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학(唯識學)의 약사(略史)
불교는 유심사상(唯心思想)에 입각하여 교리를 대부분 설명한다. 모든 것은 마음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상을 기초로 하여 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을 설명하고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도 서로 불가분리한다는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선(善)과 악(惡)을 나타내는 주체는 정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인공은 마음인 것이다.
마음을 학술적으로 말하려면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핵심적인 표현은 심의식(心意識)이라고 할 수 있다. 심(心)과 의(意)와 식(識)은 원시불교(原始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도 정신을 설명할 때 소중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보다 대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심(心)을 아라야식(阿賴耶識)이라 하고 의(意)를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며 식(識)을 의식(意識) 등 육식(六識)으로 정하여 완전히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이론을 체계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유식학은 인도(印度)에서 싹이 트게 되었으며 열매를 맺어서 중국에 전해지고 중국으로부터 한국(韓國)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식학은 여러 나라의 불교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인간의 심성(心性)을 이해시키는 데도 많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다음에는 인도에서 유식학이 성립되고 발달하는 과정과 그리고 중국과 한국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인도 유식학의 성립
유식학은 마음을 중심하여 설명하는 학설을 말한다. 물론 마음을 중심하여 설명하는 학설은 원시불교(原始佛敎)에도 있었고 소승불교(小乘佛敎)에도 있었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심의식(心意識) 등의 유심사상을 소극적으로 설명하였으며 이들 사상을 대승불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설명하게 되었다. 대승불교의 유식학을 성립시킨 학자와 교리발달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유식학(唯識學)의 성립
유식학을 성립시킨 학자는 무착보살(無着菩薩)이다. 무착(Asanga)보살은 A.D 4세기경(佛滅 九百年)에 인도의 간다라(Gandhara)라는 나라의 수도인 푸루사푸라(Purusapura)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뜻한 바 있어서 화지부(化地部)라는 소승불교의 종파에 출가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소승불교의 학설을 모두 연구하고 다음에는 대승불교에 귀의하여 미륵신앙(彌勒信仰)을 갖고 대승불교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수행을 잘한 결과 신통력(神通力)을 구족하게 되었다.
무착보살은 평소에 생각하고 연구한 학문에 대하여 풀리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하루는 신통력으로 도솔천에 계시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도솔천에 올라갔다. 무착보살은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설법 듣기를 발원하여 심오한 설법을 들었다.
그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불자(佛子)들을 강당에 모이게 하고 미륵보살로부터 들은 교리를 대중들에게 설법하여 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설법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삿된 학설이라고 비난하면서 믿지 않았다. 무착보살은 중생들을 교화하겠다는 원력(願力)을 세우고 도솔천으로 다시 올라가서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미륵님이 직접 하강하여 교화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미륵보살은 무착의 소원대로 아유다국(阿踰陀國)의 강당에 밤에만 내려와서 설교하였다. 이 설교를 들은 대중들은 환희심을 갖게 되었고 진리를 깨달은 바가 많았다.
이 설법회는 밤에만 4개월간 지속되었으며 이때 무착보살은 그 미륵보살의 설교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편집하여 발간하였다. 이 때 편집하여 발간된 책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百卷)],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대승장엄론(大乘莊嚴論)], [변중변론(辯中邊論)],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密經論)] 등이다.
이들 논전들은 유식학을 연구하는데 가장 필요한 교과서라고 해서 유식가에서는 오대부론(五大部論)이라고 칭한다. 이와 같이 무착보살의 원력에 의하여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설교를 한 것이 유식학의 근본사상인 오대부론을 성립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전설은 바수반두전(婆藪槃豆傳)에 나오는 설화이며 옛날에는 이 설화를 신앙으로 믿어왔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일부 학자들은 그 시대에 생존한 미륵보살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다. 현재 대장경(大藏經)에는 오대부론을 미륵설(彌勒說)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들 책은 무착보살이 저술한 책을 신앙심에 의하여 미륵의 이름으로 법공양(法供養)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유식학은 위에서 말한 전설과 같이 미륵보살이 신앙심의 인물이었지만 고대로부터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어 왔으며 실질적으로는 무착보살이 창립한 학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착보살은 종래의 학문을 보다 적극적인 유심주의적(唯心主義的)인 사상으로 개혁하여 유식학을 창립한 것이다.
당시에 유통되었던 [해심밀경(解深密經)], [십지경(十地經)],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 [능가경(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을 접하고 이들 경전에서 일체는 유심조(一切唯心造)이며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무착보살은 대승경전의 사상을 더욱 연구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과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과 [아비달마경론(阿毘達磨經論)] 등을 저술하게 되었다. 이들 논전이 저술됨으로써 유식학에 대한 기초적인 사상과 이론을 충분히 보급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착보살의 친동생인 세친보살(世親: Vasubandhu)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소승불교의 부파(部派)에출가하여 소승교리를 연구하고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있었다. 무착보살은 대승불교를 비방하는 세친보살(世親菩薩)의 행위를 염려하고 자신의 숙소로 오라고해서 [십지경(十地經)]을 보여주고 유식사상을 설명하여 대승불교에 귀의케 하였다. 세친보살은 대승불교에 귀의한 후 열심히 연구하여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과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과 [십지경론(十地經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을 저술하였다. 세친의 저술 가운데 가장 주목된 것은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이었다. 왜냐하면 유식삼십론에 의하여 체계화된 유식학을 널리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유식삼십론의 주석(註釋)
유식삼십론은 위에서 설명한 미륵보살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무착보살의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을 기초로 하여 원시적인 유식학을 종합하여 조직체계화한 논전이다. [유식삼십론]은 광범위한 유식사상을 삼십게송(三十偈頌)으로 축소한 것이기 때문에 잘 정돈되고 체계화된 것이기는 하나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이 명저(名著)의 사상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주석서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 논전에 대한 주석가(註釋家)는 28명의 학자가 있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게 주석한 학자는 10명이었다. 이들 10명을 흔히 십대논사(十代論師)라고 칭한다.
십대논사들은 미륵보살의 저서와 무착보살의 저서와 그리고 세친보살의 저서와 여러 대승경전을 인용하여 유식삼십론을 자세하게 해설하고 주석을 하여 일반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석서의 권수는 한 사람이 10권씩을 저술하였으며 이들 저술을 모두 합치면 100권이 된다. 각각 10권의 주석서를 쓴 십대논사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친승(親勝), (2) 화변(火辯), (3) 덕혜(德慧), (4) 안혜(安慧), (5) 난타(難陀), (6) 정월(淨月), (7) 호법(護法), (8) 승우(勝友), (9) 최승자(最勝子), (10) 지월(智月) 등이다.
이들 학자들이 주석한 유식삼십송의 주석서는 인도에 유학온 중국의 현장법사(玄藏法師)가 스승인 나란타사(那爛陀寺)의 법주(法主) 계현논사(戒賢論師)의 도움으로 대보리사(大菩提寺)에 거주한 현감거사(玄鑑居士)로부터 입수하게 되었다. 그후 현장법사는 중국으로 가지고 와서 [성유식론(成唯識論)]이라는 이름으로 한역(漢譯)하여 널리 보급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인도에서 유식학이 성립된 역사를 요약하여 살펴보았다. 무착보살의 원력으로 성립된 유식학은 세친논사에 의하여 조직체계화되었으며 십대논사(十代論師)에 의하여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그밖에 유식학자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 그리고 자증분(自證分) 등 심분설(心分說)을 주장한 진나논사(陣那論師)를 비롯하여 중국의 현장법사(玄?法師)를 지도한 계현논사(戒賢論師)도 있다. 그리고 무착보살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주석한 무성논사(無性論師)와 업력(業力)과 종자(種子)가 본래 존재한다고 주장한 호월논사(護月論師) 등이 있다. 이러한 유식학자들이 인도의 유식학을 발전시켰으며 여타의 학문발전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
2. 중국의 유식학 전래
중국에는 유식학이 인도로부터 삼차에 걸쳐서 도입하게 되었다. 첫째는 보리유지(菩堤流支)삼장이 AD 508년(永平元年)에 중국에 와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번역하여 지론종(地論宗)의 유식학을 펴게 되었다. 그 후 진제삼장(眞諦三藏)이 AD 563년(天嘉四年)에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번역하여 섭론종(攝論宗)의 유식사상을 전파하였다. 그 뒤에 현장법사(玄藏法師)는 인도에 17년간 유학하고 645년에[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대한 주석서 100권을 가지고 귀국하여 [성유식론(成唯識論)] 10권을 번역함으로써 법상종(法相宗)의 유식사상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 유식학이 세 차례에 걸쳐서 도입되었다. 이들 유식학은 사상의 차이가 많아서 후대의 학도들에게 많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각 종파간에 심체설(心體說)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서로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1) 지론종(地論宗)에서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리야식(阿梨耶識) 등 팔종의 심체를 설하였다. 이 가운데 전칠식(前七識)은 번뇌가 있는 망식(妄識)이고 제8식인 아리야식은 청정한 심체라고 주장하였다.
(2) 섭론종(攝論宗)에서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아다나식(阿咤那識), 아리야식(阿梨耶識), 아마라식(阿摩羅識) 등 구종의 심체를 설하였다. 섭론종은 구종의 심체 가운데 전팔식(前八識)은 번뇌가 있는 망식이지만 제9의 아마라식은 청정한 심체이며 진여성(眞如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아라야식(阿賴耶識) 등 팔종의 심체를 설하였다. 법상종은 이들 팔종의 심체 가운데 앞의 칠식은 망식이고 제8의 아라야식은 그 자체는 번뇌를 야기하지 않지만 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망식이라고 하였다.
이들 망식들은 그 자체가 불성(佛性)이며 식의 실성(實性)은 섭론종의 아마라식에 해당하기 때문에 따로 분리하여 심체로 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식학을 이념으로 한 세 종파들은 각기 심체설이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유식학에 어두운 학도들은 심체설에 대한 혼돈을 야기하기 쉽다. 이와 같은 종파들의 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발전한 가운데서도 제일 뒤에 전래한 법상종의 유식사상이 널리 보급되어 중국불교사에 영향을 끼쳤다.
법상종의 교학은 현장법사(600~664)가 인도로부터 귀국할 때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유식삼십론석(唯識三十論釋)]을 들여옴으로써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서도 [유식삼십론석]을 중국어로 [성유식론(成唯識論)]이라는 책으로 번역함으로써 법상종의 유식학이 신속하게 성장하였다. 그 후 법상종이라는 한 종파가 형성되었으며 그 초조(初祖)는 현장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상종에서는 현장법사의 제자인 규기법사(窺基法師)를 제 일 종조(宗祖)로 모시게 되었다. 그것은 규기법사(632~682)가 실제로 법상종을 창립하였고 [해심밀경(解深密經)]을 예로 들어 법상종의 종지가 불타의 사상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다는 교판(敎判)의 사상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등을 저술하여 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규기법사는 장안(長安)의 자은사(慈恩寺)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자은대사라고 부르며 종명도 종조의 호를 따서 자은종(慈恩宗)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상종의 제 이 종조는 혜소대사(慧沼大師:650~714)이며 혜소대사는 규기법사의 제자로서 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을 저술하여 교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법상종의 제 삼 종조는 지주대사(智周大師:668~723)이다. 지주대사는 혜소대사의 뒤를 이어 성유식론연비(成唯識論演秘) 등을 저술하여 유식사상을 널리 보급하였다.
3. 한국의 유식학 전래
한국에 유식학이 전래된 것은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중국에 가서 섭론종(攝論宗)의 교학을 공부하고 온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자장율사(慈裝律師)도 [섭론(攝論)]을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원측법사(圓測法師:613~696)가 중국에 유학하여 지론종과 섭론종과 법상종의 유식사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크게 발전시켰다.
원측법사는 15세에 당시에 유명한 학자로 알려진 법상대사(法常大師)와 승변대사(僧辯大師)에게 섭대승론을 공부하는 등 종파를 초월하여 대승교리와 소승교리를 함께 연구하였다. 그는 어학도 육개국(六個國)의 국어에 달통할 만큼 뛰어난 재질이 있었고 학문이 훌륭할 뿐 아니라 수행도 잘하여 당시 중국의 실력자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존경을 받았다.
원측법사는 유명한 사찰인 서명사(西明寺)에 주석하며 제자들을 교육하였기 때문에 호를 서명(西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측법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 유식학파가 형성하게 되었는 바 이들을 서명학파(西明學派)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라의 유학승들이 많이 모여 원측법사의 지도를 받고 또 대를 이어 학파를 형성하였다고 해서 신라의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부른다.
원측법사는 현장법사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강의할 때 그 강의를 듣고 규기법사(竅基法師)보다 소(疏)를 먼저 써서 발표하였으며 모든 면에서 규기법사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규기법사 등 중국계통의 법상종은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유식학만을 최상의 진리라고 고집한 것과는 달리 원측법사는 안혜논사(安慧論師)의 유식학을 비롯하여 모든 학설을 종합적으로 수용하였다.
원측법사는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등 많은 저술을 하여 한국과 중국의 유식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재 남아있는 둔윤법사(遁倫法師)의 [유가론기(瑜伽論記)]와 태현법사(太現法師)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 등에도 원측의 유식학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이는 법사의 유식학이 신라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원측법사의 유식학은 도증법사(道證法師)에게 학맥이 이어졌으며 도증법사는 중국에서도 원측법사의 학설을 옹호하였고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 등을 저술하여 신라계의 유식학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밖에 서명사(西明寺)의 자선법사(慈善法師)와 대천복사(大薦福寺)의 승장법사(勝莊法師)도 원측법사의 제자였다. 그리고 도증법사의 학맥을 이은 학자는 태현법사(太現法師)라고 한다. 이는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태현법사가 성유식론학기에서 도증법사의 학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유식학은 원효대사(元曉大師)도 많이 연구한 학자였다.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는 현장법사의 학문을 흠모하여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자 하였다. 이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있는 말이며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서 현장법사가 전한 유식사상이 신라에 많이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효대사는 각종 저술에서 [유가사지론]과 [성유식론] 그리고 [섭대승론] 같은 유식사상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여러 교리를 해설할 때 유식사상에 의거하여 해설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의상대사도 화엄학자(華嚴學者)였지만 저술할 때 유식사상을 인용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불교는 유식학을 바탕으로 한 저술이 많았다. 신방(神昉)대사와 승장(勝莊)대사와 순경(順璟)법사 등 많은 유식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당시의 학자들 가운데 유식학에 관한 저술을 한 권 이상 한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학풍은 고려시대까지 전해져서 불교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한편 신라의 유식학은 일본(日本)으로 전해져서 일본유식학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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