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스크랩] 대지도론(大智度論) 109. 생각의 인연

수선님 2019. 1. 6. 11:56

[문] 단이란 재물을 버리는 일이라 하거늘 어찌하여 말하기를 “버릴 바 없는 법을 구족한다” 말하는가?

 

[답] 단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세간을 벗어난 것이요, 또 하나는 세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은 세간을 벗어난 보시의 특징 없음[無相]을 말하고 있다.

특징이 없으므로 버릴 바가 없다. 그러므로 ‘버릴 바 없는 법을 구족한다’고 한다.

 

또한 재물은 얻을 수 없으므로 ‘버릴 바가 없다’고 한다.

이 물건이란 미래와 과거는 공하고, 현재의 분별에는 일정한 법이 없다. 그러므로 ‘버릴 바가 없다’고 한다.

 

또한 행자가 재물을 희사하면서 마음속으로 ‘이 보시로 인하여 공덕이 많으리라’고 생각함으로써

교만함과 애결(愛結) 등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버릴 바가 없다 하나니,

버릴 바가 없으므로 교만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으므로 애결 등이 생기지 않는다.

 

 

또한 보시하는 자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세간 사람이요, 또한 하나는 세간을 벗어난 사람이다.

 

세간 사람은 재물은 버리나 보시는 버리지 못한다.

세간을 벗어난 사람은 능히 재물을 버리고 능히 보시를 버린다.

  
  
  
10) 자ㆍ비ㆍ희ㆍ사의 4무량심을 말한다.
11) 범어로는 Aśoka.
[473 / 805] 쪽

왜냐하면, 재물도 보시하는 마음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버릴 바 없는 법을 구족한다’고 한다.

 

또한 보시바라밀에 대해 말하기를 “재물과 베푸는 자와 받는 자, 이 세 가지는 얻을 수 없다” 했다.

 

 

[문] 세 가지 일이 화합함으로써 보시라 말한다. 그런데 이제 말하기를 ‘세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어찌 보시바라밀을 갖추고 원만히 한다 하겠는가? 이제 재물도 있고, 보시하는 이도 있고, 받는 이도 있거늘 어떻게 세 가지를 얻을 수 없는가?

 

마치 보시한 방석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것은 왜냐하면 방석이란 이름이 있으면 방석이란 법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방석이란 법이 없으면 방석이란 이름도 없겠지만 이름이 있으므로 실제로 방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방석에는 길고 짧음, 거칠고 고움, 희고 검고 누렇고 붉음 등이 있으며, 인과 연, 지음과 깨짐, 결과와 과보가 있어서 그 특성[法]을 좇아 마음이 생겨난다. 곧 열 자는 길고 다섯 자는 짧으며, 올이 크면 거칠고 올이 가늘면 고우며, 물들임에 따라 빛깔이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올이 있음은 인(因)이요 짜는 기계가 있음은 연(緣)이 되나니, 이런 인연이 화합하기에 방석이 된다. 사람이 공을 들이면 지음이 있고, 사람이 훼손하면 깨뜨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를 막거나 몸을 가리면 과보라 한다.

 

사람들은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몹시 근심함이 있으니, 그러한 것으로써 보시한다면 복을 받고 도(道)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훔치거나 혹은 겁탈해서 그것을 저자거리에서 깐다고 해도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이 있는 까닭에 이 방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방석의 법이라 하거늘 어찌 보시할 물건을 얻을 수 없다 하는가?

 

 

[답] 그대가 말하기를 “이름이 있으므로 그 일이 있다” 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이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사실[有實]과 사실이 아님[有不實]이다.

 

사실이 아닌 이름이란, 마치 어떤 풀의 이름이 주리(朱利)[진나라 말로는 도적(賊)이다.]이지만, 풀 자체는 훔치거나 겁탈하지 않아 실제로는 도적이 아니거늘 도적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474 / 805] 쪽
  

또한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처럼 다만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없는 것과도 같다.

 

방석은 토끼의 풀이나 거북의 털같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인연이 모이기 때문에 있고,

인연이 흩어지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숲이라든가 군대도 모두 이름은 있으나 실제에는 없다.

 

비유하건대 나무 사람이 비록 사람이란 이름은 있으나 사람의 특성[法]을 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방석 역시 이름은 있으나 방석의 실체는 구할 수 없다.

 

방석이란 사람의 마음을 내게 하는 인연이 되나니,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근심한다.

이것이 생각의 인연이다.

 

마음이 생기는 데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실제로부터 생기는 것과 실제가 아닌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꿈속에서 본 것과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밤에 말뚝을 보고 사람이라 여기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것들은 일컬어 ‘실제가 아닌 것에서 능히 마음을 낸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이란 일정치 않으니, 마음으로 생겨나 존재하기에 곧 있는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마음으로 생겨나는 인연 때문에 존재하고, 다시 실제의 존재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는 마치 눈으로 물속의 달을 보고는 생각을 일으켜 ‘이것은 달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 마음을 좇아 이 달이 생겨났다면 진짜 달은 없어야 한다.

 

 

 

또한 있음[有]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상대해서 있음[相待有]이요, 둘째는 거짓 이름으로 있음[假名有]이요, 셋째는 법답게 있음[法有]이다.

 

상대해서 있다고 함은 마치 길고 짧음이나 너와 나[彼此]같이

실제로는 길고 짧음이 없고 너와 나가 없건만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이름이 있게 된다.

 

길다 함은 짧은 것에 인하여 존재하고, 짧다 함은 또한 긴 것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너라는 것은 나를 인하고, 나라는 것 역시 너를 인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물건의 동쪽에 있으면 그로써 이쪽은 서쪽이 되지만, 서쪽에 있다면 동쪽이 된다.

한 물건은 다름이 없는데 동쪽․서쪽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475 / 805] 쪽
  

이들은 모두가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없다.

이러한 것들을 ‘상대해서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실재하는 법은 없으니, 빛․냄새․맛․닿임 등과는 같지 않다.

 

 

거짓 이름으로 있다고 함은 마치 소락[酪]이 빛․냄새․맛․닿임 등 네 가지 일이 있어 인연이 합하는 까닭에 거짓으로 소락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

 

비록 있다고 하나 인연의 법으로 있는 것과는 같지 않고,

없다고 하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이 없는 것과도 같지 않다.

 

다만 인연이 합하는 까닭에 거짓으로 ‘있다’ 할 뿐이다. 소락이나 방석의 경우도 그러하다.

 

또한 극미(極微)12)의 빛․냄새․맛․닿임이 있으므로 털의 요소[毛分]가 있고, 털의 요소의 인연으로 털이 있고, 털의 인연으로 털솜[毳]이 있고, 털솜의 인연으로 털실이 있고, 털실의 인연으로 비단이 있고, 비단의 인연으로 옷이 있다.

 

만일 극미의 빛․냄새․맛․닿임의 인연이 없으면 또한 털의 요소도 없고, 털의 요소가 없는 까닭에 털솜도 없고, 털솜이 없는 까닭에 털실도 없고, 털실이 없는 까닭에 비단도 없고, 비단이 없는 까닭에 옷도 없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해탈 -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