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악의 꽃다발 오장애는 어떻게 버려지는가

수선님 2019. 1. 6. 12:49

 

악의 꽃다발 오장애는 어떻게 버려지는가

 

 

 

~알 쑤 없는 의심으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아직도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논란거리이다. 이는 깨달음이 신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이란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선사들만의 고유 영역처럼 각인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유명선서의 법문을 들어 보면 ~알 쑤 없는 의심으로~”라는 말로 간화선을 설명한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막혔을 때 의정이 형성되어 언젠가 막혔던 것이 뚫어지듯이 화두가 타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내 마음속의 본래불의 성품을 보기만 하면 깨달아서 성불하는 것으로 본다. 견성성불을 말한다. 이것이 선불교식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번뇌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번뇌의 소멸이 깨달음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 되는 번뇌를 말한다. 그런 번뇌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실려 있는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번뇌(煩惱)’로 옮긴 낄레사(kilesa/Sk.kleśa)는 √kliś(괴롭히다) 또는 kilissati(더럽히다, 물들이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본다. 산스끄리뜨어의 kleśa는 kliś(괴롭히다)에서 파생된 말인 듯하며,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의 해석은 이에 의거하고 있다.

 

즉 ‘몸과 마음을 들볶아서 괴롭게 하는 까닭에 번뇌라고 부른다. 이것이 곧 수면(隨眠, anuśaya)이다’(T28:984a)라고 언급되어 있듯이, 몸과 마음을 교란하여 고요함을 방해하는 것이 번뇌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상좌부에서는 kilissati(더럽히다, 물들다)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청정도론」과 주석서의 해석도 이에 의거하고 있다. 즉「청정도론」에서는 ‘스스로 오염되어 있으면서 상응하는 마음의 작용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번뇌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PED에서 ‘stain, soil, impurity, figuratively affliction; in a moral sense, depravity, lust. Its occurrence in the Piakas is rare; in later works, very frequent, where it is approx. tantamount to our terms lower, or unregenerate nature, sinful desires, vices, passions.’라고 설명되듯이, 그 일차적인 의미는 ‘때, 더러움, 오염물’이지만 비유적으로 쓰여서 도덕적인 의미의 사악, 탐욕 등의 번뇌(煩惱)를 나타낸다.

 

경장에서는 드물게 보이지만 후기 주석서에서부터 ‘저열하고 삿된 본성, 사악한 욕망, 악덕, 애욕’과 대체로 같은 말로 아주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번뇌(煩惱)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defilement, mental impurity라고 번역한다.

 

(번뇌(煩惱) ,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6.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 1번 주해)

 

 

번뇌는 빠알리어로 낄레사 (kilesa) 라 한다.  크게 ‘괴롭히다’와 ‘더럽히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 설일체유부의 견해이고 후자의 경우는 테라와다의 견해라 한다. 몸과 마음을 교란하여 고요함을 방해하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견해이고, ‘스스로 오염되어 있으면서 상응하는 마음의 작용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번뇌라고 하는 것이 테라와다의 견해라 한다.

 

번뇌의 대표선수

 

교란하여 고요함을 방해하는 것과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이 번뇌라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의 작용을 번뇌라 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 위방가-Vibhanga, Vbh.385)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8가지 번뇌를 들고 있다.

 

 

ⓛ 탐욕(lobha),

② 성냄(dosa),

③ 어리석음(moha),

④ 자만(māna),

⑤ 사견(diṭṭhi),

⑥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⑦ 해태(thīna),

⑧ 들뜸(uddhacca)

 

 

불자들이 흔히 말하는 탐욕과 성냄괴 어리석음과 함께 자만, 사견, 의심, 해태, 들뜸 등이 번뇌에 해당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탐-진-치는 번뇌의 대표선수라 볼 수 있다.

 

악의 꽃다발

 

아비담맛타상가하(Abhidhammattha Saghaha)에서는 번뇌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분류해 놓았다. 번뇌의 다발로 분류 한 것이다.  번뇌의 다발(4)폭류의 다발(4)속박의 다발(4)매듭의 다발(4)집착의 다발(4)장애의 다발(5)잠재성향의 다발(7)족쇄의 다발(10) 이렇게 여덟 가지 번뇌의 다발이 있다. 이는 마치 여러 꽃들을 모아 놓은 꽃다발과 같은 것이다. 그것도 악의 꽃만 모아 놓은 악의 꽃다발이다.

 

 

 

flowers-bunch

 

 

5가지 장애에 대한 것을 보면, 오장애라는 꽃 다발안에는 다섯가지 악의 꽃이 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라는 악의 꽃, 분노라는 악의 꽃, 해태와 혼침이라는 악의 꽃, 흥분과 회환이라는 악의 꽃, 의심이라는 악의 꽃 이렇게 다섯가지 악의 꽃이 꽃병에 꽃혀 있는 모습이다. 이런 악의 꽃들을 어떻게 해야 버릴 수 있을까.

 

컬러풀한 오색물

 

오장애는 마음의 장애를 말한다. 시각장애나 청각장애가 있듯이 마음에도 장애가 있는데 그것은 탐욕, 성냄 등을 말한다. 그러나 번뇌에 해당되는 것은 모두 마음의 장애가 된다. 그런 오장애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 되어 있다.  

 

 

바라문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묶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정복된 마음으로 지내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 그 때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그 때 타인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그 때 양자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오랜 세월 독송해왔던 경구들도 생각나지 않는데, 하물며 독송하지 않은 경구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붉거나 노랗거나 푸르거나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묶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정복된 마음으로 지내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 그 때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그 때 타인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그 때 양자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오랜 세월 독송해왔던 경구들도 생각나지 않는데, 하물며 독송하지 않은 경구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상가라바경-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6-5), 전재성님역)

 

상가라바경(S46.55).docx 

 

 

 

오장애 중에서 탐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탐욕에 대한 비유를 오색물로 비유하였다. 형상, 소리 등  다섯가지 감각대상에 대한 갈애에 따른 물의 색깔을 말한다. 이처럼 컬러풀한 물이 되었을 때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묶이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비추어 볼 수 없어서 장애라 한다.

 

다섯가지 물의 비유

 

경에서 다섯가지 장애에 대한 물의 비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오장애

물의 비유

 

감각적 쾌락의 욕망

(kāmarāga)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붉거나 노랗거나 푸르거나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

 

분노

(byāpāda)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불에 달구어져 끓어오르고 거품을 일으켰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글부글 끓는 물

해태와 혼침

(thīnamiddha)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이끼낀 수초로 덮였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끼가 낀 물

흥분과 회한

(uddhaccakukkucca)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바람에 흔들리고 소용돌이치고 물결친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

 

의심

(vicikicchā)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혼탁하고 혼란스럽고 흙탕물이고 어둠속에 놓여 있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흐린 흙탕물

 

 

 

여기 호수가 있는데, 공업용수의 유입으로 인하여 다섯가지 색깔로 물들인 물이 있다면 주변의 산과 하늘, 구름등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글부글 온천수가 솟아 오른다면 역시 보이지 않을 것이고, 녹조로 인하여 이끼가 끼었다면 보지 못할 것이다. 또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 친다면 역시 보지 못할 것이고, 비가 와서 흙탕물이 유입되었다면 보지 못할 것이다.

 

 

 

컬러풀한 물(rainbow-oil-slick-water-pollution),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부글부글끓는물, 분노

 

 

 

 

 

이끼낀 물(Blue Green Algae), 해태와 혼침

 

 

 

 

 

파도치는 물(ocean_waves), 흥분과 회환

 

 

 

 

 

흐린 흙탕물(muddy water), 의심

 

 

 

해인삼매(海印三昧)

 

그렇다면 어떤 때 맑은 호수의 물을 볼 수 있을까. 호수 물이 맑고 깨끗하고 잔잔해야 주변의 경치가 드러날 것이다.

 

 

 

잔잔한 호수(calm_lake)

 

 

 

이렇게 호수가 맑아져 주변의 산과 푸른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호수에 비추었을 때 이와 같은 마음을 해인삼매라 한다.

 

화엄경에 따르면 해인삼매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증득하면서 경험한 완벽하고 순수한 상태라 한다. 마치 바닷물이 고요하게 되었을 때 하늘의 모든 것들이 마치 거울과 같이 보여 바닷물에 도장을 찍듯이 번뇌가 가라앉은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상태는 오래가지 않는다. 삼매에서 벗어나면 다시 파도치고 흙탕물이 일어 나듯이 마음 역시 오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번뇌를 완전히 뿌리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가지 버림이 있는데

 

사홍서원에서 불자들은 모든 번뇌를 끊으오리다라고 서원한다. 일시적 억압이 아닌 번뇌의 끊음, 번뇌의 버림을 말한다. 그런 버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마하시사야도의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버림이 있다.

 

 

(1)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bhana-pahāna): 선정을 통하여 5가지 장애를 일시적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2)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nga-pahāna): 마치 밤에 켜놓은 등불에 의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위빠사나의 한 부분인 지혜의 구성요소로 그와 반대되는 버려야할 법들을 버리는 것이다.

 

(3)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ahāna): 마치 번개에 맞아 타버린 나무처럼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통하여 족쇄와 다른 삿된 법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4) 편안히 가라않음에 의한 버림(paipassaddhi-pahāna): 도에 들어서는 입구에서 족쇄들이 사라지고 나면, (phala)를 얻는 시점부터 족쇄들이 영원히 사라지고 잠잠해지는 것이다.

 

(5) 벗어남에 의한 버림(nissaraa-pahāna): 소멸(nirodha)이나 열반(nibbāna)과 동의어이다.(Ps.M.i.27)

중국에서 사단(捨斷)이라고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abandoning, overcoming이라고 한다.

 

(버림,  <초전법륜경> 2 188,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다섯가지 버림 중에 억압에 의함 버림이 선정수행으로 인한 눌러서 버리는 것이다. 마치 물결이 그친 호수와 같은 마음이지만 언제 또 다시 바람이 불어 출렁거릴지 알 수 없다.

 

알랄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

 

부처님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선정수행을 하였다. 부처님 당시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두 분의 스승에게 배웠는데, 알랄라 깔라마의 무소유처정과 웃따까 라마뿟따의 비상비비상처정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아리야빠리예사나경 (고귀한 구함의 경, M26)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머무는 한,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라는 생각과 함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고 떠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수행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인 열반을 성취하였는데, 그것이 위 네 가지 버림에 의한 것이다.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

 

악의 꽃들과 같은 오장애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끊어질 수 있는데, 그렇다면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상가라바경(S46:55)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붉거나 노랗거나 푸르거나 새빨간 색으로 물들지 않았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묶이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정복되지 않은 마음으로 지내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 그 때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그 때 타인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그 때 양자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오랜 세월 독송하지 않았은 경구들도 생각나는데, 하물며 독송해 온 경구들은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상가라바경-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6-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 (yathābhūta)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여읨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닛사라낭(nissaraa)이다. 사라짐, 버려짐 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버려지는가

 

악의 꽃들과 같은 오장애의 여읨(nissaraa)은 다음표와 같다.

 

 

오장애

여읨의 내용

제거의 길

감각적 쾌락의 욕망

(kāmarāga)

1) 선정에서의 진압에 의한 여읨.

2) 통찰에서의 특별한 관점에 의한 여읨.

3) 고귀한 길을 통한 제거에 의한 여읨.

 

욕망과 탐욕(kāma-rāga)은 부정관(不淨觀)에 바탕을 둔 첫번째 선정에서 제어됨.

아라한의 길에서  제거됨.(여기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넒은 의미에서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탐욕을 포함해서 말한다.)

분노

(byāpāda)

자애에 바탕을 둔 첫 번째 선정에서 제어됨

불환과에 이르는 길에서 제거됨

해태와 혼침

(thīnamiddha)

 

빛에 대한 지각에 의해 제어됨.

불환과에 이르는 길에서 제거됨

흥분과 회한

(uddhaccakukkucca)

 

안온에 의해 제어됨.

회환은  불환과에 이르는 길에서 제거됨.

흥분은 아라한의 길에서 제거됨.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원리에 대한 결정의 수용(dhammavavatthana)으로 억제됨.

예류자의 길에서 제거됨.

 

참고; 상가라바경(S46:55)

 

 

표를 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까마라가(kāmarāga)이다. 까마(감각적 쾌락)와 라가(욕망)의 복합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욕망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뿌리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일반적으로 탐욕은 열가지 족쇄에 따르면 아나함(불환자)이 되어야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아나함의 경우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 불환자라 하는데, 죽어서 색계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곳에서 수명대로 살다가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한다. 그런 색계에 태어나려면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기 위한 욕망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고 한다. 그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넓은 의미에서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욕망을 모두 포함한 것이라 한다.

 

오장애 중에서 예류자(수다원)단계에서 제거 되는 것은 회의적 의심이고, 분노와 해태-혼침과 흥분-회환은 모두 불환과(아나함)단계에서 제거 되고, 마지막으로 아라한 단계에서 없어지는 것은 감각적 쾌락과 대한 욕망과 흥분임을 알 수 있다. 쾌락에 바탕을 둔 욕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초기경을 보면 매우 풍부한 비유를 볼 수 있는데, 이런 비유는 뭇삶(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법을 아는 제자들에게는 방편 없이 있는 그대로 법을 설하였다. 그래서 아비담마(abhidhamma)라 한다. 비유나 방편없이 법에 대하여 설한 것을 말한다.

 

아비담마에 대하여 중국에서는 대법(對法)으로 옮겼고, 또 법을 체계화한 궁극적이고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승법(勝法)이라고도 옮겼다. 이렇게 듣거나 배우는 사람의 성향이나 근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즉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설한 아비담마에 대한 것의 예를 들라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법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양하게 법을 설하였는데 그런 것중의 하나가 비유를 들어 설한 것이다. 상가라바경에서 물의 비유를 오장애를 설명한 것은 알아듣고 이해하기 쉽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합니다

 

이와 같은 비유에 대한 가르침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이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볼 수 있다.

 

 

abhikkanta bho gotama abhikkanta bho gotama, seyyathāpi bho gotama nikkujjitta vā ukkujjeyya, paicchatta vā vivareyya, mūahasasa vā magga ācikkheyya' andhakāre vā telapajjota dhāreyya, 'cakkhumanto rūpānidakkhintī' ti, evameva bhotā gotamena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 Esāha bhagavanta gotama saraa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ghañca. Upāsaka ma bhava gotamo dhāretu ajjatagge pāupeta saraa gatanti.

 

[쌍가라바]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 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합니다.

(상가라바경-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6-5), 전재성님역)

 

 

바라문 쌍가라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찬탄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 하겠다고 하였다.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교도일지라도 감화를 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감명깊다. 이는 부처님이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개종하는 것이다. 그것도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할 것을 맹세 하고 있다.

 

이교도라고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한 줄 안다면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서 감명을 주고 인격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포교에 이교도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불교인을 위한 종교평화선언에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매우 나약하고 패배주의적 발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한 줄 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교도에게도 전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들에게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여러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교도 바라문 상가라바처럼 목숨이 다하도록 삼보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2012-11-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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