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17(80~86)

수선님 2019. 10. 20. 11:50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80. '닦을 게 없는 옛 거울'

한 스님이 물었다.

“옛 거울(古鏡)은 닦지 않아도 비춥니까?”

“전생(前生)은 인(因)이고 금생(今生)은 과(果)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우리의 자성(自性), 마음을 옛 거울(古鏡) 이라고도 합니다. 현재 뿐만 아니라 비롯함이 없는(無始) 때로부터 변함없이 만법(萬法)을 비추어주는 마음이라 하여 옛 거울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 ‘옛 거울에 먼지, 때가 수북이 쌓여 닦아야 할 것 같은데, 닦지 않아도 사물을 비출 수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번뇌 망상의 티끌이 가득 덮고 있으니, 이 티끌을 말끔하게 쓸어내야 깨끗해지지 않느냐! 이 뜻입니다.

그런데 조주의 대답은 '전생은 원인이고, 금생은 결과이다.' 즉 그대 전생의 업(業)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금생의 그대가 있다고 말합니다. 옛 거울을 닦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는데, 전혀 동떨어진, 동문서답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선사의 말씀에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오직 본분의 일로 말씀하니 자신도 본분의 일을 지켜야 합니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본분사(本分事)를 아는 것입니다.

위 대답은 '우리의 전생에 쌓은 업(業)이 원인이 되어 현생(現生)에 태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고, 현생의 업이 원인이 되어 다음 생(後生)에 결과로 나타난다.'는 불교의 인과인연, 즉 연기설(緣起說)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옛 거울을 닦지 않아도 비추니, 비추지 않으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두고, 그대는 이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인연이 있어 이 세상에서 만났으니 모든 전, 현, 후생의 업(業)을 소멸하고, 대자유인의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열심히 수행(修行)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그런데 정말로 옛 거울은 닦지 않아도 비춥니까? 육조혜능의 '한 물건이랄 것도 없는데 무슨 닦고 자시고 할게 있겠습니까?' 닦지 않는다 해도, 닦는다 해도 모두 헛된 분별입니다. 오직 마음 하나뿐인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81. '세 개의 칼이 떨어지면'

한 스님이 물었다.

“세 개의 칼(三刀)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빽빽하다(森森地)."

"떨어진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아득하고 아득하다.”

​ “세 개의 칼(三刀)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질문에 나온 '세 개의 칼(三刀)'이란 비유적으로 쓴 용어인데, 탐진치(貪瞋癡) 3독(毒), 즉 중생의 3가지 큰 번뇌로서 탐욕, 화냄,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위 질문은 ‘3가지 큰 번뇌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는 어떤가?’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 이 질문에 대해 조주선사는 본분의 일(事)로만 답했는데, 저도 코드화한 선어로 말해보면 '세 개의 칼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란 질문은 '마른 나무에 꽃이 피기 전에는 어떻습니까?'로 대체하겠습니다. 조주선사는 ‘빽빽하다(森森)’고 대답했는데 저로서는 '눈 뜨지 못한다.' 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묻는 질문으로 "떨어진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라는 말은 '나무 말(木馬)이 노새 세 마리를 낳은 뒤에는요?' 라고 하겠습니다. 조주의 ‘아득하고 아득하다’는 '눈 멀었다'로 대신하겠습니다.

이 황당무계 하다시피 한 선어(禪語)의 뜻을 금방 알아채야 깨달음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해하려 들면 결코 다다를 수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언어 이전의 소식에 눈을 떠야 합니다. 언구(言句)를 의심해야지 8만 경전을 수백 번 읽어도 체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심 또 의심.

82. '3계를 벗어난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3계를 벗어난 사람(出三界底人)은 어떻습니까?”

“농조(籠罩, 대바구니)는 얻을 수 없다.”

3 계(三界),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가 무엇인지는 불교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모르시는 분은 인터넷에서 한번 찾아보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3계, 이 우주를 벗어난 사람은 어떻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3계를 벗어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부처를 3계를 벗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 상식이 아닐까요? 이 세상의 일, 생사에 해탈한 자, 깨달은 사람입니다.

조주선사는 물고기 잡는데 쓰는, 대(竹)로 만든 기구라고 하는 농조(籠罩), 우리 말로 대바구니라 했는데, '고기 잡는 기구는 얻을 수 없다.' 라고 대신 말했습니다. 3계를 벗어난 자는 바로 부처라 했는데, 이 '얻지 못하는 대바구니'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고기잡는 기구, 대바구니는 바로 우리의 청정여래 법신,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이 바구니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냥 깨쳐서 알아야 합니다.

83. '새들의 꽃 공양'

한 스님이 물었다.

“우두(牛頭)스님이 4조(四祖)를 뵙기 전에는 온갖 새(百鳥)들이 꽃을 물어다 공양을 올렸는데, 뵙고 난 다음에는 무엇 때문에 새들이 꽃을 공양하지 않았습니까?”

“세간에 맞춰 주기도 하고 맞춰 주지 않기도 한다.”

중국 선종(禪宗)이 이어져온 내력은 달마대사로부터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조사로 계속 법(法)을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 가운데 4조 도신(道信)대사의 제자로 우두법융선사가 있는데, 선사가 도신을 만나기 전에 수행할 때에는 온갖 새들이 꽃을 물고와 공중에 뿌리며 우두를 찬탄했다고 합니다.

​ 너무나 열심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새들까지 감동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런데 4조 도신대사를 만나 진정한 깨달음을 이룬 뒤에는 다시는 새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니 세상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습니다.

​ 이것에 대해 오랫동안 의문을 가졌던 이 스님이 ‘왜 뵙고 난 다음에는 꽃을 공양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선사에게 물으니, 조주는 “세간에 맞춰 주기도 하고 맞춰 주지 않기도 한다(應世 不應世)'고 대답했습니다. 새들이 왜 꽃 공양을 그쳤는지 물었는데 아리송한 말로써 정신을 쏙 빼놓습니다.

​ 먼저 새들이 꽃을 물어다 우두선사에게 공양 올리는 것을 그만둔 이유를 선가에서 이야기 하기는 깨닫기 전에는 존재하는 마음(有心) 때문에 새들이 선사를 찾을 수가 있었지만 깨달은 후에는 마음이 없기(無心) 때문에 공양 올리려고 아무리 선사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러면, 조주의 '세간에 응하기도 하고 응하지 않기도 한다'​는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조금 어려운 말로 '진제(眞諦, 절대적 진리)와 속제(俗諦, 세속적 진리)가 서로 상응(相應)하기도 하고, 서로 불상응, 즉 통하지 않기도 한다.'는 뜻으로 풀어 보겠는데,

달리 말하면 절대적인 이치(理)와 현상(事)의 세계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말로서 임의로 자유자재하게 마음을 쓴다는 뜻입니다. 결국 유심(有心), 무심(無心)에 구애없이 중도(中道)에 통달하였으니 귀신도 속일 수가 있습니다.

​ 그것을 알리 없는 이 수행자에게는 '꽃을 물고 오든, 물고 오지 않든 간에 그런 현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수행이나 열심히 해라!'는 의미로 말했다고 봅니다. 결론은 중도(中道)는 무심(無心), 분별 없음을 체득해야 합니다.

84. '봄바람 부는 곳'

한 스님이 물었다.

“흰 구름(白雲)이 자재로이 노닐 때는 어떻습니까?”

“어찌 봄바람(春風)이 곳곳마다 한가로이 부는 것만 하겠느냐?”

하늘에 흰 구름이 이리 저리 자유스럽게 흘러가는 풍경을 빗대어 '흰 구름이 자재로이 노닐 때는 어떻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가는지, 가지 않는지도 모른 채 마음대로 흘러 다니는 구름처럼,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 상태, 결국 깨달음의 경지에 대하여 물은 것인데, 말로만 이 경지에 이르렀다 한들 스스로 체험해 보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 조주선사는 '어찌 봄바람이 곳곳마다 한가로이 부는 것에야 비교할 수 있겠냐?' 라고 대답합니다. 흰 구름이 자재로이 노닐 때는 봄바람이 곳곳에 한가로이 부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즉 더 높은 경지가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과연 이런 의미로 말했을까요?

​ ​흰 구름이 걸림 없이 노니는 것이나, 훈훈한 봄바람이 이곳저곳 불어와 시원하게 흔들어주는 것이나 만약 스스로 체험했다면 졸릴 땐 그냥 자고, 깨어나 배고프면 두부 한 모 찾아 먹는, 일 없는 늙은이(無事 老翁)가 될 것입니다. 쿨^

85. '드러난 땅 위의 흰 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드러난 땅(露地)의 흰 소(白牛) 입니까?”

“달빛 아래서는 색깔이 필요 없다.”

“흰 소는 무엇을 먹습니까?”

“예나 지금(古今)이나 씹는 것이 없다.”

“제발 제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노승은 그저 이럴 뿐이다.”

​ 노지(露地)는 말 그대로 드러난 땅이니 맨땅입니다. ‘저 맨땅 위의 흰 소(白牛)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선가(禪家)에서 흰 소라 하면 바로 우리 자성(自性)을 일컫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맨 땅 위에 서 있는 흰 소가 되는 경지를 맛보아야 합니다.

조주의 대답인 '달빛 아래서는 색깔이 필요 없다.'란 말은 흰 달빛 아래에서는 만물이 모두 희니 서로 녹아 합쳐져 흔적,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지는 또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겠습니까?

어리석은 그 스님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흰 소는 무엇을 먹느냐’고 묻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무얼 먹겠냐? 한심아 놈아! 난 아무것도 씹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마음이 무엇을 씹겠습니까? 그래도 가끔씩 말씀은 먹어야 합니다. 제발, 알아듣게 말씀 좀 잘해 달라는 요청에 냉정하게 '나는 그저 이럴 뿐이다.'고 대답합니다. 오직 사람의 마음을 가리킴을 본업으로 삼을 뿐이다. 한 마디에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나라!

여러분도 '고향 땅에서 그저 이럴 뿐이다.' 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을 때까지 오직 마음으로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86. '헤아리면 어긋난다'

조주선사가 시중하여 설했다.

“마음으로 무엇인가 헤아리려 하면 그대로 어긋나 버린다(卽差)."

그러자 한 스님이 문득 물었다.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선사는 그 스님을 세 번 때리고 말했다.

“내가 그대를 저버렸다고 하겠는가?”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설했습니다. “마음으로 무엇인가 헤아리려 하면, 즉 한 생각을 떠올리면 그대로 어긋나 버린다(卽差)." 마음에 무엇인가 떠올라 이를 분별하여 생각해 보려 하면, 한 순간 망령된 생각에 빠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쓸데없는 생각은 물론 무생(無生)이지만 꾸준히 지워나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번뇌가 곧 보리요, 부처'라 하지만 완전히 깨닫기 전까지는 할 일이 있어 생각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지나간 일이든 잡된 생각은 모두 버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도(道)는 말하면 바로 어긋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저도 강설하기 위해서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구업(口業)을 쌓고 있지만 지옥으로 쏜살같이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허허!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마음속에 한 생각 일으키지 않을 때는 헤아려 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저로서도 그러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 의심도 없고 생각도 나지 않고, 도(道)의 근원에 들어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주선사는 왜 그 스님을 세 번이나 후려치고 '노승이 그대를 저버렸다고 하겠느냐?'고 말했을까요? 조주의 가르침은 폭포의 물줄기를 베는 칼날과 같습니다.

조주가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면 그대로 어긋난다‘고 했는데 ’헤아리려 하지 않을 때는 어떤가‘ 라는 질문은 조주선사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와 곧바로 분별한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조주선사의 몽둥이 세레에 ’내가 금방 이렇게 헤아렸구나!' 하고 스스로 깨닫는다면 바로 눈을 뜰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대를 저버린 게 아니라 그대가 나를 저버렸다.'

육조혜능의 제자인 혜충국사(慧忠國師)가 자신의 시자에게 던진 말입니다. 이제 조주가 그 스님을 세 차례나 때리고 '노승이 그대를 저버렸다고 하지 말라'는 말을 한 이유를 알아챘습니까? 아직도 모르겠으면 이 의문 덩어리를 마음으로 골똘히 탐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꼭 알아채야 합니다. 조주선사가 자신의 시자(侍者)에게 말합니다. '너도 차나 한잔 해라.'

'조주록(趙州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주록 강해 19(92~93)  (0) 2019.11.03
조주록 강해 18(87~91)  (0) 2019.10.20
조주록 강해 16(76~79)  (0) 2019.10.20
조주록 강해 15(71~75)  (0) 2019.10.06
조주록 강해 14(65~70)  (0) 2019.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