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보시, 지계, 인욕의 실천

수선님 2020. 2. 23. 11:34

넷째주. 대승불교의 실천

▒ 7강. 보시, 지계, 인욕의 실천 ▒

보시바라밀

중생과 보살의 차이는 삶의 굳건한 목표가 섰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나도 깨쳐서 일체의 모든 생명들을 건지겠다는 원이 선 사람이 보살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중생이다. 따라서 보살은 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중생은 그저 ‘나다’ 하는 욕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살을 원생(願生, 願力隨生)이라 하고

중생을 욕생(欲生, 欲力隨生)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원을 세웠으면 그 다음으로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원은 공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살은 원을 세우고 끊임없는 실천을 해야 한다.

보살의 원은 다양하기 때문에 실천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보살의 실천은 바라밀행이다.

바라밀이란 말은 ‘파라미타(Paramita)’의 음역인데,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즉

‘Param’에서 끊고, ‘ita’를 붙이면 완성이란 뜻이고,

‘Parami’에서 끊고 ‘ta’를 붙이면 저 언덕에 다다른다는

도피안(到彼岸)의 뜻이 된다.

이처럼 바라밀이란 완성과 도피안이라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온갖 괴로움이 충만한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괴로움이 멸한 피안의 세계에 다다르는 것[到彼岸]이

그대로 수행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바라밀다행은 여섯 가지가 있다.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한다.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수행덕목(修行德目)의 완성,

피안에 이르는 여섯 가지 실천이란 뜻이다.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

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육바라밀이 대승보살의 대표적인 실천이다.

이 여섯 가지 바라밀을 통해서 보살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

깨침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첫째는 보시바라밀이다.

보시는 나누는 삶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베풀어라’ 하는 말이다.

이것은 나와 이웃, 나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나눔의 삶, 베풂의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다’ 하는 착각으로

나와 남 사이에 벽을 세우고 자기 중심적인 탐욕에 이끌려 살아간다.

남에게 베풀라는 가르침은 이러한 ‘나다’ 하는 놈을 제거하고

탐욕을 대치하는 가장 적극적인 실천이다.

상좌불교에서는 단지 ‘욕심내지 말아라.’, ‘탐심을 끊으라.’고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베풀고 나눌 것을 가르친다.

육바라밀 가운데 베풀어야 한다는 덕목이 제일 처음에 있는 것도

대승적 이타정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재시(財施)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나눔이고 베풂이다.

돈이나 음식 등을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에 따라 베푸는 것이다.

둘째는 법시(法施)이다.

법시는 정신적인 베풂이다.

진리의 말씀을 전해서 대중들이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또 넓은 의미로 보면 교육도 법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 상품화되는 이유는

진정한 보시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무외시(無畏施)이다.

이것은 두려움을 없게 하는 것,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무외시는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베풀 재물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보시가 많이 가진 사람이나 많이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은 보시할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 아는 것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보시가 바로 무외시이다.

얼굴 표정 하나라도 부드럽게 가지는 것,

따뜻한 말 한마디도 훌륭한 보시가 된다.

반대로 평소 어두운 표정이나 찡그리는 얼굴은

모르는 사이에 한량없는 악업을 짓는 것이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심하면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 한마디 않고도 얼굴 표정 하나로

한량없는 악업을 지을 수도 있고 무량한 공덕을 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보시를 나눔의 질로서 구분하면 두 가지, 즉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로 나눌 수 있다.

유주상보시는 문자 그대로 상에 머무는 보시이다.

상(相)은 ‘나다″ 하는 놈이다.

따라서 유주상보시는 베풀고 나눌 때

‘나다’ 하는 생각이 끼어 들어 행하는 보시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도왔다’고 하는 상이 남는다.

그런 보시는 청정한 베풂, 즉 바라밀행이 아니다.

그렇게 상이 남아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갚기를 바라게 되고,

갚지 않으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그럴 수가 있나?’ 하고 서운하게 생각한다.

그런 보시는 사회사업 차원의 베풂일지는 몰라도

베풂의 완성인 바라밀행은 되지 못한다.

진정한 보살도의 실천은 무주상보시이다.

무주상보시는 상에 머물지 않는 나눔이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그저 베풀 뿐이다.

마치 저 허공을 나는 새가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무주상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

이것을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 한다. 즉,

보시하는 사람[施者]과 보시하는 물건[施物]과 보시를 받는 사람[受者],

이 셋이 모두 깨끗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에게 얼마를 베푼다는 생각마저

텅 비워버린 보시를 말한다.

그런 행을 통해서 열반의 땅, 정토는 완성된다.

따라서 무주상보시는 영원한 복,

새어나가지 않는 무루복(無漏福)을 짓는 것이다.

이런 보시행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반대로 ‘나다’ 하는 상을 가지고 행하는 유주상보시는

복이 새어나간다고 해서 유루복(有漏福)을 짓는다고 했다.

‘내가’ 하고 생각할 때 줄줄 새어나가고,

‘누구에게’ 하고 생각할 때 줄줄 새어나가고

‘얼마를’ 할 때 새어나간다.

이렇게 새어나가는 복을 짓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똑같은 나눔이더라도 그 마음가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하겠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보시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나중에 한꺼번에 하려는 습성이 있는데,

보시는 그렇게 해서는 언제까지나 할 수 없으며,

그때그때 할 수 있는 대로 해야 한다.

『백유경』에 보면 이런 우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날을 받아 잔치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젖소에서 우유를 짜서 미리 준비해 둬야 했다.

그런데 매일 짜면 번거롭고 저장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그냥 소 뱃속에 두었다가 한꺼번에 짜자고 생각했다.

잔칫날이 다가오자 소를 끌고 와서 우유를 짜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다 젖이 말라버려 우유가 나오지 않았다.

보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재산이 많이 모이면 하자.’는 생각을 한다면,

재산이 모이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모인다 해도 실제로 보시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보시는 어떤 형태로든 일상적인 생활에서 그때그때 실천해야 한다.

보시는 ‘나다’ 하는 상을 대치하여 일체의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보살행의 첫 걸음으로서 가장 중요한 바라밀행이다.

지계바라밀

육바라밀의 두번째는 지계(持戒)이다.

지계는 계율을 잘 지키는 바리밀행이다.

계율은 삶의 질서이다.

교통이 원활하게 소통되려면 교통 질서가 잘 지켜지고,

또 한 나라가 잘 운영되려면 법질서가 잘 지켜져야 되듯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계율이 잘 지켜져야 한다.

본래 계율은 교단의 생활규범에서 시작되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계율의 내용이 정해졌기 때문에,

계율은 교단의 모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승의 계율도 대승불교의 교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승불교의 교단이 발달하면서 계율도 몇 단계로 나뉘어 발달하였다.

대승불교 초기에는 출가, 재가의 구분이 없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이념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출가나 재가, 남녀의 구분 없이 통용되었다.

따라서 대승 초기의 교단은 출가나 재가의 구분이 없는 보살 교단이었으며

계율도 모든 보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계로서 십선행(十善行), 혹은 십선계(十善戒)가 있었다.

몸으로는 살생하고, 훔치고, 사음하고, 또

입으로는 거짓말하고, 아부하고, 이간 붙이고, 험한 말을 하고,

생각으로는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 십악(十惡)이다.

이것은 몸으로 세 가지, 입으로 네 가지, 생각으로 세 가지 악을 짓는 일이다.

이러한 십악이 판치는 세상이 바로 지옥이다.

반대로 십선(十善)은 몸으로는

산 목숨을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두 살리고,

훔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베풀고,

바르지 못한 남녀관계가 아니라 바른 관계를 맺고,

또 입으로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된 말, 아부하는 말이 아니라 곧은 말,

이간 붙이는 말이 아니라 화합하는 말, 험한 말이 아니라 유순한 말을 하고,

마음으로는 탐심이 아니라 넉넉하게 베푸는 마음,

성냄이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의 십선계는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십선계는 승·속의 구분 없이 보리심을 내어

보살도를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십선계는 복잡한 공동 생활의 규칙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수행할 수 있는 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십선계는 바른 삶을 살기 위한 생활 규범이었다.

셋째로 십선행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율이 아니라,

무엇을 ‘하라’는 적극적인 계율이었다.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대승의 이타정신이

이러한 적극적인 계율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넷째로 십선행은 나와 남이 함께 실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권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지말라’는 소승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교단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대승 중기에 대승운동이 확산되고 활발해짐에 따라서

출가중들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교단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로 구분되었다.

이렇게 되자 출가보살들은 따로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공동생활의 규범과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출가교단에서는 율(律)이 강조되었다.

계는 자율성이 강한 실천덕목인데 반해

율은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대승의 계는 대승의 정신을 보존하면서

소승의 율을 차용하는 형태로 발달해 갔다.

이 두번째 단계의 계가 삼취정계(三聚淨戒)이다.

삼취정계는 세 가지 깨끗한 계라는 뜻으로서

섭율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가리킨다.

섭율의계는 소승의 계로서 교단 구성원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적용되었다.

비구는 250계(또는 227개) 비구니는 348계,

사미와 사미니는 10계, 식차마나, 정학녀(正學女)는 6계,

그리고 우바새와 우바이 등의 재가불자는 5계를 그대로 수지하였다.

이 중 출가보살의 계는 소승계를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대승계로서의 섭율의계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선행을 다 받들어 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섭선법계이며, 여기에는 물론 십선계도 모두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섭중생계라고 해서

일체의 모든 생명을 다 이익되게 하는 행이 강조된다.

이것은 일체의 모든 중생을 다 건지려는

대승정신이 잘 드러나는 계라고 할 수 있다.

『유가론』에는 섭중생계의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첫번째, ‘뜻있는 일의 협력자가 되라.’고 했다.

이는 훌륭한 일에 동참하는 동사섭(同事攝) 정신을 말한다.

두번째, ‘병고를 간호하라.’고 했다.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므로

의료 간호직에 계신 분들도 청정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한다면

섭중생계를 실천하는 것이 된다.

세번째, ‘법을 설하라.’고 했다.

대승계에서는 보살이 진리를 전하지 않는 것을 파계로 규정하고 있다.

??범망경??의 보살계에도 48경계 중 제 45계가 불화중생계(不化衆生戒),

즉 중생을 교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타정신으로 법시(法施)를 행하라는 계이다.

네번째, ‘은혜를 알고 보은(報恩)하라.’고 했다.

불자들의 삶은 ‘빚 갚는 삶’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한량없는 생명들,

나아가서는 대자연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공포로부터 중생을 지키라.’는 계율이다.

공포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핵의 공포, 환경 파괴의 공포, 범죄의 공포,

대형 사고에 대한 공포 등으로부터 중생을 지키는 실천이 보살의 계행이다.

여섯번째, ‘중생의 근심과 고통을 없애주라.’고 했다.

자비가 바로 그러한 실천이다.

중생의 고통을 뽑아내고 즐거움을 함께 하는 실천[拔苦與樂]이 바로 자비행이다.

일곱번째, ‘물건을 구하는 자에게는 주라.’고 했다.

여덟번째, ‘자비심으로 중생을 섭수하라.’고 했다.

자비심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모든 기쁨과 슬픔을 중생과 함께 하라는 뜻이다.

아홉번째, ‘마음에 적합한 것은 행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멀리하라.’고 했다.

열번째, ‘진실한 공덕을 기뻐하라.’고 했다.

의(義)가 실현되고 남이 잘 되는 일에 기뻐하라는 것이다.

열한번째, ‘과실은 제어하라.’는 것이다.

혹 중생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잘 선도하라는 것이다.

열두번째, ‘신통력으로 중생을 인도하라.’고 했다.

신통력이란 이상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인 마음으로 중생을 이끄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삼취정계에 이르러 대승의 계는 십선계(十善戒)와 더불어

일체의 모든 선법을 받들어 행하고, 또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고 살리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유감 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대승의 지계바라밀은 소승의 지계보다 실천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의 계는 단순히 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진리를 증득하기 위한 바라밀의 실천으로 승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기 대승불교에 이르면

독자적인 율의계(律儀戒)를 형성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도 성행하고 있는 ??범망경??의 보살계 10중 48계가 여기에 속한다.

인욕바라밀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문자 그대로 참는 바라밀이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 욕된 것과 많이 부딪치게 된다.

인욕바라밀은 이 욕됨을 참는 바라밀이며 성냄을 대치하는 공부이다.

우리는 연기(緣起)의 실상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나다’ 하는 착각을 일으키면서 그저 욕심부리고,

마음대로 안되면 성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탐·진·치 삼독(三毒)을 맹렬히 불태우며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불난 집’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 세계라고 한다.

사바란 말은 ‘참는다″는 뜻이어서 사바세계를 인토(忍土),

즉 참지 않으면 안 되는 땅이라고 한다.

인욕하지 않고서는 살기 힘든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이곳이 정말 사바세계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참지 못하고 너무 조급하게 사는 것 같다.

정신 없이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성수대교의 붕괴나 가스폭발사건, 삼풍백화점의 붕괴 등도

너무 조급하게 서둘러서 일어난 사건들이라고 생각된다.

빨리 빨리 서두르는 병을 치유하고 인고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본래 우리 민족은 인욕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단군신화에는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소중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태초의 수풀이 우거진 태백산 신단수 아래

그 대자연 속의 신시(神市)에서 단군신화는 전개되고 있다.

신시란 말도 엄청난 말이다.

우리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이걸 영어로 바꾸어 보면 ‘City of God’이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의 건국신화가

‘City of God’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 신화의 제 1막은 하늘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人世)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땅의 짐승인 호랑이와 곰도 인간이 되길 원해서 환웅께 간청을 했다.

그때 환웅이 인간이 되고 싶거든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어둠을 잘 참고 견디라고 했다.

아주 동양적이고 우리다운 처방이고 비법이다.

아마 서양 환웅이었다면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호랑이와 곰에게

복싱을 시킨다든지 뜀박질을 해서 이기는 자를 인간이 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환웅은 쑥과 마늘을 먹고

동굴 속의 어둠을 잘 참고 견디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잘 참고 견딘 곰은 21일 만에 사람이 됐고

반대로 참지 못한 호랑이는 그대로 짐승으로 남았다.

이것은 남을 이기는 경쟁이 아니라 안으로 참기 힘든 것,

동굴의 어둠이라는 내면적인 공포의 대상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먹기 힘든 쑥과 마늘을 먹는 것도 내면적인 인고이며 극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구성한 우리 조상들의 생각 속엔 인간인가,

짐승인가 하는 판별의 기준이 인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인고와 극기의 실천을 소중히 여겼다.

이 기준을 오늘날에 적용시켜보면 짐승으로 떨어질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인고하는 자세를 회복할 때 우리사회는 달라질 것이다.

바라밀로서의 인욕은 무엇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것을 억지로 참으면 마음의 병이 되기 쉽다.

인욕바라밀은 어려운 것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이치를 바르게 알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달마(達磨) 스님의 가르침인 보원행(報怨行)의 기본은 인욕에 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즉 원통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러한 상황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이며

내 책임도 있다는 생각으로 꿰뚫어 보라는 가르침이 바로 보원행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나 미움이 아니라

빈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 어려운 상황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오히려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금강경에도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을 행하는 수행자였을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수행자가 인욕행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그 나라의 왕이 얼마나 인욕행을 잘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수행자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나중엔 사지를 다 잘랐다.

그러나 수행자는 성을 내거나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내지 않았다.

그 수행자가 바로 전생의 부처님이었다.

이러한 인욕행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나’를 공(空)이라고 볼 때만 가능한다.

내 몸과 마음이 본래 공(空)이기 때문에

팔과 다리를 잘랐더라도 성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가 내 팔 한쪽을 끊어 가더라도

성내는 사람은 불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도 언뜻 생각하면 불가능하고 또 무모한 가르침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 어려운 상황이면 어려운 상황일수록 성내는 것은 불필요하다.

어려운 상황일 때, 상대방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히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야 적절한 대응이 가능해진다.

그래야 내 팔을 자르려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도 있고, 또 경책을 할 수도 있다.

이것도 성이 나서 정신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마음으로 자비의 경책을 하라는 것이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인욕행을 잘하셨던 분으로

청담 스님을 많이 들고 있다.

청담 스님은 말을 좀 길게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여쭙기 위해서 찾아뵈었다가

말씀만 듣고 그냥 오고만 기억도 있다.

청담 스님이 해인사에 머물 때이다.

공양을 끝내고 대중공사 시간에 스님이 말씀을 시작하면 길어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어느 때는 아침 공양 후에 대중공사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점심 공양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날도 아마 대중공사 때 말씀이 길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한 수좌가 `저 스님이 인욕행을 잘한다는데

얼마나 잘 참으시는가 보자.″ 생각하고는

느닷없이 스님에게 다가가서 뺨을 한차례 올려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청담 스님은 그 수좌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씀을 계속했다고 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인욕바라밀은 미워하는 마음을 다스려

마침내는 ‘나다″ 하는 뿌리를 뽑는 공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욕행이 무턱대고 모든 것을 참기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불의가 난무할 때 참고 수수방관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불의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용한 마음으로 경책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비의 마음으로 대처해야 보살행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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