How라 하더라도 설명 가능합니다. 수십억 년 전 태양이 생성되고 그것을 둘러싼 것이 가장자리에 생성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겠지요.

    

그러나 Why라고 했을 때는 설명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철학이 설명하기 시작하겠지요. 원인 없이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무지한 말이지요. 실제로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머리가 아프니까 그냥 원인 없이 생겼지 않을까라고 하면 그만이지요. 그러면 머리 아프게 사유 분석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원인 없이 생겼다고 하면 이치에 완전히 벗어납니다. 현재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는 것이 시작할 때는 원인 없이 우연히 생겼다고 한다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지요. 원인에서 생겼다면 어떤 원인에서 생겼는가?

    

어쩔 수 없이 수론학파가 영원불멸한 원인(常因)에 의해 생겼다고 합니다. 이 또한 불가능한 것이, 변화 없는 원인이 결과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변한 만큼 원인 또한 변하는 것이지 원인에 변화가 없다면 원인의 결과가 생기지 않는 때와 원인의 결과가 발생한 때를 두기가 힘듭니다. 원인의 작용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영원불멸한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은 무상하고 반은 영원불멸성인 창조주라는 것을 들고 나온다면?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어 무상한 존재인 것 같기도 하고 항상 계시는 자생적 존재라고 할 때는 영원불멸인 것 같은 존재가 있다고 해도 굉장한 논란거리가 됩니다. 창조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어떤 존재인가? 왜 생겼나고 한다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전지전능한 사랑의 주가 우리의 논란거리 속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불교도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안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한 사랑의 주인이 창조해낸 창조의 결과가 조물주 자신이 답답할 정도로 세상에 여러 복잡한 문제가 많지요. 사랑의 주인 창조주께서 근심하며 ‘내가 창조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만들었다.’ 라고 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논란이 있지요. 고로 원인 없이 생겼다는 것도 이치에 어긋납니다.

    

영원불멸의 인에서 생겼다는 것 또한 이치에 어긋납니다. 불멸의 자생적 존재에서 나왔다는 것도 이치에 어긋납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 뭔가?

    

이 세계 즉 기세간이 형성된 것은 이것을 누리는 주체인 유정세간인 중생이 존재하기에 기세간이 형성된 것입니다. 여기서 업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럼 이 세계는 태초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원불멸의 인과 원인 없는 발생으로 조물주를 주장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태초를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처음 어떻게 발생했는가’ 라고 했을 때 조물주가 창조했다든지 영원불멸의 인인에 의해 생겼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태초의 인이 없다고 합니다. 태초의 인이 없다고 하는 것은 태초의 인이 있다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태초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치로써 왜 생겼는가라고 할 때 이러한 가능성 저러한 가능성에서 볼 때 이것이 타당하지 않고 저것이 타당하지 않다. 여기에 타당성이 다소 있다. 이렇게 해서 태초가 없음을 얘기할 때 몇몇은 선뜻 수긍을 못합니다. 만족할런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논란이 적고 더 많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생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예를 들면 전생을 기억하는 이에게 전생은 직접 인식되는 대상(現前)입니다.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직접 알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는 힘듭니다.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에게 꿈을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저는 마약에 경험이 없습니다. 마약을 했을 때 어떤 느낌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약의 경험에 대해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 사람이 경험한 것처럼 알 수는 없습니다. 대충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의식의 체험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경험하지 않은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전생이 있다는 이유를 바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시작 없음을 이유로 드는 것이지 전생이 있다는 이유를 한마디로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 지금까지의 [입보리행론/지혜품]은 불교TV에서 4회에 걸쳐 방영한 '달라이라마의 특별법문'에서 자막으로 소개된 설법내용 전부입니다. 입보리행론의 나머지 법문은 자료를 구하는 대로 다시 옮기겠습니다.


   

일체 유정의 행복과 해탈을 위하여 보리심을 발하기 위한 수행의 길을 안내하시는 존자님의 입보리행론 법문을 계속 들을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끝)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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