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나"라는 개념과 뜻을 알아보자.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중생들은 "나"라는게 있다고 여기고
그 "나"라는 것이 영원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변치않음, 항상항.................
그래서 어릴 적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일한 나라고 여긴다.
왜냐면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고 항상함을 유지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이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나"라는 것이 집착의 뿌리인데,
만약 "나"라는 것이 영원하지 않다면....."나"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나라는 게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면, 누가 거기에 집착하겠는가?
설사 집착하더라도 그리 심하게는 집착하지 않게 된다.
나라는게 영원하다고 여기기에 나라는 것에 집착한다.
변하는 것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변한다고 알면 집착하라고 해도 하지 않는다.
중생들이 "나"에 집착하는 이유는 "나"라는 것이 영원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단일한 하나의 "나"가 영원히 유지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전혀 변화가 없는 [영원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죽어도 그 단일한 나, 영원성을 유지하는 나가 있어서
그게 내생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믿는다.
무상, 고, 무아.
부처님께서는 왜 무상/고/무아를 설하셨는가?
왜냐면 중생들은 "나"라는게 영원하며 그런 영원한 "나"를 즐거움이라고 여기는데,
실제 중생들이 나라고 여겼던 것들을 살펴 보니 "나"라고 여기는 것들이 영원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못하기에 그건 곧 고통이며,
영원하지도 못하고 고통인 것은 나가 아니며,
그런 영원한 "나"는 없기에 무상/고/무아를 가르치신 것이다.
중생들은 "나"라는게 있어서 그게 영원하며, 즐거움이라고 여긴다.
유상, 락, 유아
부처님은 그와 반대로 가르치신다.
중생들이 나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은 죄다 변하는 것들이며,
변하기에 그건 곧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며,
변하고 고통인 것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으며, 고로 그런 영원성을 유지한 나란 없다고 말씀하셨다.
무상, 고, 무아
누구의 견해가 맞을까?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전혀 관찰하거나 알려고 생각조차 못하고 사는 중생들의 생각과
그 모든 것을 철저히 관찰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내신 부처님의 가르침....
설사 부처님의 견해가 옳다고 믿더라도, 그런 믿음만으로는 택도 없다.
자신이 직접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고 분석하지 않는 한.....
각자 스스로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나"가 뭔지 직접 파악하고 분석해야 한다. 철저히...
윤회!
힌두교의 윤회와 불교의 윤회는 다르다.
단일한 하나의 영원한 "나" 또는 "영혼"이 있어서
그게 전생에도 있었고, 현생에 다시 태어났고,
또 그 동일한 "나"가 내생에도 태어난다는게 바로 힌두교식 윤회이다.
이렇듯 "나"라는 것은 영원히 변치않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물론 힌두교 뿐만이 아니라, 불교외 모든 종교가 이와 같은 방식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윤회는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걸 잘 구분해서 알아야지, 잘못알면 힌두교식 윤회를 불교식 윤회라고 착각할 수 있다.
불교는 무아이다.
영원한 나는 없다는 가르침이다.
무아/공/연기법은 오로지 불교만의 진리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런 가르침 자체가 없다.
불교의 윤회는
동일한 나, 즉 영원성을 유지한 그런 나라는 건 본래 없고
다만 이어지는 것은 업력이다.....라고 가르친다.
내생에 태어날 업력이 있어서 그로 인해 내생에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12연기법에서 [유]-->[생]을 뜻한다.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유[有]는 욕유/색유/무색유이며,
욕계에 태어날 업력이 있다는게 욕유이며,
색계에 태어날 업력이 있다는게 색유이며,
무색계에 태어날 업력이 있다는게 무색유이다.
이런 업력이 있으므로 태어난다는 게 생[生]이다.
그러므로 12연기에서 유에서 생으로 이어진다. [유]-->[생]
전생에 태어날 업력을 지어서, 그 업력으로 말미암아 이생에 태어났고,
이생에도 내생에 태어날 업력을 지으면 또 내생에 태어날 수 밖에 없고,
만약 이생에서 내생에 태어날 업력을 모두 없애버리면 윤회는 여기서 끝이다.
내생이 없다. 이것이 해탈이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께서는 불교식 윤회와 힌두교식 윤회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힌두교 및 다른 종교에서의 윤회는, 마치 하나의 긴 끈과 같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는, 마치 주사위를 하나하나씩 차례차례 쌓아놓은 것과 같다.
영원한 단일한 하나의 나가 정말로 있다면,
어찌 윤회를 끊을 것이며, 또 어찌 환생이 가능하겠는가? 영원해야 하는데..
불교의 해탈, 즉 윤회를 끊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원한 "나"는 본래 없었으며,
즉 영원한 나가 있었다는 그 착각을 없애기에 더 이상 태어날 업력이 사라져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고,
원래 있던 나를 없애서 무아가 아니다.
영원한 나가 있다고 여기면 집착할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해 내생에 태어날 업력은 반드시 생긴다.
영원한 나가 있다고 여기는 한 업력은 끝이 없으므로 끝없는 윤회가 이어진다.
불교 이외의 모든 종교가 이런 영원한 "나"가 있다고 여기거 그걸 믿고 있다.
중생들은 그야말로 거의 모든 것을 죄다 싸그리 잘못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전 착각하고 있다. 꺼구로 알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영원하지 못한 것을 영원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단일한 하나의 영원한 "나"가 정말로 있다고 치자.
그러면 인간이 죽어서 그 영원한 "나"만 남아 있게 된다.
그 "나"는 영원함을 유지해야 한다.
변하면 안된다. 변하면 "나"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윤회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윤회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중생들은 영원함과 영원하지 못함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영원하지 못한 것을 영원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영원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나"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나"의 정의이다.
변한다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3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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