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뜰앞의 잣나무/부처 그대로가 번뇌/술과 고기는?/좌선을 하는가, 좌불을 흉내 내는가

수선님 2019. 8. 11. 11:17

뜰앞의 잣나무

 

조주스님이 법상에 올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여 격을 벗어난 장부라도 여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노승이 위산(爲山)에 갔을 때, 한 스님이 위산스님에게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하고 묻자, 위산스님은 '나에게 의자를 갖다 주게.' 하였다. 종사라면 모름지기 본분의 일로 납자(衲子)를 지도해야 한다."
그때 한 스님이 조주스님께 물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요."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학인이 다시 묻기를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어떠한 것입니까? 하고 묻자,
위산스님은 의자를 갖다 주게 라고 했고, 조주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질문은 같은 데 답이 왜 틀리는지도 모르겠거니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꼭히 알아야 되겠다고 되잡아 묻는 학인의 마음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조주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기전에, 위산스님의 예를 들어 종사라면 모름지기 본분의 일로서 납자를 지도해야 한다고 했다.
마음자리에서 꼭히나 정한 바 어떠한 법을 얻는다는 것은 법과 법이 이야기할 것이나, 학인은 수행 점검으로 그 자리를 매김 하려고 한다. 그래서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법을 묻고 법안을 넓혀가는 것이다.
법을 묻고 들을 때에는 당처와 낙처를 잘 알아야 할 것이며, 질문 속에 해답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조주스님이 말씀하신 본분의 일로서 납자를 지도해야 한다는 것과, 납자의 본분의 일이 어떠한 것인지 자문해야할 것이다. 그 자문 속에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하는 질문이 본분사의 일인지를 함께 생각 해야할 것이다.

물론 "우리들의 본분사는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마음찾는 일일 것이다."

훗 날 한 스님이 조주스님께 물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 버리자,
"바로 그것입니까?" 하니.
"나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하셨다.

 

 

 

부처 그대로가 번뇌

 

조주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이 일은 마치 손바닥에 있는 맑은 구슬과 같아서 변방사람이 오면 변방사람이 나타나고, 중국사람이 오면 중국사람이 나타난다. 나는 한줄기 풀을 가지고 열여섯 자 되는 금빛 부처님 몸(丈六金身)으로 쓰기도 하고, 장육금신을 가지고 한줄기 풀로 쓰기도 하니, 부처 그대로가 번뇌며, 번뇌 그대로가 부처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는 누구에게 번뇌가 됩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번뇌가 된다."
"어떻게 해야 면할 수 있습니까?"
"면해서 무얼하려느냐?"

*신라 원효스닝의 오도 일성이 "일체유심조"라 했다.
해골의 물이 감로수로 바뀔 수 있는 것은 마음 작용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가깝하면 세상사가 가깝하고,
마음이 맑고 밝으면 세상이 맑고 밝다.
풀을 장육금신으로 여겨 예배를 드리고, 장육금신의 불상을 풀로 여기는 것은 법 얻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실지로 중국 등주의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날 낙동(洛東)의 혜림사(慧林寺)에 이르니, 겨울 날씨라 매우 추웠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을 보니 목불(木佛)이므로, 도끼로 조개어 불을 지핀 일이 있다.

부처는 중생에게 분명 번뇌다.
중생은 부처를 닮으려고 하나에서 열까지 보고 배우고 읶혀야 하기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쯤 닮을 수 있는지 기다려지는 망상도 생기기 때문이다.
중생이 부처를 닮아 가려고하는, 부처닮는 기다림의 번뇌를 애써 면해서 뭣하겠는가?
그 번뇌 면해서 무얼하려고?

 

 

 

술과 고기는?

 

홍주(洪州)의 염사(廉使: 안찰사의 다른 이름, 관리의 선악, 풍속, 정사(政事). 교육 등을 직접 살피어 조정에 보고하는 직무를 수행한다.)가 마조스님께 물었다.
"술이나 고기를 입에 대는 것이 옳습니까?. 안대는 것이 옳습니까?.
마조스님이 대답하기를,
"입에 대는 것은 일한 대가를 즐기는 것이고,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복을 짓는 일이오!"

*술은 오계(五戒)중의 금기이며,고기는 십선(十善) 중의 살계에 저촉된다.
보살의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 가운데에 제2 제3 경계가 술과 고기이다.
범망경(梵網經)에 불자여! 만약에 일부러 술을 마시면 이로부터 일어나는 과실은 실로 한이 없다. 만일 몸소 손으로 술잔을 건네어 다른이에게 술을 마시게 한다면 오백세 동안 손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이 스스로 마실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사람에게 술 마시는 것을 가르치거나 일체의 중생에게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하지 말라, 하물며 스스로 자신이 스스로 마시는 것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고의로 마시는 법을 가르쳐 마시게하면 이는 경구죄를 범하는 것이다.
불자여! 일부러 고기를 먹지 말라. 일체 중생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 이는 대자비의 성품이 갈무리되어 있는 씨앗을 죽이는 일이니 일체 중생이 미워하고 원망하며 외면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체의 보살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기를 먹으면 한없는 죄를 짓는다. 고의로 고기를 먹으면 이는 경구죄를 범하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 아닌가, 세인이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을 자신들의 생활의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즉 일에 대한 성과나 보수로 지불된 생활의 여유로 여긴다는 이야기이다.
복이란 적선(積善)에 의한내세의 복락을 말하는 것이다. 술과 고기를 먹고 입에 대는 것은 세인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입에 대지 않으면 살생하는 마음이 끊어지고 자비심이 증장하여 부처의 복전(福田)을 일구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좌선을 하는가, 좌불을 흉내 내는가

 

마조스님이 호남성 형산의 복엄선사(福嚴禪寺) 전법원(傳法院)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 남악회양(南岳懷讓)선사를 만났다. 회양선사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대덕(大德)은 무엇하려고 좌선을 하는가?"
마조가 말하였다.
"부처가 되려고요."
그러자 선사는 곧 부근에 있는 기왓장을 하나 집어들더니 마조 앞에서 이를 보란듯이 갈아대기 시작하였다.
마조가 이를 보고 물었다.
"기왓장은 갈아서 무엇을 하실 겁니까?"
회양선사가 말했다.
"거울을 삼을까 하네."
이에 마조가 빈정거렸다.
"그런다고 기왓장이 거울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회양선사는 큰소리로 말했다.
"기왓장이 거울로 될 수 없듯이 좌선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
마조가 크게 놀라 물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회양선사는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만일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수레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아니면 소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마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회양선사는 다시 말하기를,
"대덕이 지금 좌선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좌불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수가 없군, 혹시 좌선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선(禪)이란 결코 앉아 있는 것이 아니며, 혹 그대가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머무르지 않는 법을 놓고 취사선택을 해서는 안되네.
그대가 혹 좌불을 흉내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행위와 다름이 없네.
보잘것 없는 앉음새에나 휘둘리게 되면 정작 깊은 이치에 이를 수가 없는 법이라네."

*강서도일(江西道一)선사는 한주 시방현(漢州什方縣) 사람이다. 성은 마(馬)씨. 고향의 나한사(羅漢寺)로 출가 했다. 생김생김이 예사롭지 않아 소처럼 느리게 걷고 눈빛은 호랑이처럼 예리하였다. 혀가 코를 덮을 만큼 길었으며, 발바닥에는 두개의 바퀴 무늬가 있었다. 어려서 일찌기 자주(資州) 당화상(唐和尙)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유주의 원율사(圓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수행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경전을 읽거나, 관법을 하거나 참회를 하는 방법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 참선하는 방법으로 행선 와선 잎선 좌선(坐禪)으로 구분되나 대부분 좌선을 선택하게 되는데, 행.주.좌.와.어.묵.동.정의 일상을 참선으로 깃들지 않으면 않된다.

성품을 찾는 것이라면 고요히 앉아 있는것으로 찾아지는 것도 아니요.
부처님의 모양을 흉내 내고 닮아가려고 한다면 부처님의 모습 또한 정해진 바가 없으므로 좌불의 모습만 흉내내어 자신의 모습을 지키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강서 도일 선사에게는 좌선법으로 법을얻게 할 수 없었던것 갔다.
그가 좌선으로 법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과 같음을 비유로 보여주고 있다.
앉좌있는 자세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다그치라는 의미로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만일 나아가지 않는 다면, 그때는 수레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아니면 소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하고 되 묻는다.
어쩌면 강서 도일선사는 외형적 모양은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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