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 일묵스님

욕망-이해하면 버려진다(4/4)

수선님 2020. 1. 12. 11:08

(2018년 일요 법회입니다)

3편링크

세번째 방법은, 욕망을 버리는 제일 대표적인 방법이 부정관입니다. 여러분 화가 날 때는 그 대상의 모를 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싫은 면을 보기 때문에 그쵸? 똑같은 사람을 봐도 어떤 사람은 괜찮다 그러지만 어떤 사람은 저 인간 문제가 많다 화를 내죠.

탐욕이나 성냄은 균형이 깨진 극단적인 사고입니다.

좋은 쪽만 보거나 싫은 쪽만 보는. 집착을 한다는 건 대상을 객관적으로 본다기보단 좋은 면만, 한쪽면만 보는 게 되죠. 그래서 그걸 균형을 잡아주는 방법입니다. 지난번에 화를 버릴 때는 대상의 안 좋은 면만 보니까 좋은 면을 보는 자애를 닦게 합니다. 그쵸? 대상에 너무 집착을 하는 경우는 그 반대로 그 대상의 아름답지 않은 면, 그걸 보게 하는거죠. 예를 들어 어떤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집착하는 수행자는 욕망이 일어나 수행을 못하니까, 그럴 땐 보통 아름다운 표상에 마음이 혹 한거거든요. 그게. 그럴 때는 이 대상 자체가 아름다운 것만 있는건 아니다. 저 여인의 몸 안엔 위 속의 음식, 똥, 뇌, 창자, 이런게 들어 있는 걸 보게 하는 거예요.

그럼 좀 더 균형이 잡히죠. 아 아름다운 것만 있는게 아니구나. 저기에 내가 이래 빠져선 안되겠다. 이런게 부정관 수행의 목적입니다. 사라들이 부정관 얘기하면 내가 왜 대상을 그렇게 나쁘게, 안 좋게 봐야되냐 안 좋은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균형을 잡아주는 거예요.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보게 만들어 균형을 잡아주는 거죠.

우리 몸을 32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방법이 있어요.

머리털, 몸털, 손발톱, 이빨, 살갗,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 근막, 지라, 허파. 창자, 장간막(?), 위 속의 음식, 똥 이런 몸 속에 있는 그런 것들을 계속 관찰해서 아 저 아름다운 여인의 몸 속에도 똥오줌이 들어 앉았구나.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음식이 위 속에 가득 있고. 이런 걸 관찰함으로써 정내미가 뚝 떨어지게. 근데 요즘 사람들한테 이런걸 하니까 왜 좋게 봐야지 안 좋게 보냐고 막 따지던데 그건 수행의 원리를 잘 이해를(웃음)

이런 건 보편적인 방법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욕망이 일어나는 원인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지혜를 계발하는데 굉장히 좋습니다. 이 욕망이 일어나는 건 기본적으로 뭐가 있냐 하면 어리석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잘못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현상을 바로 알면 거기에 지혜가 작용하기 때문에 거기 욕망이 일어날 수 없어요. 현상에 대해 잘못 아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거기에 대한 애착이 달라붙는다는거죠. 그래서 내가 뭔가 집착을 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뭐를 한번 살펴봐야하면, 내가 뭐를 잘못 알고 있는가를 살펴보는게 있고,

역으로 또 다른 방향에서 화가 났다, 그라믄 그 화엔 반드시 뭐가 있냐 하면 내가 집착하는 고리가 있다 내가 분명히 원하는게 있다는 걸 조사해보면 그러면 그게 인제 나한테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탐욕은 뭐 때문에 일어나냐면 보통은 자기가 원하는 대상,아름다운 대상, 이런게 나타났을 때 거기 집착이 달라붙습니다. 이 아름다운 대상을 내가 소유하고 싶고 내가 오랫동안 누리고 싶고. 이런 생각이 일어나죠.

근데 부처님께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뭐라 그랬어요? 조건 따라 발생한 거라고 했죠. 조건 따라 생겼단 말은 뭐냐 하면, 조건이 사라지면 어떻다는 거예요? (법요집을 들고)지금 이건 소멸되지 않았지만 이건 영원합니까? 언젠가는 이게 세월이 지나다 보면 태워지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하고 없어질거 아니예요? 소멸되기 마련인 법이죠. 소멸된 상탠 아니지만. 그런건 무상하죠. 영원하지 않은걸 우리가 완전하다 할 수 있어요? 불완전합니다. 결점이 많다. 괴로움의 속성이 있다. 그리고 이건 내것이라고 할 수도 없어. 내것이라 붙들고 내가 계속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야. 조건이 변함 변해. 그러니까 이것도 내것이라 할 수도 없는 거죠. 그걸 알면 여기 대상이 저건 내가 귀한 것이고 내가 가짐 좋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별것도 아닌거야.

황금인줄알고 붙들었는데 알고 보니 똥이야

그걸 누가 붙들겠냐는 거죠. 그래서 그런걸 정확히 꿰뚫어 보게 되면 이게 버려집니다. 보통 어리석음의 가장 기본은, 영원하지 않은걸 영원하다 생각하는거. 이게 가장 원초적인 어리석음입니다. 그리고 괴로움일수밖에 없는걸 뭐라 봐요. 행복으로 봐요. 혹은 내 것이 아닌 것. 나라고 할만한게 없는걸 내것이라 생각하는 것. 이런게 다 원초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진리로 말하면 고성제에 대한 어리석음이예요.

장애요소는 해롭습니까 유익합니까? 감각적 욕망이 해로워요 유익해요?

해롭다고 말하기 싫죠? 그래도 나는 좀 더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죠.

근데 이건 사실 본질적으로 괴로움이고 해로운 법인데 이걸 유익하다 착각하는 이건 또 뭐겠어요? 이것도 아주 근원적인 어리석음에 들어갑니다. 번뇌를 번뇌로 보고 장애를 장애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세속적인 프레임에서 이거 정도야 당연하게 즐기는 거지 이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잘 보려 하지 않습니다.

탐욕없음은 유익합니까 해롭습니까? 이건 유익한데 탐욕 없이 어떻게 살아, 그래도 좀 집착하며 살아야지. 그게 인간의 삶이지 이렇게 하는 것도 뭐예요. 그것도 일종의 어리석음이죠. 그건 진리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여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자기 식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어리석음을 기울이면 다 집착이 일어난다는 거죠.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은 거기에 어리석음이 숨어 있고, 또 욕망이 있음 아까 뭐가 일어난다 그랬어요? 화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욕망이 충족되면 그것이 사라질까봐 초조한 쪽으로 가요. 집착이 있기 때문에. 충족되지 못하면 얻지 못하는 그 자체가 괴로움이죠.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 막 화가 나. 호흡을 할 때 잘 안 되고 짜증나 그러면 그 때 분명히 뭔가 내가 바라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빨리 수행이 잘 됐으면 좋겠다. 빨리 희열과 행복을 경험했음 좋겠다. 이런 마음들이 있으면 그런게 자기 뜻대로 안됐을 때 짜증나게 만들거든요.

수행이 안될땐 자기 마음을 점검해 봐야 해요.

내가 올바른 마음으로 수행을 하고 있는지. 욕망이 작용하고 있는지, 욕심이 있진 않은지. 이런걸 보면 수행할 때 자기 점검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어떤 화가 났는데 화가 났을 때 욕망이 있다, 그럼 이 화를 버리기 위해 뭘 버려야하겠어요? 욕망을 버려야겠죠 그쵸? 욕망을 버리는 방법은 이런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방법은 아까 말했듯 가장 기본적인 건, 감각적 욕망이 갖고 있는 결점. 이건 행복이 아니란 거죠. 이걸 좇아가는 것이 괴로움의 요소가 훨씬 많다. 행복의 요소가 없진 않지만 조금이고, 괴로움의 요소가 훨씬 많다는 것. 이런 걸 통찰해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이거 자체가 괴로움의 요소가 더 강하다고 인식을 전환하면 잘 버려집니다. 인식을 바꾸는게 중요해요.

제일 쉽게 바꾸는건 제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건 보시를 실천하는 거예요. 내가 아끼는 걸 나눠주는 거예요.

법보시도 일종의 보시잖아요. 자기가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걸 아무 대가 없이 푸는 거잖아요. 이런 것들도 다 자기가 욕망을 거머쥐고 있는, 인색함을 버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보시를 실천하는 것도 탐욕을 버리는 젤 쉬운 방법이고, 아까 말했듯 우리 욕망이 있단 건 그 속에 반드시 왜곡이 숨어 있는 거예요. 어리석음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느 날 정신이 반짝 들어서 아 욕망 이거 자체가 갖고 있는 결점이 있구나 맘을 바꾸면 금방 버려지고 화도 금방 가라앉아요. 그래서 결국 화를 버리는 방법이 화나 욕망을 버리는 밑뿌리엔 왜곡된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이 젤 근원적으로 버리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삼매 수행을 통해 지혜를 계발하는 목적이 다 여기 있어요.

지혜가 계발되면 어리석음이 버려지거든요.

어리석음이 버려지면 탐욕이나 성냄이 토대가 없으지는 거예요. 그래서 욕망을 버릴 때는 뭘해야 하겠어요? 욕망 자체가 괴로움이란 걸 이해해야 하고,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이 대상이, 감각적 욕망은 보통 대상이 있거든요. 이 대상이 영원합니까? 이건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기에 항상 조건에 영향을 받으므로 영원하지도 않고 내것이라 할만한 것도 없다 이렇게 통찰하면 이거에 대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죠.

아난다경에 보면 이런 게송이 나옵니다.

인식이 전도됐기 때문에 그대 마음은 불붙었다.

인식이 애욕을 유발하는 아름다운 표상을, 아름다운 표상을 보고 거기 마음이 불붙은 거예요. 이걸 어떻게 봐야 되나, 형성된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이다, 괴로움이라 보고 자아가 아니가.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애욕의 불을 꺼버리고 다신 불타게 하지 마시오.

이게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우리가 감각적 욕망을 버릴 때는 그것을 괴로움으로 보고, 내가 집착하는 대상도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니 내것이라 할게 없다. 이거 자체가 그렇게 집착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꿰뚫어 아는 지혜가 필요해요.

욕망은 보통 사견과 함께 일어납니다. 견해가 함께 동반되어 일어나죠. 보통 보면 감각적 욕망 뿐 아니라 견해가 강하게, 특히 사견이 많으면 화가 많이 일어나요. 화가 일어나면 밑뿌리에 보면 집착과 함께 집착하는 대상이 견해인 경우도 많아요.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세속 프레임으로 수행자들을 바라보면 이해 안 되는 구석이 상당히 많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짓이냐.

실제 제가 구정선사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솥을 걸게 해 놓고 나선 아니라고 옮겨, 저리 옮겨, 이러면 세속적 프레임으로 보면 저 스님이 정신 나갔나 이상한 사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수행자들은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스승이 의도하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묵묵히 수행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그게 자신의 맘에 있는 자만 등을 내려놓게 하는 훈련 과정이었음을 알게 돼요. 근데 이걸 세속적인 프레임에서 보면 날 무시하나,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이건 선에서 일어나는 거라 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일 수 있지만, 부처님도 경전에 보면 가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 이런 표현이 나오거든요. 부처님이 왜 저렇게 말을 거칠게 하나 생각할 수 있어요. 또 어떤 스님한테는 머리가 텅 빈 모모야 이런 말도 해요. 그게 그 분을 비난하거나 나쁘게 하려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번뇌를 깨게 하려 일시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 걸 어떻게 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수행의 견해, 그런 경우는 보통 그 사람의 마음을 보게 만드는 상황이예요. 대상이 아니라. 그 때 자기 마음에서 뭐가 일어나나 보게 해서 그런 걸 개선하게 하기 위해 자극을 주는 그런 것들이 많거든요. 근데 그걸 자기 마음을 보지 않고 상대의 태도를 보면 저 사람 왜 저렇게 화를 내, 나를 왜 무시해 이런 쪽으로 마음이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수행자라면 대상으로 가지 않고 자기 마음을 보면 의미가 이해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도 그런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화가 많이 일어나는 한 예입니다.

자기가 많이 생각하는 거에 대해 여러분 그걸 아셔야 해요.

여러분은 아직 바른 견해가 확립된 사람이 아닙니다. 바른 견해가 확립되면 수다원이예요.

성자의 반열이죠. 내가 아직 수다원이 아니라는건, 내가 갖고 있는 견해가 틀릴 수 있겠죠? 내가 갖고 있는 견해가 진리의 입장에서 봐선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이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가진 이 견해를 고집하는게 아니라 더 지혜로운 말을 들으면 언제나 바꿀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거죠. 자기 마음에서 이런 것이 아직은 확정적인 견해를 가지면 안된다는 거죠. 수다원이 되어 바른 견해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부처님의 견해로 보려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되죠.

그래서 견해를 바탕으로 하는 화가 일어날 때는 견해를 버려야 하는데 견해를 버리는 가장 중요한 건 바른 견해를 일단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른 견해, 부처님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본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자기 견해를 고집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첫째로 말씀하신 건, 일단 법을 잘 들어야 한다. 배움이란 걸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일단 듣고 배워야 해요. 법에 대해 잘 아는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걸 듣고 배우고, 자기가 기억해야 합니다. 사유도 하면서 기억하고 그걸 실제로 그렇게 보려 노력해 나가면서 견해가 바뀌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리석은 견해를 버리기 위해서는 바른 견해를 배워야 하고 바른 견해가 뭐냐 하면 사성제를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이 세상은 조건지어진 것이므로 무상고무아이며 내것이라 할만한게 없다. 이게 첫번째 고성제의 진리고,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은 괴로움을 이끌어내므로 해로운 것이고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게 집성제입니다. 이 탐욕이 없고 성냄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상태는 계발해야죠. 이게 도성제거든요. 이런 것들을 배워 내 마음이 탐욕이 있는 마음인지 성냄이 있는 마음인지 또는 탐욕이 없는 마음인지 성냄이 없는 마음인지 내가 이 대상을 무상하다고 보는지 영원하다고 보는지 점검해서 거기에 맞게 사유하는 이게 바로 바른견해-붓다의 견해에 따라 세상을 보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보기엔 이게 맞는거 같은데? 이렇게 하면 안돼요.

여러분 생각은 아직 검증이 안 된 생각이 많습니다. 보통 그냥 자기가 소속된, 살아온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거지. 부처님은 3천년 가까이 적어도 지혜로운 사람들에겐 검증된 견해란 말이예요. 그런걸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자기가 가진 견해가 아직은 확정된 것이 아니고 바르지 않을 수 있다,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제가 옛날에 출가하기 전에 알았던 내가 공부를 배웠던 거사님이 진아론자였어요. '아'가 있다,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주인이 됐을 때 이걸 깨달음이라 한다, 이렇게 배웠었거든요. 저도 그땐 어리석어서 그것이 맞는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막 설파하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면 속으로 저 무식한 거 막 이렇게 비난하고 이런 행동들을 많이 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초기불교를 접하고 불교를 제대로 만나고 나서 보니까 야 내가 그동안 정말 말도 안되는 견해를 바른 견해로 알고 남에게 설파하기도 하고 잘난척 했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정말 부끄럽게 생각했거든요. 제가 그때 이후로 내가 가진 견해에 대해 확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항상 변할 수 있다.

내가 가진 견해보다 더 합리적이고 바른 견해가 있음 전 항상 바꿨어요.

지금까지 그건 제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거에 대해 집착하진 않았단 말이죠. 보통 견해란 걸 계속 가지다 보면, 견해가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 의견을 잘 안 받아들입니다. 자기 입맛에 안 맞는건 다 쳐버리기 때문에. 자기 사견이 강한 사람들은 수행하는데 굉장히 큰 장애요소입니다.

그래서 이런 견해가 바뀔 수 있단 걸 알아야 하고, 아까 말했던 사성제의 방향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 조건 발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멸되기 마련이다. 소멸되기 마련이니까 무상하고 괴로운 거고, 내것이라 할만한 것도 없다. 이런걸 잘 이해하시면 이런 사견은 버려질 수 있다는 거죠.

마지막 한가지는 자만입니다. 자만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번에도 자세하게 한번 말씀드린 적 있는데 자만이 많은 사람이 또 화가 많아요. 내가 잘났다, 남들보다 못하다. 열등감도 자만에 들어가요. 혹은 나와 남이 동등하다 하는 거. 니도 스님이고 나도 스님이다. 같이 동등하다 하는 그런 것도 다 자만에 들어갑니다.

자만으로 채워지는건 허영심과 우쭐함 그런거밖에 없어요.

자만을 내세우는건 어린애들이 하는 짓입니다. 수행을 좀 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자만이 많으면 수행 결과에 대한 경쟁,나를 내세우고 싶은-내가 수행 잘한걸 드러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기도 쉽고. 이런게 일종의 명예욕이거든요.

부처님께선 이런 명예욕의 마라의 미끼-마라의 낚시바늘이라고 하셨어요. 명예욕에 사람이 한번 노출되기 시작하면 수행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이런 자만이란 것이 실제 수행자를 자꾸 비교하게 되고 내가 남보다 못하면 그거에 대해 스트레스받고. 이런건 세속적인 프레임이거든요. 누군가랑 경쟁하고 이기고 이런건.

수행은 자기 마음에 있는 번뇌를 버리는 거지 남하고 경쟁하는게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번뇌만 버려지만 되는데 그게 남들이 잘하고 안하고 이런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남이 잘하는걸 보고 자기도 자극받아서 잘하고 이런건 좋은건데.이런 자만 때문에 화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옆에서 누가 충고하는 말을 잘 못들어요.

법구경에 보면 이런말이 나와요.마치 보물을 전하는 이처럼, 허물을 보고 꾸짖어 말하는 현명한 이가 있으면 그런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해야 한다. 마치 자기 허물을 지적해주는 이를 보물을 주는 사람처럼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 보려면 수십년, 수백생이 걸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걸 지적해 주는걸 고맙게 생각하고 보물로 받아들여야지 그걸 짜증내는 것은 되게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와 가까이 하는 사람에겐 좋은 일만 있을 뿐 나쁜 일은 없다. 이게 법구경에 나온 얘기죠.

자만이 독단적으로 작용되는게 아니라 자만과 견해는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합니다.

자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주장이 강해요.

그런게 같이 작용을 해서 남의 말을 잘 듣질 못하고. 다 들으란 말은 아니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해요. 그건 자기에게 손해될게 없거든요. 부처님도 지혜로운 말을 전해주는 사람은 보물을 주는 사람이라고 비유해 놨잖아요. 그래서 그런걸 듣고 실제 우리가 니까야 경전에도 보면 수행자가 갖춰야 될 덕목 중 남의 훈계를 잘 받아들이고, 이런 표현이 자주 나와요. 수행자는 자기 고집도 있고 자존심도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좋은 맘으로 지적해 주는걸 잘 못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런 것을 흔쾌히 받을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거 자체가 이 사람 공부가 많이 된거예요. 하심이 된거잖아요. 그런 식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만을 버리는 것은 겸손이죠.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것. 그렇다고 나를 비하하라 그런게 아니라, 남을 공경하는 거죠. 자기만 잘났다고 내세우는게 아니라. 자기를 겸손하게 하며 남을 존중하면 사람들은 다 좋아하죠. 그래서 자만을 버리는 것에 대해선 경전에 자주 나옵니다. 보통 나라고 몸이나 마음에 대해 나라고 생각하는게 강해서 자만이 일어나는 거기 때문에 이 물질도 내 것이 아니오, 이 느낌도 이 마음도 내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고 조건발생이므로 사라지게 마련이며 내 것이라 할만한게 없다.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나란 생각, 내것이란 생각. 자만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이것도 경전에 아주 자주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나라고 하는 이 사견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있다 요게 나다 라는 견해부터 시작해서 62가지 사견이 다 벌어집니다. 이게 나라고 움켜쥐는 이것이 모든 번뇌가, 사견이 일어나는 것의 원흉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걸 지혜로써, 조건에 의해 일어났기에 내 것이라 할만한게 없고 변하기 마련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것이라 할만한게 없다. 이렇게 바라보면서 자만이 버려진다는 거죠.

제가 말씀드렸듯 탐욕, 성냄 이건 서로 상호작용을 합니다.

다른 번뇌와 연관되어 작동하고 밑뿌리엔 항상 어리석음이란 것이 바탕이 돼 있어요.

우리가 세상의 진리에 대해 어둡기 때문에 자꾸 탐욕 쪽으로 가기도 하고 성냄 쪽으로 가기도 하고 이렇다는 거죠. 그래서 인제 이걸 버리기 위해선 제일 중요한 두 가지라 길게 말씀드렸는데,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가라앉으면, 가라앉히는 과정에서도 지혜가 생기고, 가라앉고 나서 생기는 지혜는 훨씬 더 강력한 지혜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감각적 욕망과 성냄을 잘 길들이는 것이, 이것을 길들이는 지혜가 생기면 삼매에 들어가기 훨씬 쉽습니다. 실제로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완전히 소멸되는데 아나함은 자기가 맘만 먹음 반드시 선정에 들 수 있어요. 아나함이 죽으면 욕계엔 안 태어나거든요.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데 거긴 선정이 없인 갈 수 없는 곳이예요. 이건 뭐냐하면 아나함은 어떻게든 선정에 들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과 성냄을 버리는 방법을,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린 내용을 잘 이해하셔서 적절하게 활용하시면 버리는데 도움이 많이 될거고 감각적 욕망과 화를 잘 버리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일상을 사는 것도 편해지고 삼매에도 쉽게 들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심 좋을 거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